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공유]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어린이날이다. 작년에 아이들에 대해 써둔 글이 있어 재공유 한다.

Isaac의 생각저장 창고

캡처

이번주 목요일에 회사에서 ‘Take your child to work day’ 행사가 있었다. 행사는 오전과 오후 순서로 되어있었는데,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회사소개를 하고 회사 투어를 했고 오후는 카니발이 있었다. 카니발에서는 각 부서별로 부스를 마련해서 솜사탕을 팔거나 물풍선 던지기, 링던지기 같은 가벼운 게임을 했는데 수익금은 donation한다. 딸아이는 어려서 오전순서는 참여하지 않고 오후의 카니발만 참석했다. 카니발이 끝나고 내 책상도 잠깐 들렸는데 딸애는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동료들에게 인사도 시켰다. 아이도 즐거워 했고 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식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는 아이가 위험할까봐 뾰죽한 물건을 치우기도 하고, 몸에 좋거나 맛있는 음식을 아이를 위해 따로 챙겨두기도 한다. 아이가 교양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태교도 하고, 커서는 책도 읽히며 음악회나 미술관도 데려가고 박물관에 따라가기도 한다. 아이가 사는 세상이 좀더 좋았으면 하는 마음에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환경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도덕이니 규범이니 하는 것도 아이가 없는 사람의 마음과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천양지차이다.

한 블로거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희망’인 이유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인생에서 무엇이…

View original post 300 more words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0. 들어가며

곧 세월호 참사 1주년이다. 추모의 의미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가 길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생각해보고, 읽어보고, 공부한 다음에, 글을 쓰는 정도 일 것 같다. 주제가 워낙 무거우니 만큼 글도 길다. 이렇게 긴 글임에도 나의 이야기는 일반론적인 또는 근본적인 이야기에만 머무를 예정이다.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이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지적 부탁한다.

목차

0. 들어가며
1. 헴펠의 역설 – 귀납적 지식의 한계
2. 귀납적 지식과 인과론 – 회의주의자의 세상 보기
3. 자신의 법칙으로 살아가기
4. 신정론 (Theodicity) –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5. 볼테르와 루소 – 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6. 시스템적인 접근 – 루소의 답장
7. 힐스버러 참사 – 20세기의 참사
8.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개인적인 접근
9. 미시적 해체의 오류 – 개인적인 접근 vs. 구조적인 접근
10. 마치면서

1. 헴펠의 역설- 귀납적 지식의 한계

헴펠의 역설(Hempel’s raven paradox) 이라는 것이 있다. 독일의 논리학자 헴펠(1905-1997)이 귀납적 추론과 직관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예이다. 설명을 위해 고등학교 때 수학시간에 배운 명제에 대해 복습해보려고 한다.

Capture

빨간색 선은 역(conversion), 녹색선은 이(inversion), 파란색선이 대우(contraposition)이다. 대우관계는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예를 들자면, ‘1) 전기가 나가면(P)는 불이 꺼진다(Q).’ 와 ‘2) 불이 켜져 있으면 (~Q) 전기가 들어온 것이다. (~P)’는 대우관계이고 1)이 참이면 2) 역시 논리적으로 참이다.

헴펠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까마귀는 검다. (All ravens are black.)

(2)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 (대우) (Everything that is not black is not a raven.)

(3) 내 애완용 까마귀는 검다. (My pet raven is black.) : 1번을 지지하는 예시

(4) 이 녹색 물건 (검은색이 아닌)은 사과 (까마귀가 아닌)이다. (This green (and thus not black) thing is an apple (and thus not a raven).): 3번을 지지하는 예시

직관적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사과를 보면서 까마귀가 검다는 것을 증명하다니.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맞다. 헴펠의 역설은 귀납적 접근의 한계를 드러낸다. 헴펠의 역설에 의하면, 까마귀가 검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세상의 모든 검지 않은 것을 모아서 까마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헴펠의 역설에다 시간의 개념을 더해 볼까. 우리는 까마귀가 검다라고 말하기 위해 과거에 존재했던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모든 까마귀를 가져다가 검다라는 것을 확인해야 까마귀가 검다라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다. 만약 3년 뒤에 파란 새를 한번 찾아봤는데, 알고보니 까마귀였다면 이 역시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2. 귀납적 지식과 인과론 – 회의주의자의 세상 보기

헴펠의 역설은 존재한다. 그러면 귀납적 지식이 무의미 할까. 감히 내가 어찌 인류가 쌓아올린 방대한 지식의 대부분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은 수천년에 걸친 관찰과 경험의 축적으로 발견한 진리이다.

