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과 피자 도우

9/11은 뉴요커에게 어떤 식으로든 트라우마를 남겼다. 당시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던 아내는 아직도 기분이 안좋은 날이면 테러꿈을 꾼다. 하루는 탄저균이 전세계에 퍼지기도 하고 다른 날은 그날처럼 다수의 비행기가 추락하기도 한다. 꿈속에서는 항상 먼지가 자욱했고 매퀘한 냄새가 가득했다고 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빈도수가 많이 줄었다.

오늘 읽은 기사는 당시 잿더미에서 시신을 수습했던 경찰의 이야기다. 뉴욕 경찰 Douglas Greenwood는 40일간 시신 수습 작업에 투입됐었다. 이후 PTSD에 시달린다. 그는 26년을 일하던 NYPD를 떠난다.

After 9/11, a Police Captain Wanted to Change His Life. He Opened a Pizza Place (NYT, 9월 10일자)

이탈리아계인 그는 할머니가 피자도우를 만들던 모습을 기억하고, 피자를 만들면서 아픔을 잊는다. 뉴욕코너의 조그만 공간에서 나름 자리를 잡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작년 겨울 Douglas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피자집은 지금 70먹은 Doug의 형과 같이 일하던 주방장 둘이서 운영하고 있다. 올 가을 확장을 해, 조그맣게나마 앉을 공간도 생길 예정이라고 한다. 그건 Doug의 소원이기도 했고.

출처: http://scoutmob.com/new-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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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ing Up

이번주 뉴요커 커버. 제목은 ‘Looking up’ 이다. (왼쪽 그림)

6년전 뉴요커 커버(오른쪽 그림)는 등교하는 여자아이를 실었다. 등교 길에서 애처롭게 엄마를 뒤돌아보던 어린아이가 6년만에 훌쩍 컸다. 올려다 보는 엄마에게 그 아이는 여전히 물가에 내어놓은 자식이다.

6년전인 2012년은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가 있던 해였다. 사건 얼마 후에 카툰 작가가 그렸던 뉴요커 표지 그림(오른쪽)도 올린다. 건물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눈빛을 보다 보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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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작가의 말 링크.

 

매케인과 낭만보수

오늘자 뉴스는 존 매케인 상원 의원이 1년이 조금 넘게 해오던 뇌종양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Sen. John McCain to discontinue medical treatment, family says (USA Today, 8월 24일자)

한때 대통령 후보까지 올랐었다. 생의 마지막에서는 그는 트럼프와 여러 이슈에서 삐걱였다. 기억나는 건, 오마마케어 폐지에 극적인 반대표를 던지던 순간. 나토에 대한 적극 지지. 트럼프 정부의 친러시아 분위기에 강한 우려 표명. 같은 모습이다.

지난주에 뉴요커지는 이미 매케인에 대한 짧은 논평을 하면서 부고아닌 부고를 올렸다. 뉴요커는 그를 두고서 end of romantic conservatism 이라고 평했다. 2018년 지금 시점 미국 공화당에서 그의 노선은 좀 올드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다.

John McCain and the End of Romantic Conservatism (8월 18일자 뉴요커)

스러지는 한 노인을 보면서 왠지 애잔하다. 그의 정치적 노선에 동의해서도 아니고, 옛날이 좋았다고 노래하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내가 그만큼 물렁한 사람이어서 그럴 지도 모르고, 아니면 늙어감/사라짐이 좀더 공감되는 벌써 그런 연배가 되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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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매케인 (1936 – )

미국의 교정 시스템

김승섭 교수님의 사회역학 공부방 페북연재를 재미있게 읽고있다. 최근에는 미국 교도소와 공중보건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페북링크

교수님도 지적하셨지만 전세계 9백만명 정도의 수감자 중에 2백 20만명이 미국인이다. 그러니까 수감자 10명중 2명이 미국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다는 뜻. 인구당 비율은 한국의 7배, 일본의 10배이다.

미국 교도소 수감자가 급증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마약과의 전쟁, three strike rule, mandatory minimum sentence 등이 원인으로 이야기 된다.

2년 전에에 미국 교도소 관련한 단편을 읽고서 끄적인 적이 있는데, 생각이 나서 다시 찾아 읽어보었다. 뉴요커에 실린 Fifty-Seven이다.

