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연재: 2.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Vox기자 Amanda Taub의 NYT 기고문을 공유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간략하게 정리하고 내 생각을 덧붙이려 한다.

지난주 영국에 초점을 맞추던 외신들이 이제 EU 내부의 문제를 조명하는 분위기이다.

Euroseptic, 즉 EU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것은 EU가 비민주적이며, 각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르펜이나, UKIP의 패라지, 그리고 이번 브렉시트를 이끈 보리스 존슨이 대표적인 Eurosepti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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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극우 포퓰리스트로 보는 것은 일리가 있는 평가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들을 때마다 Euroseptic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놓치는 듯한 찜찜함이 남는다.

개별국가의 시각에서 EU를 바라보면 EU는 대단히 비민주적으로 작동한다. 영국을 예를 들자면,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 (이를테면, 그리스를 구제하는 문제에 있어서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들…)에 대해 정작 영국사람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결과보다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 영국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의사결정을 영국사람이 하겠다는 요구는 정당하며 지극히 근본적인 문제제기인 것이다.

정치는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어떻게 의사 결정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고, 이익단체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미디어와 공론장, 그리고 국회에서 논의를 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경우에는 청원서를 접수하거나, 헌법소원을 하거나, 아니면 시위에 참가하거나, 이런 행위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EU는 그런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심지어는 영국민 자신에게 중요한 큰 결정에 마저 그러하다.

European Parli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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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첨부한 기사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왜 EU는 비민주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것일까?

첫째, EU는 원래 그렇게 작동하도록 고안되었다. 유럽의회의 구성원들은 선거로 선출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technocrat, 즉 전문가 집단이다. 그들은 개별 국가의 이익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EU 관점에서 최적의 결정을 할 것을 요구 받는다.

EU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럽의 평화와 공존, 그리고 하나된 유럽이다. 하나의 유럽이라는 이상과 개별국가의 이익은 상충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나 유럽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파시즘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는 더더욱 그러하다. EU의 전문가 중심의 의사결정은 이러한 목적에 잘 부합한다.

기사는 두번째로 EU의 지나치게 약한 권력을 지적한다. (헤깔리기 쉽지만, 강한 권력이 아니다.) 유럽 난민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EU는 각 나라에 난민 수용을 강제로 배정할 수 없다. 유럽의회에서 협의를 거친 이후, 각 나라와 다시 협상하고, 부탁하며, 양해를 구해왔다. 유럽 각국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도 자기 나라가 떠안기는 거부하고 서로 모른척해왔다. 그리고 그 협상의 결과에 대해 개별 국가들은 모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유럽연합과 각국의 힘의 균형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포스팅한 바 있다. European Union을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유럽연합과 각국 정부는 미국의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관계와 유사하다.

미합중국도 건국초기에는 연방정부의 힘이 약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서로 견제하면서 성장해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서로간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을 때가 남북전쟁이다.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은 연방정부의 권한이 극대화된다. 연방을 탈퇴하면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메세지가 어디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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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llification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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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이 강한 연방정부를 주장했던 것처럼 하나된 유럽, 그리고 강력한 유럽 연합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브렉시트 이후, EU는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좀더 강력한 EU를 추구하던지 (강력한 EU는 우선은 UK에 대한 강경대응의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아니면 어떠한 식으로든 민주적인 의사 결정 절차를 추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사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 그리고 엘리트 정치인들과 대중의 괴리이다. 브렉시트 과정에서 영국의 양당은 모두 EU 잔류를 내걸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엘리트 정치인을 불신했다. 사실, 카메룬의 협박(?)은 결론만 보면 틀린말은 아니였다. 그가 말했듯이 Exit을 선택하는 것은 영국민의 선택이지만, 그 와중에서 생기는 사회/정치적인 혼란, 경제적인 부담은 온전히 국민의 몫으로 남게되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기성정치에 불만 표시로 브렉시트를 선택하였다.

EU가 태생적으로 민주적이지 않은 것 또한 EU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듯이, 엘리트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에 우려를 표하는 것 또한 나름의 당위성이 있다. 사실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은 영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트럼프와 샌더스의 부상 또한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1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편: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3편: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82년 우범곤 사건

올랜도 사건 뉴스를 보다가 최악의 총기난사 사고 리스트를 발견했다. 리스트 2위에 한국이 올라와서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 봐도 그즈음 한국에 총기난사 사고가 없었다. 83년 아웅산 테러는 사망자가 10여명 정도 였고, 82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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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찾아봤더니, 우범곤 사건이 있었다. 처음 듣는 사건이다. 워낙 대형사고라서 민심 동요를 우려 언론통제가 가해졌던 듯. 정치적인 사건도 아니라 그 이후에도 그다지 조명되지 않았던 것 같고.

사건의 경위를 보면, 경남 의령에 우범곤이라는 순경이 동거녀와 말다툼을 하고서 홧김에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와 수류탄을 탈취하여 58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한국이 총기 청정국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안심하게 되는 사건 기록이다.

