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기적에 관하여

지난주 교회에서 성찬식이 있었다. 내가 딱히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사실은 믿음이 좋다는 말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성찬식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이니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과 기적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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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나는 열혈 신앙인이었다. 지금도 신앙이 없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간 여러 교회를 접하면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강산이 몇번 바뀌는 걸 보면서, 존경하던 분들의 모습이 변하는 걸 보면서, 한국교회/미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나자신의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지적인 기반이 여러차례 바뀌면서, 먹고사니즘에 매몰되어 한참을 고분분투 하며 살다가, 그리고 가정을 가지고 다시금 살아가는 의미를 생각하다보니, 지금와서 바라보는 신앙은 20대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구약에 등장하는 신의 잔인함이나 이질적인 문화/종교에 대한 intolerances 불관용 같은 것은 이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대의 나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던 이야기들이었을 테다. 이를테면 요시야왕의 우상파괴 운동이 21세기 도덕관념으로 어떻게 용납될 것인가? IS가 알레포의 유적들을 파괴한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16세기 크롬웰이 성모상을 불태운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사실 이런 이슈는 상당히 다면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에서 뜨거운 남부 동상 철거 운동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인권과 평등을 계몽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믿음이라고 본다면, 남부의 동상들은 노예와 미국의 원죄를 나타내는 상징이고, 인권을 신봉하는 현대인에게 반드시 파괴되어야 할 우상일테다.

물론, 그리고 당연히도, 내가 남부의 과거나 노예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고, 요시야가 파괴했던 바알 성상과 바알신앙의 문란함/잔혹함에 어떤 호감을 가진 것도 아니다.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슈들의 복잡함을 잠시 생각해본 거지…

작년에는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 믿음의 근간이 복음주의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는데, 그것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한 많은 부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으며,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

대학시절 변증 차원에서 공부하고 지나갔었다. 그러나 지금와서 다시금 생각해보면 예수의 부활과 기적들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몇년전에 개인적으로 정리해본적이 있다. 그러나 여러차례 페북으로 소개했기에 마지막에 링크만 남겨두고 대신 최근 읽었던 뉴욕타임스 칼럼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의 칼럼들이다. 크리스토프는 예수의 가르침을 존경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예수의 부활, 동정녀 탄생, 오병이어의 기적 등등…)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종교계의 지도자들에게 물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입니까?

첫번째 칼럼에서는 기독교 변증으로 유명한 팀 켈러 목사에게 물었다.

Am I a Christian, Pastor Timothy Keller?

팀 켈러는 단도직입적이다. If something is truly integral to a body of thought, you can’t remove it without destabilizing the whole thing. 예를 들자면 이런거다. 지구온난화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린피스의 보드 멤버인 것이 말이 안된다. 속좁다고 말할 수 있다.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신앙인은 아니다.

두번째 칼럼에서 크리스토프는 이번에 좀더 리버럴한 크리스찬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물었다. 카터는 평생을 지역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해왔다.

President Carter, Am I a Christian?

카터는 말한다. 과학을 믿는 내게 이를테면 6일 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반대로 나는 신약을 믿고 이는 신약에 나오는 동정녀 출산과 예수의 부활을 포함한다.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못한다.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크리스토프는 묻는다. 예수는 화합을 가르쳤으나 종종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배제의 행동을 해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터는 대답한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이렇게 말하죠.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저는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배제를 말하는 이들은 제가 이해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 삶을 산다고 봅니다.

크리스토프는 묻는다. 나는 당신이 복음주의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종종 말합니다. 또 종종 성경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당신은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나요?

카터는 대답한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모순들을 성경이 여러 저자들이 쓴 책이고 진본임을 나타내는 증거로 봅니다. 성경의 초기 저자들이 거짓된 이야기를 썼다면 모순들을 삭제했겠죠. 저는 성경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정수와 사도바울의 초대 교회에 쓴 편지들을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모순이 나타날 때는 저는 평등과 인권에 기반하여 어떤 것을 믿을까 결정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칼럼에서 크리스토프는 뉴왁의 Tobin 추기경에게 묻는다.

Cardinal Tobin, Am I a Christian?

Tobin 추기경은 답한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에게 더 말할 여지가 있다는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았다면, 예 저는 당신이 그의 영역안에 있다고 봅니다.

