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동자’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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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을 한국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드라마가 있다. ‘여명의 눈동자’. 드라마는 우리들에게 많은 장면을 남겼다. 대표적인 장면은 철조망을 넘어서 최대치와 여옥이 나누는 키스장면.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를 기점으로 티비 드라마에서 키스 장면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여명의 눈동자는 당시 중학생이던 나에게 과하게 자극적인 드라마였다. 우선, 드라마가 정신대라는 소재를 다룬 방식은 피끓는 청소년이었던 나에게 성적인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 최대치는 살아있는 뱀을 뜯었고, 일본 군인과 싸우면서 칼에 찔려서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 그뿐인가, 제주 4.3과 빨치산 이야기는 공산당이 괴물이다라는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커다란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았던 이유는 자극이 아니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물들과 그들의 사랑이었다. 여명의 눈동자의 세계관은 이후 김종학 사단이 만든 ‘모래시계’에도 이어진다. 드라마의 인물들과 그들의 사랑 방식은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한동안 나를 사로잡았었다. 나의 이상형은 채시라 누님과 고현정 누님이었다.

사랑은 시대의 소용돌이를 뚫고서 비극적으로 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지고지순해야 했으며,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나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역사의 장난질 속에서 징그럽게 살아남으려 했던 대치/태수가 되기도 했었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려 했던 박상원이 되기도 하였다. 90년대를 수놓았던 김종학의 드라마들은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 세계관에 영향을 미쳤었다.

얼마전 친구가 페북에서 여명의 눈동자를 언급했다. 추억이 실타래처럼 딸려오길래 몇자 남겨본다.

(뱀발)

그런데, 이상하게 이 드라마를 생각할 때 기억나는 아주 사소한 장면이 있다. 제주 4.3의 와중이었던가 아니면 지리산에서 였던가. 한 공산주의자와 최대치가 나누는 대화이다. 그 공산주의자는 산을 오르는 와중에 이런 대사를 친다.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죠? 이데올로기 때문에 동족끼리 서로 이렇게 죽이니.” 아마도 그는 작중화자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당의 지령에 따르는 공산주의자로서, 아주 단면적인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런 대사를 치다니, 이질적이지 않은가. 나중에 혹시라도 송지나 작가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한번 물어보리라. (20년도 더 된 옛날이라 기억이 분명치는 않다. 여튼 이질적이었다는 것과 이데올로기, 아이러니라는 단어를 썼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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