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여성과 제인에어

어제 제인에어 포스팅을 했는데, 마침 페북에 19세기 여성에 대한 글이 있길래 공유한다.

링크 (이미혜 작가의 페북 포스트)

  • 아쉽게도 위의 링크는 2016 3월 23일 현재 기준으로 깨져있네요. 참고하세요.

The Proposal. John Pettie, R.A. (1839-1893). Oil On Canvas, 1869.

(image source: wikimedia)

이 그림은 19세기의 스코틀랜드 화가 John Pettie가 그렸다. 그림에서 여성은 청혼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여성의 반응은 기쁨이나 놀라움이 아니다. 죄지은 사람의 표정이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왜 그런지 이해가 간다. 19세기 영국의 여성들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거나 감정을 표현한다거나 하면 정숙하지 못한 여자로 취급받았다.

지난번에 포스팅 했듯이 제인에어는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이었다. (링크: 영화 ‘Jane Eyre(2011)’를 보고서) 제인은 자기 의견을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고전을 읽을 때, 20세기 이전 사람들에게 ‘개인(individual)’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권/여권의 신장은 20세기에서야 이뤄졌다. 물론 고전이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는 인류에게 호소하는 보편적인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적/시대적 배경까지 생각한다면 좀더 폭넓게 고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가?

시지프스의신화

대학교 친구 중에 항상 고민하고 심각해하는 친구가 있었다. 나도 보통은 심각한 편에 속하지만 그렇게 고민까지 하는 편은 아닌지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면을 끝까지 파고 들었고 파고 들때마다 나오는 아픔으로 힘들어 했었다.

어쩌면 고전을 읽는 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전 소설을 예를 들어보자. 고전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단순하지 않다. 고전의 세계는 대부분 현실을 많이 닮아 있고 인물들도 입체적이다. 고전의 세계를 한번 통과하고 나서는 내가 가진 세계관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진실을 보게 된다. 어떤 때는 진실과 대면하는 순간이 책을 통해 직접오지 않기도 한다. 그래도 묘하게 책을 읽는 중에 진실을 대면하는 때가 많이 있다. 그것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감수성이 커지면 그만큼 세상을 넓게 보게 되어 그런게 아닐까 싶다.

통속물, 소위 가벼운 책들은 그렇지 않다. 가벼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다. 머리쓸 필요 없이, 고민할 필요 없이, 그저 내가 좋아하는 환타지의 장르를 정해서 통속적인 세상에서 충분히 즐기다 오면 그만이다. 나를 깨고 흔드는 힘은 없다. 통속물은 내가 알고 있는 믿고 있는 세계관을 확실하게 해주고 나는 거기서 힘을 얻으면 그만이다.

고전이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가? 어떤 면에서 그러할 지도 모르겠다. 고전을 읽는 사람들은 소위 지혜라는 것에 좀더 가까운 사람이거나 깊이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어떠한 면에서 고전을 읽는 사람들은 고통을 즐기기만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한다. 고전은 우리를 한번 크게 두드려서 흔들어 놓고, 내가 알고 있는 틀을 깨고 나올 것을 종용한다. 문제는 그 틀을 깨어 나와 자유를 얻은 순간, 또 다른 고전이 기다리며 다른 틀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는 행위는 끝도 없이 자기 정진을 하는, 시지프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고행의 길처럼 보인다.

어쩌면 고전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몸부림을 마치고 종국에는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정도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긴 여행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처럼…

고전이 그다지 인기있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수없이 쏟아지는 지식의 홍수속에서 그 지식이 얼마의 생명력을 가지는가를 생각해보면 꽤 오랜 기간 살아남아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들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꼭 인기 있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고전이 힘을 잃은 시대에 아직도 그것을 붙들고 싸우는 분들에게 건투를 빈다. 그리고 즐거운 여행 되시기를 바란다.