크리스토프가 묻는다. 저는 예수의 가르침을 존경하지만 기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예수 시절에야 아테네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걸 믿는 시절이였으니 기적을 믿는게 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 2017년 지금에도 물위를 걸었다는 것과 몇개의 빵과 물고기를 뻥튀기 해서 수천명을 먹였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Tobin 추기경은 답한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걸 믿을 자유가 있지요. 기독교인들도 비기독교에서 나온 지혜를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요. 사실 가장 놀라운 기적은 incarnation 성육신입니다. 기독교인은 태초이전에도 계셨고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우리가운데 왔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그 외의 것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적들은 마술쇼가 아닙니다. 기적들은 모두 하나님이 누구신지,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프의 관련 칼럼은 지금까지는 이렇게 세개 이다. 발췌를 했으니 관심있는 분은 원문을 읽기를 권한다. 칼럼은 재작년부터 기독교 주요 절기, 그러니까 부활절과 성탄절에 쓰고 있으니 올해 부활절도 이어질지 모른다. 생각해보니 기독교의 주요 절기는, 어쩌면 당연히, 기적과 연결되어 있다. 부활절은 부활에, 성탄절은 동정녀 출산에

마지막으로 아직까지도 읽을 때마다 감격하는 파스칼의 말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The supreme function of reason is to show man that some things are beyond reason.” – Blaise Pascal

재인용: How Can I Possibly Believe That Faith Is Better Than Doubt?

+ 덧: 예전에 내가 정리했던 개인 신앙 이야기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2015년 2월 28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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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재학중인 학교 후배와 잠깐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다른 전공의 졸업반과 마찬가지로 MBA 졸업을 앞둔 사람들의 고민도 취업이다. 미국 취업을 생각하는 그 후배에게 몇가지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사실 내가 줄 수 있는 소소한 팁 정도는 이미 그도 알고 있었기에 굳이 별 말이 필요 없었다. 밥이라도 사주려고 했는데 여건이 되지 않았다. 다음번에 아틀란타에 올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맛있는 밥을 사주마 하면서 그를 보냈다.

한국에서 자라서 교육을 받은 토종 된장남이 미국 현지 취업 기회를 잡는 일은 흔치않다. 한국과 미국의 게임의 법칙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러하다. 특히 문과 계열은 취업시장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물론 영어로 native와)과 프로페셔널한 태도(미국 기업문화에 맞는), job과 industry에 대한 열정 등으로 승부를 봐야하는데 문화와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크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년의 내가 생각났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깨어짐을 경험했었다. 졸업을 1주일 앞두고서야 job offer를 받았고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였었다. 당시 나는 가족 기숙사에 있었는데, 규정상 졸업 후 한달안에 짐을 빼야 했다. Job도 없었고 미국에 가족/친구도 없는데, 그동안 늘려놓은 세간살이들과 부양가족을 데리고서 어디로 이사해야 할 지 답이 없었다. 미국에 가져온 얼마 안되는 돈은 학비로 거의 썼기에 당장 생계도 고민해봐야 할 판이었다.

세상에는 매일 생계의 위협을 마주하며 사는 분들도 많다. 이정도의 경험은 그분들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다만 개인적으로 내가 하고 싶고, 해야한다고 믿었던 일을 하려고 하면서 맞닥드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을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런 때에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확실해야만 버틸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 선택의 무게를 부양 가족들에게도 지워야 할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몇가지 없다는 것이 나를 작게 만들었다. 낮아지는 시간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지금은 job을 구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는 곳간을 늘일 걱정을 하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누가복음 12장 13-21절)이다. 20대 때 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물질 만을 추구하는 삶과의 결별이다. 한때 그러한 삶이 선교사가 된다던가 full time social worker가 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면에서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소위 ‘사역’의 길을 말할 때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기독교 사역자/선교사/사회 봉사로 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폭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물질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똑같이 밥먹고, 가족들 부양하며, 애쓰며 땀흘리며 산다. 거친 세상에서 아둥바둥 사는 모습이 별로 다를 리는 없다. 그러나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행위를 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진지한 그리스도 인은 물질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만약 부가 따라 온다면 그것은 본질이 아니고 덤 같은 것이다.

다만, 진지한 그리스도 인은 물질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재능을 물질적인 부를 축적하는데에만 쏟는 사람들에 비해서 힘든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그어 주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다. 여기 전문을 옮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오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현대인의 성경, 마태복음 6장 9-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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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이 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처음 부분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두번째 부분에서는 사람의 일에 대해 말한다. 바로 두번째 주제로 전환할 때 처음 나오는 언급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기도문은 산상수훈 중에 나오는 기도문이다. 따라서 이 전환을 산상수훈의 큰 주제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았을 때 의미가 남다르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생계에 대한 염려에 대해 기도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 이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새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새를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중략)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모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덤으로 주실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마태복음 6장 26-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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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하자. 내가 선택한 길들이 숭고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럴 깜냥도 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또하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면 부자가 된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읽었다면 선입관 또는 기분 탓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이 너무 거대하게 들려서 왠지 그 대가(?)가 엄청난 부나 편안함을 보장할 것 같은 생각이 든것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은 필요한 딱 그 정도를 주시고, 굶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나의 경우는 낙담을 경험했을 때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말이 참 많은 위로가 되었다.

쉽지 않은 길을 가는 분들, 그리고 지금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매일 힘쓰는 분들에게 예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