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땅, 예루살렘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 미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다는 발표를 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기에 지금까지는 누구도 이를 실행에 옮긴 적이 없다. AIPAC의 영향력 때문에 부시도 공약으로만 이야기 했을 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이제는 이 이슈가 예전보다 국제정치에서 덜 민감한 사안이라는 뜻이거나, 트럼프가 워낙 파격적이라는 의미이겠지…)

예루살렘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이 모두 신성한 땅으로 여기는 곳이다. 유대교는 성전이 있었던 곳이기에, 기독교는 이에 더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이기에, 이슬람은 모하메드가 하늘로 승천한 곳이기에 그러하다. 현대에 와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크게보자면 이스라엘-중동, 더크게는 기독교-이슬람)의 중심이 되었다.

2년전에 구약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를 되새긴 적이 있다. 생각이 나서 공유한다. 구약은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이 같이 경전으로 인정하는 책이기에 두 종교에 모두 동일한 의미가 있다.

혹시나 모를 오해를 막고자 덧붙이자면, 예전 포스트가 이스라엘이나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혀 정치적인 입장없이 성경을 그자체로 독해했던 내용을 옮긴 포스트이다.

몇천년전 이야기를 현대의 문맥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일은 각자가 딛고서있는 믿음과 지적인 풍토, 정치적인 신념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예전 포스트
시편 121편: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2015년 11월 12일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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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예루살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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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의복과 종교에 대한 단상들

1.
터키의 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정치소설을 하나 쓴 적이 있다. 제목은 ‘눈’이다. ‘눈’에는 아래와 같은 세속주의자와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대화가 나온다. (편의상 A와 B로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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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han Pamuk (19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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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여자들이 히잡을 벗고 머리를 내놓는 것이 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지? 히잡을 벗으면 유럽인들의 대우가 달라지나?

서구화에 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B: 나도 딸자식이 있어. 히잡을 쓰지 않았지. 아내가 히잡을 쓰는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난 여식에게도 간섭하지 않네. (중략) 내 딸은 ‘아버지, 저 역시 모든 여학생들이 히잡을 쓰고 들어오는 교실에 머리를 드러내놓고 입실하는 용기를 내지는 못할 거예요. 할 수 없이 히잡을 쓸 거예요.’ 라고 말했네.

히잡을 쓰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세속주의자의 항변이다.

이어서 B: 내 딸의 변명은 동시에 다른 많은 터키 여성의 변명이기도 하네. 여성이 히잡을 벗는다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더 편하고, 더 존경받는 위치에 있게 될 걸세.

히잡이 여성을 억압한다는 세속주의자의 의견이다.

A: 히잡은 여성을 불편, 겁탈, 모욕으로부터 보호하고, 사회 속에 더 편히 나갈 수 있게 만들어. 과거에 밸리 댄서였던 멜라핫 샨드라를 포함해 나중에 히잡을 쓰게 된 많은 여성들이 밝혔듯이, 히잡은 여성들로 하여금, 길거리에서 남자들의 동물적인 감정에 호소하는가하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다른 여성들과 경쟁을 하고 이 때문에 화장을 해대야 하는 가련한 존재에서 벗어나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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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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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다. 그리고 프랑스와는 반대로 이슬람의 입장에서 세속주의, 즉 정교분리 원칙을 채택한 나라이다. 프랑스처럼 학교에서 히잡을 금지하였었다. 그러나 2013년에 이 법은 폐지 되었다.

참고자료: 세속주의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 사람들은 왜 에르도안에 열광할까? (산타크로체 블로그)

두사람의 대화는 평행을 달린다. 서로 귀를 막고 대화를 하던 끝에 근본주의자 A는 세속주의자 B를 살해한다.

2.
‘눈’에서 내가 인상깊게 읽은 다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세속주의자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도 아닌 주인공 카는 이렇게 말한다.

“터키에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가장 숭고한 사고 가장 위대한 창조자와 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 어떤 단체에 들어가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3.
세속주의자들은 무슬림 여성의 히잡을 벗기는 일이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히잡을 쓰는 여성의 결정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인 무형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히잡착용은 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이 소수인 곳에서는 히잡착용이 반대로 사회적인 압력에 저항하는 행위이다.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이를 세속주의에 대한 무슬림 집단의 분노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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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을 쓴 여성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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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 꽤나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에서 컸다. 여름이 되면 나의 교회는 성도들의 복장을 주의시키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서로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짧은 치마, 끈나시, 슬리퍼를 자제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오면 어김없이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5.
법으로 복장을 규제하는 프랑스, 터키의 사례와 한국 보수적 교회안에서의 복장 권고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종교는 여성의 복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6.
꾸란을 우선 보자. 히잡의 근거가 되는 구절은 33:59이다.