여담이지만, 사건의 여파로 내무장관이 사임하고, 노태우가 정치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계기라는 의미는 정치적 실세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시점이 되었다는 의미.)

 

회색분자와 에라스무스

나는 회색분자이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좀 불편하다. 내가 보는 세상은 항상 불투명하고 딱잘라 말하기 어려운 모습만 가득하다. 그렇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흑백 논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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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문화사가 하우징어 (Johan Huizinga, 1887 – 1945)는 에라스무스(1466-1536)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썼다.

The ideal joy of life is also perfectly idyllic in so far that it requires an aloofness from earthly concerns and contempt for all that is sordid. It is foolish to be interested in all that happens in the world; to pride oneself on one’s knowledge of the market, of the King of England‘s plans, the news from Rome, conditions in Denmark. The sensible old man of the Colloquium Senile has an easy post of honor, a safe mediocrity, he judges no one and nothing and smiles upon all the world. Quiet for oneself, surrounded by books.- that is of all thing most desirable.
– Erasmus and the Age of Reformation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 세속적 관심사로부터의 초연함과 지저분한 것들에 대한 경멸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원적 즐거움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장의 물품 가격을 잘 알고, 영국 왕의 원정계획에 대해 소상하고, 로마에서 온 소식을 잘 알며, 덴마크의 생활환경을 꿰뚫고 있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인가? <대화집>에 나오는 현명한 노인은 그리 높지 않은 명예의 자리에서 안전하고도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판단치 않으며, 이 세상에 대해 미소를 짓는다. 책들로 둘러싸인 채 늘 고요하게 있으면서 자족하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 (에라스뮈스 평전 – 요한 하위징아 저, 연암서가)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불확실성과 현실의 모호함이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건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와 끝까지 대립했다. 그는 수많은 종교개혁가의 스승이었지만 종교개혁을 끝내 지지하지 않았다. <우신예찬>을 통해서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했지만, 그의 개혁은 항상 카톨릭의 안에 있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카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여생을 마친다.

후세는 루터의 이름을 기억한다. 당대에 학문적 깊이와 고고함으로 존경을 받았던 에라스무스는 지금에 와서 유약한 지식인, 이도저도 아닌 신학자 정도로 매도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루터는 개신교의 아버지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기치는 서양 정신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그러할 지라도 나는 루터가 아닌 에라스무스에 더 끌린다. 루터의 신학에 동의하지만 경건함/소박함/정직함/신중함이라는 가치를 지닌 ‘자유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영락없는 회색분자인듯 하다.

+ 참고자료: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 – 그의 생활방식에 대하여

아나키스트: 천황 암살을 계획했던 가네코 후미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에는 일본인이 몇 있다. 그중 한 사람이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받았던 후세 다쓰지라는 인권변호사이다. 이 사람은 일본인 쉰들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조선 독립운동에 열정적이었고 삼일운동 당시 지지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 검사로 일본 법조계에 입문했으나 법률의 사회적 적용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변호사가 된다. 후에 일본 내의 노동운동/사회주의 운동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 활약하고,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맡는다. 그가 변호했던 사건 중에 하나가 당시 일본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일본 천황 암살 미수 사건이다.

박열은 본디 아나키스트 였다. 그는 천황 암살미수 사건으로 22년 복역하게 된다. 해방후 그는 이승만 지지로 우익 노선으로 전향하고, 또 몇년 후에 6.25 때 납북된 인물로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그의 고향 문경에 가면 박열 열사 추모관이 있다. 박열에 대한 이야기도 많겠지만 오늘은 그의 연인이었던 가네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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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에 대한 글 중에서 쉽게 읽어볼 만한 글은 산하님의 1926.7.23 조선을 사랑한 일본 여인 가네코 후미코이다. 산하님은 맛깔나게 글을 쓰시기 때문에 심각한 스타일에 길기까지 한 내 글보다는 읽는 재미가 있을 듯 하다. ㅎㅎ

가네코는 일본인이지만 불우한 가정사로 인해 어린시절을 조선에 사는 할머니 밑에서 큰다. 어린 시절 목격한 3.1운동은 그녀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녀의 이야기는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몇번 역사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일제시대 일본인/한국인 간의 신분을 넘는 사랑 이야기로 단순화되곤 한다. 이는 가네코가 아나키스트 였다라는 것과 박열이 납북되었다는 것이 여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데올로기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고 또 한국적인 상황에서 아나키즘을 언급하는 것 조차 불온한 느낌을 주는 것과 관련이 적지 않아 보인다.

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에서 들어온 잘못된 번역의 대표적인 예로, 정확히는 탈권위주의 정도로 번역되는게 맞을 듯 하다. 아나키스트는 어떠한 이유로도 개인의 자유가 사회/국가라고 이름지워진 권위로 부터 억압받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이다.