Fifty-Seven과 미국의 교정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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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미국 대선 감상

머리 속이 복잡한데, 그래도 뭔가는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끄적인다.

트럼프 당선이 유력해졌던 11월 8일 밤11시 경, 내가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당혹감이 잦아들자 몇몇 백인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나의 이웃이고 직장 동료이며 딸내미 학교 학부모들이다. 나는 공화당 강세인 deep south에 살고 있기에 그 친구들이 트럼프를 뽑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선거 전에 가볍게 지나가는 말로 그들은 말했다. ‘트럼프나 힐러리나 둘다 형편에 없어서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부분 신실한 기독교인인 그들의 말은 사실은 ‘트럼프가 흠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힐러리를 뽑지는 못하겠어요.’ 라는 이야기라는 것을 선거가 지나고야 깨닫게 되었다.

친하게 지내는 직장 동료중에 은퇴한 두 분이 있다. 보수적인 지역에서 자란 전형적인 남부 복음주의자 기독교인이다. 인구 분포로 따지면 60대 백인 대졸자들이기도 하다.

한분은 러스트 벨트 지역인 오하이오 출신이고, 지금은 은퇴를 하고 플로리다에 정착했다. 한번은 그분이 휴가 기간에 고향에 다녀오고서, 옛날 친구들을 만나보니 반갑긴 했지만 동네가 너무 우울해 졌다고 했다. 한때 미국의 공장으로 활기가 넘쳤던 곳이 지금은 생기라곤 없으며 친구들은 대부분 술에 빠져 산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분과는 페친이기도 한데, 생전 포스팅을 안하던 분이 선거 이후 쌤통이라는 뉘앙스의 포스트를 올렸다.

다른 한분은 켄터키 출신 HR 매니져인데, 최근 은퇴를 했다. 그분과는 아직도 가끔 만나서 커피를 마신다. 문학을 전공하셔서 주로 책이야기나 여행이야기를 한다. 한번은 내가 뉴욕타임스를 읽는 것을 보자. 약간 껄적지근한 표정으로 뉴욕타임스 애독자냐고 물어봤다. 잠깐이었지만 나를 사회주의자 신문을 읽는 이민자로 보는 시선을 0.5초 쯤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미국 정치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정치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한적은 없다. 오히려 회색 인간에 가까워 여기저기 색깔이 분명하지 않다며 오해를 받는 편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페친도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유독 이번 선거 이후에는 승리에 들떠있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포스팅을 보는 일이 괴롭다. 그만큼 내게 트럼프는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사실 이번 선거는 공화당의 차례가 될 가능 성이 컸고 그래서 경선 과정에서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후보자가 공화당에서 되기를 바랬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가 후보가 되었다.

공화당의 정치적 노선에 100%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민주당의 정치 노선에 100% 반대하는 것도 아니기에 선거 결과 자체에 보통은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대통령 선거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닐 뿐더러 대통령 하나를 잘못 뽑았다고 세상이 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갑갑한 일은 종종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트럼프가 주장하는 이야기의 상당수가 음모론에 근거한다는 점. 그리고 그의 정책이 사실상 디테일이 없다는 점은 나를 못견디게 만들었다. 나의 삶의 자세랄까 그런 부분과 정확하게 대치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포스팅을 한적이 있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이야기었다. 아툴 가완디의 칼텍 졸업식 축사를 인용하면서 말했다. 젊은 시절 내가 가방끈을 늘려가며 유일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으로 삶을 보는 자세 같은 것이다. 과학은 놀라운 지식이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요술 방망이가 아니다.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에 대한 결단이고, 사실과 근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겠다는 결의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 가짐은 세상을 사는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이전 포스트: The mistrust of science (7월 12일자 포스트)

음모론으로 세상을 설명하다보면 증거나 사실이 없어도 그저 간단하고 이해가 쉬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없는 주장과 말의 성찬이 공허한 것은 역시 같은 맥락이다.

20대를 거치고 30대에 이르러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은 어떤 주장을 할 때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그 자체는 어찌보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주장을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진정 그 주제를 가지고 씨름을 했는가 삶을 통해 드러나는 주장인가는 대부분 디테일에서 판단이 갈린다.

