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log: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말과 글

작년 이맘 때 쓴 글.
페북이 알려줘서 다시 읽어봤다. 재공유한다.

Isaac의 생각저장 창고

말과 글은 그사람의 지적인 수준을 드러낸다. 5년 전인가 서울에서 지하철에 탔을 때 였다. 한 이쁘장하게 생긴 처자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그 처자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 좀 신기했다. 그처자는 ‘대박’이라는 단어 만을 사용하여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대박~’, ‘대~에~박’, ‘대!박!’, ‘왠일이니?’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다. ‘Oh my God!’와 ‘you know’이다. 나도 처음에는 미국 사람스러운 감탄사를 적절하게 섟어주는 것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내다보니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 오히려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도 그랬고 나도 그렇고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슬랭이나 욕을 먼저 배운 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쓰고 나면 네이티브에 가까워 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처음 우리말 욕을 배웠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왠지 표현을 속 시원하게 한 것 같았다. 자극적인 표현은 내 속에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자꾸 생기는 것이다.

나는 꾸밈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꾸밈말(부사,형용사)은 더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말을 할 때에 꾸밈말을 필요이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표현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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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슈디의 글쓰기

뉴욕에서 발행되는 ‘파리리뷰 the Paris Review’. 이 잡지는 작가들을 반세기 넘게 인터뷰 해왔다. 헤밍웨이, 포크너 부터 하루키, 쿤데라 등 대가라고 불릴 수 있는 작가들이다. 이 인터뷰 들은 최근 한국에도 ‘작가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의 책으로 번역되었다.

원문은 온라인에 공개되어있다. (한국기준으로) 유명한 작가 인터뷰는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고, 또 영어 원문이 궁금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 링크를 걸어둔다.

링크: Paris Review interview

최근 살만 루슈디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어서 옮겨둔다. 그가 글쓰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시나 글은 엉덩이로 쓰는구나 싶었다. 귀찮아서 번역은 안했다. 궁금한 분은 책을 사보시길.

Salman_Rushdie

(image source: commons.wikimedia.org)

INTERVIEWER

Can you talk about your procedure when you sit down at the desk?

RUSHDIE

If you read the press you might get the impression that all I ever do is go to parties. Actually, what I do for hours, every day of my life, is sit in a room by myself. When I stop for the day I always try to have some notion of where I want to pick up. If I’ve done that, then it’s a little easier to start because I know the first sentence or phrase. At least I know where in my head to go and look for it. Early on, it’s very slow and there are a lot of false starts. I’ll write a paragraph, and then the next day I’ll think, Nah, I don’t like that at all, or, I don’t know where it belongs, but it doesn’t belong here. Quite often it will take me months to get underway. When I was younger, I would write with a lot more ease than I do now, but what I wrote would require a great deal more rewriting. Now I write much more slowly and I revise a lot as I go. I find that when I’ve got a bit done, it seems to require less revision than it used to. So it’s changed. I’m just looking for something that gives me a little rush, and if I can get that, get a few hundred words down, then that’s got me through the day.

INTERVIEWER

Do you get up in the morning and start writing first thing?

RUSHDIE

Yes, absolutely. I don’t have any strange, occult practices. I just get up, go downstairs, and write. I’ve learned that I need to give it the first energy of the day, so before I read the newspaper, before I open the mail, before I phone anyone, often before I have a shower, I sit in my pajamas at the desk. I do not let myself get up until I’ve done something that I think qualifies as working. If I go out to dinner with friends, when I come home I go back to the desk before going to bed and read through what I did that day. When I wake up in the morning, the first thing I do is to read through what I did the day before. No matter how well you think you’ve done on a given day, there will always be something that is underimagined, some little thing that you need to add or subtract—and I must say, thank God for laptops, because it makes it a lot easier. This process of critically rereading what I did the day before is a way of getting back inside the skin of the book. But sometimes I know exactly what I want to do and I sit down and start on it. So there’s no rule.