이들이 꿈꾸는 이상향의 모습과 그 이상향을 실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국가를 해체하고 작은 단위의 신뢰사회인 공동체를 만들자고 하기도 하고, 어떤이들은 완전한 비폭력을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극단적으로 폭력과 테러를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또 그들 사상의 스펙트럼은 극우로 부터 극좌까지 걸쳐있기 때문에 딱히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많다.

아나키즘은 극단으로 흐르면 허무주의로 흐르기 쉽다. 다원주의/허무주의/아나키즘은 어찌보면 형제 같은 존재이다. 그렇지만 허무주의에 다다른 아나키즘은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폭력과 테러를 조장하기도 한다. 이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나키스트 아니면 무정부주의자의 이미지 일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아나키즘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에서 잘 묘사되어진다.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제도화된 조직에 대한 반대를 출발점으로 하기 때문에 조직화가 쉽지 않다. 굳이 살펴보자면 우크라이나의 네스트로 마흐노, 스페인 내전 초기의 전국노동연맹 정도이고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는 한 세력은 스키마스크로 유명한 마르코스의 멕시코의 사파피스타 민족해방 전선 정도 이다. 조금 범위를 넓히면 어나니머스도 아나키즘의 한 모습으로 들어갈 듯 싶다. 그리고 현대적인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조금 다른데 우리나라에서는 생태주의, 반전운동, 대안학교, 공동체 운동 등으로 조금 변형된 형태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공산주의도 어떤 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아나키즘을 지향한다. 막스도 공산주의가 완성되면 정부는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공산 독재가 결국 영구화할 것이고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괴물로 변해버릴 뿐이라 말한다. 결국 역사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하고 있다.

실제로 일제시대에 우리나라를 풍미했던 아나키즘의 조류는 이러한 흐름에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독립 운동가였던 김원봉, 이회영과 이들이 세운 의열단은 아나키스트 집단이었고 말년의 신채호도 아나키즘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아나키즘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생긴 집단이기도 하지만 사회주의자와의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조금 헤깔리기도 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큰 주제이므로 조지오웰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이정도로 마무리 짓도록 하자.

아나키스트들은 원칙이 다소 모호하기는 했지만 특권과 불의에 대한 증오는 정말로 순수했다는 점에서 대다수의 이른바 혁명가들과 대립되었다. 철학적으로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은 양극단이다. 실제적으로, 즉 목표로 하는 사회의 형태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차이는 주로 강조점의 차이이다. 그러나 그 차이 때문에 절대로 화해할 수가 없다. 공산주의자는 늘 중앙 집권과 효율을 강조한다. 아나키스트는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다. –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중에서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다. 가네코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가네코는 당시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 들과 교류를 하다가 조선인 출신 아나키스트 박열과 동거를 시작한다. 이때 그녀와 박열의 동거 계약서가 재미있다.

1. 동지로서 동거할것.

2. 운동 활동에서는 가네코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3.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둔다

그녀는 뼈속까지 사상에 충실한 여자였고,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육체적으로 일치되는 완벽한 연애를 꿈꿨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박열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도 박열의 아나키즘에 근거한 시를 보고서 이다. 그녀는 그의 시를 보고 그를 찾아갔고 연애를 시작한다.

평등 사상에 기반한 동거를 했던 둘은 1923년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반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관동 대지진이 발생한다.그들은 체포되었고, 취조 도중 폭탄 구입 계획이 알려지게 된다. 민심이 흉흉했던 당시 일본 정부는 천황암살 기도를 큰 이슈로 만들었고 ‘대역사건’이라고 한다. 이 혐의로 1926년 이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사형언도시 가네코는 만세를 불렀고,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는 말을 남긴다. 며칠후 이들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앞에 언급한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옥중 결혼을 한다. 그리고 몇달 뒤 가네코는 의문의 자살(?)을 하면서 스물셋의 짧고 힘겨운 삶을 마친다.

이 사건은 일본 안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킨다. 그 중 하나가 옥중에서 찍혔다는 아래의 묘한 포즈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우연히(?) 유출되었고 일본의 신문들은 대서 특필한다. 이후에도 이 사진은 음란한 조선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사진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이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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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녀의 재판 기록을 통해 그녀의 육성을 몇자만 옮겨 보자.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먼저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달라고.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다음으로 재판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부디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고.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재심준비회 편, 《박열ㆍ가네코 후미코 재판기록》, 748쪽, 이하 《재판기록》)

나는 박열에게 부화뇌동하여 천황이나 황태자를 타도하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천황은 필요 없는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이 박열과 같았기 때문에 부부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조건 가운데는 그런 생각을 공동으로 실행하려는 동지적 결합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가네코의 진술서 중)

나는 아나키즘에 동의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나는 평화주의를 선호하고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아나키즘은 대부분 이상주의에 머무를 때가 많아서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없을 뿐더러 우스운 망상에 지날 때가 많다.

