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니즘과 예루살렘 – There is neither Jew nor Gentile

며칠전 미대사관 예루살렘 이전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몇가지가 빠졌다. 괜한 오해만 사겠다 싶다. 추가로 몇자 더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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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며칠간 뉴스를 지켜본 결과로는 트럼프의 이번 결정이 중동 정세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논란은 많이 되고 있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예전처럼 중동 정세의 중심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 아마도 그런 판단하에 트럼프의 깜짝 발표가 있었겠지.

다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입지가 중동에서 더 약해질텐데, 트럼프는 별로 상관 안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트럼프 핵심 지지층인 미국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두팔벌려 환영하고 있으니까. 대표적으로 친트럼프계 Paula White 목사는 환영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녀는 트럼프 정부 evangelist 자문 위원장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http://www.cnn.com/2017/12/06/politics/american-evangelicals-jerusalem/

기독교계가 모두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미국 공화당을 지지하는 복음주의 계열 기독교인은 열정적인 환호를 보였다. 반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deep concern 깊은 우려’를 표명했고, 정교회쪽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사실 오랜기간 애증의 관계였다. 이를테면 루터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유로 경멸했고, 이는 나치 인종청소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럼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내가 알기로 이스라엘과 유대인, 비유대인 (성경 용어로는 Gentile 이방인)을 보는데에 크게 2가지 관점이 있다.

첫번째는 시오니즘에 동질감을 느끼는 보수 복음주의 계열의 관점이다. 이쪽이 정치적으로는 공화당의 hawkish policy에 동조하는 분들이다.

이쪽 주장을 성경에서 근거를 찾자면 대표적으로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 로마서 11장을 들 수 있다. 유대교는 선민사상에 기반한다. 그러나 본인이 유대인이 었던 바울은 예수교의 신앙과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러면서 비유대인을 접붙인 올리브나무에 비유한다.

그리고 26절에 이르러서 이렇게 말을한다.

all Israel will be saved. As it is written: “The deliverer will come from Zion; he will turn godlessness away from Jacob.” (NIV) 그후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쓰인 말씀과 같습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올 것이니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제거할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지난번 포스트에도 시온산에 대해 언급을 했는데,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중에 하나이고, 종종 예루살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는 (유대인에게) 신성한 산이다. 그러니까 보수 복음주의 쪽에서는 이에 근거해서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예수를 믿게되면 예수가 재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난번 포스트
종교의 땅, 예루살렘(12월 7일자)

시오니즘에 공감하지 않는 다른 한쪽이 근거로 대는 구절은 갈라디아서 3장이다. 이 또한 바울의 편지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는 할례와 믿음을 둘러싼 갈라디아인들의 신학 논쟁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다.

할례는 유대인의 징표이다. 당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명확히 갈라서기 이전이었고, 따라서 어떤이들은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절차 중에 하나라는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믿는 믿음외에 다른 징표가 있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3장 28-29절에서는 신분제 사회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There is neither Jew nor Gentile, neither slave nor free, nor is there male and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If you belong to Christ, then you are Abraham’s seed, and heirs according to the promise. (NIV)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므로 유대인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상속자들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갈라디아서 선언 이후, 더이상 기독교에서 ‘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종이나 종교나 성별이나 신분에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존재로 초대되었다.

여담이지만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내가 성경에서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이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막부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 하나에 감복해서 예수에 귀의하기도 했고 목숨을 내어놓기도 했다.

대충 정리해보자. 예루살렘이 가지는 의미는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떤이에게 예루살렘은 유대인에게 회복되어야 할 물리적인 장소이기도 하고, 어떤이에게는 유대인과 타민족은 별다른 차이가 없기도 하다.

사실 미국 (또는 일부 한국)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를 넘어서기도 한다. 트럼프가 종교적인 인물은 아닌 것이 분명하기에 그의 정치적인 메세지는 분명해 보인다. (외교적으로는 손해만 봤다는게 대다수의 분석이고)

예루살렘은 목놓아 울뿐이다. 그 조그마한 땅에 수천년간 종교적/정치적/지정학적 의미가 얽히고 설켜 흘린 피가 얼마인가.