Kepler_laws_diagram.svg

예를 들어볼까. 케플러(1571-1630)의 법칙(Kepler’s laws of planetary motion) 같이 귀납적인 관찰로 발견된 법칙은 뉴턴(1643-1727)의 만유인력의 법칙 (Newton’s laws of motion)의 토대가 되었다. 실험과 관찰, 확증이라는 과학의 방법론은 지식의 근간이고 인류의 지식은 그렇게 발전해 왔다. 사족으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귀납적인 지식이 아니다. 모든 물체는 질점(부피는 zero이면서 무게를 가지고 있는 가상의 점)으로 환원된다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형이상학적인 법칙이다.

귀납적 지식이 무의미하지 않다면, 나는 헴펠의 역설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굳이 말하자면 인류의 지식에 경외감을 가지되 틀릴 수도 있다는 겸허함을 가지자는 정도가 아닐까 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어떤 법칙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말하는 진리/법칙/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법칙이라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의지가 들어갈 여지가 적은 편이어서 비교적 보편타당하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인간의 일을 다루는 학문 (이를테면 사회과학, 경제학, 경영학 등등….)은 되먹임 (feedback)이 클 수 밖에 없다. 학자들이 석유자원의 고갈을 경고할 때, 인류는 셰일혁명으로 예측을 뒤집었다. 멜서스의 비관적인 인구론은 농업혁명으로 가뿐히 무시되었다.

너무 학문적인 이야기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누구나 인생관, 지혜 같은 것을 가지고 살고 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순간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다.’ ‘세상에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 ‘가족과의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 같은 철학/법칙들은 누구나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러한 지혜들은 개개인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확증되어진 것이고, 부모님이나 인생의 선배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의 법칙과 마찮가지로 삶의 지혜 또한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자신의 법칙으로 살아가기

1265468524_WzoQsuqN_andy61

“참 열심히 살았어. 다시 산다고 해도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할 꺼야.”

최대치가 여옥을 보고서 죽기전에 한 마지막 대사이다. 학도병이었던 최대치는 세월의 풍파에 마적단, 남파 간첩, 인민군 장교, 빨치산으로 살아간다. 그는 도덕을 무시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그는 강해지고  싶어서, 또 나중엔 무력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한 길을 고집한다.

예전에는 박상원 같은 반듯한 사람이 좋았다. 이제 나이가 든 걸까. 최대치 같이 살아보자고 발버둥 치는 그런 사람들이 더 안스럽다. 누구나 열심히 산다. 그것이 사회를 변화시킬 정의이던지, 자신과 가족을 먹여살릴 돈이 던지, 아니면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던지, 도저히 내려 놓을 수 없는 자존심이던지… 인간은 무언가를 위해서 달려가고 있다.

열심히 살아온 누군가에게 당신은 존재 자체가 틀렸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나 삶의 법칙/관점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그것이 남을 해하는 것이던, 자연을 해하는 것이던 간에 말이다. 누군가에게 옳은 것은 자신에게 그른 것이기도 하다. 모순된 세상에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 철학자들은 세상에 대해 여러 관점을 내 놓는다.

17세기. 세상의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고 우주는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과 세계에는 기계적인 인과 관계만이 있을 뿐이라는 데카르트 적인 세계관이 부딪쳤다.