하지만 정말 불쌍한 삶(주: 그녀의 삶은 옥중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에 잘 묘사되어 있다.)을 살았던 스물 세살의 젊은 여인의 처절하고 독한 이상주의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내가 믿는 신념대로 사는가? 세상의 조류에 흔들리지 않고 진정으로 고민한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사는가? 다수의 생각에 잡아 먹혀서 괴물의 얼굴을 하고 살지 않는가? 다시 한번 내 자신에게 물어본다.

시대 정신이란?: 딸깍발이와 ‘잘살아보세’ 정신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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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의 수필중에 ‘딸깍발이’라는 게 있다. ‘딸깍발이’는 1956년 발표된 ‘벙어리 냉가슴’이라는 수필집에 포함되어 있는데, 교과서에 실려있기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있다. ‘딸깍발이’에서 이희승 선생은 해학적인 한문체를 사용하여 선비정신을 묘사하고 있다. 생각보다 길지 않으니 그가 말한 선비정신이 무엇인지 궁굼하면, 고등학교 국어시간의 추억을 되살릴 겸, 한번 읽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원문: 딸깍발이)

선비정신은 해방이전 까지 우리 민족의 중심이 되는 사상이었다. 우리 민족은 성리학에 바탕하여 고상한 세계 즉 이상향을 추구하였고 양반들은 매일 경서를 읽고 붓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서 서로 보여주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성리학은 본래 중국에서 시작한 학문이지만 실제로 그 정신에 입각해서 나라를 세운 것은 조선이 유일하다. 불교 정신으로 대표되는 고려가 망하고 당시 지식인이었던 신진 사대부 계층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 성리학과 선비정신은 우리 민족이 500년간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되었다.

선비정신이 도전을 받게 된 것은 구한말이다. 이때 우리에게 당면한 시대 과제는 외세에 의한 개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였다. 선비 정신을 바탕으로 점잖게 공자와 주자, 그리고 이상향을 논했던 우리 민족은 물질문명으로 밀어닥친 세상 앞에 무방비 상태였다. 19세기와 20세기 초는 전세계 적으로도 사상의 혼란이 가득했던 시기 였다. 누군가는 선비정신을, 누군가는 동학을, 누군가는 일본을, 누군가는 자본주의를, 또 누군가는 공산주의를 따르자고 말했고 우리는 혼란에 빠져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제 통치와 6.25로 대표되는 우리의 근현대사는 한민족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기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했던 것은 ‘잘살아보세’ 정신이었다. (주: 새마을정신은 오염된 말이기에 ‘잘살아보세’ 정신이라는 말을 내가 만들어봤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정부의 선전구호로서의 ‘새마을 운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잘살아보세’ 정신은 군사정권 이전부터 국민 모두가 열망하는 하나의 가치였다. 70/80년대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이밥에 고기국 한번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등골이 휘어지도록 일했고, 소를 팔아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우수한 노동력이 배출되었고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 탄생한다. 우리 부모세대에게 그 흥분은 아직 가시지 않은 젊은 시절의 체험이다.

모든 큰 성공이 그러하듯이 ‘잘살아보세’ 정신의 성공에도 그늘이 있었다. 그 비극의 시작은 새마을 운동이 기존의 우리것에 대한 부정인 데에 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었던 우리는 옛것을 고리타분하고 냄새나는 노인네 취급했다. 먹고사는데 도움이 된다면 한옥이던, 문화재던, 자연이건 일단 부수고 스레트 지붕으로 덮어버렸다. 청계천과 중랑변의 판자집들은 모두 부숴버리고 빈민들은 용산으로 신림동으로 성남으로 쫓겨 갔다.

한국교회가 세를 얻었던 것은 이쯤이 아닌가 한다. 성장의 고통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던 것은 교회의 목사님들이었다. 교회에서 주일날 위로를 얻은 기독교인들은 힘을 얻어서 다시 산업의 역군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한국교회가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순수하게 사회/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잘살아보세’ 정신이 있다.

몇달전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든 문창극 총리 지명자의 윤치호 언급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윤치호는 YMCA를 이끌며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계몽운동을 펼친 인물이였다. 그의 사상은 한국인은 무지하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으로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그의 지향점은 이토 히로부미의 대동아 공영론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 향한다. 온누리 교회에서의 문창극의 강의는 이 윤치호의 사상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의 강의에서 발견하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부정과 친일의 기운은 윤치호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세상은 바뀌었고 우리도 변했다. 이제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살아보세’ 정신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가 매년 10% 이상 성장하는 일은 더이상 없을 것 같다. 우리는 97년 IMF로 이름지어진 외환파동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도 높은 경제 개혁으로 위기를 넘길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고달퍼 졌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말이다. 이 말은 너무 오염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짧게 설명하지는 못할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닥친 시대적 과제 일 수도 있다.

