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들어가며: 대부분 저의 포스팅은 기독교 신앙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만, 오늘 이야기는 개인 기독교 신앙에 관련한 이야기이고 기독교의 전제가 깔려 있므로 기독교에 알레르기를 일으키시는 분은 읽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늘 쓰는 글도 역시나 일종의 일기입니다.

400px-Psalms_Scroll

(Image source: wikipedia) 사해버전 성경 (Est. 408 BCE to 318 CE)

내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점검하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이고 하나는 ‘십자가’이다. ‘성경’은 나의 신앙이 성경의 하나님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성경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에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부활하신 십자가 사건과 보혈의 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는 믿음이 다른 종교와 다르게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인식에서 그러하다.

성경을 어떻게 믿느냐는 쉽지 않은 신학적인 문제이다. 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답하는 과정은 수월하지 않다. 종국에는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나로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내게는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오늘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고 생각을 정리 해보고자 이 글을 적어본다.

첫번째는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저자가 작성한 원문 그대로 인가 하는 문제이다. 가장 최근에 쓰여진 신약 같은 경우도 2000년이 지난 문서이고 구약 같은 경우는 350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원본이 아니고 가장 원본에 가깝다는 사해문서 조차도 몇백년에 걸쳐 베껴 쓰인 책이다. 또한 정경도 몇차례의 공의회 이후에 정립된 것이니 우리가 오늘날 보는 성경은 원본에 얼만큼 가까운지 알기 힘들다.

두번째 이슈는 최근에 생각하게 된,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진리라는 것은 언어에 갖혀있다. 언어에 갖혀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언어는 세계를 표현하지만 본질과 정확하게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의 사고가 언어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고자체도 언어 속에 갖히기도 한다.

두가지 이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느껴본 적이 있겠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다른 관점과 자아가 생긴다. 물론 분명히 나는 똑같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영어를 사용할 때와 한국어를 사용할 때의 나는 미묘하게 다르다. 제스쳐도 달라지고 사고를 전개하는 방식도 달라지며, 목소리나 발성법까지 달라진다. 이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차이를 만들 뿐 아니라 때로는 내 관점까지 바꾼다.

이를테면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나는 무의식 중에 상대가 나보다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를 염두에 둔체 말을한다. (이것은 존댓말이 없는 영어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고 한국어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인식 체계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라는 한계가 있는 도구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헬라어/히브리어로 제한되어 지는 것인가? 또 우리가 읽는 성경의 헬라어/히브리어는 현대의 우리가 이해하는 헬라어/히브리어와 일치하는 것 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제 아이와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했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일테지만 그것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 왔다. 언젠가 누구에게 들었본적이 있는 이야기 일테지만, 내게 새롭게 느껴졌으니 감사할 일이다.

바로 성령이다. 나는 하나님(성부), 예수님(성자)에 집중하고 성령에 대해서는 무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진리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인 것이다. 성령을 단순히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존재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어제 아이와 읽었던 말씀은 베드로 후서 였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후서 1:20-21

참고로 여기서 예언은 앞을 보는 예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서와 모세오경 그러니까 구약을 말한다. 즉 신약 이전에 쓰여진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언어의 불완전함과 인간적인 저자의 관점까지 넘어서는 성령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자면, 필사의 불완전함/정경 체택 과정의 인간적인 부분/그리고 번역의 불완전함을 뛰어 넘어 성령은 역사한다고 믿는다. 성령이 없이는 교회와 신앙이 쌓아올려 질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인용하고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하고 있다. 성경과 언어에 대한 생각을 한 후에 요한복음을 읽으니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이었다. 그 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을 이기지 못하였다. (새번역 요한복음 1장 1-5절)

+덧붙이며: 제 블로그 방문객은 대부분 기독교인이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기독교인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이 글을 읽으셨다면 논리적으로 비약을 느끼실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논리/과학이 아니며,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인 믿음으로 뛰어넘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성령이 하는 영역이라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캡처

이번주 목요일에 회사에서 ‘Take your child to work day’ 행사가 있었다. 행사는 오전과 오후 순서로 되어있었는데,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회사소개를 하고 회사 투어를 했고 오후는 카니발이 있었다. 카니발에서는 각 부서별로 부스를 마련해서 솜사탕을 팔거나 물풍선 던지기, 링던지기 같은 가벼운 게임을 했는데 수익금은 donation한다. 딸아이는 어려서 오전순서는 참여하지 않고 오후의 카니발만 참석했다. 카니발이 끝나고 내 책상도 잠깐 들렸는데 딸애는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동료들에게 인사도 시켰다. 아이도 즐거워 했고 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식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는 아이가 위험할까봐 뾰죽한 물건을 치우기도 하고, 몸에 좋거나 맛있는 음식을 아이를 위해 따로 챙겨두기도 한다. 아이가 교양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태교도 하고, 커서는 책도 읽히며 음악회나 미술관도 데려가고 박물관에 따라가기도 한다. 아이가 사는 세상이 좀더 좋았으면 하는 마음에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환경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도덕이니 규범이니 하는 것도 아이가 없는 사람의 마음과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천양지차이다.

한 블로거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희망’인 이유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가르쳐 주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격암님의 블로그: 아이들이 어른들의 희망인 이유) 우리는 지켜야할 소중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행동한다. 최소한 걱정한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무신경하게 지나쳤던 술집들이나 위험한 환경은 부모가 된 사람들의 눈에는 걱정꺼리이다. 아무리 악한이라고 하더라도 자식이 보고 있는 앞에서 떳떳하게 범죄를 저지르지는 못하는 법이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어버이날이 되면 몇몇 부모들은 카네이션을 달고 회사에 출근한다. 대부분 부장/차장님들이다. 평소에는 ‘쪼으는 데’에 숙달된 분들이시다. 내 기분탓인지 그분들도 카네이션을 달고 있는 그 순간 만은 조금더 너그럽고 유한 모습을 보이셨던 것 같다. 아이들은 우리가 한숨 돌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주는 존재이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내 정체성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성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었던 시절에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때 나를 지켜주었던 것은 아이에게 매일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하기로 한 약속이다. 매일 지키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이와 한 약속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사실 그 시간은 내가 가르키는 시간이라기 보다는 배우는 시간이었다. (예전글: 페르시아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에스더) 아이는 진정 어른의 선생이다.

저출산은 우리나라의 서글픈 현실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단순히 부담이나 짐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울고 웃고 그리고 우리는 배운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한 친구가 있다. 그의 다짐이 진심에서 나온 것인줄 알기에 또 아니라고 하기에는 별다르게 설득할 말이 없기에 더욱 서글프다. 부모만을 의지하며 연명해가는 갓난아이들, 세상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면서 질문을 쏟아내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의식하면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들이 있는 한 세상은 희망이 있다.

이쯤에서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미국에서 그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발 떨어진 입장이었다. 대다수 나의 친구들이 이미 부모가 되었기 때문인지 그들에게 충격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형참사 자체의 참혹함도 있지만 그 대상이 아이들이 었다는 데에서 더욱 큰 슬픔이 있지 않았나 싶다. 계속되는 뉴스와 소식들에서 대한민국은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강하게 느꼈던 것 같다. 부모의 심정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부모인 것을 자각하는 것 그 자체로도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은 행동한다. 그것이 아이들이 어른들의 희망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