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트립
바다에 가기로 했다. 사실 바다는 내가 즐기는 휴양지가 아니다. 햇볕에 살이 데일까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는 일도, 속옷과 속살 사이에 모래와 소금물이 엉겨 붙어 있는 상황을 애써 참아내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불편함들만 참을 수 있다면 바다 만큼 살아있는 즐거움을 주는 곳이 없다. 무엇보다도 갓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가 에너지를 발산하기에는 바다가 제격이다. 아이가 컸으니, 해변에 드러누워 책을 읽는 사치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를 하기도 했다.
데스틴은 내가 사는 아틀란타에서 350 마일 정도 떨어져 있다. 미터로 환산하면 550 킬로미터 정도이고 서울/부산 거리보다 조금 멀다. 다만 경부고속도로와 비교해 교통체증이 거의 없기 때문에 힘겨운 거리는 아니다. 에메랄드 빛 바다, 밀가루 같이 부서지는 고운 모래와 백사장을 머리 속에 그리며 길을 떠났다.
차로 6시간이다. 3박 4일 일정에 오며 가며 6시간 씩 걸린다면 로드 트립도 여행의 일부로 봐야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땅의 변화를 느끼며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여행하면서 나누는 잡담도 즐거움의 한부분이다. 여섯 시간을 A 지점에서 B 지점까지 이동하는 과정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여행의 반은 고난길이 되지 않겠는가.
일부 미국인들에게 로드 트립은 그 자체로 취미가 되기도 한다. 같은 부서에 있는 닉은 바이커인데, 휴가는 할리를 타고서 길 위에서 지낸다. 모터사이클 동호회에서 사람들을 모아 몇날 며칠을 달리는 것이다. 닉에 따르면 바이크 위에서는 바람과 자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유리로 외기를 차단하고 경험을 제한하는 자동차 여행과 다른 차원의 경험이라고.
(image source: fixabay)
하지만 나는 안정지향적인 사람이다. 평생 모터사이클 여행을 할 마음이 생길리는 없으리라. 고요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일행과 장시간 수다를 떠는 것이면 충분하다. 수다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1평이 조금 넘는 좁은 공간에서 6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면 차에서 내릴 즈음에는 일종의 유대감이 생긴다.
고장난 LP판
30분을 달렸다. 이제 아틀란타를 벗어났고 I-85 고속도로 위에 있다. 바깥 풍경이 단조롭다고 느낄 즈음 뒷자석을 보니, 아내와 아이는 잠이 들어 있었다. 다시 창밖을 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날이 흐리다. 남부의 햇살은 지나치게 강해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운전 중에 피부가 상하기 쉽다. 나도 몇년을 무신경하게 다니다 보니 팔에 기미가 생겼다. 미국 사람들에게 피부암이 흔한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가 잠에서 깨어 났다. 흥이 났는지 노래를 흥얼거린다. 최근에 학교에서 배운 ‘Under the Sea’이다. 바다여행에 어울리는 노래이다. 몇번인가 반복한다. 조금 있다가 지겨워졌는지 이번에는 자작곡을 흥얼거린다. 자작곡이래야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단순한 멜로디에 요즘에 배운 단어를 후크로 걸어 계속 반복한다. ‘the~ northern~ hemisphere~ the northern hemisphere.~ the northern~ northern~ northern~ hemisphere~.’ 고장난 LP판이 따로 없다.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아이들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언어를 습득하는데, 그 방법이 과학적이다. 단어를 익히는 데에는 반복보다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 기억을 강화하는 데에 멜로디가 함께 한다면 효과는 배가 된다.
딸아이가 한국어를 깨치던 만 두살 쯤. 그때도 아이는 단어를 반복하는 노래를 만들어서 읊조리고는 했다. 그때는 4음절 단어가 어려웠던가 보다. 노래 가사는 ‘할아버지’나 ‘호랑나비’의 무한 반복이었다.
<목차>
데스틴 여행기 – 첫째날 (1) : 로드트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