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1편 :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들어가며

오늘은 성경 이야기.

전에도 언급했지만, 내가 포스팅하는 목적은 지나가는 생각을 활자에 붙잡아두고 정리하기 위함이다. 이 글도 그런 이유로 썼다.

(내 생각엔) 비교적 객관적으로 성경을 기술 했으나, 기독교에 앨러지 반응이 있는 분들이 굳이 참아가며 읽을 필요는 없다. (재미없고 길어서 읽을 것 같지 않지만.)

시편을 시로 읽기

시편은 성경의 다른 책과는 달리 시로 쓰여졌다.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고 시적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번역시가 으레 그러하듯 원어의 형식미는 옮기기가 어렵다. 그래서 시편을 읽으면서 이게 원래 시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할 때가 많다.

시편 121편은 꽤 유명하다.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한번도 121편을 시로 읽어본 적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라면 당연히 있어야할 음율, 절제된 형식, 응축된 사고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내가 읽어본 중에는 NIV 버전 번역이 시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NIV 번역 전문을 옮긴다.

A song of asc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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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ift up my eyes to the mountains—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My help comes from the Lord,
the Maker of heaven and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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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not let your foot slip—
he who watches over you will not slumber;
indeed, he who watches over Israel
will neither slumber nor sl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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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watches over you—
the Lord is your shade at your right hand;
the sun will not harm you by day,
nor the moon by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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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will keep you from all harm—
he will watch over your life;
the Lord will watch over your coming and going
both now and forever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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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옮기고 보면 121편이 4연으로 된 시라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일정한 형식 또한 갖추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각 연의 1행과 2행이 한쌍이고, 3행과 4행이 또다른 한쌍이다. 한 연에서 1,2행과 3,4행은 대조의 관계일 때도 있고 (1연 같은 경우), 보충해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4연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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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돈된 시의 양식은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준다. 잘은 모르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읽는 다면 읽는 맛이 더욱 강하리라 추측한다. 시편은 원래 낭독을 위한 글이고 선율이 붙은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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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시를 분석해 본 사람이라면 같은 방식으로 시편의 시들을 분석해도 재미있다. 121편에는 대조적 심상,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서로 대구하는 구절, 반복되는 이미지 같은 분석거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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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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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V에는 시편 121편의 제목이 ‘a song of ascents’으로 되어 있다. 한글로는 ‘올라가는 노래(?)’ 쯤 될 것 같다. (한글) 새번역에는 좀더 친절하게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KJV나 다른 번역본을 보아도 성전과 순례자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새번역이 좀더 친절하게 의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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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로 치자면 추석, 설날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대신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이 있다. 어떤 면에서 무슬림이 메카를 순례하는 일과도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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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성전에 올라가는, 즉 예루살렘을 걸어서 올라가는 유대인의 입장이 되어 시를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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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시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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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저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산을 본다. 한글로는 단수인 산이지만 영어로는 복수인 mountains이다. 예루살렘 성을 둘러보면 동쪽에 감람산(Olive Mountain), 서쪽에는 시온산 (Zion Mountain)이 있다. 성 자체도 모리아 산(Moriah Mountain) 위에 위치한다.  예루살렘은 산으로 둘러쌓인 천혜의 요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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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ains
(이미지 출처: http://www.returntogod.com/jerusalem/mountains.htm)
1)감람산, 2)모리아산, 3)시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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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 때문일까? 예루살렘 언덕길을 올라가는 사람들은 요새를 보면서 웅장한 느낌을 받는 것 같다. 비슷한 소재의 노래가 또 있다. 시편 125편이다. 125편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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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감싸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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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래는 순례자가 산을 올려다 보는 지점까지 동일하다. 그러나 그 이후는 다르다. 125편은 산에서 하나님을 연상하여 그 속성을 찬양한다. 반면에 121편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산을 창조한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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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125편에서는 (산의 속성)=(하나님의 속성)이고, 121편에서는 (산)<(하나님)이다. 121편에서 묘사하는 하나님은 우주적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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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1편과 감정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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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문학은 화자의 경험(또는 상상)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것을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능동적으로 연결지을 때에 문학이 힘을 가진다. 이 과정을 다른 말로 하면 감정이입이다. 121편에서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후크(hook)는 1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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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시편 121편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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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일차 독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싼 산들과 예루살렘 요새를 보면서 안정감을 느낀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현대의 독자가 시를 읽는다면 산 대신에 나를 둘러싼 보호막을 떠올리는 것이 시를 읽는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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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를 블로그에 쓴 적이 있었다. 불확실성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가장 세속적이면서 현대적인 방법은 물질적인 해법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것은 합리적인 해법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입장에서 예측이 가능한 리스크를 최소화 하며 대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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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자면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매일 끼니를 챙겨 먹는다. 교통사고를 피하고자 교통법규를 준수하고 산다.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입고, 외부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을 짓는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열심히 수능을 준비한다. 인간은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확실성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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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in 70AD -- a painting by David Roberts (1796-1849).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in 70AD —
a painting by David Roberts (1796-1849).