발터 벤야민 글 발췌

셀프서비스 식당 “아우게이아스” – 발터 벤야민

“혼자서 식사를 한다는 것. 이것은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 제기되는 가장 강력한 이의다. 혼자서 하는 식사는 삶을 힘겹고 거칠게 만들어버린다. 혼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영락하지 않기 위해 엄격하게 살아야 한다. 은둔자들은, 이것 때문만 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소한 식사를 했다. 음식은 더불어 먹어야 제격이다. 식사하는 것이 제대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나누어 먹어야 한다. 누구와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는 식탁에 함께 앉은 거지가 매 식사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나누어 주는 것이었지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담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음식을 나누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사교 또한 문제가 된다.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사람들은 서로 평등해지고 그리고 연결된다. 생 제르망 백작은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식탁 앞에서 음식을 탐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이미 대화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자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자리를 일어서는 곳에서는 경쟁의식이 싸움과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다.”

+ 덧

어쩌다 벤야민이 눈에 들어와 글들을 퍼다 나르고 있다. 몇년쯤에 우리나라에서도 꽤 유행한 철학자로 알고 있는데 글이 매력적이다. 불친절한 글의 전개(논리의 흐름을 독자와 전부 공유하지 않는다.)가 그를 어려운 철학자 반열에 올려 놨나보다. 아니면 번역의 문제일 수도.

그의 글 만을 놓고 봤을 때는 영락없이 트위터/페이스북 글쓰기이다. 이건 페북 중독자가 셀프서비스 식당에서 혼자 밥먹다가 뜬금 없이 든 생각을 포스팅한 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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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가 – 발터 벤야민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간다는 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그 소망의 실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실현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즉 그 실현이 목표에 정확하게 합당한 실현이 되는지, 아니면 탐욕스럽고 흐리멍덩하게 소망에 자신을 탕진하는지는 길을 가고 있는 자의 훈련 여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신을 절제하면서 불필요하거나 장황하거나 어슬렁거리는 동작들을 피하면 피할수록, 모든 신체의 자세는 자신에게 그만큼 더 족하게 되고, 그 신체를 더욱더 적절하게 운용하게 된다. 열악한 작가는 착상이 많이 떠올라 그 착상들 속에서 기력을 탕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열악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냉철하게 말할 줄 모른다.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

Walter Benjamin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말과 글

말과 글은 그사람의 지적인 수준을 드러낸다. 5년 전인가 서울에서 지하철에 탔을 때 였다. 한 이쁘장하게 생긴 처자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그 처자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 좀 신기했다. 그처자는 ‘대박’이라는 단어 만을 사용하여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대박~’, ‘대~에~박’, ‘대!박!’. 아 하나 더 있다. ‘왠일이니?’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다. ‘Oh my God!’와 ‘you know’이다. 나도 처음에는 미국 사람스러운 감탄사를 적절하게 섟어주는 것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내다보니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 오히려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도 그랬고 나도 그렇고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슬랭이나 욕을 먼저 배운 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쓰고 나면 네이티브에 가까워 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처음 우리말 욕을 배웠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왠지 표현을 속 시원하게 한 것 같았다. 자극적인 표현은 내 속에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는 꾸밈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꾸밈말(부사,형용사)은 더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말을 할 때에 꾸밈말을 필요이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표현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말의 기본 구조, 그러니까 주어, 동사, 목적어를 사용하고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불필요한 단어를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고 논리적인 언어 사용을 노력하다 보면 불필요한 꾸밈 말이 본질을 흐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딱딱 끊어지는 단문을 좋아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취향의 문제이다. 말에서 곁가지를 다 치고 필요한 내용만 남기면 취할 것이 많지 않다. 마치 그림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를 다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추상적인 몇개의 선인 것과 같다. 어떤이들은 장식적인 말과 장식적인 그림을 좋아하지만, 나는 본질만 남아 있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서 듣는/읽는/보는 사람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너무 말/표현이 과하면 부담스럽다. 쓰는/말하는/그리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단문을 잘 쓰지 못하며, 과도한 표현을 할 때가 많다. 나의 문제는 한 문장에 너무 많은 생각을 집어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 글을 쓸때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중구난방이 되곤 한다. 심지어는 과함에 대해 논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생각을 사용하고 있어 민망하다. 그래서 글은 다듬어야 하고 계속 다듬을 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