대선 토론을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트럼프에게는 그러한 디테일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모습은 중요한 이슈에 대해 서로 공약을 들고서 지겹도록 토론하고 싸우면서 하나하나 집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토론에서 그러한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내 주위의 공화당 지지자들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내 주변의 공화당 지지자들이 처음부터 트럼프를 지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트럼프가 공화당 전체의 지지를 얻기까지는 경선 과정 1년이 꼬박 걸렸다.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내 주변의 지지자들은 골수 트럼프 팬은 아니었고 대다수 교육을 받은 소위 교양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결국에 선거 마지막에 트럼프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표를 모두 끌고 오는 데에 성공했다.

아마 트럼프의 골수 지지자를 찾으려면 러스트 벨트 지역이나 탄광지대인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르는 지역의 백인들을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돌아서서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긴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며칠전 뉴요커에서 웨스트버지니아 로간이라는 곳에 선거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를 실었다. 애팔랜치아 산맥 일대는 탄광지대로 지금은 경제 활력을 완전히 잃은 곳이다. 우리로 따지면 강원도 탄광지대 정도 되려나 싶다.

기사 링크:

Learning Trump won, in West Virginia (뉴요커 11월 10일자)

The people of Logan, West Virginia, are used to being different from the rest of the country, but in the Presidential election they were more mainstream than they knew.

image source: 해당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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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퇴역군인 Ojeda는 열성 트럼프 지지자이다. 그는 트럼프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선거 당일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선거 결과를 본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기쁨에 잠시 눈물을 흘렸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흥분이 담긴 문자를 보냈다. 그가 사는 지역은 80%가 트럼프를 뽑았다.

물론 그는 트럼프가 공약 대로 석탄 산업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들을 집행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가 트럼프를 지지한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Nothing’s good anymore. And I think for the first time people stood up and said, ‘We’re tired of the direction we’ve been going down for the last eight years.”

그가 느끼기에 트럼프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어준 정치인이다. 이전 후보들은 선심마냥 복지 예산을 편성하는 것 이외에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지 못했다. 트럼프와 탄광촌 사람들을 엮어서 조롱하는 코메디 프로그램들은 오히려 트럼프 지지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입을 빌자면 그들이 딱히 라티노와 불법 이민자들에게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라티노나 불법 이민자들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백인이 대다수인 동네에서 평생을 지낸 사람들이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동네 사람들은 인종에 대해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무의식중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불리기는 싫다는 생각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트럼프가 등장하고서 이제 그런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그들의 이야기다. “People feel free to say what they really think.”

(잠깐 내 의견을 덧붙이자면, 사실 인종차별은 타인종과 만나볼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오히려 이들은 다른 세계에 대해 무지해서 정말 인종차별적인 이야기를 거침없이 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흑인이면서 트럼프를 지지한 Jones라는 인물의 이야기도 옮긴다.

“Honestly, I don’t think anything’s going to change. People of color in this state struggle no matter what. We struggle under Democratic leadership, and we struggle under Republican leadership. A lot of African-Americans in this state feel that their situation was not improved by having an African-American President, and it wouldn’t be improved by either Trump or Clinton. I was proud to have a part in electing the first African-American President, but is my life strikingly better now? I don’t think so. We’re suffering in this state, and I don’t see any end in sight.”

트럼프 지지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꾸 설득하고 싶은 생각이 치민다.

그래서 트럼프가 당신들의 목소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겠다. 나같이 배운 사람들이 당신들을 잊고 있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당신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줄 것 같는가? 그는 말로는 여러가지 약속을 했지만, 실제로 어떠한 계획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여러분을 더 힘들게 할 것이다.

요즘 뉴스나 그들의 포스팅을 보다보면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트럼프를 뽑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트럼프의 부적절한 행동과 인종적인 발언들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들이 남는다. 그런데 그들이 트럼프를 뽑았다고 해서 트럼프의 행동을 전부 용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가 전하는 하나의 메세지에 공감하고서 그의 부적절한 언사들이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America needs fixing. I am your voice!”

