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회의론에 관하여

6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이해가 안되는게 몇가지 있다. 첫째가 총기 소유를 인정하는 것이고 다음이 기후변화에 대한 정치적 쟁점화이다.

산타훈장님이 관련 포스트를 하셨는데, 기후변화 회의론 관련 댓글이 보이길래 좀 길게 댓글을 남겼다. 여기다도 옮겨둔다.

산타님 페북 포스트

+덧: 한 분이 전문가와 일반인의 견해 차이에 대해 의견을 주셔서 답변한 내용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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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기후변화 회의론은 기후변화에 인간의 영향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산타훈장님 포스트가 기후변화의 진위를 가리는 주제가 아니기에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기후변화 회의론 관련 댓글도 있기도 하거니와, 혹시 오해하는 분이 있을까 싶어 몇자 남깁니다.

기온 상승 자체에 대해서는 이미 논란의 여지가 없고, 기후변화가 인간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과학적으로는 정설입니다.

몇몇 이론이 있다고는 하지만, 소수이고 반박이 가능할 만큼 현재로서는 신뢰성이 현저히 낮고 (가치가 떨어지기에) 관련연구도 그다지 없습니다.

과학은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자세를 기반으로 하기에 누구든지 반박할 수 있으나 그만큼 과학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산타훈장님글의 다른 예처럼 백신이 위험하다는 주장을 하려면 그만한 과학적인 근거와 실험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백신 위해론이 정치적인 이슈가 된다고 안아키까지 불러와 양편의 의견을 골고루 들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유엔 산하 과학자 단체 IPCC가 정리한 자료 (한글 번역본) 링크를 남깁니다. 이것보다 더 잘 정리된 자료를 본적이 없고, 상당히 공신력있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IPCC의 자료가 공신력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을 것 같네요. 의사협회가 낸 백신자료가 믿을 수 없다고 하거나 통계청 자료가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말하면 제가 더이상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Click to access Chapter%20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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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댓글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굳이 IPCC의 공신력을 끌어들인 것은 과학자들 (전문가 집단) 사이에서 컨센서스가 이뤄진 상황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전문가 집단에서 컨센서스가 이뤄진 사안을 반박하는 것은 그만한 과학적인 근거와 자료가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저는 논의의 시작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에 닥칠 리스크나 공동체에 닥칠 위험에 대해서 말할 부분은 정치의 영역이고 이조차도 지나치게 과장된다면 오히려 반발심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고요.

기후변화가 과학적 사실인 것은 맞지만 그 여파와 대책에 대해서는 조금씩 다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대중으로서 다수는 틀리고 전문가 집단이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후변화 논란에 관해서는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기후변화가 맞냐 틀리냐, 인류에 피해가 가는가 아닌가는 전문가의 영역이 맞고, 그다음에 그래서 어떻게 할것인가는 정치와 일반인들의 영역이 맞다고 봅니다.

자동차가 고장났는데, 초보 운전자에게 점검을 하라고 할수는 없는 노릇이 아닐까요? 카센타에서 점검을 우선 받고 결정은 차주가 해야겠죠. 2nd opinion을 받는 것은 문제가 안되겠지만, 수리비가 비싸다고 자동차가 문제 없다는 사짜말을 믿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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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STRUST OF SCIENCE – Atul Gawande (New Yorker)

젊은 시절 내가 전공을 바꿔가며, 그리고 가방끈을 늘려가면서 유일하게 배운게 있다면, 그것은 과학으로 세상을 보는 자세 같은 것이다.

과학은, 내가 어릴적 오해했던 것 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요술 방망이나 놀라운 지식이 아니다. 아툴 가완디를 인용하자면,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에의 결단이고 a commitment to a systematic way of thinking, 관찰과 실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지식을 쌓겠다는 결의이다 an allegiance to a way of building knowledge explaining the universe through testing and factual observation.

20대를 돌이켜보면, 나는 새로운 지식 자체를 갈구했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서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기계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경제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게 되는게 신기했다. 기존의 지식을 새로운 지식으로 바꾸는 그 경험에만 열광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 부터인가 과학이 단순히 놀라운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천문학자 Hubble을 인용하자면, 과학은 건강한 회의주의이며 healthy skepticism,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며 suspended judgement, 훈련된 상상력 disciplined imagination 이다.

불변하는 지식은 없다. 과학적인 지식은 단지 가능성이 높은 근사치 probable knowledge 이다. 언제나 반례가 존재할 수 있다. 세상을 열린 마음으로 보고서 가설을 세우며 (또는 다른 이의 가설을 받아들이고) 사실 관찰을 통해서 자신의 가설을 검증해 간다. 어느정도 관찰이 진행된 후에 자신의 가설을 수용할 건인지 기각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과학은 세상을 근사치로 (또는 모델로) 이해하고 그 근사치는 계속해서 수정 보완 되어 간다. (successive approximation)

아툴 가완디가 어제 칼텍에서 졸업식 축사를 했다. 그는 과학을 불신하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 했다. 단어 문장 하나하나에 공감했고, 많은 생각을 불러왔기에 공유한다.