(image source: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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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요새는 AD 70년에 로마 티투스장군에게 함락된다. 결사 항전을 선택했던 유대인은 대다수 굶어 죽었고 그들이 의지하던 요새는 완전히 무너진다. 로마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270만의 예루살렘 사람중에서 110만명이 죽고, 9만 7천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하니, 초토화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멸망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책이름은 The War of the Jews이고 영역본은 전문이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다. (링크) 이후 티투스는 개선 장군이 되고, 칠년 후에 황제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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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 당시 고대인의 숫자 개념은 조금 달랐다는 것은 감안해서, 270만/110만 이라는 숫자는 조금 과장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참고2. 요세푸스의 책에서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이야기는 Book 5, Book 6에 나온다. 참고3.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는 8권에 예루살렘 몰락이 기술되어 있다. 로마인 이야기는 널리 읽히는 책이지만, 그녀가 유대/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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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121편을 읽다 보면 창조자인 하나님에게까지 시선이 올라가게 된다. 내가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은 1연에서 였다. 개인적인 삶의 경험과 실패의 기록들, 인간적인 보호막이 때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깨달음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보면 시편의 저자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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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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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에서 감정이입에 성공한 독자들은 2연, 3연, 4연을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후는 창조자이며 우주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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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은 졸지 않는 하나님께서 낙상을 막아준다는 이야기이고,
3연은 그가 그늘이 되어서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에서 지켜준다는 이야기,
4연은 영원의 존재가 언제나 순례자들을 지켜준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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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이스라엘의 사막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는 순례자가 겪을 수 있는 현실적인 위협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우주적인 존재가 그들을 지켜준다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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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이 노래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시가 어떻게 낭독되고 불려졌을 지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2연/3연/4연을 같이 부르면서 감정을 고양시키고 기뻐했을 것이다. 이는 현대의 교회에서 시편으로 만든 찬양을 부르면서 교인들이 같이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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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그리스도인이라면, 힘들 때 이 시를 읽으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 과정은 문학이 주는 치유의 효과와 유사하다. 그 위로의 감정은 순례자의 처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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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족 하나 만 더. 나는 읽으면서 하나님이 그늘이 되어서 순례자를 밤의 달빛에서 지켜 주신다는 이야기가 이상했다. 달빛이 무슨 해를 끼친단 말인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달빛을 오래 쐬면 정신병이 온다고 믿었다. 생각해보니, 미치광이라는 뜻의 lunatic이라는 단어는 달(lunar)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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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공유]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 그리고 바울이 말한 자기 비움과 자족

오늘 재보궐 선거가 끝나고, 몇몇 분들이 많이 속상해 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그 몇몇 분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들이기에 안스럽기도 하다.

그 분들을 보면서 장자의 4편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공자와 안회의 대화가 생각났다. 이와 관련해, 작년에 써둔 글이 있어서 재공유한다.