cathedral2009

요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을 읽고 있다. 카버 아저씨 작품의 미덕은 딱 필요한 그만큼만 말한다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하루키는 꾸준히 카버의 책을 읽으면서 말의 리듬감과 호흡을 조절하는 감을 유지한다고 한다. 나는 하루키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문장은 매력적이다. 문장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빼고 나면 거기서 독자는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빼기에만 집중하면 논리가 흐트러진다. 글을 쓰는 사람은 머리속에 모든 생각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넘어가기가 쉽다. 그러나 논리의 고리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글은 죽어버린다. 그래서 글을 잘 쓰기는 어렵다. 딱 필요한 만큼만 들어가고 빠져야 한다. 너무 과하면 부담스럽고, 너무 적으면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반복해서 글을 다듬으면 해결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그래서 프로페셔널 문장가들은 대부분 엉덩이로 글을 쓰는가 보다.

+ 덧: 이 글은 참고로 퇴고를 하지 않았다.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적어봤는데, 나는 프로페셔널 작가가 아니니까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블로그만 하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다.

장거리 비행을 대비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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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pedia)

아무리 많이해도 익숙해 지지 않는게 몇가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장거리 비행.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열다섯시간. 그 시간을 좁디 좁은 비행기에 갇혀있다 보면 수명이 며칠은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내 기대수명이 80년이면 79년 360일 쯤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노트북을 장시간 사용하거나 overload하면 발열로 인해 수명이 줄어 드는 데, 꼭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 기지개도 켜보고, 복도를 이리저리 다녀보고, 영화도 보지만 좀처럼 시간이 안간다. 어떤이들은 알콜의 힘을 빌어 잠을 청하기도 하는 것 같다. 조심해야한다. 과음하다가 바비킴된다.

이번 비행에는 뭘하고 시간을 죽일지 고민해 봤다. 책도 몇 권 들고 갈 생각이고, 아이패드도 풀로 충전해서 들고갈 생각이다. 기내 상영 영화가 중요하다. 예전보다 나아진게 있다면, 내가 영화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VOD(video on demand)이다. 2년 전인가 대한항공 미주노선을 타봤는데, 채널을 돌리는게 아니구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거다. 감격했다. 비즈니스를 탄 느낌이었다. (비즈니스는 진작에 이런 시스템이 었다.) 십년 전에 캐나다 갈 때였나 노트북을 들고 탔는데, 지뢰찾기 게임을 했었다. 탈때는 분명히 하수였는데, 내릴 때 쯤 되니 고수가 되어 버렸다. 한계 상황에서 인간의 집중력은 무한 증가한다.

몇달째 만지작 거리고 있는 초고 상태인 글들을 완성 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블로그 게시판에는 40개 가량 드래프트 상태로 저장되어 있는 글들이 있다. 어떤 글은 주제만 메모 되어 있는 글들도 있고, 어떤 글들은 개요만 짜놓은 글들도 있다. 어떤 글은 거의 다 썼는데, 영 올리기가 찜찜해서 임시 저장 해둔 놈들도 있다. 딸램과의 이야기,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각 나라별 커뮤니케이션 방식, 돈에 대한 내 나름의 경제학적/사회학적/철학적/성경적 고찰 시리즈 등등. 꽤 오랜 시간 생각에 물을 주고 이런 저런 잡다한 메모를 모으다보면 그럴 듯한 글이 될 때가 많은데, 그정도 글이 나올라면 몇 번 글이 뒤집어 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경우는 산책을 하거나 샤워를 할 때 좋은 생각이 많이 나오는데, 비행기 안에서는 그렇게 생산적이기 힘들 것 같다. 이건 실현 불가능한 생각인듯.