당시 두가지 세계관을 조화롭게 이해해보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라이프니치(1646-1716)이다. 그는 우주가 겉으로 볼 때 기계론적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데카르트적인 방식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기계를 창조한 신이라는 존재를 잊지 않고 언급한다. 그는 세계를 통해서 신의 목적과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4. 신정론 (Theodicity) –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근대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을 한다는 것은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했다. 가장 성공에 근접했던 과학자는 뉴턴이 아니었을까 한다. 뉴턴이 엄청난 양의 신학서적을 저술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뉴턴은 자신을 과학자가 아닌 신학자로 여겼다. 뉴턴은 과학 보다 신학에 관련된 책을 더 많이 썼다.

253px-Gottfried_Wilhelm_von_Leibniz

뉴턴과 동시대의 과학자 중에 라이프니치(1646-1716)가 있다. (앞의 라이프니치와 동일인이다.) 미분을 발명하기도 한 그는 신정론(Theodicity)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유신론자였던 그는 전지(omniscience), 전능(omnipotence)하며 선한 존재 (omnibenevolence)인 신이 창조한 세계는 완벽하다고 보았다.

I form the light, and create darkness: I make peace, and create evil: I the LORD do all these things. (Isaiah 45:7)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킨다.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한다. (이사야 45장 7절)

*덧: 라이프니치는 아마도 이사야서의 이 구절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1710년에 신정론(Theodicy: Essays on the Goodness of God, the Freedom of Man and the Origin of Evil)이라는 책을 쓴다. 신정론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신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첫 번째 악은 모든 피조물의 불완전한 성질에서 비롯된다. 완벽하다면 그것은 신이고, 악할 수가 없다. 두 번째 악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악이다. 신은 자연의 악을 꼭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죄에 대한 벌로서, 또 때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더 큰 악을 저지하거나 보다 더 큰 선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의 악을 원할 수 있다. 세 번째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 악은 인간의 자유의 결과이다. 신은 가장 선한 것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고, 이에 따라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선’ 뿐만 아니라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신은 ‘악’을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악을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용: 철학여행까페[41]다양성과 조화를 추구한 철학자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론 또는 어떠한 다양한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 배후에는 신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5. 볼테르와 루소 – 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VoltaireCandidFrontis+Chap01-1762

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에게 정의가 있고 신도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 신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이라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다. 볼테르

1755년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한다. 이 지진으로 리스본 사람의 1/10이 죽는다. 볼테르는 이를 두고서 시를 쓴다. 그는 이 시로 당시 대세였던 라이프니치의 신정론을 비판한다. (영어 번역본 링크) 이 시는 왜 무고한 사람이 죽는가? 왜 하나님은 재난을 허용하는가? 재난을 만든 신은 왜 존재하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루소이다. 이 시를 편지로 받은 루소는 볼테르를 반박하는 답장을 쓴다. 루소는 ‘리스본의 지진은 신의 섭리가 아니다. 리스본 시내에 밀집 지역을 만들고, 다층 주택을 지은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재난에 대비해 적절한 대책을 마련했다면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답변한다. (영어 번역본 링크)

루소와 볼테르/라이프니츠를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루소는 재난에서 신의 존재를 고려 대상에서 빼버렸다. 말하자면 재난은 어디에서 왔는가.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를 멈추었다는 것이다.

18세기의 유럽은 철저하게 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곳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대형 사고가 나면, 누구나 신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현대인은 모든 인과를 신과 연결짓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분노를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심리이다. 나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을 때 분노와 답답함이 가득했다. 선장/회사/해경/정부를 파고 드는 하나하나 기사에 반응하고 우울해 했었다. 아마 리스본 대지진 때, 유럽인들은 비슷하게 신에게 의문을 제기했던 것 같다.

6. 시스템적인 접근 – 루소의 답장

download

루소는 볼테르에게 답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 do not see how one can search for the source of moral evil anywhere but in man…. Moreover … the majority of our physical misfortunes are also our work. Without leaving your Lisbon subject, concede, for example, that it was hardly nature that there brought together twenty-thousand houses of six or seven stories. If the residents of this large city had been more evenly dispersed and less densely housed, the losses would have been fewer or perhaps none at all. Everyone would have fled at the first shock. But many obstinately remained . . . to expose themselves to additional earth tremors because what they would have had to leave behind was worth more than what they could carry away. How many unfortunates perished in this disaster through the desire to fetch their clothing, papers, or money?

