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학자금 대출 이슈와 영리(for-profit) 대학

어제 일자 (2015년 9월 10일) 뉴욕타임즈 기사를 읽고 느낀점을 간단하게 정리해봤다.

기사 링크: New Data Gives Clearer Picture of Student De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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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에선 학자금 대출 이슈가 점점 커지고 있다. 내년 대선 주요 쟁점 중 하나가 될 모양이다.
  • 기사는 스탠포드 Yannelis팀의 연구결과를 요약한다. NYU를 비롯한 4년제 사립대학의 등록금 인상이 학자금 대출 증가를 이끌었을 것이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영리 대학(for-profit)과 커뮤니티 컬리지가 주범이었다는 내용.
  • 영리 대학(for-profit)은 우리나라에 없는 교육 형태이다. 일종의 직업교육 학원을 확장시켜서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으로 인정했다.
  • 영리대학의 문제점은 자주 지적되어 왔다. 아무래도 상장기업에 이익추구가 목적이다 보니 과도한 마케팅으로 인한 폐해가 있다.
  • 영리 대학도 맞춤형 교육, 유연성, 현장성 등 나름의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 문제는 정부가 보조금 제도 (Pell grant)로 등록금을 대주면서 영리 대학의 규모를 무리하게 키웠다는데에 있다. 등록금 부담이 없어서 저소득층과 일반적으로 대학에 오지 않을 사람들까지 끌어 들였다. 그리고 (보조금이 지원되지 않는) 나머지 학비가 대출로 되어 버린 것이다.
  • 미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대학 교육의 미래나 학자금 대출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읽어볼 만한 기사이다. 아울러 디테일한 자료 조사와 그에 기반한 정책들로 이슈를 만들어가는 미국식 언론/정책/정치를 느껴볼 수 있는 보너스도 있다.

아이 교육에 대해 올바로 질문하는 법

글을 쓰다가 자의식 과잉이 될 때가 있다. 오늘 글이 그러한데, 쓰다보니 개똥철학 교육론이 되어버렸다. 나는 교육에 대해 전문지식도 경험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에 불구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글을 적어본다.

질문이 왜 잘못되었는가?

두달 전에 Ivy League와 미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글을 공유한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아이비리그를 비판하는 글을 읽어봐야 딱히 해결책이 있는게 아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명문대에 입학하되, 속물이 되지 않고, 생각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라고 얼버무리며 결론을 내었다.

그런데 글을 쓰고서 내내 찝찝한 거다. 왜 찝찝한가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싶었다. 어떤 경우는 ‘질문에 무엇을 답하는가’보다 ‘어떻게 질문을 하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인용한 칼럼의 필자의 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필자는 Ivy League 시스템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리고, 대안으로 (약간은 소심한 뉘앙스로) 주립대와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제시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필자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하기에 어떤식으로든 대안을 제시하긴 했는데, 본인도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성급하게 마무리 지은 모양새다.

그 글을 읽었던 나도 필자의 논지를 따라가면서, ‘아이비리그가 주는 가치가 무엇인가.’, ‘아니면 한국의 명문대가 주는 가치가 무엇인가.’, ‘그러면 나는 내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생각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되었다. 그 질문은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하면 행복할 것이다.’, ‘성공할 것이다.’, ‘생각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 질문이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자연스레 Ivy League와 인생의 성공을 놓고서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을 하며 글을 읽게 된다.

질문을 제대로 하려면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것인가?’ ‘생각하는 법을 배울 것인가?’ ‘부모는 자신의 기대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찌보면 명문대에 진학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말이 아니라 본질이 아닌 질문이라는 것이다. 명문대에 간 아이가 불행할 수도 있고, 아닌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

누군가는 계속 물을 수 있다. ‘그래도 역시나 명문대에 가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래도 그 누군가가 이 질문을 여전히 한다면, 나는 그분에게 당신은 잘못된 질문의 늪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말해줄 것이다.

진정 중요한 질문은

내가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은 ‘어떻게 부모로서 아이에게 대리욕망을 하지 않는가?’ 이다.