아내는 비행할 때 먹을 것을 준비한다. 이착륙을 대비해서는 껌과 사탕을 준비하고, 중간중간 유용한 과일도 준비한다. 이착륙 할 때는 기압 때문에 귀가 먹먹해진다. 나는 침 몇번 삼키면 괜찮아 지는데, 아내는 꽤 힘들어 한다. 그럴 때 껌과 사탕은 조금 도움이 된다. 몇년 전 부터 귀마개도 사용해 봤는데, 아내가 꽤 만족한다. 고통을 줄여주니 꽤 기특한 도구이다. 기내식을 계속 먹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항공사 입장에서 나름 신경써서 식단을 구성하는 것일 테지만, 먹는 입장에서는 곤욕이다. 아무래두 기압이 낮은 곳에서 대량으로 조리를 하기 때문에 냉동식품의 퀄리티 이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계속 앉아 있어서 소화도 안될 지경인데 이런 음식을 먹고 있자니 사육당하는 가축의 느낌이 든다. 장거리 비행을 하고서 내리면 몇시간은 속이 부글거리고 그 좋은 나의 먹성도 사라진다. 아내는 귤이나 신선한 과일을 준비하는 데, 이게 그나마 낫다.

딸아이는 워낙 어려서 부터 장거리 비행에 자주 데리고 다녔더니 비행기가 자기 세상이다. 비행기에 앉으면 바로 담요와 쿠션을 뜯어보고 만져본다. 우선은 자리부터 편하게 만든다. 열 몇 시간의 비행이 순탄하기 위해서는 안락함이 중요하다. 그다음에는 안전 메뉴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도 읽는다. 주로는 그림을 보지만, 그래도 그게 무슨 재미일까. 하긴 동물원에 가서도 동물보다 지도를 더 재미있게 보는 녀석이니 거기에 그려진 그림이 큰 재미를 줄런지도 모르겠다. 그다음엔 주위를 살핀다. 앞으로 뒤로 놀만한 아줌마/할머니가 없나 살핀다. 아이의 놀이 상대로는 할머니/할아버지가 딱이다. 손녀 생각이 나는지 그 분들은 비행기 안에 있는 꼬마들의 좋은 친구가 된다. 몇시간은 그정도로 버틸 수 있다. 그것마져 지루할 때는 어린이 프로를 찾는다. 몇년 전까지는 뽀로로가 큰 도움이 됐다. 몇 시간은 더 버틸 수 있다.

그 다음은 승무원 언니들. 딸애는 승무원과 친해두면 뭐라도 하나 더 나온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한국말, 영어, 몸짓, 발짓, 표정을 다 동원해서 애교를 부리고 어떻게든 그들의 시선을 잡아챈다. 서비스를 하는 분과 친해지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비스가 만족스럽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이는 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만족을 나타낸다. 어디서 사람들을 기분좋게 하는 법을 배웠을까 궁금해진다. 조금은 가엽기도하다. 두살 무렵 부터 부모의 유랑에 동참을 시켰으니 말이다. 서울, 제주, 채플힐, 뉴욕, 애틀란타, 마이애미, 런던, 취리히, 로마, 프랑크프루트 등등. 좋은 경험이 되었을 거라고 말해보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겐 환경이 자주 바뀌는 건 큰 스트레스이다. 만 네살이 될 때까지는 장거리 비행을 하고 나면 꼭 일주일을 아펐다. 한번은 딸때문에 마일리지를 모아서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한 적이 있지만, 매번 그렇게 여행할 수는 없을 터이다.

이번 비행에는 가족이 없다. 일정 때문에 아내와 딸이 먼저 한국에 들어가고, 나는 따로 갔다가 따로 돌아와야 한다.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장거리 비행 무사히 잘 마쳤으면 좋겠다.

온라인에서 나를 얼마나 드러내는 것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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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깅을 하다가 가끔 드는 고민이 있다. 나를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고, 어디까지 감추는 것이 좋을까. 내가 유명한 블로거이거나 감추어야 할 은밀한 사생활이 있어서는 아니다. 내 글의 독자들이래야 친구/가족들이 대부분일 테다. 하지만 블로그는 오픈된 공간이다. 이곳도 검색유입이 꽤 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는 문제이다.