이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사실 그분들은 나의 글을 읽고 화가 나거나 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아량을 가지고 읽어주면 좋을 것 같다. (읽는다는 전제하에서..^^)

Isaac의 생각저장 창고

오늘은 좀 길고 심오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 이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회 참여/소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결론은 기쁨/행복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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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장자 초상화)

장자의 4편 인간세(人間世)는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의 대화로 시작을 한다. (주: 안회는 공자의 수제자이고 공자의 자는 중니임) 원문: 장자 인간세편

안회가 중니를 만나 여행을 떠나겠다고 청했다. 이에 중니가 물었다.
” 어디로 가려는가?”
” 위나라로 떠나려 합니다.”
” 어째서 위나라로 가려 하는가?”
” 제가 듣기에 위나라 왕은 나이가 젊은데다가 행실이 사나워 나라일을 가벼이 경영하고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백성을 죽도록 함부로 내버려 두어 시체가 흡사 연못에 무성한 파초와도 같이 많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일찍이 선생님께서,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들어가라, 어진 의사에게는 환자가 많이 모이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대로 다스리는 방법을 강구하면 위나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 어허! 자네가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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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저는 기독교 관련 포스팅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제가 별로 종교적인 사람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기독교가 제게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신앙을 빼고서 포스팅을 하는 것은 모순이더군요.

꽤 긴 연재였는데, 주제가 너무 무겁다보니 다른 주제를 중간에 포스팅하기도 생뚱맞았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소소한 제 얘기를 주로 할 생각입니다. 제가 그린 그림도 올리고, 딸램 이야기도 하고, 미국사람들 뒷담화도 할 생각입니다. 뭐, 가끔은 기독교 이야기도 하겠지요.

연재를 보시고 혹시라도 기독교에 관심이 생긴 분들은 질문을 주셔도 좋습니다. 체계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잘(?) 답변을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나누는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럼 한국에 계신분들은 좋은 밤 되시고, 미국에 계신 분들은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아참 중동/유럽에 계신 분들을 빠뜨렸네요. 지금 이미 주무시고 계시겠군요.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중동에 계신 L형, 그리고 E형수님도 좋은 밤 되세요.

딸램이 놀아달라고 조르네요. 이만 자리를 뜹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내가 믿는 기독교 : 6.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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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두 글에서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가지 해법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서야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인 ‘대속’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정리하자면, 저는 물질적인 방법은 환경을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방법은 나를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속의 방법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집니다. 불확실성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불확실성의 문제를 ‘죄’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제가 글의 처음부터 죄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굳이 불확실성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죄’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람이 스스로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0-26)

저는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죄에 관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K님의 글을 통해서 이해한 바로는 독실한 무슬림이 선행을 통해 악행을 덮으며, 그로 인해 알라의 죄사함을 받는 것이 무슬림의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목적은 결국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시고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Picture of a wooden Christian cross on St. Cuthbert’s Isle, Holy Island, Northumberland. St Cuthbert’s Isle is a small island used as a retreat by both Aidan and Cuthbert.

이것이 바울이 이야기하고 예수가 말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시대의 기준에 맞추어 조정한 것이 아닙니다. 일전에 E님께서 마태복음 5장을 인용하셔서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신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구절은 유대인이 지켜왔던 율법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기준에서 살인과 간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살인과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않은 것에 그쳤습니다. 예수는 이것에서 한발 더 나아간 해석을 한 것이지요. 살인과 간음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누구도 죄인의 기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 인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본질을 흐렸던가 싶기도 합니다. L님도 오늘 글을 올린다고 했으니, 저도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그럼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5.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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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저는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해법중에서 물질적인 방법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정신적인 방법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철학의 모습이 될 때도 있고 종교의 모습이 될 때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방법이 주목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 입니다. 물질적인 방법이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방법이라고 하면, 이것은 나 자신에 집중하는 방법입니다. 물질적인 방법이 추위를 견디기 위해 옷을 더 껴입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신적인 방법은 건강을 키워서 추위가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철학/사상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신적인 방법에는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RELIGIONES