아이는 언제나 아이의 삶을 산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아이의 어떤 면은 나와 무서우리 만큼 닮은 동시에, 어떤 면은 정말로 생소한 이질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여섯/일곱살이 되면 그때부터 자의식이라는 게 생기게 되고, 조금씩 부모의 품을 떠난다. 유치원을 가게 되고 친구와 교류가 생긴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어느 순간, 아이가 집밖에서 배워온 것을 알고 말할 때가 있다. 부모의 눈에는 여전히 아기로만 보이는데,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고 세상의 지식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럴 때면,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구나. 스스로 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내가 어떠한 기대를 아이에게 가지고 있던지간에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부모는 일반적인 사회 통념과 한정된 인생경험으로 아이에게 가장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는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그것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일 때도 있다.

부모의 역할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인 나이 중간 값은 마흔하나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인생의 반환점에 거의 다다른 샘이다. 짧게 나마 나를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진정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아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것/잘하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실존주의의 개념을 살짝 변형시켜 빌려오자면, 인간은 세상에 내동댕이 쳐진 존재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아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처음에 재미도 없고, 흥미를 못붙인다고해서 그것을 평생 즐기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예를 들자면, 음식의 깊은 맛을 알아가는 것이 그러하다. 나물의 씁슬한 맛, 삭힌 음식의 깊은 맛 같은 것들은 훈련을 통해 알게되는 맛이다. 인간의 본성은 쓴맛과 삭힌 맛을 거부하는데, 꾸준히 먹어가며 입맛이 변하게 된다. 공부/책읽기/글쓰기 등등 몇가지 것들도 역시 그러한데, 본인의 취향을 알게 되기 까지는 훈련되고 익숙해지며,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본인의 전공이나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 역시 그러하다.

아마도 부모의 역할은 그 과정에 조금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와 부모님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나는 아직도 가끔 부모님께 이런저런 조언을 구할 때가 있다. 대부분은 부모님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이제는 부모님도 연세가 들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온전히 따라잡지 못하신다. 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예전보다 복잡해져서 설명하는데에만도 힘겨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편안함은 그분들이 온전히 내편이라는데에서 온다. 내입장에서 생각해주신다. 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때로 큰 힘이 된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자식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알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미국식 엘리트 교육에 관한 책들

칼럼을 길게도 비평했다. 내가 못마땅 했던 것은 칼럼이 질문을 던진 방식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사실 필자의 논지 자체는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을 전공한 저자의 책은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있다. 미국에서도 꽤 반향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미국식 엘리트 교육에 대한 저자의 통렬한 비판은 한국의 상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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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자는 에이미 추아의 <타이거 마더>에 대해서도 실랄하게 비판한다고 한다. <타이거 마더>는 저자와 대척점에 있는 스파르타식 아이 교육법에 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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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추아는 중국계 이민 2세이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데, 스파르타식 자녀 교육법으로 꽤 큰 파장을 불러 왔던 것으로 안다.

시간이 나면 두 책을 다 읽어 보고 싶다. 문제는 읽지 않은 책이 쌓이기만 한다는 거다.

[재공유]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어린이날이다. 작년에 아이들에 대해 써둔 글이 있어 재공유 한다.

Isaac의 생각저장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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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목요일에 회사에서 ‘Take your child to work day’ 행사가 있었다. 행사는 오전과 오후 순서로 되어있었는데,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회사소개를 하고 회사 투어를 했고 오후는 카니발이 있었다. 카니발에서는 각 부서별로 부스를 마련해서 솜사탕을 팔거나 물풍선 던지기, 링던지기 같은 가벼운 게임을 했는데 수익금은 donation한다. 딸아이는 어려서 오전순서는 참여하지 않고 오후의 카니발만 참석했다. 카니발이 끝나고 내 책상도 잠깐 들렸는데 딸애는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동료들에게 인사도 시켰다. 아이도 즐거워 했고 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식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는 아이가 위험할까봐 뾰죽한 물건을 치우기도 하고, 몸에 좋거나 맛있는 음식을 아이를 위해 따로 챙겨두기도 한다. 아이가 교양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태교도 하고, 커서는 책도 읽히며 음악회나 미술관도 데려가고 박물관에 따라가기도 한다. 아이가 사는 세상이 좀더 좋았으면 하는 마음에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환경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도덕이니 규범이니 하는 것도 아이가 없는 사람의 마음과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천양지차이다.