마지막으로 성경 한구절만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예레미아 7:34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기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I will bring an end to the sounds of joy and gladness and to the voices of bride and bridegroom in the towns of Judah and the streets of Jerusalem, for the land will become desolate. NIV

[재공유]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 그리고 바울이 말한 자기 비움과 자족

오늘 재보궐 선거가 끝나고, 몇몇 분들이 많이 속상해 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그 몇몇 분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들이기에 안스럽기도 하다.

그 분들을 보면서 장자의 4편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공자와 안회의 대화가 생각났다. 이와 관련해, 작년에 써둔 글이 있어서 재공유한다.

이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사실 그분들은 나의 글을 읽고 화가 나거나 욕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아량을 가지고 읽어주면 좋을 것 같다. (읽는다는 전제하에서..^^)

Isaac의 생각저장 창고

오늘은 좀 길고 심오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 이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회 참여/소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결론은 기쁨/행복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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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장자 초상화)

장자의 4편 인간세(人間世)는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의 대화로 시작을 한다. (주: 안회는 공자의 수제자이고 공자의 자는 중니임) 원문: 장자 인간세편

안회가 중니를 만나 여행을 떠나겠다고 청했다. 이에 중니가 물었다.
” 어디로 가려는가?”
” 위나라로 떠나려 합니다.”
” 어째서 위나라로 가려 하는가?”
” 제가 듣기에 위나라 왕은 나이가 젊은데다가 행실이 사나워 나라일을 가벼이 경영하고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백성을 죽도록 함부로 내버려 두어 시체가 흡사 연못에 무성한 파초와도 같이 많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일찍이 선생님께서,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들어가라, 어진 의사에게는 환자가 많이 모이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대로 다스리는 방법을 강구하면 위나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 어허! 자네가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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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기독교 : 6.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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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두 글에서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가지 해법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서야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인 ‘대속’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정리하자면, 저는 물질적인 방법은 환경을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방법은 나를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속의 방법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집니다. 불확실성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불확실성의 문제를 ‘죄’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제가 글의 처음부터 죄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굳이 불확실성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죄’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람이 스스로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0-26)

저는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죄에 관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K님의 글을 통해서 이해한 바로는 독실한 무슬림이 선행을 통해 악행을 덮으며, 그로 인해 알라의 죄사함을 받는 것이 무슬림의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목적은 결국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시고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Picture of a wooden Christian cross on St. Cuthbert’s Isle, Holy Island, Northumberland. St Cuthbert’s Isle is a small island used as a retreat by both Aidan and Cuthbert.

이것이 바울이 이야기하고 예수가 말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시대의 기준에 맞추어 조정한 것이 아닙니다. 일전에 E님께서 마태복음 5장을 인용하셔서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신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구절은 유대인이 지켜왔던 율법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기준에서 살인과 간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살인과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않은 것에 그쳤습니다. 예수는 이것에서 한발 더 나아간 해석을 한 것이지요. 살인과 간음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누구도 죄인의 기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 인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본질을 흐렸던가 싶기도 합니다. L님도 오늘 글을 올린다고 했으니, 저도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그럼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 그리고 바울이 말한 자기 비움과 자족

오늘은 좀 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 이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회 참여/소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결론은 기쁨/행복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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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장자 초상화)

장자의 4편 인간세(人間世)는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의 대화로 시작을 한다. (주: 안회는 공자의 수제자이고 공자의 자는 중니임) 원문: 장자 인간세편

안회가 중니를 만나 여행을 떠나겠다고 청했다. 이에 중니가 물었다.
” 어디로 가려는가?”
” 위나라로 떠나려 합니다.”
” 어째서 위나라로 가려 하는가?”
” 제가 듣기에 위나라 왕은 나이가 젊은데다가 행실이 사나워 나라일을 가벼이 경영하고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백성을 죽도록 함부로 내버려 두어 시체가 흡사 연못에 무성한 파초와도 같이 많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일찍이 선생님께서,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들어가라, 어진 의사에게는 환자가 많이 모이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대로 다스리는 방법을 강구하면 위나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 어허! 자네가 가면 필시 형벌을 받을 걸세. 무릇 도란 번거로움을 멀리 해야 되는 법이네. 복잡해지면 마음이 요동하게 되지. 자기 마음이 흔들리면 근심 걱정에서 구해 낼 수도 없다네. 옛 지인(至人)은 먼저 자신이 도를 갖춘 연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갔다네. 자네 자신도 아직 본래 면목을 회복하지 못했으면서 난폭한 사람의 행동을 어느 겨를에 막겠는가?’