백면서생(白面書生): 오직 글만 읽고 세상 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

mail.naver

몇년전 유행한 유머중에 하나가 ‘연애를 글로 배웠습니다.’ ‘키스를 글로 배웠습니다.’이다. 나는 그러한 유머를 볼 때마다 배꼽을 붙잡고 웃는다. 내가 그 유머에 자지러지는 이유는 왠지 모르게 내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새로운 경험에 항상 목말라 있었고, 그 갈증을 해결했던 방법은 주로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나를 매료 시켰던 것은 주로 역사이야기, 세계 전래 동화, 각국의 신화, 성경이야기, 탐정소설, SF 소설 같은 것들이다. 딱히 분야가 정해져 있던 것 같지는 않고 잡식을 했는데 한가지 공통되는 점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소설은 우리의 삶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대부분의 인기 있는 통속소설이라는 것은 인기가 있을 법한 소재와 인물을 사람들의 판타지와 적당히 버무려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단순히 재미 있는 소재만을 가져온다고 해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허접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작가는 소설 속에서 세계를 창조하는데, 이때 작가의 세계관이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 히어로물의 세계관이라고 하면 슈퍼맨/배트맨이 등장하여 초인적인 힘으로 세계를 구하지만 괴로워하거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세계관이라 하면 뉴욕에 사는 매력적인 직장여성들이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우정을 나누기도 하면서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관은 소설속에만 존재하는 법칙 같은 것인데 우리가 대부분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안들거나 싫어지는 이유는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불행하게 생을 마치는 식의 세계관이 탐탁치 않고, 어떤이는 모두가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다며 지루해 한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세계관과 맞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세계관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야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세상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은 영화와 소설 속의 세상을 실제와 혼동할 때가 있다.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은 소설과 다르다. 만약 뉴욕에 한번도 와보지 못한 사람이 섹스 앤 더 시티나 프렌즈가 그리는 뉴욕이 정말이라고 생각하고 똑같이 살려고 한다면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행동은 코메디의 소재로 적합하다. 연애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무협소설이나 연애소설에 나오는 것을 현실로 생각하고 연인에게 행동한다면 가장 빵점인 연애를 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소설/공연예술에 목을 메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 특히 그러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이야기라는 것이 별로 의미 없게 여겨지는 순간이 왔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얄팍하며, 어떤 이야기는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어떤 소설은 그저그런 세계관을 독특한 문체만으로 잔뜩 치장했을 뿐이다. 너무 뻔하다. 내가 알고 느끼는 세계와 작가들이 그리는 세계가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소설읽기를 멈추었다. 소설보다는 자기계발서를… 영화보다는 예능프로를… 즐겨보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책은 (저자가 다른 경우에도!) 그저 동어 반복일 경우가 많다.

이제 책하고 화해를 할까 싶다. 검증된 고전의 경우에는 조금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지혜 같은 것이 있다. 10대에 읽었던 ‘노인과 바다’는 그저 낚시꾼의 허무한 귀환 정도의 재미없는 글이었다. 조금 나이가 들어 만나는 헤밍웨이는 자연의 위대함, 인간의 의지를 찬양하는 작가이다. 어린시절 톨스토이의 단편은 그저 재미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한번 종교/삶과 씨름을 해본 후에 만나는 톨스토이는 소박한 이야기에 닮긴 경건함이다.

여전히 사람과 관계 맺기에 미숙한 한 백면서생의 이야기였다.

조언자를 찾고있는 당신을 위하여

최근에 회사에서 좀 부담가는 일이 하나 생겼다. 우리회사의 텔레마케터들을 모아서 마케팅에 대한 강의를 하라고 하는 압력이다. 나름 이제 뻔뻔함이 생겨서 회의에서 문법틀려가면서 콩글리쉬로 이야기 하는데에는 별 스트레스가 없지만 미국 아줌마/아저씨들 모아놓고서 호흡이 긴 강의를 하는 것은 부담이 너무 크다. 결국 하게되지 않을까 싶지않기는 하다.