여기서 내가 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가 밝혀야 겠다. 정치나 근현대사는 워낙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있고, 내 생각이 다른 사람과 다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을 지나서 답답하게 만들고 불쾌하게 만든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지난번에 간디 관련 포스팅을 하고서 (관련글: 단식의 의미 그리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 민감한 주제를 별 설명도 없이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설명을 해야하겠는데 짧게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글마저 충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내가 던진 질문에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나는 ‘잘살아보세’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 새로운 가치가 말하는 전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현 정권의 대통령은 ‘잘살아보세’ 정신의 상징이다. 젊은 세대는 왜 이분이 대통령이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6.25를 겪지 않았고 잘살기 위해서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해야 했던 우리 부모의 가난을 알지 못한다. 전쟁과 가난의 상처는 논리적인 설득으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의 부모님들의 선택은 ‘잘살아보세’ 정신으로 돌아가자 였고 젊은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못하고 세대 갈등의 길을 선택했다.

간디를 언급한 이전 글에서 진보세력이 ‘정권심판의 메세지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런 맥락이었다. 배웠다는 분들은 하나 같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고 있지만 아직도 그 대답이 그렇게 속시원하지 않다. 미국을 따르는 것을 대안으로 할 수도 있고 독일이나 북유럽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대답이 아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답변이 선비정신이었고 우리 부모세대의 답변이 ‘잘살아보세’ 정신이었듯이 우리는 우리의 답변이 필요하다. 진보가 우리에게 제시해야 할 것은 시대정신(時代精神, 독일어: zeitgeist)이다. 나는 그러한 의미에서 아직 진보라고 이름지워진 사람들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면 진보라는 말자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진보(progress)라는 것은 어떠한 지향점이 있고 그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어 간다는 것인데 나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글을 마치기 전에 기독교인인 나의 생각을 하나만 덧붙이려고 한다. ‘잘살아보세’ 정신을 완전히 부정한다면 이것은 선비정신을 부정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교회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마찮가지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은 고단했던 우리의 삶에 위안을 주었고 그것은 그자체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다만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아는 한가지 모습으로 제한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존재이다. 한국교회가 알고 있는 신학에 그 모습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지금 시점에서 한국교회에 새로운 신학과 사상이 필요한 이유이다.

윤치호 토론 2

제가 요새 엄청난 양의 글로 페북을 도배하고 있는데요. 그래도 정치적인 이슈가 담겨 있는 글을 포스팅할 때는 조금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후배가 저의 글에 반박하는 긴 글을 올려주었는데, 댓글로 남겨두기 아까워서 담벼락에 다시 올립니다. 후배의 글을 통해서도 제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도 되었고 배운 점도 있기에 이런 류의 포스팅도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포스팅은 수정없이 원문을 그대로 올립니다.)

(후배의 글)

제가 아는 박노자씨의 평가는 조금 다릅니다. 링크는 ‘영화화 한다면 적당한 인물’ 추천이라 단편적 발췌로 박노자씨의 호의를 추측하기는 힘듭니다. 저는 사실 박노자씨를 통해 윤치호라는 인물을 더 알게 된 사람인데요, 아시다시피 박노자씨의 여러 저작에 윤치호가 계속 등장합니다. 박노자씨의 의견은 ‘윤치호는 이런식(물지 못할거면 짖지도 마라)으로 식민당국에 대한 자신의 무비판, 협력을 스스로 합리화했다’ 입니다. 이건 찾아보시면 금방 나오는것이기도 하고 박노자교수님께 직접 물어보셔도 됩니다.(vladimir.tikhonov@ikos.uio.no 엄청 바쁘실텐데 대답을 무쟈게 잘해주신다는..)

– 그당시에는 어쩔수 없었다거나, 그 상황에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말은 정당화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합니다. 시대적 상황인식도 해석이 가미되지 않은 현실인식은 없고, 그 인식범위의 넓고 좁음은 있겠지만 어떤 인식이 정답인가도 있을수 없지요. 자신의 그릇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는 말은 그래서 의미없는 말입니다. 그것이 행위의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범죄자도 최선을 다해 합리적인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범죄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식민지시대에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윤치호가 해야 할 선택은, 그 합리성이 아니라 그 정당성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적어도 재평가가 시도되는 지금 이시점 대한민국은 표면적으로나마 독립국이니까요. 물론 실제로 독립을 이루었느냐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합니다.(내적 독립까지 이루어졌다면 이런 재평가가 이슈화될리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 조봉암선생의 배경 언급하신 부분은 조봉암 선생이 남긴 글들로도 반박이 가능할것 같기는 한데, 아예 다른 예로도 쉽게 반박이 될 것 같습니다. 윤치호와 동시대의 인물로 우당 이회영선생 및 그 형제들이 있습니다. 희대의 천재 입장에서는 비이성적인 선택을 한 ‘우매한 민중’일 뿐이겠습니다만,(실제로 윤치호가 대중을 보는 시선은 이랬습니다. 사회진화론자인데다 racist였죠.) 흔한 친일파들의 변명인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는 사실 좀 옹색합니다.