“예언자여 그대의 아내들과 딸들과 믿는 여성들에게 베일을 쓰라고 이르라 그때는 외출할 때라 그렇게 함이 가장 편리한 것으로 그렇게 알려져 간음되지 않도록 함이라 실로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꾸란에 근거하여, 무슬림들은 히잡이 여성을 보호한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강간과 모욕, 불필요한 시선에서 여성을 자유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소설 ‘눈’에서 등장하는 근본주의자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고린도전서 11:5)

천주교에서 미사를 볼 때에 여성이 흰천을 쓰는 전통은 이에 근거한다. 다만 현대에 와서 천주교는 이를 강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교는 성경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 전통을 폐지 시켰다.

7.
내가 아는 바로는 무슬림에게 신앙은 꾸란을 글자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꾸란은 알라의 말씀이다. 아랍어로 쓰인 경전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는 무슬림은 원어의 의미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번역본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제한한다. (예를 들어 아랍어를 모른다거나…) 그리고 신자에게 아랍어를 배울 것을 권장한다.

이슬람과 교회(여기서는 천주교, 기독교를 합쳐서 교회라고 그냥 칭하기로 한다.) 모두 동일하게 ‘경전’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번역된 성경도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글자 그대로를 따르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을 더욱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사소해보이는 이 변화는 생각보다 큰 차이를 가져왔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이슬람을 중세(선지자 무하메드 시절)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게 만들었다면, 교회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관습에 열린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8.
시간이 된다면 이어서 교회가 종교개혁 이후 어떻게 바뀌었는지 (특히 이슬람과 비교해서), 그리고 존 로크를 살펴보면서 세속주의와 계몽주의가 서구사회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볼 계획이다.

종교적인 주제의 포스트는 부담스럽지만, 어쨌든 burkini를 시작으로 연결되는 이번 포스트에서 종교 이야기를 빼놓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9.
오늘의 이야기를 맺으며 성경과 하디스(이슬람의 또다른 경전)를 인용한다. 둘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의복 논쟁을 둘러싼 나의 결론 이기도 하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Allah does not look at your figures, nor at your attire but He looks at your hearts [and deeds]” Chapter 1 – Hadith 7

관련 포스트
프랑스의 수영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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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된 테러의 위협

[재공유]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어린이날이다. 작년에 아이들에 대해 써둔 글이 있어 재공유 한다.

Isaac의 생각저장 창고

캡처

이번주 목요일에 회사에서 ‘Take your child to work day’ 행사가 있었다. 행사는 오전과 오후 순서로 되어있었는데,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회사소개를 하고 회사 투어를 했고 오후는 카니발이 있었다. 카니발에서는 각 부서별로 부스를 마련해서 솜사탕을 팔거나 물풍선 던지기, 링던지기 같은 가벼운 게임을 했는데 수익금은 donation한다. 딸아이는 어려서 오전순서는 참여하지 않고 오후의 카니발만 참석했다. 카니발이 끝나고 내 책상도 잠깐 들렸는데 딸애는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동료들에게 인사도 시켰다. 아이도 즐거워 했고 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식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는 아이가 위험할까봐 뾰죽한 물건을 치우기도 하고, 몸에 좋거나 맛있는 음식을 아이를 위해 따로 챙겨두기도 한다. 아이가 교양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태교도 하고, 커서는 책도 읽히며 음악회나 미술관도 데려가고 박물관에 따라가기도 한다. 아이가 사는 세상이 좀더 좋았으면 하는 마음에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환경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도덕이니 규범이니 하는 것도 아이가 없는 사람의 마음과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천양지차이다.