내가 이해한 루소의 관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이러하다. 사고가 났을 때,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가에 집중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신), 사고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사고는 누군가 (또는 신)의 잘못으로 발생하지만, 동시에 사회 시스템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 (물론 루소는 시스템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조직 문화, 정부의 시책, 법령, 관련 산업의 인센티브 시스템 등등이 하나하나 맞물려서 사고가 발생하고 더 커진다. 사고에서 잘못한 사람과 조직을 찾기에 급급하면 시간이 흐르고 다른 이슈에 묻혀버리게 된다.

7. 힐스버러 참사 – 20세기의 참사

현대에 일어난 대형 참사 중에 힐스버러 사고가 있다. 1989년 FA 결승전에서 96명이 압사 사고를 당했다. 이 사건은 영국인 모두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캡처
(image source: Hillsborough was real living hell, The Munster Express)

위의 사진은 힐스보로 참사 당시 데일리 미러 표지이다.

이 사건이 일어 났을 당시 경찰은 무질서한 팬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유족들은 희생자의 오명을 씻기 위해 Hillsborough Family Support Group (HFSG)와 Hillsborough justice Campaign (HJC)을 구성한다. 이 사건 이후에는 영국 축구계는 매해 사고를 기억하는 추모를 한다. 또한 영국의 스포츠, 공연 안전 시스템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 과정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 겼다. 결국에는 사고의 백서라고 할 수 있는 보고서를 내기에 이른다. 이 보고서는 45만 페이지에 이른다. 다만 이 ‘제대로 된’ 보고서는 사고가 일어난 지 23년 만인 2012년이 되어서야 나왔다.

8.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개인적인 접근

돌아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아마 나는 이쯤에서 루소의 관점이나, 시스템적인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끝내도 될 듯하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러한 접근이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교훈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시스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개인의 문제는 남는다. 시스템적으로 개선이 이뤄지고 난 이후에도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위험 천만한 곳이며 불행은 나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다. 진정한 위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다. 위험에 닥쳤을 때 인간은 참 무력하다.

나의 질문은 도돌이표 처럼 돌아온다. ‘신은 잔인한 존재인가?’ ‘왜 삶에는 고통과 위험이 있는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해결 되지 않는다. 신에 대해 변론하고자 여러 신학자들은 답을 내놓는다. 역사적으로 라이프니츠 뿐 아니라 정말 많은 논쟁과 이야기 들이 있어왔다. 나는 누구의 손도 못들어 줄 것 같다.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직관적으로, 느낄 뿐이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볼테르도 루소의 답장을 받고서도 그다지 속이 시원하지 않았던가보다. 그는 아예 책을 한권 쓴다. 그게 바로 풍자소설로 유명한 ‘캉디드’이다. 소설 속에서 캉디드는 처음에는 ‘All is well’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낙관주의자 였다. 그는 정말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생고생을 한다. 고향에서 추방당하고, 군대에 납치되었다가, 사기도 당하고, 노예선에 팔렸다가, 결국은 결혼을 해서 안정되는가 싶었지만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다. 결국 그는 낙관주의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캉디드는 이런 말을 남긴다. ‘그러나 우리는 밭을 갈아야 한다.’ 캉디드는 거대 담론에 파묻히기 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candide_grafik

9. 미시적 해체의 오류 – 개인적인 접근 vs. 구조적인 접근

미시적 해체의 오류

문제를 끊임없이 미시적으로 나눈다. 결국은 아무 문제도 없고 책임자도 없다. 그저 끊임없이 나눌 뿐이다. 거시적 태도는 도식적 틀 속에 갇히곤 하지만, 미시적 태도는 폭력의 문제를 무화시키고 본질을 해체시켜 버린다. 분석이 아니라 핑계거리를 나열할 뿐이지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세세히 나누다 보면 아유슈비츠의 학살도, 용산 철거민 사건에도, 세월호에도 책임자는 없다. 지젝이 사이비 들뢰즈 아류들에게 지적한 대목이다. 게다가 나누다가 이득이 생기면, 나눈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계속 나누며 이득을 감춘다. (출처: 김응교 교수 페이스북)

균형잡힌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뜨거운 사안을 다룰 때는 더욱이나. 누군가는 내 글을 보면서 미시적 해체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겠다 싶다. 그럴지도. 나는 거시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폭력을 더 못견디는 사람이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다.