그러자 안회는 공자에게 열심히 한결같이 설득하면 안되냐고 묻는다. 공자는 이에 안된다고 한다. 또 안회는 내 의견을 말하지 않고 옛성인들의 말에 인용하여 설득하겠다고 하니 공자는 그것도 안된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잘 안와닿는 사람들을 위해 비유를 하자면 이렇다. 어떤 학생이 수업시간에 술담배의 해악에 대해 배우고서 선생님께 묻는다. “선생님, 제 친구는 술담배를 합니다. 제가 오늘 수업시간에 배운대로 술담배의 안좋은 점을 설명하고 진심을 보여주면 친구가 술담배를 끊을까요?” “아니다. 알코올과 니코틴의 독성은 누구나 다 안다. 심지어 담배곽에도 니코틴과 타르의 해악을 경고하고 있다. 진심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애연가/애주가가 술담배를 끊을 것 같으냐? 오히려 건방지다고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술의 해악에 대한 하버드대의 연구 결과와 독일의 흡연 극복 사례를 기분상하지 않도록 보여주면 그 친구가 마음을 돌이키실까요?” “아니다. 그렇게 하면 친구에게 두들겨 맞지는 않겠지만 사람이 변하지는 않을꺼야.”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안회의 안타까운 마음에 있다. 술담배 같이 문제가 분명한 것은 덜 복잡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이야기 하거나, 정치를 이야기 하거나, 종교와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장자가 살았던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안회는 이제 모르겠다고 하고 공자에게 어쩌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이때 바로 공자가 말하는 것이 심재(心齋)라는 것이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심재이니라.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동양 사상에 조예가 없는 내가 심재에 대해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내가 이해하기로는 심재의 핵심은 자기를 비운다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장자>의 전체 문맥으로 보았을 때 물흐르는 듯이 사는 삶을 말하지 않나 싶다. <장자>는 물흐르는 듯이 사는 삶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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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렘브란트, 감옥 안의 바울>

이제 바울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바울의 편지 중에 하나가 빌립보서이다. 바울은 평생 열렬한 기독교 전파자의 삶을 살았는데, 처형당하기 몇년 전에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가 바로 성경의 빌립보서이다.

바울은 빌립보 편지에서 계속해서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 속에 있는 기쁨을 묘사하면서 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기뻐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기쁨이라는 것은 편한 상황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고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그의 이런 인생의 자세는 흡사 달관한 도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빌립보 편지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의 모습에서 ‘자기 비움’을 발견한다. 빌립보서 2장 7절에서 그는 예수에 대해 ‘자기를 비웠다고(개역개정)’고 말한다. (영어로는 made himself nothing (NIV)’ 그리스어로는 케노시스(kenosis)라고 한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케노시스로 이해를 한 것이다.

빌립보서 전체는 바울의 ‘자기 비움’ 또는 ‘달관’의 삶의 자세가 가득차있다. 바울은 다른 예수 전도자들 사이에서도 시기를 받았는데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릇된 동기에서든 참된 동기에서든 어쨌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내가 기뻐하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또 바울은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참되고 정결한 삶, 기뻐하는 삶을 살라고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하게 사는 법도 알고 부유하게 사는 법도 압니다. 배가 부르건 고프건 부유하게 살건 가난하게 살건 그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만족하게 생각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장자 인간세편에서 질문을 던졌고, 바울의 빌립보 편지로 답을 했다. 안회의 이야기를 보면서 세상을 바꿔보려는 사람은 옛날에도 많았구나 싶다. 젊은 혈기에 시시비비를 가리려 했다가는 잘난척한다는 소리 듣기 쉽상이다. 모른척 지나가자니 내가 사랑하는 친구/가족/사회/국가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한때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은 배신감으로 가득찬 염세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장자의 답변은 ‘심재’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심재’는 빌립보 편지에서 바울이 말하는 ‘자기 비움’이다. 바울은 평생 예수를 전하고 따르는 삶을 살았는데, 그가 전한 예수는 ‘케노시스’였고 그렇게 살다보니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한 것이다.

오늘 여러가지 뉴스들을 보면서 갑갑해진, 젊은 혈기로 가득차 있는 나를 위해 글을 써보았다. 조금 지루한 이야기 일 수도 있는데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