한해가 시작되었고, 한살을 더 먹었다. 매년 별 감흥없이 생일이 지날 때가 많은데, 올해는 많은 분들이 축하해주셨다. 참 감사하다. 딱히 세상에 보탬이 될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따로 챙겨서 기억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세상에 빚진 것이 많다.
어렸을 때와 달리 가끔은 내 나이를 잊곤 한다. 최근에 누가 나이를 묻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계산을 했야만 했다. 그래서 빠른 계산법으로 생각해낸 게 하나 있는데, 딸의 나이를 기준으로 내 나이를 계산하는 것이다. 나는 딸아이와 정확히 30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내 딸 나이에 서른만 더하면 된다. 내 나이는 기억하지 못해도 딸애 나이는 항상 기억하고 있기에 이 방법이 가장 빠르다. 어느새 삶의 중심이 딸로 이동했다.
감사하게도 딸은 잘 크고 있다. 내가 따뜻하게 잘해주는 아빠는 아닌데도, 자기 아빠를 무척 사랑한다. 이번 생일에는 딸아이가 직접 골라서 내게 잠옷을 선물해주었다. 편한옷을 좋아하는 아빠를 생각해서 특별히 보들보들한 소재의 옷을 골랐다고 한다. 아이의 계획 대로라면 ‘서프라이즈’ 선물인데 입이 간질간질해서 며칠전에 내게 귀뜸해주었기에 품목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딸아이의 기준으로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이다. 돈모는 재미를 느끼게 해줄 요량으로 작년에 저금통을 마련해 주었는데, 요새는 동전이 생기면 의례히 딸아이의 손에 쥐어준다. 그렇게 일년을 모으니 꽤 묵직해졌다. 그래서 인지 딸아이는 항상 자기가 부자라고 말한다. 한번은 아내랑 내가 어떤 물건을 살 때 너무 비싼게 아닌가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갑자기 딸아이가 대화에 끼어든다. 자기가 부자니까 걱정 말라며 좋은 걸로 사라고 한다. 아이 때문에 우리 가족도 덩달아 부유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나저나 녀석이 어디서 돈이 생겨서 잠옷을 샀을까. 동전만을 모아서는 부족할 터이다. 사실은 얼마전 아이 외할머니가 세뱃돈을 주셨더랬다. 그 돈을 가지고서 엄마랑 선물을 사러 갔다고.. 아이 엄마가 타겟(우리나라로 치면 이마트 같은 곳)에서 할인코너를 기웃거렸더니, 아이가 제일 비싼 몰에가서 제일 좋은 옷으로 골라야 한다고 말하며 단호한 표정을 짓더란다. 결국 아이가 주장한 대로 백화점으로 갔다고… 내가 살면서 받아본 중에 가장 부담스러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