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day of school

초등학교 입학식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꽤나 추웠고, 교장선생님 훈화가 길었던 것 같은데 그 기억은 입학식이 맞는지 아니면 매주 있었던 야외 조회시간 중에 하나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학교에 가려면 가파르고 길다란 언덕을 지나야 했다. 왜 그시절 초등학교들은 하나같이 언덕위에 있었던 것일까. 오른손에 신발주머니를 앞뒤로 흔들며 왼손에 도시락 가방을 들고서 내 몸만큼이나 큰 책가방을 매고 헐레벌떡 학교에 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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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e-영상 역사관)

학교 이름은 신명국민학교였다. 나의 성과 똑같이 ‘신’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놀렸고 나는 그게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건데, 아이들은 말장난을 참 좋아한다. 겨울이면 학교 뒷편에 논바닥을 얼린 스케이트장이 열린다. 아마 서울에서 마지막 남은 논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논바닥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비닐하우스에 설치된 간이매점 떡볶이를 먹다보면 겨울 방학이 지나고 개학을 했다.

아내는 어린시절을 독일에서 지냈다.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름은 커녕 얼굴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내는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 이름은 Frau Ruppel. 반에는 스무명의 친구들이 있었어. Silke, Ida, Boris, Natascha, Carmen, Sascha, Sonja. 잠깐 그 나타샤가 내가 아는 그 나타샤야? 맞아. 유치원을 같이 다녔는데 초등학교도 같이 갔어. 옛날 얘기하니까 독일에 가고 싶네.

오늘은 딸아이가 학교에 입학한다. 담임은 20대 금발의 아가씨. 반 친구들은 스무명이 조금 넘는다. 아시아계는 두세명. 인도계 대여섯명. 흑인 대여섯명. 북유럽 출신 조금. 나머지는 백인이다. 아내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했다. 딸아이는 몇주전 부터 맥락없이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을 던진다. 은근한 두려움을 저렇게 표시하나보다.

아이와 나는 전날 잘 잤고, 아내는 밤새 잠을 못이뤘다. 그렇게 수선하고 분주한 등교 첫날 아침이 시작되었다.

주요국가 부동산 가격 추세 그래프

IMF의 자료를 토대로 주요국가별 부동산 가격 추세 그래프를 그려봤다. (할일이 없으니 별짓을 다하는군…^^) 사이트에 접속해보면 국가별 엑셀 데이타를 다운 받을 수 있다.

자세한 경로는 블로거 ‘채훈아빠’님의 포스팅을 참조하시길…

링크: 세계 부동산 시장 상황을 일목 요연하게 볼 수 있는 곳 – I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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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래프는 1995년을 100으로 놓고 상대 비교한 값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 일본은 1990년 이후 부동산 장기 불황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 미국은 2006년 과열로 피크를 찍은후 2011년까지 정신 못차리다가 다시 회복중이고,
– 스페인은 미국보다 더 심한 피크를 2007년에 찍고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독일은 부동산 경기 사이클이 거의 없고, 프랑스는 큰 불황이 없었다.

우리나라가 좀 의외인데,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이 호시절이었고, 97년에 휘청, 2000년 대 초반이 아주 좋았던 것 같다. 근대 이렇게 그려놓고 보니 ‘겨우??’ 하는 느낌이다.

뭐,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 나름 재미있는 비교였음.

참고로 내가 작업해봤던 Excel 파일도 같이 공유한다. (pp_long.xlsx)

+덧(04/17/2015): 이후에 경제 전문가이신 폐친 두분께서 좋은 댓글을 많이 달아 주셨기에 공유한다. 링크: 우리나라 지역별 부동산 경기에 대한 짧은 이야기. 내 허접한 블로그 내용보다 두분의 커맨트에서 배울게 더 많다.