한 블로거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희망’인 이유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인생에서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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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회 이동성 복원을 위한 교육 정책의 방향 – KDI

근래에 본 보고서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보고서이다. 이런 걸 직접 조사하는 분들이 계시구나… 딱히 말이 필요 없다. 채훈아빠님의 포스트를 참조하시길…

사회 이동성 복원을 위한 교육 정책의 방향 – K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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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 90년대 말만해도 서울대에는 6대 광역시 출신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주위의 친구들도 그랬고… 연대에 다니는 친구들이 몇 있어서 더 비교가 되었는데, 서울대는 지방수재들도 꽤 많이 모이는 학교 느낌이었다. 이제는 그것도 옛날 이야기 인가부다.

Don’t Send Your Kid to the Ivy League을 읽고

페친의 페친이신 오석태 이코노미스트님께서 링크하신 칼럼을 읽었다. 생각할꺼리가 많은 글인지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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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Send Your Kid to the Ivy League (New Republic 2014년 7월 21일자)

요약하자면,

– 능력주의 (meritocracy)로 입학 사정을 하는 Ivy League 학교들
– 명문대 입학을 위해서 스펙쌓기에 집중하지만 (르네상스를 공부하기 위한 ‘하루짜리’ 이태리 투어, 과테말라 봉사활동 등등…) 깊이가 없는 아이들.
– 생각하기를 가르치기 보다는 기술(technocratic)을 가르쳐서 좀비를 양산하는 명문학교들. 그리고 역시나 생각없이 컨설팅과 투자은행을 커리어로 선택하는 졸업생들.
– 능력지상주의는 결국 불평등을 고착시킨다. (‘다양성’을 고려하여 다양한 민족과 배경의 아이들을 뽑는다고 내세우지만, 부모들을 결국 중산층 이상의 의사나 금융업계 종사자 들이다.)
– 대안은 주립대(좀더 다양한 배경의 아이들을 접할 수 있는)나 리버럴 아트 칼리지 (liberal arts college) – 인문학 중심의 교육을 시키는 – 일 수도 있을 듯 하다.
– 우리는 신분제(aristocracy)와 능력주의 (meritocracy)를 시도해 보았다. 이제 민주주의 (democracy)를 시도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허… 글이 길어 요약도 길다. 요약은 요약이니, 영어가 되는 분은 원문을 읽기를 추천한다.

비판적인 시각이 살아있는 글은 언제나 반갑다. 생각을 하게 해주니. 그런데 흥미롭게 읽고서도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 미국의 명문대 시스템을 경험한 마눌님과 한국의 명문대 시스템을 경험한 나도 분명한 그림이 아직 없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일지도…) 각 시스템의 장단점을 잘 알고 느끼기에 더욱 그러하다.

자식에 대한 기대라는 것은 어느 부모에게나 있지 않은가. 이 글을 읽고 자식을 아이비 리그에 보내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다. 아마 현실적으로는 내가 느꼈듯이 ‘명문대에 입학하되, 속물이 되지 않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칼럼을 쓴 필자도 콜럼비아를 졸업한 사람이 아닌가.

언젠가 자식을 몰래 미국에 유학보내면 진보계열 인사고, 떳떳하게 유학보내면 보수계열 인사라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농담이 떠오르더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글을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대학을 갔고, 무엇을 얻었는가. 그리고 아이가 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으면 좋겠는가 하는 것들을 차근차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 우리나라 교육과 부모에 대한 글을 보고 짧은 감상을 남긴 적이 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이글이 좀더 와닿는다. (링크: 복상 ‘불안한 사회에서 부모의 욕망 비우기’를 읽고)

+ 덧(2015.6.1): 이 글을 쓰고서 찝찝한 느낌에 글을 하나 더 썼다. 아이 교육에 대해 올바로 질문하는 법

복상 ‘불안한 사회에서 부모의 욕망 비우기’를 읽고

원글 link: 불안한 사회에서 부모의 욕망 비우기 (복음과 상황 290호 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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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내내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았다. 글쓴이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분명 부모로서 자녀를 키우는 이야기인데, 읽으면서 나는 그시절 나의 부모님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그리고 그때 부모님과의 풀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되새겨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님을 더 이해하게 되고, 나 자신을 더욱 알게되고,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았던 무언가를 더 알게된다. 진솔하게 자식 키우는 이야기를 나눠준 글쓴이에게 감사한다.

+ 덧 (2015/04/27)
링크된 글이 전체공개에서 회원공개로 바뀌었다. 원글을 읽는 것을 추천하지만, 회원가입이 번거러운 분들을 위해 일부 발췌한다. (사실 회원가입이 어렵지는 않다. 기본 정보만 입력하면 된다.)