그들에게 기쁨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지하던 트럼프에 비관적인 전망을 보이던 기성언론들을 한방 먹였다는 사실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한방을 먹였다는 쾌감이다. 운동경기에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약팀이었는데 이겼다는 쾌감과 그다지 다를 바없다. 나는 여전히 한마디가 하고 싶다. 그래서 그게 너희들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될 것 같은가. 다시금 내 머리 속에 들리는 대답은 똑같다. 그건 의미 없다고 어쨌든 누가 내 목소리가 되어 통쾌하게 한방 먹이지 않았냐고.

그리고 트럼프에 불안해 하던 나머지 미국인들도 지금은 긍정모드로 바뀌어서 이전의 부적절한 트럼프는 사라지고 자신이 꿈꾸는 good Trump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건 마치 신혼 초기에 상대 배우자의 단점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이 기대하는 좋은 모습만 남아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것 이라는 기대나 다름 없다.

글쎄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4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고, 어찌 되었든 누구나 자신의 이유가 있어서 트럼프를 뽑았을 테니.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이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 내가 느끼는 비관적인 감정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고, 모두가 만족하는 세상이 왔으면 그게 트럼프라고 해도 나는 큰 불만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었노라고 내말을 기쁘게 번복할 것이다.

뉴요커들의 침착한 테러 대응

지난 주말 뉴욕/뉴저지에서 있었던 폭탄 사건은 몇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저주었다. 수사가 진행되어 봐야 알겠지만 정황상 테러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좋은 일인지 모르겠으나, 이번 뉴스를 보면서 뉴욕은 테러에 대한 대응을 가장 침착하게 하는 도시가 되었구나 싶었다. 폭발물을 제거하는 과정, 용의자를 밝혀내는 과정, 용의자를 검거하는 과정, 그리고 시민의 반응까지 어떤 흥분이나 과잉 대응이 없이 차근차근 이뤄졌다. 로봇으로 폭발물을 안전하게 제거, 핸드폰 알람 메세지를 통해 범인 소재를 파악, 소란 없이 차분하게 대응 하는 시민들은 뭐랄까 경외심 마저 느끼게 한다.

이제는 테러 소식이 일상인지라 언론의 관심도 예전만 못하다. 총기사고에 무뎌지는 것처럼 테러에도 무뎌진다. (나는 총기사고에는 무뎌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통계상으로 테러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아주 미약한 수준이지만, 미국에서 총기사고 사망률은 교통사고 사망률과 유사한 수준이다.)

여러모로 마음이 번잡스러운 가운데, 정치인들만 목소리 높여 테러를 규탄한다. 테러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은 정치인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테러의 위협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뉴요커들은 일본인들이 지진에 침착하게 대응하는 수준의 반응을 보였다. 일본이 지진에 대응하는 시스템이 잘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의 대응 수준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참고로 관련해서 예전에 올렸던 테러에 대한 포스트도 링크를 걸어둔다.
일상이 된 테러의 위협 (9월 5일자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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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저지 사건 용의자 Ahmad Rah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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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뉴요커 기사
NEW YORK’S RATIONAL RESPONSE TO TERROR, the new yorker, 9월 20일자

이슬람과 서구문명 관련 포스트
프랑스의 수영복 전쟁
프랑스와 세속주의 laïcité (라이시테)
여성의 의복과 종교에 대한 단상들
이슬람 여성 복장을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면서…
일상이 된 테러의 위협
뉴요커들의 침착한 테러 대응

우울증, 그 숨겨진 비밀의 공유 – Andrew Solomon (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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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의 페친께서 우울증을 고백하는 포스트를 보았다. 우울증을 겪어본 일은 없지만, 주변에 가까운 몇분의 우울증을 지켜보면서 우울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래의 TED 동영상은 내가 우울증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New Yorker지의 staff writer인 앤드류 솔로몬은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우울증에 대해 깊이있는 성찰을 한다. (참고로 동영상에 한글 자막이 있다.)

몇 부분 옮긴다.

“전 항상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했어요. 강제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91년, 전 많은 헤어짐을 겪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연인과도 헤어졌고, 몇 년 간의 외국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흔들림 없이 잘 견뎌냈어요. 그러나 3년 후인 1994년 모든 것에 흥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일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닌 활력입니다.”