간만에 그려본 아크릴화

Painted my friend performing a fire dance at a small town, Germany. (Acrylic, 0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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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을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붓을 잡았는데, 꽤 고생했다. 뎃생만 몇달 하다가 간만에 그림에 손을 대서 였다. 디테일에 집착해서, 큰 붓으로 붓터치를 하기 보다는 작은 붓으로 연필뎃생 하듯이 그림을 그리는 거였다.

불만스러운 부분이 몇군데 있지만, 그리면서 또 배웠으니 이정도로 만족. 꽤 오래 작업한 그림이라 완성한 기념으로 올려본다.

원래는 공연을 한 나타샤에게 선물할 생각도 있었으나,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고민중이다. 독일까지 보내려면 돈도 들 것 같구…

어제 독일 알제리전 감상

Originally posted 07/01/2014 on facebook

알제리 무슬림 전사들 정말 멋있더라. 어제 퇴근하고 별기대 없이 티비를 틀었다. 당연히 독일의 압승을 생각했는데 스코어는 여전히 0:0.

연장전에 지쳐서 뛰지도 못하는 상황. 독일에 두골을 연거푸 먹고서도 패배가 거의 확실한 상황. 종료직전 집념의 한골을 넣더라. 감동의 마무리는 경기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는 감독.

객관적인 열세를 알면서도 승리를 열망하며 죽을 듯이 뛰는, 체력고갈로 쥐가나있으면서도 공만보면 독을 품고 달려드는 녹색친구들. 끝날때 쯤되니 골키퍼의 무성한 턱수염이 다 멋있어 보이더라.

이래서 축구를 본다.

유대인과 독일의 반성

 

Originally posted 06/04/2014 @ facebook

독일에 가면 길거리에서 금속으로 된 표식에 새겨진 이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독일어를 모르기에 그냥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케이블 매설’ 표지 같은 건 줄 알고 지나쳤다. 그 모습을 본 잉그릿이 이게 뭔지 설명해 준다. 이 표지는 표시가 된 곳 앞에 살던 사람들 중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2012년 당시 그 이야기를 듣고 찍은 사진이다. 그러고 보니 도로 곳곳에 이러한 표식들이 있었다. 한 골목에 많게는 수십 개의 이름들이 있다. 당시 유럽에 살던 900만 명의 유대인중의 2/3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이러한 아픔의 흔적들이 유럽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2번의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 초는 정말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시기였다. 모두가 자신의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고 서로를 증오했다. 사회주의자는 자본가 계급을 적으로 생각했고, 자본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멸시했으며, 혼란의 와중에 등장한 파시스트들은 무질서와 ‘나와 다름’을 죄악시하며 하나로 똘똘 뭉쳐서 다른 민족/국가에 폭력을 쏟아 부었다. 아시아에서는 뒤늦게 제국주의의 물결에 합류하고자 했던 일본이 서구의 왜곡된 모습을 황국신민 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서 주변 국가들을 괴롭혔고, 미국인들은 흑인/native American에 대한 학대를 당연시 했다. 이러한 광기의 끝 무렵에 탄생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그 내부에서의 사상갈등으로 서로 죽고 죽인다. 스탈린의 피의 대숙청 때 사상자는 2백만으로 까지 추산되고 있다.

폭력의 시대를 겪고서 유럽 사람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똘레랑스 (관용)’이다. 어원은 허세의 끝장을 보여주는 프랑스 사람들에게서 나온 말이지만 내게는 가장 울림이 큰 가치 중에 하나이다. (쓰고 보니 politically correct한 말은 아니군…ㅎㅎ)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들이대는 것의 폭력적 결말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가치인 것이다.