(image source: wikipedia)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종교별로 다양합니다. 이를테면, 불교의 경우는 참선을 하고, 유대교는 율법을 암송합니다. 또, 이슬람은 꾸란을 암송합니다. 저는 이러한 방법이 종교적인 열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준은 다를 지언정 (율법/꾸란/불경 등등…) 자신을 갈고 닦는 행위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K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이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K님께서 댓글을 단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실제로 이슬람에서는, 죄를 지으면 동물을 잡는 행위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죄를 지은 후 ‘진정으로’ 참회할 때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인데, 자신이 ‘진정으로’ 참회하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냐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값비싼 것도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 포기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양이나 소는 고기나 우유의 근원이 되는 등 경제적 가치가 뛰어나 모두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그렇게 값비싼 것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함으로써 선행이 쌓이는 것이고, 선행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악행이 용서받는 것입니다. 꾸란에서 희생물을 잡는 것과 관련하여 말하길 ‘동물의 고기를 하나님께서 받는 것이 아니며 동물의 피를 하나님께서 받는 것도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대들로부터의 경외심을 받는 것이라'(그 의미의 번역, 꾸란 제22장 37절)

K님께서는 동물을 잡는 행위에 대해서 선행을 쌓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이말이 이슬람에서 알라께 용서를 받는 다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앞에서 제가 이야기 했듯이 나라는 존재의 행위가 강조되어 있는 것이지요.

제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지는 않지만, 나의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두가지 방법 (정신적인 방법/물질적인 방법)이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가진 존재 이기 때문에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쳐져 있다면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현대 문명은 너무나도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부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외를 가져왔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더욱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대인들은 지구 환경을 너무나도 훼손시켰습니다. 저는 그것이 인류가 환경을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온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기독교 역시 종교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많은 부분은 정신적인 해법에 속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는 많은 분들이 교회를 정신수양을 하는 곳으로 여깁니다. 기독교도 종교의 하나이고 그러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정신수양으로만 보기 어려운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대속’이라는 개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4.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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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이야기에 이어서 몇가지 이야기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오늘은 K님의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그러니까 ‘대속’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대속에 대한 이야기는 좀 길어 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속에 이야기는 그 전제(인간의 상황)가 없이 설명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게 ‘대속’ 이야기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은 ‘성경’과 ‘대속’이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L님이 신학을 공부 했던 입장에서 성경적인 관점으로 잘 설명해 주리라 믿습니다만, 거기에다 제 신앙고백을 덧붙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아서 이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불확실성과 금융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금융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가 그나마 조금 아는 주제이기도 하고, (저는 MBA에서 금융을 전공했습니다.) 현대 물질 문명이 불확실성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야기의 실마리를 푸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 능력한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보겠습니다.

1921년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리스크, 불확실성, 그리고 이윤’이라는 책을 발표합니다. 그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경제 활동에는 리스크(risk)와 불확실성(uncertainty)이 존재하는데, 리스크는 계측이 가능한 대상인 반면에 불확실성은 계측이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현대 금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금융학은 거칠게 말하자면 (특히 금융공학의 경우) 이 리스크에 대해서 다루는 학문입니다. 1970년대에 들어 블랙과 슐츠는 통계학/미적분학을 기반으로 블랙-슐츠 방적식을 발표합니다. 이 방정식이 발전해서 1990년대 금융공학이 학문으로 태어납니다. 현대의 주식시장에서 옵션과 트레이딩, 파생상품은 상당수가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문제는 현대의 금융이론은 리스크(계측 가능한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불확실성(계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008년에 있었던 금융위기에 세계 경제가 대책없이 무너지기만 했던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는 이것이 금융만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물질문명, 즉 자본주의는 인간의 방법으로 각종 상황에 대해서 대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작해야 일부 계산 가능한 리스크에 대해서만 대처가 가능할 뿐입니다.

