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가 자의식 과잉이 될 때가 있다. 오늘 글이 그러한데, 쓰다보니 개똥철학 교육론이 되어버렸다. 나는 교육에 대해 전문지식도 경험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에 불구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글을 적어본다.
질문이 왜 잘못되었는가?
두달 전에 Ivy League와 미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글을 공유한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아이비리그를 비판하는 글을 읽어봐야 딱히 해결책이 있는게 아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명문대에 입학하되, 속물이 되지 않고, 생각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라고 얼버무리며 결론을 내었다.
그런데 글을 쓰고서 내내 찝찝한 거다. 왜 찝찝한가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싶었다. 어떤 경우는 ‘질문에 무엇을 답하는가’보다 ‘어떻게 질문을 하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인용한 칼럼의 필자의 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필자는 Ivy League 시스템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리고, 대안으로 (약간은 소심한 뉘앙스로) 주립대와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제시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필자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하기에 어떤식으로든 대안을 제시하긴 했는데, 본인도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성급하게 마무리 지은 모양새다.
그 글을 읽었던 나도 필자의 논지를 따라가면서, ‘아이비리그가 주는 가치가 무엇인가.’, ‘아니면 한국의 명문대가 주는 가치가 무엇인가.’, ‘그러면 나는 내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생각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되었다. 그 질문은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하면 행복할 것이다.’, ‘성공할 것이다.’, ‘생각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 질문이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자연스레 Ivy League와 인생의 성공을 놓고서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을 하며 글을 읽게 된다.
질문을 제대로 하려면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것인가?’ ‘생각하는 법을 배울 것인가?’ ‘부모는 자신의 기대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찌보면 명문대에 진학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말이 아니라 본질이 아닌 질문이라는 것이다. 명문대에 간 아이가 불행할 수도 있고, 아닌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
누군가는 계속 물을 수 있다. ‘그래도 역시나 명문대에 가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래도 그 누군가가 이 질문을 여전히 한다면, 나는 그분에게 당신은 잘못된 질문의 늪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말해줄 것이다.
진정 중요한 질문은
내가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은 ‘어떻게 부모로서 아이에게 대리욕망을 하지 않는가?’ 이다.
아이는 언제나 아이의 삶을 산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아이의 어떤 면은 나와 무서우리 만큼 닮은 동시에, 어떤 면은 정말로 생소한 이질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여섯/일곱살이 되면 그때부터 자의식이라는 게 생기게 되고, 조금씩 부모의 품을 떠난다. 유치원을 가게 되고 친구와 교류가 생긴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어느 순간, 아이가 집밖에서 배워온 것을 알고 말할 때가 있다. 부모의 눈에는 여전히 아기로만 보이는데,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고 세상의 지식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럴 때면,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구나. 스스로 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내가 어떠한 기대를 아이에게 가지고 있던지간에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부모는 일반적인 사회 통념과 한정된 인생경험으로 아이에게 가장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는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그것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일 때도 있다.
부모의 역할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인 나이 중간 값은 마흔하나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인생의 반환점에 거의 다다른 샘이다. 짧게 나마 나를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진정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아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것/잘하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실존주의의 개념을 살짝 변형시켜 빌려오자면, 인간은 세상에 내동댕이 쳐진 존재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아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처음에 재미도 없고, 흥미를 못붙인다고해서 그것을 평생 즐기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예를 들자면, 음식의 깊은 맛을 알아가는 것이 그러하다. 나물의 씁슬한 맛, 삭힌 음식의 깊은 맛 같은 것들은 훈련을 통해 알게되는 맛이다. 인간의 본성은 쓴맛과 삭힌 맛을 거부하는데, 꾸준히 먹어가며 입맛이 변하게 된다. 공부/책읽기/글쓰기 등등 몇가지 것들도 역시 그러한데, 본인의 취향을 알게 되기 까지는 훈련되고 익숙해지며,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본인의 전공이나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 역시 그러하다.
아마도 부모의 역할은 그 과정에 조금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와 부모님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나는 아직도 가끔 부모님께 이런저런 조언을 구할 때가 있다. 대부분은 부모님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이제는 부모님도 연세가 들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온전히 따라잡지 못하신다. 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예전보다 복잡해져서 설명하는데에만도 힘겨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편안함은 그분들이 온전히 내편이라는데에서 온다. 내입장에서 생각해주신다. 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때로 큰 힘이 된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자식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알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미국식 엘리트 교육에 관한 책들
칼럼을 길게도 비평했다. 내가 못마땅 했던 것은 칼럼이 질문을 던진 방식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사실 필자의 논지 자체는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을 전공한 저자의 책은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있다. 미국에서도 꽤 반향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미국식 엘리트 교육에 대한 저자의 통렬한 비판은 한국의 상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저자는 에이미 추아의 <타이거 마더>에 대해서도 실랄하게 비판한다고 한다. <타이거 마더>는 저자와 대척점에 있는 스파르타식 아이 교육법에 대한 책이다.
에이미 추아는 중국계 이민 2세이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데, 스파르타식 자녀 교육법으로 꽤 큰 파장을 불러 왔던 것으로 안다.
시간이 나면 두 책을 다 읽어 보고 싶다. 문제는 읽지 않은 책이 쌓이기만 한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