10. 마치면서

이제 정말 1년이 지났다. 끝으로, 누군가의 친구이고, 자식이었던 고인에게 삼가 명복을, 그리고 유가족에게도 위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권남훈 교수님 세월호 단상을 읽고

download

권남훈 교수님의 글. 이글이 쓰여진 시점 (작년 4월)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차분하고, 균형잡혀있는 시각에 감탄한다.

세월호에 대한 단상 1

이슈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라도 한마디 보태기에 바쁜 페북세상을 보면, 때로는 침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참 귀하게 여겨진다. 침묵하는 것이 방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하고 열심히 생각해서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대형사고는 연쇄적인 부실이 중첩되어 일어난다. 그 고리 중간의 누구 하나 만이라도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면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터. 그러나 아쉽게도 그 고리의 중간을 이어가는 ‘이름 없는 영웅들’은 빛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역할을 잘한다면, 사고는 없을 것이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세상을 그나마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고 생각한다.

허락받지 않고 글을 링크 걸었는데, 전체공유로 되어 있는 글이기에 권교수님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기계의 얼굴을 한 사람들

요새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대시보드(dashboard) 구축이다. 대시보드는 일종의 표준화된 레포트를 말한다. 어제 잠깐 동료들과 식사를 하면서 아무리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도 왜 대시보드에 에러가 발생할까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첫번째 이유는 자꾸 바뀌는 환경이다. 대부분 시스템/대시보드는 다른 시스템과 연결되어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설계할 때와는 환경이 달라지고 링크들이 깨지게 마련이다. 두번째 이유는 사람이다. 담당자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 동일한 담당자라도 바뀌는 환경을 새심하게 신경쓰지 않으면 프로세스가 엉켜서 에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회사일이라는 게 시간이 흐를 수록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시스템이 복잡해질 수록 일은 점점 분업화되고 서로 책임과 업무의 구간을 명확히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지 점점 파악하기 힘들어 지고, 점점 아무 생각없이 메뉴얼대로 일을 하게 된다. 금전출납 계원은 생각없이 영수증을 시스템에 입력하고, 보고서를 만드는 사람은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에 무감각해지고 그저 정해진 프로세스대로 기계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효율적/과학적/객관적인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일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되면 일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재미가 없고 그저 돈을 벌기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매일 하는 일에서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고 일의 의미나 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가치나 의미 같은 것은 계량화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뒤로 밀려날 뿐이다.

모던타임즈

(Image Source: 영화 ‘Modern Times’ (1936))

찰리 채플린은 20세기 초에 기계의 부속으로 변해버린 인간의 비극을 그린 영화를 발표했었다. 영화 모던타임즈는 채플린이 사회주의자라고 매도 당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는 자의반/타의반으로 미국에서 추방당한다. 당시 그는 블루칼라의 기계화를 그림으로 그려냈지만, 21세기의 지금에 와서는 화이트 칼라 역시 그저 기계 부속품에 지나지 않게 된 것 같다.