내가 학력고사를 보고 합격 소식을 기다릴 때, 나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합격자 발표 당일, 전화를 걸고 ‘합격’이란 소리를 듣자 난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다행이다’란 생각만 들었다. 난 합격하지 못했어도 나름 다시 잘할 자신이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 할지라도 내 마음은 그랬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만약 내가 불합격했단 말을 들었으면 엄마는 엉엉 울었을 것이다. 자리에 누워 계속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겨우내 ‘내 인생은 의미가 없어’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을 것이다. 난 그게 ‘불합격’보다 훨씬 더 두려웠다. 엄마가 가진 그 큰 부담감은 언제나 날 힘겹게 했다. 내 인생에 신경 쓸 시간이나 에너지가 모자랄 정도였다. 엄마의 불안을 걱정하느라고. 엄마의 두려움을 돌보느라고.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느라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성취’가 크게 자리 잡을 때 그 관계는 서로에게 상처와 짐이 된다.

대학 학비를 댈 만큼 사는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도 대학 가서 자기 정도의 경제적 수준을 유지하며 살겠지 생각하는 것 같다. 대학 학비 대기 어려운 부모들은 자식만은 어떻게든 그런 경제적 상태로 밀어 넣어주기 위해 대학에 목을 매는 것 같다. 아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아들이 착실하게 공부하여 경영학과를 나와 취업을 준비하는데 돈 있고 빽 있는 친구들이 먼저 취업하는 것을 보고는 왜 엄마는 돈도 없고 빽도 없느냐고 원망하더란다. 얼마나 좌절이 되었으면 그랬을까.

나는 우리 아이가 대학엘 가더라도 ‘바보’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만약 둘 중 꼭 선택해야 한다면 난 대학생 대신 생각하는 사람이 되길 권할 것이다. 이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조금만 길게 보면 당연한 결정이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시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스를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 때와는 또 달라서 점점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없는 정도까지 치닫고 있다. 치열한 입시경쟁과 학벌이 높아도 좁기만 한 채용시장, 돈 이외의 가치가 바닥을 치는 사회. 학벌로도 안 되는 채용시장이라면 자기만의 차별화된 능력, 그 아이만이 가진, 아이가 가장 잘할 무엇을 준비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대학의 미래 – 오바마 대통령의 커뮤니티 컬리지 무료화 계획에 대한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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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 톰행크스가 뉴욕 타임즈에 I Owe It All to Community College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2년제 커뮤니티 컬리지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그곳에서 배운 지식이 어떻게 현재의 배우 생활에 도움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뉴스 페퍼민트에 번역 되어 있으니 한글판을 읽고 싶은 분들은 오늘의 나를 만든 커뮤니티 칼리지(뉴스페퍼민트)를 참조하면 된다.

뜬금없이 톰행크스가 이 글을 기고한 이유는 지난 8일 오바마 대통령이 테네시의 한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전국의 커뮤니티 컬리지를 무료로 개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Obama Plan Would Help Many Go to Community College Free: NYT) 처음에는 나는 이 계획을 들었을 때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보니 아주 불가능하지 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현재 미국의 커뮤니티 컬리지들은 30%의 예산만을 등록금에서 조달(NYT)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학의 경우 4년제를 포함해서 60~70%(출처:대학교육연구소)) 또 커뮤니티 컬리지의 경우는 지금도 장학금 같은 방식으로 70~90%의 학생들이 무료로 등록하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600억 달러의 예산을 공화당에서 통과시킬리는 만무하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학교를 무료로 개방했을 때 일단 등록하고 보려는 학생들이 생길 것이며 (free rider의 문제), 수준낮은 4년제 대학은 어려워 지는 등 (2년제가 공짜라면 허접한 4년제에 누가 가겠는가?)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필요한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되지 않은 현시점에서)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여기서 부터는 정리되지 않은 제 생각을 써본 글이니 그냥 재미로만 읽어 주세요. 군데 군데 논리의 구멍이 뻥뻥 뚫린거 찾기 쉽습니다. ^^ ————————————————————-