한 블로거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희망’인 이유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인생에서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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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눈송이로 걸어들어가는 아이

한달여 생각하기를 멈췄다. 몇 주는 이사준비에 정신이 없었고, 지금은 정착에 바쁘다. 가재 도구들이 자리를 잡고, 생각없이 물건이 집힐 정도가 되려면 몇달은 더 걸릴 듯 하다. 새집과 관련한 서류작업도 한뭉치이고, 매일매일 물건 사다가 나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런 때에 나 혼자 고고하게 글이나 쓰고 책이나 읽고 있으면 도리가 아니겠지.

아이와 성경을 읽기도, 엉터리 옛날 얘기도 같이 쉬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이와 꾸준히 해오던 일이었다. 아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실은 세상의 모든 아이가 그러하다. 누구나 어린시절 귀기울여 듣던 옛날 이야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이야기가 현실이고 현실이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나는 티비를 보면서 눈물을 짓거나 무서워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야기는 진짜가 아니란다.”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하게 되면서 나는 더이상 이야기에 눈물 흘리지 않게 되었다. 나같이 메마른 어른들을 위해서 일까. 이야기꾼들은 이야기에 진실성을 부과하기 위해 자꾸만 장치를 가져다가 심어둔다. 요즘에 와서는 그마저도 식상해졌는지 시작부터 대놓고 ‘이 이야기는 실화에 근거했음’을 말하고 시작한다.

너무 딸아이를 방치해두었나부다. 요새 심지어는 imaginary friend를 만들어서 혼자 떠들고 논다. 자기는 imaginary friend가 수십명이 있어서 심심할 일이 없다나? 혼자 침대에 누어서 한시간씩 조잘거리는 대상은 아마도 imaginary friend였나보다. 상상력이 바닥을 기는 나같은 아저씨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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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이어서 발터 벤야민의 글 한구절을 공유한다.

책 읽는 아이 아이들이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씩 받는다. 저학년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하지는 못하고 나누어주는 대로 받는다. 가끔씩만 자기가 원하는 책을 고를 수 있다. 자기가 탐하는 책들이 다른 아이들 수중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마침내 아이는 책을 받는다. 일주일 동안 전적으로 그 텍스트의 놀이에 탐닉한다. 텍스트는 눈송이들처럼 온화하고 은밀하게, 촘촘하고 끊임없이 아이를 감싼다. 그 눈송이들 속으로 아이는 무한한 신뢰를 갖고 걸어 들어간다. 거듭거듭 유혹하는 책의 고요함! 책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직은 잠자리에 들면 스스로 이야기들을 지어내는 시절이니까. 거의 사라져 버린 그 이야기들 속에 나 있는 길들을 아이는 추적해간다. 책을 읽을 때 아이는 귀를 닫아둔다. 책은 너무 높은 책상 위에 있고, 언제나 한 손을 책 위에 올려놓는다. 아이는 형상과 메시지를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도 볼 수있는 것처럼, 주인공의 모험들을 문자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읽을 줄 안다. 아이의 숨결은 책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 속에 있고, 온갖 등장인물들이 아이에게 입김을 분다.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더 가까이 인물들 속에 섞여 들어간다. 아이는 일어난 사건과 주고 받는 말들로부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이는 마치 손으로 뒤덮인 것처럼 온몸이 방금 읽은 것으로 흠뻑 덮여 있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길, 2007, 109-110쪽)

B형 남자의 불편함

많은 분들이 IS와 무슬림을 동일시 한다. 듣는 무슬림 기분 나쁘다. 무슬림은 시아가 있고 수니가 있으며, 그 안에서도 차이가 많다. IS는 그중에서도 왕따 같은 애들이다.

많은 분들이 에볼라때문에 아프리카 사람과 접촉하길 꺼려한다. 듣는 아프리카 사람들 기분나쁘다. 에볼라는 서아프리카에 퍼졌다.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는 비행기로 7시간 거리다. 프랑스 파리까지는 6시간. 누구도 파리와 에볼라를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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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일부 기독교인의 비리를 듣고 기독교를 욕한다. 듣는 기독교인 기분 나쁘다. 성경을 배우는 것과 실천하며 사는 것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도 다양한 사람이 있다.

외국인이 한국사람에게 김정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당황스럽다. 북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고, 우리를 북한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할 때, 도쿄에 가봤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행여라도 일본과 한국을 같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싶어 차이를 열심히 설명해 본다. 근데 의미 없다.

