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토론

Originally posted 06/16 @ facebook

일전에 윤치호에 관해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주신 분이 있어 댓글을 달다보니 내용이 너무 길어졌네요. 담벼락에 다시 올립니다. 약간 수정했고, 언제나 그렇지만 비판이나 토론 환영합니다.

의견: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저는 ‘현실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죽산 조봉암선생의 어록중에 이런게 있습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있을법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역사에 너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것 같아서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사람’을 판별할 마땅한 기준은 있을 수가 없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박노자씨가 윤치호에게 우호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근거는 뭔가요. 박노자씨가 윤치호씨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건 대강 알고 있었지만 그의 사상에 우호적이기도 한가요. 뭔가 안어울려서요.

답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박노자씨의 윤치호에 대한 평을 링크 걸어둡니다.

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753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54174

첫번째 글은 프레시안에 연재된 글인데 영어천재 윤치호의 면모가 자세히 그려져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좀 길지만 읽어볼만 합니다. 두번째 글은 씨네 21에 실은 짧은 평인데 간단히 요약되어 있어서 보기 편합니다.

두 링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박노자는 윤치호를 최초의 ‘세계인’으로 평가하면서 그로 인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런 모습 때문에 비난할 수 만은 없다라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저는 역사적인 인물을 볼때 그사람의 시대적인 배경과 상황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치호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전세계가 가장 미쳐돌아가던 시기의 인물입니다. 2번의 세계대전이 있었고 약육강식과 폭력이 극에 달했을 때 살았던 인물입니다. 폭력의 시대에 전세계에서 가장 힘없는 나라중에 하나인 우리나라에 태어난 지식인이었죠. 우리는 그가 일기를 꾸준히 썼기에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데, 초반 20대 때의 청년스러움이 세상의 폭력앞에 고통받고 변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의 잘못까지 부정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가 대지주였던 자신의 계급적인 이익을 위해 친일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시대의 무거움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큰 것을 요구하는지… 또 개인은 그 짐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 하고 고통받는 그의 이러한 고뇌하는 모습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뿐입니다.

이건 개인적인 견해인데, 미국사람들과 살면서 느낀건 서양 사람들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체면을 생각해서 못 그럴텐데 이 친구들은 필요가 있는 사람한테는 철저하게 잘하죠. 이해관계가 없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인종차별이 공공연히 행해졌던 당시 미국의 상황을 보건데, 윤치호는 아시아의 이름없는 나라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겠지요. 당시 미국인들은 일본인을 원숭이라고 비하했습니다. 일본보다 더 힘이 없었던 한국인의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을 겁니다.

외교세계는 냉철합니다. 겉으로는 명분과 논리를 내세우지만 국가적 이익이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금에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이나 3.1운동으로 약자의 부르짖음이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지만 당시 국제관계는 지금보다 더욱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상황이었죠. (참고로 간디는 윤치호 보다 4살 아래입니다.)

윤치호는 3.1운동 당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우리나라의 독립하고 연관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일본이 미국의 적국으로 돌아서지 않는한 미국은 우리나라 독립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족 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있던 지식인 계층과 반대되는 현실주의적인 판단이었죠. 윤치호는 3.1운동의 대표로 서명할 것을 요청받지만 3.1 운동이 우리나라에 독립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참여를 거절합니다. 윤치호의 좌우명이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라는 것은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후에 윤치호도 일기에 3.1 운동이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시선을 변화시켰다고 평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언급하신 조봉암 선생은 윤치호보다 34살이 어립니다. 3.1운동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힘을 보고 자란 세대이죠. 박세리의 성공이 여자골프계에 자신감을 가져왔듯이 그는 독립운동의 가치를 목격한 세대예요.

글을 쓰다보니 제가 왜 이렇게 핏대 세우며 윤치호를 쉴드 처주는지 모르겠네요. 윤치호가 불운하다고 말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친일파 윤치호 후손은 지금도 잘살고 있습니다. 원래도 명문가이기도 했고요. 이를 테면 장남 윤영선은 50년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숙부 윤영렬의 손자가 바로 윤보선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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