“우울증에 관해 얘기할 때 종종 간과하는 것은 본인이 그 한심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울증을 앓는 동안 그게 얼마나 한심한지 잘 알아요.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 문제 없이 음성 메세지를 듣고 점심을 먹고, 샤워를 하고 현관을 나서니까요. 일상적인 일이죠. 그럼에도 이 손아귀를 빠져나올 방법을 찾지 못해 헤매게 됩니다. 저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행동이 줄고 생각도 줄어들고 감각이 무뎌졌죠. 무감각 상태였어요.”

“사람들은 보통 3가지를 혼동합니다. 우울증, 비애, 그리고 슬픔입니다. 비애는 주변의 영향을 받습니다. 누군가를 잃고 나서 비통함에 빠졌더라도 6개월이 지난 후 아직 슬픔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전보다는 나아졌다면 아마 비애일 겁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저절로 어느 정도 사라지고요. 만약 처참한 상실을 겪었고 끔찍한 기분인데 6개월 후에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힘든 상황으로 인해 발생한 우울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들은 우울증이 단지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깊고 깊은 슬픔이며, 커도 너무 큰 비애입니다. 원인은 찾기 힘듭니다.”

아참, 앤드류 솔로몬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그의 글은 항상 진솔하고, 내면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간다. 글 자체는 참 드라이한데, 아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에 읽고 나면 글에서 온기를 느낀다. (TED 강연에서도 참 dry하게 말한다.)

THE MISTRUST OF SCIENCE – Atul Gawande (New Yorker)

젊은 시절 내가 전공을 바꿔가며, 그리고 가방끈을 늘려가면서 유일하게 배운게 있다면, 그것은 과학으로 세상을 보는 자세 같은 것이다.

과학은, 내가 어릴적 오해했던 것 처럼,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요술 방망이나 놀라운 지식이 아니다. 아툴 가완디를 인용하자면,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에의 결단이고 a commitment to a systematic way of thinking, 관찰과 실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지식을 쌓겠다는 결의이다 an allegiance to a way of building knowledge explaining the universe through testing and factual observation.

20대를 돌이켜보면, 나는 새로운 지식 자체를 갈구했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서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기계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경제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게 되는게 신기했다. 기존의 지식을 새로운 지식으로 바꾸는 그 경험에만 열광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 부터인가 과학이 단순히 놀라운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천문학자 Hubble을 인용하자면, 과학은 건강한 회의주의이며 healthy skepticism,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며 suspended judgement, 훈련된 상상력 disciplined imagination 이다.

불변하는 지식은 없다. 과학적인 지식은 단지 가능성이 높은 근사치 probable knowledge 이다. 언제나 반례가 존재할 수 있다. 세상을 열린 마음으로 보고서 가설을 세우며 (또는 다른 이의 가설을 받아들이고) 사실 관찰을 통해서 자신의 가설을 검증해 간다. 어느정도 관찰이 진행된 후에 자신의 가설을 수용할 건인지 기각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과학은 세상을 근사치로 (또는 모델로) 이해하고 그 근사치는 계속해서 수정 보완 되어 간다. (successive approximation)

아툴 가완디가 어제 칼텍에서 졸업식 축사를 했다. 그는 과학을 불신하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 했다. 단어 문장 하나하나에 공감했고, 많은 생각을 불러왔기에 공유한다.

간혹 음모론에 근거하여 과학의 가장 기본 지식마저도 흔들어버리려는 시도를 볼 때가 있다. 미디어는 검증된 기초적인 과학 지식을 흔들 때 종종 ‘주류’ 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충분히 교육받은 이들이 ‘주류’, ‘비주류’라는 구분짓기에 흔들리고, 필요이상으로 회의를 하게 되는 것을 볼 때마다 의아해 진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나는 자신을 다시 돌아본다.

과학은 직관에 반하는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그것은 과학이 직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관찰과 실험에 의해 입증되는 proven 것이기에 그러하다.