주로 학문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기실 불확실성의 문제는 우리가 매일 마주치며 사는 문제 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매일 끼니를 챙겨 먹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 교통법규를 준수하고 삽니다.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입고, 외부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을 짓습니다. 인간은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확실성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마주한 불확실성은 결국에는 죽음의 문제에 이르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나 인간은 죽게 마련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 (친구/가족)은 역시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결국 사람은 죽기 마련인데 아둥바둥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항상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할 방법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외면합니다. 계측가능한 리스크에 집중하고 계측이 불가능한 불확실성은 외면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누가복음 1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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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freebibleimages.org)

현대인은 불확실성의 문제를 자신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물질적인 해결책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현대인은 공허함을 가지고 삽니다. 물질적인 해법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허무주의에 다다릅니다.

심지어 현대에 와서는 종교조차도 이러한 물질적인 방법을 해법으로 내 놓기도 합니다. 어떤이들에게는 교회나 절에 가는 것 조차도 더 소유하기 위해서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3.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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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pedia) 사해버전 성경 (Est. 408 BCE to 318 CE)

쓰다보니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왜 성경을 믿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습니다. 예전에 제가 생각을 정리해 두느라 적어둔 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제 의견은 링크 걸어둔 글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2. 유대교와 기독교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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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근에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 발견한 사실이 있어서 사족을 붙입니다. (발견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의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유대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구약 성서는 대부분이 바벨론 유수 기간에 씌여진 책입니다. ‘바벨론 유수’라고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70년 가량 유대인이 바벨론의 포로로 유랑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성경은 ‘바벨론 유수’기간 문서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전해 내려오던 판본도 상당수 유실되었다가 이시기에 학자들에 의해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 성서는 기본적으로 exile literature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성서 뿐만 아니라 exile literature (본국에서 쫓겨나서 방랑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정서가 있습니다. exile literature의 특징은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이러했더라면…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나라가 강대했던 시기를 이상으로 그립니다. 전통음악을 듣고, 고향의 향수에 젖어 삽니다. 바벨론 유수의 시기에 유대인들은 모여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서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멀어진 모습을 반복해서 되새기면서 울고 회개를 합니다. 여기 구약성경의 느헤미야기를 인용합니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중략)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 에스라 제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모든 백성을 타일렀다. (느헤미아 8:4-9)

그들이 읽었던 율법은 모세오경(성경 처음의 5권) 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유수’기간에 씌여졌던 열왕기서/역대서는 일종의 역사서인데 모세오경의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들을 평가합니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다윗왕이 가장 이상적인 왕이지요. 그 이후로는 왕들의 죄악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이야기 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기간에 그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꿈꾸게 됩니다.

이제 신약의 시대로 넘어옵니다. 예수는 새로운 율법을 말하지요. 예수는 성전을 허물러 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말하는 율법은 구약의 율법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대인의 메시아는 그들이 기대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따르려는 열심에 대해 경계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세오경의 율법을 더 잘 지키고자 했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을 비난합니다. 바리새 계열 유대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지키려고 세부의 지침과 가르침을 만들어서 지켰던 사람들이죠. (당연히 모세오경과 율법에 근거합니다.) 심지어 예수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으로 당시 율법학자들과 랍비들을 욕합니다. 그리고서 제자들에게 문자적으로 율법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는데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완성하러왔다고 주장하는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완성합니다. 아시다시피 유대교와 기독교는 구약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쓰인 신약은 기독교만의 경전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나 예수가 말한 율법의 완성은 조금 논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인듯합니다.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도 한번 나누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이 이야기들은 제 개인적인 견해이며 신학/역사를 전공한 분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1. 이슬람과 기독교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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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이뤄지는 토론을 보면서 저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적는 이야기는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저는 신학/역사/인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일이 없기 때문에 깊이에 한계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해왔던 부분이고 저의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 생각을 몇자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L님과 K님의 토론을 보면서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이 꾸란을 접근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꾸란은 선지자 무하메드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슬람은 꾸란의 단어 (아랍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암기하며,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종교입니다.