이 뉴스가 내 관심을 끈 것은 대학의 미래에 대해서 미국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 있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바마는 교육 이슈를 이야기 하기 좋아한다.) 사실 대학의 미래는 항상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지만 이야기 하기 조심스러운 소재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들이 대학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각자가 대학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고 학문을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대학의 목적을 어떻게 보는가 이다. 모든 것을 투자 대비 가치로 따지기 좋아하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대학은 신분 상승의 수단 또는 대졸 임금 프리미엄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만 대학을 본다면 2010년대 지금에 와서 대학교육은 실패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데에는 몇가지 근거가 있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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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은 인적자본 일등 국가인가 (KDI), 채훈아빠 블로그 재인용)

KDI의 최근 통계 자료에 따르면, 가장 위의 파란색 점선이 고졸 대비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임금 프리미엄인데, 1980년대의 80%에서 현재로 오면 60%까지 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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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ealth by degree (economist))

또 위의 이코노미스트 자료를 보면, 빨간 점선이 OECD 평균 대학 진학률인데, 30년 만에 약 18% 정도 증가 한 것을 볼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대학진학률은 높아지는 추세이고 대학의 임금 프리미엄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관련해서 관심있으신 분들은 링크 자료로 들어가면 참고자료 리스트가 잘 정리되어 있다. 참조하시길.)

그러나 대학이 단순히 임금 상승을 위한 수단인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견해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이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내 식으로 이해를 하면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라는 이야기 이다. 심지어는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하는 경영학 마져도 (내가 공부했을 때 느낀 바로는) 기업 현장의 실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영학이라고 하는 학문을 하는 것이다. 기업에서 후배 직원을 받아본 사람들은 느끼겠지만, 아무리 대학에서 잘나가는 친구였다고 하더라도, 실무에 바로 투입되어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학문하는 곳으로서의 대학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와서 정립이 된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대학이라는 곳은 엘리트 계층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1970년대 그러니까 대학진학율이 10% 정도이던 시절에는 대학생들이 고졸/중졸을 보는 시선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19세기 만해도 미국사람들에게 대학이라는 곳은 목사가 되기 위해 가는 곳이었고 따라서 라틴어와 희랍어를 필수로 가르켰다. 그이후 라틴어가 필수 과목에서는 사라졌지만, 20세기 초까지도 대학생들은 남을 돕기 위해 대학에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출처: 최후의 교수들, 프랭크 도나휴)

그렇지만 지금의 대학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면 대학에 진학한 공대생의 상당수가 미적분을 제대로 못하는 수준이고, 영문과에 진학했다고 하지만 원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어찌보면 이는 당연한데 60~70%가 대학에 진학하는데, 그 모두가 학문을 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다. 만약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 대학을 진학한다고 하면, 대학은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교양을 가르키는 곳이 맞다고 본다. 그리고 정말 학문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이상의 고등 교육 과정(대학원이 되었든, 연구소의 형태가 되든…)을 만드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오바마의 커뮤니티 컬리지 무료화 제안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세계적으로 대학진학률이 높아지는 것은 (우리나라 만의 현상은 아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만큼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지식의 양은 점점 쌓였기에 12년의 의무 교육과정으로는 현대인에게 기본적인 교양의 수준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커뮤니티 컬리지 무료화는 어떤 의미에서 13년의 정규 교육과정 (미국의 경우는 kindergarten 1년이 더 해져서 13년이다.) 에다가 2년의 추가 교육과정을 정규로 더하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당연히 국민들 사이에 합의가 필요하다. 교육의 문제를 단순히 잘살기 위한 투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대학과정을 정규교육화 (즉 세금을 집행하여 무료 또는 무료에 가까운 교육과정으로 만드는 것) 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80~90%가 대학에 진학한다면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으로 프리미엄이 붙을 수가 없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반대로 대학 교육을 교양있는 시민으로 키우기 위한 기본 소양을 키우는 것 (고등학교와 유사한 그 연장 선상의 어떤 것)이 라고 본다면 전국민에게 정규 교육과정으로 제공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학의 경우도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것이 100년 남짓 되었을까?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그 모습대로 나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p.s. 쓰다가 보니 무슨 레포트도 아니고 주장하는 글도 아닌 이상한 뻘글이 되었네요. 지금까지 하던 포스팅과 또다른 형태의 글입니다.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다지 전문성도 없는데, 논란이 될만한 주장만 늘어 놓은지라 포스팅하기 망설여 졌는데, 그냥 길게 쓰고 지우기도 아까워서 포스팅합니다. 의견이 있으시면 댓글로 달아주셔도 좋습니다.

