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log: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말과 글

작년 이맘 때 쓴 글.
페북이 알려줘서 다시 읽어봤다. 재공유한다.

Isaac의 생각저장 창고

말과 글은 그사람의 지적인 수준을 드러낸다. 5년 전인가 서울에서 지하철에 탔을 때 였다. 한 이쁘장하게 생긴 처자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그 처자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 좀 신기했다. 그처자는 ‘대박’이라는 단어 만을 사용하여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대박~’, ‘대~에~박’, ‘대!박!’, ‘왠일이니?’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다. ‘Oh my God!’와 ‘you know’이다. 나도 처음에는 미국 사람스러운 감탄사를 적절하게 섟어주는 것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내다보니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 오히려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도 그랬고 나도 그렇고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슬랭이나 욕을 먼저 배운 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쓰고 나면 네이티브에 가까워 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처음 우리말 욕을 배웠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왠지 표현을 속 시원하게 한 것 같았다. 자극적인 표현은 내 속에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자꾸 생기는 것이다.

나는 꾸밈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꾸밈말(부사,형용사)은 더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말을 할 때에 꾸밈말을 필요이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표현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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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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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들었는데, 김영하 팟케스트를 통하였다.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일상의 어떤 사건을 다루는 소설의 섬세함은 나에게 충분한 호감을 주었다.

이를테면 마지막에 헤더가 로버트의 방에 있다가 바깥의 학생을 바라보는 장면이라던지. 남자친구인 콜린과 처음으로 관계를 갖는 장면이라던지.

침대 옆에 누워서 딴짓을 하던 아내도 어느새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다. 아내의 감상은 나와 사뭇 다르다. 소설이 붙들고 있는 기억의 한 자락이 아내의 무엇인가를 건드린 듯하다. 그러한 경험은 소설을 개인적인 ‘그 무엇’으로 만든다.

여자의 심리를 이렇게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가 남자라니. 아내는 잘 믿지 못했다. 일상의 디테일을 포착하여 글을 썼으니 필시 경험이 창작 동인이 되었을 텐데.

<대성당>을 읽을 때. 레이먼드 카버가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으나, 카버의 이야기는 절대로 개인적인 ‘그 무엇’이 되지 않는다.

차이는 아마 시점이 아닐까 싶다. 포터의 소설은 일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데, 그 차분한 절제가 세련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기억의 쪼가리가 읽는 사람의 기억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건조한 문장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소설의 이야기와 내 기억이 일치하는 부분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그 무엇’으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 책을 사서 표제작 외에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내 기억과도 맞춰 봐야겠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말과 글

말과 글은 그사람의 지적인 수준을 드러낸다. 5년 전인가 서울에서 지하철에 탔을 때 였다. 한 이쁘장하게 생긴 처자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그 처자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 좀 신기했다. 그처자는 ‘대박’이라는 단어 만을 사용하여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대박~’, ‘대~에~박’, ‘대!박!’. 아 하나 더 있다. ‘왠일이니?’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다. ‘Oh my God!’와 ‘you know’이다. 나도 처음에는 미국 사람스러운 감탄사를 적절하게 섟어주는 것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내다보니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 오히려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도 그랬고 나도 그렇고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슬랭이나 욕을 먼저 배운 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쓰고 나면 네이티브에 가까워 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처음 우리말 욕을 배웠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왠지 표현을 속 시원하게 한 것 같았다. 자극적인 표현은 내 속에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는 꾸밈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꾸밈말(부사,형용사)은 더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말을 할 때에 꾸밈말을 필요이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표현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말의 기본 구조, 그러니까 주어, 동사, 목적어를 사용하고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불필요한 단어를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고 논리적인 언어 사용을 노력하다 보면 불필요한 꾸밈 말이 본질을 흐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딱딱 끊어지는 단문을 좋아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취향의 문제이다. 말에서 곁가지를 다 치고 필요한 내용만 남기면 취할 것이 많지 않다. 마치 그림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를 다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추상적인 몇개의 선인 것과 같다. 어떤이들은 장식적인 말과 장식적인 그림을 좋아하지만, 나는 본질만 남아 있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서 듣는/읽는/보는 사람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너무 말/표현이 과하면 부담스럽다. 쓰는/말하는/그리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단문을 잘 쓰지 못하며, 과도한 표현을 할 때가 많다. 나의 문제는 한 문장에 너무 많은 생각을 집어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 글을 쓸때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중구난방이 되곤 한다. 심지어는 과함에 대해 논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생각을 사용하고 있어 민망하다. 그래서 글은 다듬어야 하고 계속 다듬을 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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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을 읽고 있다. 카버 아저씨 작품의 미덕은 딱 필요한 그만큼만 말한다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하루키는 꾸준히 카버의 책을 읽으면서 말의 리듬감과 호흡을 조절하는 감을 유지한다고 한다. 나는 하루키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문장은 매력적이다. 문장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빼고 나면 거기서 독자는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빼기에만 집중하면 논리가 흐트러진다. 글을 쓰는 사람은 머리속에 모든 생각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넘어가기가 쉽다. 그러나 논리의 고리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글은 죽어버린다. 그래서 글을 잘 쓰기는 어렵다. 딱 필요한 만큼만 들어가고 빠져야 한다. 너무 과하면 부담스럽고, 너무 적으면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반복해서 글을 다듬으면 해결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그래서 프로페셔널 문장가들은 대부분 엉덩이로 글을 쓰는가 보다.

+ 덧: 이 글은 참고로 퇴고를 하지 않았다.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적어봤는데, 나는 프로페셔널 작가가 아니니까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블로그만 하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중에서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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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probably need to eat something,” the baker said. “I hope you’ll eat some of my hot rolls. You have to eat and keep going. Eating is a small, good thing in a time like this,” he said.

‘A Small, Good Thing’ / Raymond Carver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은 될 거요.”

레이먼드 카버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 단편집 ‘대성당’ 중

카버의 이 짧은 단편에는 부부가 등장한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진 부부는 빵집 주인의 전화를 받는다. 예전에 주문했던 죽은 아이의 생일 케익을 찾아 가라는 전화이다. 분노와 절망감에 부부는 빵집으로 달려간다. 발췌한 부분은 빵집 주인이 자초지종을 듣고 부부에게 건네는 말이다.

산사람은 살아야한다. 우리는 성찬식에서 빵을 나누고 예수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별것 아닌 것은 그렇게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기억이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