그런데 과연 모르는 사람이라서 자신을 드러내는게 어려운 것일까. 블로깅을 하면서 간혹 선뜻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내가 블로그를 하는 것을 아는 지인과 만날 때이다. 친구나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항상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는 내면을 조금 감추고 사는게 사람이다. 블로깅을 통해 일방적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독자들을 잘 모르는데, 독자들은 나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주된 관심사라든지, 정치적인 지향점이라든지, 좋아하는 책이라든지, 최근에 본 영화라든지, 딸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하는 것들을 말이다.

교류 없이 지내던 옛친구를 블로그를 통해서 만나고, 오프라인 모임까지 연결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소개팅에 나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나는 상대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다. 외모도 배경도 모른채 그저 커피점에서 상대방이 언제 오려나 궁금해하면서 커피를 마신다. 근대 상대는 이미 나에 대한 뒷조사가 끝난거다. 창밖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언제 들어갈지 뜸을 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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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생각은 오버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예를 들어 사촌 동생 결혼식장에서 갔는데 오랜만에 집안 어르신을 만났다고 하자. 어르신은 관심있는 척, 나에 대해 몇가지를 물어본다. 나는 성의껏 대답을 하지만, 어르신은 그 내용을 금새 잊는다. 거기다가 만약 내가 진짜 요즘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 – 이를테면, 딸과 대화하면서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던지, 회사에서 하루 종일 치이다가 집에 와서 레츠비를 마셨는데 평소에는 드럽게 맛없던게 그날따라 맛있었다던지 –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좀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어르신은 내가 어떤 직장을 다니며, 무슨 학교를 갔으며, 자녀가 몇살인가 하는 등등의 호구조사 정도로 충분하다. (아직 장가를 못갔거나 자식이 없다면 한바탕 훈계가 따라오겠지…) 사실은 호구조사를 하는 자체가 어르신에게는 관심의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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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블로그가 유행할 때만 해도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교환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블로그의 글들은 좀더 호흡이 길다. 또 블로그에는 한개의 글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여러개의 글들은 글쓴이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낸다. 독자는 포스팅한 글들을 읽으며 생각을 한다. 그들은 필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블로그 역시 완전한 소통의 공간은 아니며 어느 정도는 일방적일 수 밖에 없기는 하다.

몇년새 뜨거워진 소셜 미디어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의 독자는 참을성이 없다. 손가락으로 주욱 스크롤을 하다가 맘에드는 문장 / 사진 / 그림이 있으면 Like를 눌러주면 그만이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어르신이 나의 호구조사에만 관심이 있다면, 소셜 미디어에서는 누군가가 올린 짧은 문장과 사진 속의 찰나가 나와 코드가 맞는가만이 중요할 뿐이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블로그의 독자라고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들어줄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글이라면 당연히 최소한의 포장은 필요하다. 이건 아마 글을 읽는 사람을 향한 배려 같은 것일 테다. 사람들은 누구나 바쁜 데, 최소한의 배려도 없으면 그것은 소통을 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도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 몇가지 신경 쓰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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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형식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글 자체의 내용과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다. 나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블로깅을 한다. 블로그에서 일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 이슈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경제 이야기, 또 정치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나라는 사람이 관심사가 자주 바뀌고 중구난방이라 오만가지 잡다구리를 이야기 한다. 그래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매일매일 사회의 일원으로, 경제 생활을 영위하며, 정치에 영향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글들이 있는데, 나를 빼놓고 글을 쓴다면 쓰레기 더미를 재생산하는 것밖에 아니지 않나.