– 윤치호라는 인물이 변절만 하지 않았어도 아마 A급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겼으리라는 사실은 아마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겁니다. 그런데 이 변절이라는게, 주로 지식인들이 자행하는 – 그리고 자신들의 지식으로 열심히 합리화하기 바쁜 이 변절이라는게, 종합적 평가를 뒤집을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변절을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윤치호가 했던건 독립운동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正義에 입각한 최선의 합리적 선택이 아니었나 합니다. 똑똑한 사람들의 특성이죠.

무의미한 논쟁같아서 최대한 짧게 지엽적인것만 적으려고 했는데 써놓고 보니 길고 모호하게 적혀있네요 여튼 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이루고 있는 집권층의 구성이나, 건국인지 독립인지 모를 그시점에 나라를 조직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史觀등이 대한민국을 지금까지도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걸 과연 수정할 수 있으려나 회의를 가지고 있고) 그 바탕에는 역사적인 불확실성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히곤 했던 합리성이라는 허상이 있으며, 그 합리성을 평가하는 방법은 논리가 아니고 정의와 불의의 구분이라고 믿고 있고요. 쓰다보니 제가 생각하는 정치의 본질을 적어놨네요.

(제 답글)
성의 있는 답변 감사합니다. 박노자씨의 윤치호에 대한 제가 아는 평은 위의 두 링크가 다입니다. 후배님께서 더 관심있께 찾아보신 것 같아 제가 잘못생각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제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존댓말로 댓글을 시작했습니다. 언어의 정치성 때문에 반말이 되면 형으로서 하는 훈계가 될 것 같은 부분을 염려에서였죠.

인물을 평가하는 시각 차이는 아마도 후배님과 저의 관점이 달라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상당히도 그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편인 사람이고 진리라는 것이 여러 사람에 관점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믿는 편이거든요. 나쁜짓 해놓고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논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껄끄럽게 하는 관점이긴 합니다만…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중인지라 찬찬히 생각해볼 시간은 없는데요. 집에가서 시간내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관련글 링크:

윤치호 토론

조선근대사 인물 – 윤치호와 서재필

윤치호 토론

Originally posted 06/16 @ facebook

일전에 윤치호에 관해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주신 분이 있어 댓글을 달다보니 내용이 너무 길어졌네요. 담벼락에 다시 올립니다. 약간 수정했고, 언제나 그렇지만 비판이나 토론 환영합니다.

의견: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저는 ‘현실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죽산 조봉암선생의 어록중에 이런게 있습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있을법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역사에 너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것 같아서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사람’을 판별할 마땅한 기준은 있을 수가 없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박노자씨가 윤치호에게 우호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근거는 뭔가요. 박노자씨가 윤치호씨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건 대강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상에 우호적이기도 한가요. 뭔가 안어울려서요.

답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박노자씨의 윤치호에 대한 평을 링크 걸어둡니다.

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753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54174

첫번째 글은 프레시안에 연재된 글인데 영어천재 윤치호의 면모가 자세히 그려져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좀 길지만 읽어볼만 합니다. 두번째 글은 씨네 21에 실은 짧은 평인데 간단히 요약되어 있어서 보기 편합니다.

두 링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박노자는 윤치호를 최초의 ‘세계인’으로 평가하면서 그로 인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런 모습 때문에 비난할 수 만은 없다라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저는 역사적인 인물을 볼때 그사람의 시대적인 배경과 상황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치호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전세계가 가장 미쳐돌아가던 시기의 인물입니다. 2번의 세계대전이 있었고 약육강식과 폭력이 극에 달했을 때 살았던 인물입니다. 폭력의 시대에 전세계에서 가장 힘없는 나라중에 하나인 우리나라에 태어난 지식인이었죠. 우리는 그가 일기를 꾸준히 썼기에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데, 초반 20대 때의 청년스러움이 세상의 폭력앞에 고통받고 변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의 잘못까지 부정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가 대지주였던 자신의 계급적인 이익을 위해 친일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시대의 무거움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것을 요구하는지… 또 개인은 그 짐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 하고 고통받는 그의 이러한 고뇌하는 모습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뿐입니다.

이건 개인적인 견해인데, 미국사람들과 살면서 느낀건 서양 사람들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체면을 생각해서 못 그럴텐데 이 친구들은 필요가 있는 사람한테는 철저하게 잘하죠. 이해관계가 없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인종차별이 공공연히 행해졌던 당시 미국의 상황을 보건데, 윤치호는 아시아의 이름없는 나라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겠지요. 당시 미국인들은 일본인을 원숭이라고 비하했습니다. 일본보다 더 힘이 없었던 한국인의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을 겁니다.