어떤 분이 유럽은 이렇다라고 말하면, 궁금하다. 어디 유럽을 말하는 것일까. 복지를 말할 때 북유럽/독일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 관광을 말할 때는 프랑스/이탈리아를 말하는 것 같기도하다. 유럽을 통째로 말하는 건 한국/일본을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보다도 훨씬 무모하다.

사람들이 미국을 하나의 인격체처럼 말하면 당혹스럽다.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상호 경쟁 시스템이 작용하는 미국을 하나로 보기는 참 어렵다. 정부/군대/상원/하원/학계/기업/남부/동부/서부 등등… 모두 다른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따로 행동하는 entity들이다.

B형이라고 괴팍하고 한 성깔하는 시크한 남자라고 지레 짐작해버린다면, 기분 나쁘다. 내가 시크한건 맞지만 무지하게 부드럽고 상냥한 남자다.

내가 믿는 기독교 : 3.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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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pedia) 사해버전 성경 (Est. 408 BCE to 318 CE)

쓰다보니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왜 성경을 믿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습니다. 예전에 제가 생각을 정리해 두느라 적어둔 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제 의견은 링크 걸어둔 글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2. 유대교와 기독교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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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근에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 발견한 사실이 있어서 사족을 붙입니다. (발견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의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유대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구약 성서는 대부분이 바벨론 유수 기간에 씌여진 책입니다. ‘바벨론 유수’라고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70년 가량 유대인이 바벨론의 포로로 유랑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성경은 ‘바벨론 유수’기간 문서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전해 내려오던 판본도 상당수 유실되었다가 이시기에 학자들에 의해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 성서는 기본적으로 exile literature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성서 뿐만 아니라 exile literature (본국에서 쫓겨나서 방랑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정서가 있습니다. exile literature의 특징은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이러했더라면…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나라가 강대했던 시기를 이상으로 그립니다. 전통음악을 듣고, 고향의 향수에 젖어 삽니다. 바벨론 유수의 시기에 유대인들은 모여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서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멀어진 모습을 반복해서 되새기면서 울고 회개를 합니다. 여기 구약성경의 느헤미야기를 인용합니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중략)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 에스라 제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모든 백성을 타일렀다. (느헤미아 8:4-9)

그들이 읽었던 율법은 모세오경(성경 처음의 5권) 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유수’기간에 씌여졌던 열왕기서/역대서는 일종의 역사서인데 모세오경의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들을 평가합니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다윗왕이 가장 이상적인 왕이지요. 그 이후로는 왕들의 죄악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이야기 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기간에 그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꿈꾸게 됩니다.

이제 신약의 시대로 넘어옵니다. 예수는 새로운 율법을 말하지요. 예수는 성전을 허물러 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말하는 율법은 구약의 율법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대인의 메시아는 그들이 기대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따르려는 열심에 대해 경계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세오경의 율법을 더 잘 지키고자 했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을 비난합니다. 바리새 계열 유대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지키려고 세부의 지침과 가르침을 만들어서 지켰던 사람들이죠. (당연히 모세오경과 율법에 근거합니다.) 심지어 예수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으로 당시 율법학자들과 랍비들을 욕합니다. 그리고서 제자들에게 문자적으로 율법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는데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완성하러왔다고 주장하는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완성합니다. 아시다시피 유대교와 기독교는 구약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쓰인 신약은 기독교만의 경전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나 예수가 말한 율법의 완성은 조금 논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인듯합니다.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도 한번 나누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이 이야기들은 제 개인적인 견해이며 신학/역사를 전공한 분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1. 이슬람과 기독교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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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이뤄지는 토론을 보면서 저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적는 이야기는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저는 신학/역사/인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일이 없기 때문에 깊이에 한계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해왔던 부분이고 저의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 생각을 몇자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L님과 K님의 토론을 보면서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이 꾸란을 접근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꾸란은 선지자 무하메드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슬람은 꾸란의 단어 (아랍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암기하며,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종교입니다.

제 생각은 선지자 모하메드가 중세(6~7세기)의 인물이 었다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무슬림의 모든 행동의 근거는 모하메드의 계시에 바탕합니다. 그런데 중세의 도덕관념과 세계관은 현대인의 눈으로는 몹시 이질적입니다.

저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류는 변해왔고 이슬람 세계는 중세의 가치관(정확히 말하자면 모하메드의 계시)을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비무슬림의 눈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중세의 종교관은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주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므로서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더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려는 신학 연구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성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 시절에 가장 열중했던 일이 독일어 성경 번역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아랍어로 씌어진 꾸란의 원문 자체를 신성시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인 것이지요.

