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Brooks 선정 올해의 칼럼

매년 이맘때, NYT의 칼럼리스트 David Brooks는 올해의 명칼럼을 선정하여 Sidney Awards를 발표하고 링크를 걸어준다. 주로 정치/사회/문화에 관련한 글들이었는데, 리스트를 훑어보니 올해는 유난히 인공지능과 테크 쪽 글들이 많다. 아무래도 올해는 테크가 핫했던 한 해였던 듯. 모두 극악의 장문들이긴 하지만, 시간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글들이다.

파트 1: The 2015 Sidney Awards (12월 18일자 NYT)

지난주 금요일 파트1에 이어서 올라온, David Brooks 선정 올해의 칼럼 파트 2.
테크, 인공지능 관련 글이 많았던 파트 1과 달리, 파트 2는 공동체와 개인주의, 고립에 대한 칼럼이 많다.

주제는 PTSD, 소로의 월든 비판, 말콤 글래드웰의 공동체 관련 글, ISIS, 대학 내의 성 이슈 등이다.

파트 2: The 2015 Sidney Awards, Part 2 (12월 22일자 NYT)

캡처

내가 믿는 기독교 : 1. 이슬람과 기독교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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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이뤄지는 토론을 보면서 저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적는 이야기는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저는 신학/역사/인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일이 없기 때문에 깊이에 한계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해왔던 부분이고 저의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 생각을 몇자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L님과 K님의 토론을 보면서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이 꾸란을 접근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꾸란은 선지자 무하메드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슬람은 꾸란의 단어 (아랍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암기하며,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종교입니다.

제 생각은 선지자 모하메드가 중세(6~7세기)의 인물이 었다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무슬림의 모든 행동의 근거는 모하메드의 계시에 바탕합니다. 그런데 중세의 도덕관념과 세계관은 현대인의 눈으로는 몹시 이질적입니다.

저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류는 변해왔고 이슬람 세계는 중세의 가치관(정확히 말하자면 모하메드의 계시)을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비무슬림의 눈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중세의 종교관은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주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므로서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더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려는 신학 연구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성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 시절에 가장 열중했던 일이 독일어 성경 번역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아랍어로 씌어진 꾸란의 원문 자체를 신성시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인 것이지요.

종교개혁 이후에도 서양의 세계관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근대/현대로 오면서 인류가 겪었던 가장 큰 변화중에 하나가 ‘개인’의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와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사회라는 개념은 비교적 생긴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당시 새로운 개념이었던 ‘individualism’을 ‘self-reliance’라는 말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개인주의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self-reliance’라고 정의한 것이지요.

당시 철학자들 사이에서만 논의되던 이야기는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20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개인의 가치를 고귀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류는 인권을 신경쓰기 시작했고 여성의 인권도 비약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비무슬림의 눈으로 무슬림 사회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눈에는 이슬람 국가에서 인권은 무시되고, 여성은 억압된다고 비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에머슨의 에세이집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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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alph Waldo Emerson, 1803 ~ 1882)

“To believe your own thought, to believe that what is true for you in your private heart is true for all men, – that is genius.”
“Society never advances. It recedes as fast on one side as it gains on the other. It undergoes continual changes; it is barbarous, it is civilized, it is Christianized, it is rich, it is scientific; but this change is not amelioration.”

from ‘Self-Reliance’ Ralph Waldo Emerson

“당신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당신 자신의 마음속에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곧,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진실이 된다. 이것이 재능이다.”
“사회는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다른 한 편에서 하나를 얻으면 그만큼 빨리 무언가는 퇴보한다. 사회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야만적이었다가, 문명화되었다가, 종교적이었다가, 과학적인 세상이 된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다> 중, 랄프 왈도 에머슨

– 최근에 에머슨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에머슨의 사상이 왜 미국의 정신이라고 불리우는지 조금 알것 같다. 우리나라 대다수 학자들은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이기주의(egoism) 정도로 소개하고 있으나, 실제로 개인의 가치와 잠재력을 신뢰하는 개인주의가 그렇게 간단하지 만은 않다. 에머슨은 19세기에 개인주의(individualism)이라는 말이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을 때 ‘self-reliance’라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나는 진보라는 말(또는 진보세력이라는 이름)에 동의하지 않는데 진보(progress)라는 말은 어떠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지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라고 생각한다.

에머슨과 초월주의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을 정리해서 한번 포스팅을 할 생각이다. 우리나라에는 미국의 초창기 역사/사상/문학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돌아보는 것은 21세기에도 나름 의미가 있다. 지금의 초강대국 미국이 있음은 그들의 가치가 보편적으로 인류에 공감대를 형성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