THE MISTRUST OF SCIENCE by Atul Gawande, 6월 10일자 New Yorker

The New Yorker

(image source: 해당 기사)

공화당의 라이징 스타 니키 헤일리 주지사

공화당의 라이징 스타 니키 헤일리에 대한 뉴요커 기사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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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mplicated History of Nikki Haley (New Yorker, 1월 13일자)

South Carolina 주지사 니키 헤일리는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언론에서 언급되는 ‘신예’이다. (젊고 이쁘고 여자이면서 인도계이다. 부통령 후보로 누구와도 딱인 조합)

워싱턴 관례상, 대통령의 state of the union address (신년 연설) 이후 야당에서 반대연설을 한다. 이때 주로 유망한 신인 정치인을 내세운다. 2013년에 그 자리에 섰던 사람이 바로 마르코 루비오다. 그는 현재 공화당의 대선 후보 중에 하나이다.

그녀가 요며칠 주목 받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반대 연설에서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을 비난한데에 있다. (트럼프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반대 연설이기 때문에 오바마의 나약한 리더십에 대한 비난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례적이다.

그녀가 전국구 정치인으로 따오른 건 작년 6월 찰스턴 총기사건 이후로 남부기 퇴출 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인도계 이민자의 딸인 그녀의 배경도 신선함을 더해준다.

한글 기사가 궁금한 분들은 연합뉴스의 기사 아래 링크 참조.

‘反이민풍토 자성’ 헤일리,부통령후보 부상…’공화당의 오바마’ (연합뉴스 1월 14일자)

Fifty-Seven과 미국의 교정 시스템

이번주에 읽은 단편. 역시 뉴요커에 전문이 공개되어 있다.

Fifty-Seven by Rachel Kushner 11월 30일자 New Y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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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뉴요커 해당 소설)

소설의 문체가 낯설었다. 주인공이 되내이는 생각과 단어들이 파편이 되어 튀어나온다. 랩, 아니면 하드락을 듣는 것 같다.

도입부를 옮겨본다.

They dropped him from I.R.C. so early the sky was black. He walked until he found himself stranded on the median of a freeway entrance, cars streaming toward him with their blinding lights, like a video game where the enemies come right at you, motherfuckers just keep coming straight at you one after the other, bam bam bam.

나는 소설의 도입부를 읽을 때 조금 긴장한다. 그건 소개팅에 나가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전까지의 긴장감 같은 거다. 그런데 Rachel Kushner (소설의 저자)는 처음부터 나에게 총을 쏘아 댄다. Bam bam bam.

소설은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당일 skid row 밑바닥 인생인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 후반부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주인공의 교도소 생활 이다.

감옥 이야기는 인기있는 소재임이 틀림없다. 감옥 관련 영상물이 연상된다. 친절한 금자씨, Orange is the new black, Oz 등등…

창작의 세계 보다 현실은 더욱 비참하다. 다음은 인구 10만명당 교도소 수감자 수 비교 차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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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Santacroce님 포스트 재인용)

미국의 형법은 강력한 처벌을 원칙으로 한다. 그만큼 감옥 수용자의 숫자도 어마마 하다. 경범죄로 잡혀들어간 이들이 그안에서 돌다가 중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삶에는 관성 같은 것이 있어서 잘못 굴러가다 한번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또한, 미국 교도소는 죄수들의 문제에 대해 방임이 원칙이다. 방임 아래서 새로운 범죄 사회가 탄생 한다. 감옥 내 갱단이 있고, 인종 갈등이 있으며, 성폭행과 잔혹행위가 만연한다. 주정부 예산 문제로 교정 시스템의 정상화는 답이 없어 보인다.

가끔 한국에도 미국식의 강력한 처벌을 도입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나는 죄를 지은 만큼만 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죄를 지은 만큼의 벌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도 Three-strike lawMandatory Minimum Sentence (주로 마약 사범들) 같은 가혹한 형법 규정들은 논란이 되곤 한다. 이를 테면 20불을 훔친 범죄자가 삼진룰 (Three-strike law)에 걸리면 종신형이 선고될 수 있다. 21세기 장발장이다.

어쨌든 단편 이야기를 다시 하자. 주인공은 무자비한 범죄자이다. 별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서 사제 무기를 만들어 또 사람을 ‘조진다’. IQ 57의 길거리 인생 주인공의 삶에는 별다른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를 방치하고 격리한 세상도 그에게 무심하다. 다만 펠리칸 pelicans 만이 교도소에 입소하는 그를 반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