제 생각은 선지자 모하메드가 중세(6~7세기)의 인물이 었다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무슬림의 모든 행동의 근거는 모하메드의 계시에 바탕합니다. 그런데 중세의 도덕관념과 세계관은 현대인의 눈으로는 몹시 이질적입니다.

저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류는 변해왔고 이슬람 세계는 중세의 가치관(정확히 말하자면 모하메드의 계시)을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비무슬림의 눈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중세의 종교관은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주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므로서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더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려는 신학 연구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성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 시절에 가장 열중했던 일이 독일어 성경 번역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아랍어로 씌어진 꾸란의 원문 자체를 신성시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인 것이지요.

종교개혁 이후에도 서양의 세계관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근대/현대로 오면서 인류가 겪었던 가장 큰 변화중에 하나가 ‘개인’의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와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사회라는 개념은 비교적 생긴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당시 새로운 개념이었던 ‘individualism’을 ‘self-reliance’라는 말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개인주의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self-reliance’라고 정의한 것이지요.

당시 철학자들 사이에서만 논의되던 이야기는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20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개인의 가치를 고귀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류는 인권을 신경쓰기 시작했고 여성의 인권도 비약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비무슬림의 눈으로 무슬림 사회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눈에는 이슬람 국가에서 인권은 무시되고, 여성은 억압된다고 비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IS와 이슬람

최근에 페북에 IS와 이슬람에 관련한 글을 몇가지 올렸다. 이슬람과 IS에 관심있으신 분들에게 참고가 될 것 같아서 정리해서 블로그에도 공유한다.

첫째

IS 관련한 이코노미스트지 차트를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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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ihadist friends and foes (economist daily chart)

알카에다는 그래도 시리아 반군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한다. 요새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IS는 누구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네거티브 전략일까? 계속 유지하기 쉽지 않아보이는데…

둘째

이슬람인의 관점에서 IS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었다. 흔치 않은 한국인 이슬람교인인 김은수씨께서 ‘정통 이슬람’의 관점에서 이부분을 정리해 주셨기에 공유한다.

정통 이슬람이 바라본 IS의 교리적 문제점 (페북 링크)

곁다리로 배운 게 있다. 이슬람인들은 코란을 축자적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 무하메드의 코란과 하디스가 알라의 계시라는 전제가 바탕이 되어있다. 선지자 무하메드가 설파한 원문이 비교적 온전히 보전되어 있기에 타당한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지하는 기독교의 성경 접근방법은 문맥과 의미에 집중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읽는 것이다. 이슬람인들이 코란을 읽는 방법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물론 내가 아는 몇몇 분들은 성경을 축자적으로 접근해서 나를 답답하게 만들기는 한다만은… (이건 옳다 그르다에서 오는 답답함이 라기 보다는 근본적인 다름 때문에 오는 답답함이다.)

셋째

두번째 글 (축자적인 이슬람 코란 해석)에 대한 댓글들

Q: 근데 꾸란의 원문이 보존된거 맞아? 인쇄술은 모하메드 이후 몇백년후에 나온거라 그전엔 결국 필사되었을텐데…

꾸란에 대한 위키피디아 링크

나의 댓글: 제가 꾸란에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적절하게 답을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꾸란 원전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방법은 아마 성서비평학의 방법 (여러가지 사본을 교차 검증하는 방식)이 쓰였을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과는 달리 무슬림들은 필사의 오류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원본이 잘 보존되었다고 인정이 되는 것 같아요. 성경과 마찬가지로 필사가 되었겠지만, 비교적 최근에 쓰인 책인지라 보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형의 링크를 보고서 저도 좀 찾아봤는데, 꾸란이 처음부터 글의 형태로 내려왔던 건 아니군요. 모하메드의 이야기가 구두로 전승되다가 첫번째 칼리프부터 문서화가 되었고, 세번째 칼리프 Uthman부터 정본이 공표되었다고 하네요. 비교적 초기에 정본이 정립되었기에 원본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적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