나를 드러내고 글을 쓰면 누군가와 척을 지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속에 있는 생각은 통제할 수 없는 몬스터 같아서 밖으로 나오면 누군가에게 상처 줄 수 있다. 생각이 말이되고 말이 글이 되면서 여러번의 자기 검열을 거치지만, 보편타당한 두리 뭉실한 이야기만 쓰는게 아니라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드러내고 쓰는 글에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세상을 보는 방식, 가치판단이 갈리는 의견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거기서 끝난다면 다행인 일이겠지만, 쓰여진 글이 독자의 눈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게 된다. 글을 읽는 사람이 나와 똑같은 문화에서, 똑같은 주제를 공부하고,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똑같은 경제적인 형편에 있다면, 오해나 상처가 적어질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나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할 이유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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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 중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외로울 때 책을 본다고… 이해가 간다. 책을 읽다가 책의 저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게되면 반갑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다. 시대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는 친구이다. 어렴풋이 내가 생각했던 것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정리되어 나오면 그게 그렇게 기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는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껴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생각을 강요할 수 없지만, 책을 공유할 수는 있다. 내가 공감했던 책에 같은 감정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더 가까이 온 것 같다.

어찌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책을 추천하는 사람보다 더 외로운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는 것도 모자라서 직접 쓴 글을 내민다. ‘방망이 깍던 노인’을 쓴 윤오영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한 수필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맘이 통하는 친구와 대화할 수 있다면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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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다보면 유리병에 편지를 적어서 망망대해에 떠내려 보내는 느낌이 든다. 오늘도 유리병 편지를 하나 적어 띄어 보낸다. 이번 편지는 너무 길어서 누가 읽을런지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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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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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 시리즈를 발견했다. (링크: 고종석 “글쓰기의 쾌감, 중독되면 끊을 수 없어”) 글쓰기 특강 연재의 대부분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일맥 상통하는 듯.

특별히 공감한 두 부분

“달리는 사람에게 고비를 넘기고 나면 찾아온다는 marathoner`s high가 있다면 글 쓰는 사람에게는 writer’s high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첫 번째 독자이기 때문에 글을 읽으며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이 제법 마음에 드는 순간, 그 쾌감을 맛보게 되면 거기에 중독되어 계속 쓰게 된다는 거였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고종석은 몇 가지 작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하나는 글을 쓸 때 행갈이에 신경 쓰라는 말이었다. 의외로 많은 수강생들이 행갈이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나의 문단은 하나의 생각 덩어리이기 때문에 문단을 제대로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단을 잘 나눌 수 있다는 건 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글을 읽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 듯하다. 고종석은 또 문단나누기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내가 처음 글쓰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연습했고 지금도 신경쓰는 부분은 문단 나누기와 한 문단에 한가지 생각만 담기이다. 아직도 그게 쉽게 되질 않는다. 공감가는 글을 만나고서 박수가 쳐졌다.

나는 글을 쓸 때 나쁜 습관이 많이 있다. ‘수동태의 문장을 즐겨 쓴다.’ ‘만연체의 문장을 쓴다.’ ‘쓸데없는 부사와 겹조사로 겉멋을 부린다.’ 등등… 내 사고 체계가 명료하지 못해서 머리속의 생각을 처음 글로 옮겨 놓으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나열일 경우가 많다. 나는 나의 글을 교정을 볼 때는 이런 부분에 몹시 주의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본다.

가장 간결하면서도 글맛이 있도록 글을 쓰는 작가로 유명한 사람은 헤밍웨이이다. 그가 말한 글쓰기에 대한 언급도 여기 몇자 옮겨본다. 그러고보니 헤밍웨이와 고종석은 기자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구나.

“글을 쓰는 일은 잘해야 외로운 삶을 사는 겁니다. 작가를 위한 단체는 외로움을 덜어주지만 글이 좋아지는가 하는 점에는 회의가 듭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면 작가의 공적인 위상은 올라가지만 작품의 질이 떨어질 때가 종종 있죠. (노벨상 수상소감 중에서)”
“내가 이룬 성공은 모두 내가 아는 것에 관한 글을 써서 이룬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심성이 많아질 뿐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두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네. 자신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완벽한 글, 그게 아니면 멋진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 그다음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쓰네. 그녀가 읽거나 쓸 줄 아는지, 또는 생존인물인지 고인인지 상관하지 않고 말일세.”

요즈음의 나를 보면 글쓰기에 중독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제 조금 숨도 고르고 쉬어가며 글을 써야겠다. 내공이 부족한데다가 생업이 있는 사람인데 이러다가 주화입마에 빠질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