벌레, 그리고 두려움에 대처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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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http://www.bugsvill.co.kr)

예전에는 딸아이가 벌레를 재미있어 했다. 한번은 뉴욕의 장남감 가게에 갔는데 박제된 곤충을 좋아해서 거기서 한참을 보고 있는 거다. 문제는 우리 마눌님은 벌레를 보면 기겁을 한다는 것. 그래서 마눌님 몰래 곤충 박제를 몇개 사줄 계획까지 짠 적이 있다. 그러다가 계획이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러던 녀석이 요새는 벌레를 무서워한다. 엄마가 기겁해서 놀라는 걸 보고서 그대로 배운게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대부분 어떤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을 부모를 통해서 배울 때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가끔 아이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는데, 대부분 우리가 아는 영역 밖의 것들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같다. 아이에게 모르는 것을 관찰하고 배우는 방법(과학의 방법)을 가르키거나, 아니면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종교의 방법)을 가르켰으면 하는데… 내가 가르킨다고 될 일은 아닌 듯하다. 스스로 터득하고 깨우치기를 기다려 주는 수 밖에. 그래도 가장 안배웠으면 하는 것은 무지의 영역을 부정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방법이다.

어렸을 적을 생각해보면 벌레 같은 것은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매해 여름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갔었던 게 컸던 것 같다. 서울에서 크고 자랐지만 산골에서 매미를 잡고, 모기에 뜯기면서, 잠자리채 들고 산골짝과 담배밭/고추밭을 뛰어 다녔던 기억이 있다. 내게 벌레는 미지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그냥 같이 살아가는 생물중에 하나 일 뿐이었다.

반면 나는 초자연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겁이 많은 아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유령 이야기는 정말 소름끼치게 싫어 했는데, 혼자 자는건 꽤 커서도 무서웠던 것 같다. 다행인지 우리 집이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아주 어렸을 때는 단칸방에서 네식구가 같이 잤고, 꽤 커서까지 동생이랑 한 방을 썼었다.

커서는 딱히 초자연적인 것에 흥미가 있는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비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무관심한 편이라 이제는 그리 무서움을 타는 편은 아니다. 다큰 남자 어른이 무서운 이야기에 겁먹어서 쓰겠나…ㅎㅎ  내가 크면서 터득했던 두려움에 대처했던 방식은 두려움의 영역에 대해서 가능한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무의미한 호들갑을 최소화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요새들어서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영역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방법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내게 대표적인 무지의 영역은 여자의 마음이다. 학창시절이나 성인이 되어서도 연애에는 항상 젠병이었다. 결혼을 해서도 알 수 없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고 어찌보면 유령보다 더 무서운 아내의 호통이다. 그것은 머리로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일 대상일 듯하다.

아이가 무지를 또는 두려움을 어찌 대처하는가를 잘 배웠으면 좋겠다. 물론 요즈음은 벌레가 나오면 기겁하고 있는 엄마와 아이를 위해 잡아 죽이고 흔적처리까지 한다만…

무한경쟁의 삶은 우리를 어떻게 불행하게 만들었을까?

최근 한국에 계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무한경쟁의 삶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는 각박해지고 이제 부모님 세대에 있었던 고속성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내가 먹여살리는 가족이라도 숨쉬고 살게 하려면 나라도 경쟁에서 조금 높은 고지를 점해야만 한다. 젊은 세대들은 권위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지만 너무나도 견고한 세상의 게임의 룰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젊은 세대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미국 또는 미국식에 대한 반발은 아마도 여기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 사람들의 사고 방식으로는 경쟁은 아름다운 것이고 건강한 경쟁이 세상을 발전하게 하는 동력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다. 사소한 것도 불만이 있다면 넘어가지 않는 그들이지만 경쟁에서 졌다면 깨끗이 승복한다. 당일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 받는다면 군소리 없이 바로 짐을 싸는 사람들이다. 직속상사가 자기보다 스무살 정도 아래의 핏덩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이 있다면 불만없이 따라주고 깍듯이 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무한 경쟁 논리의 본산인 미국 사람들은 모두 불행하고 만족하지 못하며 살것 같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한국사람들이 더욱 만족하지 못하며 스트레스 받으며 살고 있다. 높은 자살율과 낮은 출산율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다. 왜 그럴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다양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성공이라는 것을 정해진 잣대에 맞추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세분화하고 서열화한다. 최근에 뉴스 중에 ‘감히 네가 연세대 동문이라고?” 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연세대 안에서도 입시 출신 별(정시합격, 수시합격, 장수생, 농어촌 전형 등등…)로 골품제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이러한 세태가 어디 연세대 학생들의 문제이겠는가? 기사화 되지 않았을 뿐이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어디를 가서도 이러한 식의 시선과 판단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가장 중첩되어 있고 치열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대학입시이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한국대학서열구조