이제 20세기 초는 너무나도 먼 옛날이다. 그 시절을 체험한 이는 모두 무덤 속에 잠들어 있고, 이제는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게 미국이나 한국이나 보수/진보의 갈등이 점점 커지는 것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가끔 온라인에서 보이는 글들도 소위 어르신의 입장에서 보면 선동이라는 생각이 들겠다 싶은 내용도 있고, 그 어르신들이 대응하는 행태도 너무나도 20세기 스타일이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타자 입장에서 봤을 때, 단편적인 사실만 보고서 감정적으로 서로 헐 뜯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음모론적인 이야기가 사실인냥 받아지는 경우도 많고…

이제 나도 세상의 때도 조금 묻고 좌절도 겪고 하다 보니, 지금 내가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죽고 못사는 것이 나중에 보면 별일 아닌 게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게 역사라는 관점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선행학습을 금지한 독일은 지금!!(EBS, 캡쳐)’을 보고

Originally posted 03/16/2014

EBS 프로그램을 누군가가 해둔 캡쳐를 보고서 든 생각을 포스팅 한다. (링크: 선행학습을 금지한 독일은 지금!!)

작년 이맘때 3개월간 독일/스위스에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비즈니스를 전공한 입장에서 특히나 경제/기업문화를 관심있게 보았다. 거기서 가장 많이 느낀 차이는 독일 사회는 ‘연대’가 정말 중요한 사회적인 가치라는 것이다. 미국식의 가치인 ‘효율성’ 또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천박하게 여겨지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두번의 세계대전이 가져온 참혹함에 대한 뿌리 깊은 반성과 사회주의의 가치가 그러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가져온 듯 하다.

하지만 독일 방식이 우리에게 맞는 방법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BS 프로그램에서 독일의 교육을 따라야할 근거로 독일은 잘사는 나라라서 그렇다고 이야기 했으므로… 이부분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자.

현재 독일의 부의 근간에는 몇가지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EU의 통합 과정에서 동유럽의 저임금 노동자의 다수를 받아 드릴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기업입장에서는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큰 이점을 가져왔다. 또한 유로화로 인한 환율의 왜곡은 그들을 수출 강대국으로 만든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과 시스템, 침체되어 있는 청년들과 너무나 안정이 되어 있어서 어떻게 보면 노쇄한 것 같이 보이는 분위기가 한국에 맞는 것인가는 의문이다.

또한 교육을 말할 때 교육 제도 자체 만을 말하는 건 어불 성설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과 사상을 그대로 배울 뿐이고 어른들이 변하지 않고서는 제도를 아무리 바꾸어 봤자 얼마안가 다시 우리식으로 바뀔 뿐이다. 90년대 후반 미국의 SAT를 벤치마킹해서 만들었던 수능이 지금에 와서는 문제 유형만 바뀐 다른 형태의 학력고사로 바뀐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덧붙여 말하자면 SAT는 지식을 측정하는 시험이라기 보다는 사고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일종을 아이큐 테스트 같은 시험이다. 아마 내가 96년에 봤던 수능과 두번 수능을 치뤄 진통을 치뤘던 94년의 수능이 그에 가장 근접했던 수능이 아니었나 싶다.)

독일/스위스에 있을 때 현지에서 사시는 분들과 그들의 아이들과 교제할 기회가 있었다. 그 학부모들이 느끼는 건 학교에서 너무 쉽게 가르치고 공부하는게 아니라 놀다 오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아이들은 맨날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은 최상위권인게 이상하다는 거였다. (아이들이 놀고 오는 건 아닐꺼다. 다른 형태의 교육을 받고 오는 거일 꺼다….) 만약 이러한 시스템을 우리나라로 그대로 들여오면 한국의 학부모들이 마냥 놀고 먹는 것 같은 자녀들을 그대로 둘까? 아마도 공교육에 대한 불신만 가지게 되고 당장 사교육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될 것이다. 어른들의 삶자체가 ‘연대’가 아닌 ‘경쟁력’과 ‘치열함’을 모토로 하는데 어찌 자식들이 가만히 놀고 있는걸 두고 보겠는가? 또 그렇게 두는 인격적인 부모님이 있다 한들 그 아이들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적응하면서 살아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