종교개혁 이후에도 서양의 세계관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근대/현대로 오면서 인류가 겪었던 가장 큰 변화중에 하나가 ‘개인’의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와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사회라는 개념은 비교적 생긴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당시 새로운 개념이었던 ‘individualism’을 ‘self-reliance’라는 말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개인주의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self-reliance’라고 정의한 것이지요.

당시 철학자들 사이에서만 논의되던 이야기는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20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개인의 가치를 고귀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류는 인권을 신경쓰기 시작했고 여성의 인권도 비약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비무슬림의 눈으로 무슬림 사회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눈에는 이슬람 국가에서 인권은 무시되고, 여성은 억압된다고 비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IS와 이슬람

최근에 페북에 IS와 이슬람에 관련한 글을 몇가지 올렸다. 이슬람과 IS에 관심있으신 분들에게 참고가 될 것 같아서 정리해서 블로그에도 공유한다.

첫째

IS 관련한 이코노미스트지 차트를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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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ihadist friends and foes (economist daily chart)

알카에다는 그래도 시리아 반군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한다. 요새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IS는 누구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네거티브 전략일까? 계속 유지하기 쉽지 않아보이는데…

둘째

이슬람인의 관점에서 IS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었다. 흔치 않은 한국인 이슬람교인인 김은수씨께서 ‘정통 이슬람’의 관점에서 이부분을 정리해 주셨기에 공유한다.

정통 이슬람이 바라본 IS의 교리적 문제점 (페북 링크)

곁다리로 배운 게 있다. 이슬람인들은 코란을 축자적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 무하메드의 코란과 하디스가 알라의 계시라는 전제가 바탕이 되어있다. 선지자 무하메드가 설파한 원문이 비교적 온전히 보전되어 있기에 타당한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지하는 기독교의 성경 접근방법은 문맥과 의미에 집중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읽는 것이다. 이슬람인들이 코란을 읽는 방법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물론 내가 아는 몇몇 분들은 성경을 축자적으로 접근해서 나를 답답하게 만들기는 한다만은… (이건 옳다 그르다에서 오는 답답함이 라기 보다는 근본적인 다름 때문에 오는 답답함이다.)

셋째

두번째 글 (축자적인 이슬람 코란 해석)에 대한 댓글들

Q: 근데 꾸란의 원문이 보존된거 맞아? 인쇄술은 모하메드 이후 몇백년후에 나온거라 그전엔 결국 필사되었을텐데…

꾸란에 대한 위키피디아 링크

나의 댓글: 제가 꾸란에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적절하게 답을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꾸란 원전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방법은 아마 성서비평학의 방법 (여러가지 사본을 교차 검증하는 방식)이 쓰였을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과는 달리 무슬림들은 필사의 오류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봐서 원본이 잘 보존되었다고 인정이 되는 것 같아요. 성경과 마찬가지로 필사가 되었겠지만, 비교적 최근에 쓰인 책인지라 보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형의 링크를 보고서 저도 좀 찾아봤는데, 꾸란이 처음부터 글의 형태로 내려왔던 건 아니군요. 모하메드의 이야기가 구두로 전승되다가 첫번째 칼리프부터 문서화가 되었고, 세번째 칼리프 Uthman부터 정본이 공표되었다고 하네요. 비교적 초기에 정본이 정립되었기에 원본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적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딸과의 대화 모음 (집안일/성경/반대말에 대한 잡담)

첫번째

아내: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설겆이를 하다가) 일이 해도해도 끝이 안나.
딸램: (무심한 듯 앉아있다가) 집안일은 원래 그런거야.

으이구 애늙은이.

두번째

오늘은 아이에게 성경에 있는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아이가 물었다. “아빠, 엘리야 선지자는 남자야? 여자야?” “남자.” “왜 이렇게 성경에는 남자가 많아? 나는 여자인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남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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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딸아이에게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라는 표현을 가르쳐 주었다. 며칠후 딸아이가 시끄러운 곳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쥐살은 듯이 시끄럽네.”

가끔 우리말의 상투적인 표현을 뒤집어 보아도 재미있다. 그러면서 표현의 유래/의미/어감을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