외교세계는 냉철합니다. 겉으로는 명분과 논리를 내세우지만 국가적 이익이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금에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이나 3.1운동으로 약자의 부르짖음이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지만 당시 국제관계는 지금보다 더욱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상황이었죠. (참고로 간디는 윤치호 보다 4살 아래입니다.)

윤치호는 3.1운동 당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우리나라의 독립하고 연관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일본이 미국의 적국으로 돌아서지 않는한 미국은 우리나라 독립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족 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있던 지식인 계층과 반대되는 현실주의적인 판단이었죠. 윤치호는 3.1운동의 대표로 서명할 것을 요청받지만 3.1 운동이 우리나라에 독립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참여를 거절합니다. 윤치호의 좌우명이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라는 것은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후에 윤치호도 일기에 3.1 운동이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시선을 변화시켰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언급하신 조봉암 선생은 윤치호보다 34살이 어립니다. 3.1운동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힘을 보고 자란 세대이죠. 박세리의 성공이 여자골프계에 자신감을 가져왔듯이 그는 독립운동의 가치를 목격한 세대예요.

글을 쓰다보니 제가 왜 이렇게 핏대 세우며 윤치호를 쉴드 처주는지 모르겠네요. 윤치호가 불운하다고 말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친일파 윤치호 후손은 지금도 잘살고 있습니다. 원래도 명문가이기도 했고요. 이를 테면 장남 윤영선은 50년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숙부 윤영렬의 손자가 바로 윤보선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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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토론2

조선근대사 인물 – 윤치호와 서재필

유대인과 독일의 반성

 

Originally posted 06/04/2014 @ facebook

독일에 가면 길거리에서 금속으로 된 표식에 새겨진 이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독일어를 모르기에 그냥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케이블 매설’ 표지 같은 건 줄 알고 지나쳤다. 그 모습을 본 잉그릿이 이게 뭔지 설명해 준다. 이 표지는 표시가 된 곳 앞에 살던 사람들 중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2012년 당시 그 이야기를 듣고 찍은 사진이다. 그러고 보니 도로 곳곳에 이러한 표식들이 있었다. 한 골목에 많게는 수십 개의 이름들이 있다. 당시 유럽에 살던 900만 명의 유대인중의 2/3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이러한 아픔의 흔적들이 유럽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2번의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 초는 정말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시기였다. 모두가 자신의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고 서로를 증오했다. 사회주의자는 자본가 계급을 적으로 생각했고, 자본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멸시했으며, 혼란의 와중에 등장한 파시스트들은 무질서와 ‘나와 다름’을 죄악시하며 하나로 똘똘 뭉쳐서 다른 민족/국가에 폭력을 쏟아 부었다. 아시아에서는 뒤늦게 제국주의의 물결에 합류하고자 했던 일본이 서구의 왜곡된 모습을 황국신민 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서 주변 국가들을 괴롭혔고, 미국인들은 흑인/native American에 대한 학대를 당연시 했다. 이러한 광기의 끝 무렵에 탄생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그 내부에서의 사상갈등으로 서로 죽고 죽인다. 스탈린의 피의 대숙청 때 사상자는 2백만으로 까지 추산되고 있다.

폭력의 시대를 겪고서 유럽 사람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똘레랑스 (관용)’이다. 어원은 허세의 끝장을 보여주는 프랑스 사람들에게서 나온 말이지만 내게는 가장 울림이 큰 가치 중에 하나이다. (쓰고 보니 politically correct한 말은 아니군…ㅎㅎ)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들이대는 것의 폭력적 결말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가치인 것이다.

이제 20세기 초는 너무나도 먼 옛날이다. 그 시절을 체험한 이는 모두 무덤 속에 잠들어 있고, 이제는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게 미국이나 한국이나 보수/진보의 갈등이 점점 커지는 것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가끔 온라인에서 보이는 글들도 소위 어르신의 입장에서 보면 선동이라는 생각이 들겠다 싶은 내용도 있고, 그 어르신들이 대응하는 행태도 너무나도 20세기 스타일이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타자 입장에서 봤을 때, 단편적인 사실만 보고서 감정적으로 서로 헐 뜯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음모론적인 이야기가 사실인냥 받아지는 경우도 많고…

이제 나도 세상의 때도 조금 묻고 좌절도 겪고 하다 보니, 지금 내가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죽고 못사는 것이 나중에 보면 별일 아닌 게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게 역사라는 관점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조선근대사 인물 – 윤치호와 서재필

조선 근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중의 하나가 바로 윤치호 일기다. 윤치호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 계몽운동의 한축이였던 사람이다. 그는 60년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는데 처음 4년은 한자로 그다음 3년은 한글로 그리고 1889년 부터는 영어로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공부를 위해서 영어 일기를 썼다고 하나 나중에는 습관도 되었고 프라이버시 유지를 위해서 계속 영어로 썼다고 한다.