Capture

(출처: CEB Research)

그분들 모아놓고 하려는 강의 자료중에 하나는 위의 내용이다.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인터넷 세상이 오면서 이제는 고객들에게도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디지털 이전 시대에는 고객들이 정보가 부족하여 영업담당자에게 문의를 했다면 요즈음은 대부분의 고객들이 이미 정보를 알고 있고 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기업에 문의를 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비추어 보아도 확실히 그렇다. 어떤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기전에 제품에 대해 사전에 검색해보고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먼저 찾아본다. 은행의 금융상품이나 컨설팅 서비스, 학원, 음식점, 여행지의 숙소를 선택할 때 우선시 하는 것은 주변사람의 추천이나 입소문이지만, 그다음 찾아보는 것은 인터넷이다. 직접 추천을 못받는 경우에도 디지털 세상에서는 정보가 부족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의사에게 상담을 받고 진료를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이전인 20세기에는 의사의 말이 곧 진리였다. 의학관련 정보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의사가 말해주는 처방을 단순히 따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건강 정보는 세상에 넘처난다. 우리는 의사를 만나기 전에 인터넷을 검색하고 주위의 조언을 먼저 듣는다. 의사를 만나서 진료를 받은 후에 의사의 진단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원하는 진단과 처방을 내려주는 의사를 만날 때까지 다른 병원을 방문한다. 2nd opinion을 받는 것이 나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의사의 권위는 예전만 못하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는 것이 무의미해져 버린 것일까?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의 조언이 필요없어져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조언에 목말라 하는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다만 조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내용이 바뀌었다. 20세기에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서 정보를 듣고자 했다. 요즈음의 우리들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 또는 판단을 전문가가 인정해 주는가?’ 하는 것을 듣고자 한다. 세상에 넘처나는 정보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들은 더욱더 불안해졌으며 누군가가 나서서 나의 판단에 확신을 줄 것을 갈구하고 있다.

우리세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키워드는 ‘공감’이다. 어느새인가 인터넷 공간에서 권위있는 기성 언론의 목소리는 점차 약해져가고 있다. 요즈음의 사람들은 주변의 누군가가 올려놓은 공감 베스트 글에 마음을 연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은 인기글을 쓰는 사람들은 요즘 세상의 celebrity이다. 웹툰계에서는 일상의 작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생활툰’이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가 즐겨보는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공감을 자아내는 소재를 다룬 코너들이 대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해줄 입장이 되어본 적이 별로 없다. 어떤 분야에서도 어느정도 잘하는 사람이 된적은 있으나 일인자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세를 따르기 보다는 내가 그냥 좋아하는 일을 했으니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별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나는 아직 어리고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누군가의 조언에 목말라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조언자를 구했던 방법이나 원칙에 대해서는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나와 유사한 고민을 해봤던 사람을 찾는다. 이때 주의할 점은 너무 오래전에 그 고민을 해보았던 사람은 안된다.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른 뒤라면 그 사람은 현실감이 많이 떨어진 조언을 해줄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관점에서 생각을 하고 문제를 바라보게 되어있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까? 우리가 경제적인 문제를 은퇴한 어르신에게 묻는다면 그분은 노후보장과 은퇴준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가능성이 크다. 고등학생이 학창시절에 대해 어른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이야기는 역시나 대학입시나 성적이 중심이 될 것이다. 어른의 시각에 있어서 친구들 사이에서의 인정이나 이성에 대한 관심은 지나가는 순간의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렇지만 정작 그 어른들은 직장에서의 상사의 인정에 목을 매어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진심으로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그사람의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 인생에 있어 그러한 사람을 한사람이라도 만난다면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입을 앞둔 학생들, 진로의 고민을 하는 20대에게 그러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몇년 앞의 조언자의 존재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둘째로는 ‘나이든 사람의 조언을 찾는다.’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숫자적인 나이보다는 진정으로 삶을 고민하고 치열하게 살아간 경험으로서의 나이이다. 이러한 조언을 듣는 데에는 어느정도의 훈련과 자신의 관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들의 조언은 대부분 나의 상황과 다른 맥락과 관점의 조언이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 어른들의 말이나 금언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가끔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나의 상황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문제를 단순하게 볼 때 해결책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세상 돌아가는게 어쩔 때는 너무 복잡하게 보이지만, 때로 단순한 삶의 지혜나 원칙이라는 것은 여전히 먹힌다. 그 지혜라는 것은 어떤 복잡다단한 이론이나 체계적인 지식이 뒷받침 되지 않은 투박한 모습인 경우도 있고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네 잔소리 일 수도 있다.