간혹 음모론에 근거하여 과학의 가장 기본 지식마저도 흔들어버리려는 시도를 볼 때가 있다. 미디어는 검증된 기초적인 과학 지식을 흔들 때 종종 ‘주류’ 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충분히 교육받은 이들이 ‘주류’, ‘비주류’라는 구분짓기에 흔들리고, 필요이상으로 회의를 하게 되는 것을 볼 때마다 의아해 진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나는 자신을 다시 돌아본다.

과학은 직관에 반하는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그것은 과학이 직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관찰과 실험에 의해 입증되는 proven 것이기에 그러하다.

THE MISTRUST OF SCIENCE by Atul Gawande, 6월 10일자 New Yorker

The New Yorker

(image source: 해당 기사)

미디어가 과학을 소비하는 법, 그리고 그 폐해

“Science is by its nature imperfect, but it is hugely important.”

블로그에서도 몇번을 언급했지만, 나는 John Oliver쇼의 애청자이다. 지난 주말 방송은 그중에서도 베스트로 꼽을만 했다. Vox에서 지난 주 에피소드를 소개하길래 공유한다.

John Oliver exposes how the media turns scientific studies into “morning show gossip” (Vox, 5월 9일자)

존 올리버도 언급하지만, 오늘날 미디어가 과학을 소비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가십 위주이다. 이를테면, 커피가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든가, 방귀가 암예방에 도움이 된다든가 등등…

미디어의 가십위주 과학 소비는 대중의 인식 속에 과학을 흥미거리로 전락시켰을 뿐 아니라,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뉴스를 듣다보면 도대체 커피가, 포도주가, hug가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자기 편한대로 끌어다가 믿어버리면 된다.

이는 대중이 유사과학을 맹신하게 하는 부작용마저 만들고 있다. ‘기후 변화는 거짓이다’나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 같은 터무니 없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과학적으로는 유의성이 약한) 이야기가 최근 힘을 얻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 두가지 명제는 이미 과학자들 사이에서 거짓이라는 과학적 공감대 scientific consensus가 형성되어 있는 바이다.

“No! No, no, no, no, no, no, no, no! In science, you don’t just get to cherry-pick the parts that what you were going to do anyway. That’s religion. You’re thinking of religion.”

다시한번 깊이 공감하게 되는 John Oliver 이야기. 과학은 종교가 아니다. 대중은 ‘섹시’한 결론만을 듣고 싶어하지만, 과학은 느리게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되어 가는 과정과 방법론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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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와 산초 – 두려움에 대하여

두려워하는군, 산초야. 네 마음 속의 두려움이 네가 올바르게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효력이 바로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Don_Quijote_and_Sancho_Panza

두려움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딸아이가 두려움을 호소할 때가 있다. 유난히 겁이 많은 편이라 눈앞에서 잠시만 부모가 없어도 난리가 난다. 어떻게 두려움을 대처해야 하는가 잘 가르쳐주고 싶다.

가장 편한 방법은 아빠가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효과적이지만, 일시적인 해법이다. 나는 그것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평생 지켜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려움은 대부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만났을 때 생겨난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갑작스런 놀래킴은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이다. 나쁜일도 미리 예측이 가능하고, 대처가 가능하다면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내게 있어 가장 힘든 것은 나쁜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그 은근한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는 상태이다.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을 것 같다. 과학의 방법과 종교의 방법. 무지의 영역을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과학의 방법이고, 무지의 영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종교의 방법일테다.

딸이 가장 배우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두려움의 영역을 짖밟고 부정하는 것이다. 두려움에 가득찬 사람들은 사물을 그대로 보지 못하며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한다. 사람들이 상식적인 이야기를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저 이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낸시랭의 신학펀치 – 제6회 ‘창세기 이야기는 왜 다른 신화와 비슷한가요?’

Origianlly Posted 03/12/2014 @ facebook

많이 생각 해봤지만 그다지 입밖으로 내본적은 없는 주제다. 과학과 기독교, 신화와 성경… 창조과학의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과학적인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받아왔다. 어쨌든 구원교수님이 마지막에 언급한 두가지 입장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두번째 입장, 즉 인류는 역사적으로 공통적인 경험을 해왔고 이것이 각기 다른 신화에서 유사한 모티브로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사람이 성경을 썼다는 사실이 성경의 가치를 절대 훼손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옛날 성경이 쓰여질 때부터 오랜 세월 성경이 전수되고 확립 되어지는 과정에서 성령이 주재하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믿음 아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