최근 문창극 총리내정자 논란으로 윤치호가 언론에서 언급되고 있다. 윤치호는 단순히 친일파로 분류하기에는 애매한 사람이다. 일신영달만을 생각했던 이완용 같은 인물하고는 다른 부류라 하겠다. 박노자씨도 윤치호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 중에 하나이고 나도 관심이 있다. 100년 전에 밴더빌트와 애틀란타에 있는 에모리에서 신학을 전공했다는 게 왠지 묘한 동질감을 불러 온다. 물론 그의 친일적인 행적과 사회 지도층이지만 방관적인 모습을 취했던 일에는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윤치호는 명망가의 서자 집안에서 태어 났다. 16살때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 유학을 했고 젊은 시절 김옥균,서재필 등의 갑신정변의 주역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윤치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그때 미국은 제3차 영적 대각성 운동 중이었다. 그는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예수를 믿게 된다. 그는 또한 미국에서 서구 문명의 힘을 체험하는 동시에 뿌리깊은 인종차별을 경험한다. 그의 일기 중에는 유학시절 감리교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큰 충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에서 미국안에 흑인 들을 다 쓸어버려야 한다는 설교했던 것이다.

윤치호는 일제시절 계몽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이었기에 3.1 운동 당시에 민족대표로 서명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거부했고 이후 일본이 ‘황국신민설’을 주장할 때 이에 동조해 완전한 친일파로 돌아서게 된다. 이부분 부터는 윤치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나는 윤치호란 사람이 자기 배부르기 위해 친일을 했다기 보다는 근대화의 모델을 일본에서 찾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인종차별을 경험한 그가 일본에서 답을 찾은 것은 이해 가는 부분이 있다.

어학면에서 윤치호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제대로 영어를 사용한 거의 최초의 한국 사람이다. 그는 영한사전이 없던 시절에 일본에서 독학으로 영어를 깨쳤다. 그는 일기에 미국 사람들 기준으로도 상당히 고급 영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가 만약 그 재능을 사용해서 서양의 고전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면 현대 한국어에 일어의 영향이 좀 적었을 거라는 아쉬움도 있다. 알다시피 근현대 한국에서 서양 고전들은 대부분 일어판을 재번역해 출판되었다.

동시대 사람으로 ‘친미(?)’를 했던 서재필과는 유사하면서 다른 면이 많다. 서재필 또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으로 도피하는데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난민 신분으로 들어가서 낮에는 막일을 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다가 독지가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마친다. 그는 대학시절 중국어/일어로 된 의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때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한국 사람 최초로 미국 의사가 된다.

서재필은 미국 사람과 결혼한 후 법적으로도 미국사람이 된다. 그는 한국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지만, 이는 핏줄이 한국 사람이어서 그런 부분이 컸고 본인은 항상 자신을 미국 사람이라고 말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일가가 멸족을 당했기 때문에 조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애매한 것이 이해가 안가는 것 아니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도 영어만 사용했다고 한다. 윤치호의 일기에서도 윤치호가 서재필의 이러한 면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나온다. 서재필은 이승만보다 먼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받지만 거절한다.

‘친미’를 했던 ‘친일’을 했던 아니면 ‘친노’를 하던 당시 지식인들은 어떤 측면에서 선택을 해야했다. 물론 김구 선생과 같이 독립주의 노선을 주장한 분도 계시지만, 조금 이상주의적이지 않나 하는게 나의 의견이다.

기독교인이면서 미국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내 입장에서 윤치호 서재필 이야기를 들으면 선배 이야기 듣는 그런 느낌이 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그리고 세상이 많이 바뀐 지금도 이 두사람의 고민이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밑에 댓글로 썼던 내용인데 본문으로 오는게 맞을 걸 같아서 덧붙였습니다.)

윤치호는 YMCA 운동로 우리나라 기독교의 계몽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의 기준으로 철저히 현실적인 상황 판단에 의한 친일과 계몽운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한국인은 무지하니까 주님의 축복으로 변해야 한다’는 70~80년대 한국 교회의 메세지에 영향을 끼친 것을 완전히 부인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성장한 한국교회….) 이러한 한국교회식 계몽주의는 공산주의자의 박해를 피해서 남하한 초기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반공주의 전통과 함께 한국교회의 중요한 역사적인 뿌리 중에 하나입니다. 문창극 같은 인물이 우리나라 교계의 역사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사상이 어느정도 필요했던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이미 계몽사상은 100여년, 그리고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60여년이 지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그 전통과 신학을 뛰어넘을 인물이나 고민들이 없었다는 데에 지금의 문제가 온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어려움과 반성들이 새로운 신학과 사상의 발견의 계기가 되고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서 긍적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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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토론

윤치호 토론2

+ 덧 (2015년 9월 15일): 이글을 블로그 초창기에 포스팅 했습니다. 지금와서 읽어보니 생각이 덜 영글은 부분이 꽤 보입니다. 왠지 부끄러워져서 비공개로 돌릴까 싶어집니다. 그러다가 이 글은 예전의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자료인 듯 하여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