그 지혜라는 대상이 굳이 사람일 필요는 없다. 어쩔 때는 고전이 답일 수도 있다. 가끔 오래된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책을 들추다가 고민에 대한 해답, 또는 지혜라고 불리우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대부분의 고전은 오랜 세월을 통해 여러사람들에게 검증된 책이고 우리의 현실의 문제에 직접적인 답을 해주지 않지만 중요한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내가 딸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것은 이러한 책을 통한 관계 맺음을 어려서부터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 이다. (관련글: 페르시아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에스더) 사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은 단순한 고전을 넘어서는 책이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지혜라는 측면에서 유익함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나 자신에게 조언을 구한다.’ 이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과정을 거쳤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를 거친 단계이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필요 이상 고민하게 되면 쓸데없는 고민이 되어 버린다. 삶의 불확실성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도 우리를 옭아맨다. 본래 완벽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때로는 나의 느낌에 충실해야 할 때가 있다. 일단 던져보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수정을 한다던가 또는 완전히 접는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해보지 않고서는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판단의 잣대는 감정과 직관일 것이다. 결정의 순간에 있어서 내가 당시 하고 싶은 것을 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지나고 생각해봤을 때 후회가 남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선택해 왔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도 그렇다. 내 인생을 결정지었던 많은 결정들은 후에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르고 했던 것이 대부분 이었다. 고2때 이과를 선택했던 것, 대학 때 화학공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했던 일, 현역으로 군대를 갔던일, 미국으로 온 일 등등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결정이었다. 당시 주위의 조언을 듣기는 했지만 나는 그 조언을 토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정도로 나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단지 ‘수학이 좀더 좋았다.’, ‘영어는 싫었다.’, ‘화학이 왠지 끌렸다.’, ‘현역으로 군대를 가면 세상 경험을 할 것 같다.’ 등등의 왠지 모르는 나의 감정과 직관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 왔다. 지금에 와서 돌아볼 때, 어떠한 결정은 인생길을 돌아오게 한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어쨌건 나의 감정과 직관에 기반한 결정이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감정과 직관에 의한 결정은 두가지 측면이 있다. 일단 어떤 일이든지 자기가 좋아해서 하게된 일은 꾸준히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자의식이 있어서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에 있어서는 일종의 책임감이 생기게 된다. 기본적으로 자질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질이 꾸준한 노력과 시간을 넘어서지 못한다. 또 직관이라는 것은 묘한 측면이 있다. 직관은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의식 또는 이성의 영역 밖의 나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직관은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고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오늘도 꽤 긴 글을 썼다. 처음에 자판을 잡고 글을 시작했을 때는 ‘공감’이라는 주제와 ‘조언자를 찾는 원칙’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고서 가볍게 시작했으나 쓰고 보니 어떤 팁이라기 보다는 나의 희망사항이나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만 그리다가 말은 모양새가 되었다. 최근 내가 이런 글을 올리는 걸 보니 확실히 요즈음의 나는 자의식 과잉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이글을 다시 보면 낯뜨거워 질 것이 분명하지만 일단 기록을 남기는 의미에서 포스팅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