미국이 이상적이고 이러한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이다. 미국 또한 명문대가 존재하고 암묵적인 서열이 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스탠포드 등등 같은 부동의 명문대가 있고 아이비리그 학교가 있고 주립대가 있으며 커뮤니티 칼리지가 있다. 그리고 명문대를 나오는 것이 사회적인 성공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정도로 세세하게 학교간 등급을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 마다 잘하는 분야가 다르고 개성이 뚜렷해서 어느 학교가 좋은가 하는 논쟁은 거의 무의미하다. 또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서 좋은 학교 또는 직장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려있다. 오히려 미국 사람들은 인간승리 드라마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식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교육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은 교육 현장에서 드러나는 문제가 단순히 교육 시스템이나 교육관계자들의 자질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학교이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나의 세대나 우리 부모의 세대와는 확실히 다르다. 이들은 고등학교의 존재 목적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며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볼때 학교는 졸업장을 주는 것 말고는 의미가 없다. 시험대비 만을 위한 지식이라면 또는 스펙을 쌓기 위한 교육이라면 학교 말고도 사교육 시장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는데 졸업장을 위해서 수업을 참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를 억압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선택할 권리를 준다면 또는 다른 대안이 있다면 억압 만을 가져다 주는 학교에 누가 앉아 있겠는가?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요즈음의 아이들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다. 아직 사회에 발도 디뎌보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묻는다. 법을 지키고 착하게 살면 손해보는 게 아닌가?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직장을 얻고 성공하는게 맞는가? 그들은 이미 연예 뉴스에서 병역기피를 매일 보고 있고, 쪽집게 과외로 지름길을 따라 가는 삶의 요령을 배우고 있다. 우리 세대처럼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순진한 아이들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실은 그 깊이가 일천하다는 것이다. 내가 삶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배웠던 순간은 경제적인 불확실성이 있지만 끝까지 버텨봤던 순간, 그리고 내가 가진 열악한 조건과 현실을 알게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그때 였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많은 것을 알지만 얇게 알기 때문에 오히려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서 세상의 부조리를 읊어댈 뿐이다. 이것이 아이들만의 또는 젊은 세대들만의 문제인가? 아이들이 이러한 질문을 했을때 자신있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글을 주섬주섬 정리해보련다. 다시 다양성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세상에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정말 손을 꼽을 정도로 적다. 어느 한가지 방법이 맞고 다른 방식은 틀리다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권위주의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경쟁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내가 세계를 보는 관점은 경쟁과 개개인의 욕망이 세상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기심과 경쟁심리가 때로는 지저분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방향을 볼 때 건전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은 인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다만 그경쟁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쟁이라면 모든 이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반대해야할 미국식(?)은 바로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극단적으로 만약 우리의 인생을 수능을 보듯이 점수화 시키고 등수화 시켜버린다면 우리 모두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대다수는 상위 10%에 들어가지 못해 불행할 것이며, 상위 10%에 들어가는 사람은 1%에 들어가지 못해서 불행할 것다. 상위 1%에 들어가는 사람은 상위 1% 밖으로 밀려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다. 모두가 지는 게임이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1등을 할 수 있다. 또 어떤 순간에서 1등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다. 살면서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1등을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고3때 수능을 보고 모든 것을 점수화했던 그 순간처럼 삶의 모든 가치들을 그렇게 획일화하고 단순화 시켜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공부잘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의미일까?

Originally posted 06/07/2014 @ facebook

이번에 제주도지사로 선출된 원희룡 관련글 링크 걸어 본다. 그냥 연예계 뒷얘기 듣는 기분으로 읽으면 재미있는 글이다. 원희룡씨가 확실히 시험공부 머리는 있는 분인 것 같다.

펌) 공부왕 원희룡 대 장하준

이번 선거때는 고변 관련 논란도 있었고 해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봤다. 내 결론은 간단하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그 성실성과 집중력으로 국민을 섬긴다면 정말 우리는 모두 공부 잘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겠지만, 그런 분들이 집중력을 일신영달에만 쓴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유독 우리나라는 공부 잘하는 사람을 우러러 보는 경향이 있다. 혹자는 그뿌리를 과거제도에서 찾기도 하지만, 그건 너무 먼 예전 얘기라 나는 잘 모르겠다. 그치만 내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선생님들도 공부 잘하는 사람은 노터치였고 심지어 노는 친구들도 공부 잘하는 애들은 잘 안건드렸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수석합격/ 하바드 출신 같은게 정말 잘 먹히는 사회다.

미국을 생각해보면 꼭 그런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 식으로 공부만 잘하는 친구들은 오히려 nerd로 평가 받는 경향이 있고, 운동을 잘하거나 잘 노는 친구들이 인기가 좋다. 미국에서도 명문대와 name value는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명문대는 network 측면에서 더욱 중요한 것 같고, 명문대만 나왔다고 우러러 보지는 않다. 그리고 이건 정말 애매한 건데 명문대 나온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잘되는 건지 명문대 타이틀 때문에 잘되는 건지는 정말 알기 힘든 것 같다.

조금 들어가서 교육과 계급에 대한 생각도 해보았다. 교육은 신분 상승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지난 세기 동안 한국은 가장 극심한 사회 변동이 있었다. 농부의 아들이 고위층이 되고 명문가의 아들이 극빈층이 되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흔한 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변동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교육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전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교육열의 중요한 원인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학부모/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면 성공하고 공부 못하면 실패한다고 알게모르게 겁을 준다. 물론 초등학교 학력에 돈을 많이 벌어서 부유층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분들은 졸부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은 자식들은 어떻게든 좋은 교육을 시키거나 최소한 명문대 출신 며느리/사위를 본다. 신분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 (바로 우리…T.T)은 정말 극심한 스트레스를 앉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신분 상승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은 신분 하락도 열려있다는 말이다. 기득권이나 나이든 분들이 보수를 지지 하는 건 이치적으로 당연하다.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도 어쩌면 몇십년전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안정화(?)되고 있고, 잘사는 집 아이가 공부도 잘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인식은 많이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공부/스펙은 전국민의 스트레스다. 반면에 요즘의 10대/20대들은 부모 세대들 보다 몇배 더 노력해도 얻을 수 있는 게 더 적다. 사회가 그만큼 안정화되었고 70/80년대의 고속 성장은 이제 다시 오기 힘들어 보인다.

서울대 나왔다고 신분상승이 보장되는 것만도 아니다. 그나마 조금더 보장되는 길이라면 고시나, 전문직, 유학(?) 같은게 아닐런지… 성공을 믿고 서울공대로 진학했던 나의 과동기들. (90년대는 기술입국을 권장하였다. 고3 때 나는 ‘과학원 이야기’, ‘포항공대 이야기’ 같은 책을 읽고 감명 받았었다.) 일부는 회사 연구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뭔가 더 해보고 싶은 친구들은 고시로/의치대 대학원으로 각기 뿔뿔히 흩어졌다. 공부 머리로 한번 더 승부를 보려는 것이었을까. 나쁜 뜻은 아니다. 나 또한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 중에 하나이고,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 있다. 편향성에 대해 말하는 거다.

뱀발로 인도 친구들하고 얘기 나눈 바에 따르면 인도도 우리나라 못지 않은 교육열을 가진 나라 중에 하나이다. 인도 역시 엄청난 사회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다. 갑자기 생겨난 부로 인해 사람들의 의식은 변하고 있고 카스트제도는 도전을 받고 있다. 최근 인도는 10년만에 투표로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내 인도 페친들이 관련 포스팅을 쏟아 내는 걸 보면 젊은층들은 상당히 고무되어 있는 듯하다.

유럽은 이런 면에서 정반대인 것 같다. 사회는 안정되어 있고 대부분 사람들은 교육에 열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미국은 그 중간정도 인 것 같고… 나중에 스위스/독일 체류 경험 이나 미국 유학 이야기 같은 건 또 포스팅 해보려고 한다. 이미 글이 너무 길어졌고, 자꾸 옆길로 새는 느낌이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