현대 문명이 이루워낸 놀라운 성과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계량화 할 것을 강요한다. 과학의 눈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사물의 가치는 사라진다. 내 어릴적 낙서가 적혀 있던 공책은 과학의 눈으로 볼때 종이와 잉크에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유명인이 되지 않는 한…) 남녀의 사랑과 결혼은 과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서로의 필요와 의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는 생일 조차도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태어나는 것 조차 의미가 없고, 세포의 분열 활동에 지나지 않는데 우연히 정해진 하루를 매년 축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의 몸은 세포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가치나 의미가 사라질 때 사람들은 기계가 된다. 우리는 세월호의 선장을 통해 그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그는 매일 그가 운전하는 배에 화물을 실은 것과 아이들을 실은 것에 의미의 차이를 부여하지 않는다. 세월호의 담당 관리들도 그러했고 관련한 관료들도 그러했다. 메뉴얼을 그대로 보고 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줄이려고 어떠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나는 다른가? 나 또한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고 사는가? 기계적으로 메뉴얼을 따라 살지 않는가? 나에게 주어진 일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요즈음 읽고 있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 때문인지… 세월호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요새 내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일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머리속을 맴도는 질문은 비슷하게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같은자리에서 질문을 모양만 바꾸어 가며 하고 있다.

그럴 때 나를 잠깐씩 현실 세계로 끌어 당기는 것은 딸아이와 마눌님이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 나에게는 해독인 것인가? 이또한 계량화 될 수 없는 가치 같은 것이다. 오늘 아이하고 더 즐겁게 놀아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 덧 (2015년 11월 11일) : 이 글의 주제를 한단어로 요약하면 디지털 테일러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테일러리즘 관련하여서는 최근에 포스팅한 적이 있다.

단식의 의미 그리고 함께 살아 간다는 것

최근 뉴스에 유민 아버지의 단식 소식이 자꾸 보여서 마음이 아프다. 세월호 참사 이야기 관련해서는 워낙 많은 목소리들이 있기 때문에 말을 아끼려 했다. 피해자 가족들이 있고 아직도 여파가 남아있는 사건이기에 말한마디 꺼내는 것 조차 조심스럽다. 다만, 단식이라는 행위는 누군가가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계속 눈에 밟힌다.

다운로드

단식 소식을 접했을 때, 내게 떠오른 인물은 간디였다. 유민 아버지가 간디 같은 성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간디는 진심을 보여주려고 했을 때 단식이라는 행위를 했고 누가 어떻게 말하던 지금 그분은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 느껴져서 이다.

간디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책중에 하나가 ‘간디 자서전’이다. 함석헌 선생이 번역했는데, 642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고 어려운 인도 지명과 추상명사들이 나와서 손대기가 쉽지는 않은 책이다. 나도 실은 아직 읽지 못했다. 다행히도 누군가가 잘 요약한 글을 올려주어서 조금 맛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참고한 블로그 글은 다음의 두 링크이다. (해를그리며 님의 블로그: 간디자서전을 읽고, 격암님의 블로그: 간디로본 우리의 모습) 두 글 다 찬찬히 읽어볼 만큼 좋은 글이다.

이분들의 글에 따르면, 간디 자서전은 간디가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은 아니다. 본인이 깨달은 진리를 설파하지도 않는다.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부제가 보여주듯이 본인이 살면서 구도해왔던 실험 과정을 차근차근 기술하고 있다. 대부분은 그가 믿었던 힌두교를 바탕으로 해서 금욕적인 삶과 채식으로 몸을 단련해 왔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본인의 도를 추구하면서 분쟁과 다툼이 있는 곳을 쫓아다닌다. 섬유노동자 파업, 세금 파업 등등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 그는 일방적인 폭력을 배제하였고 토론과 설득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진심을 보이기 위해 단식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폭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고 대화를 통해서 하나되고 화해하는 것을 추구했다.

간디의 이러한 방식은 현대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의 방법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는 마음으로 깊이 동의한다. 의견의 차이가 생겼을 때 명확하게 승패를 가르는 방법은 일시적으로 통하더라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양당정치에서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누군가는 선거공학적으로 승리를 거둘 테지만 이것은 패자에게 위기의식을 가져오고 오히려 패자는 다음번 승리를 위해 결집하게 된다.

내가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태도를 발견할 때는 이러한 말을 들을 때이다. ‘이 모든 것은 놈현 때문이다.’, ‘MB가 나라를 망쳐놨다.’, ‘공주님 때문에 나라를 떠나고 싶다.’ 이 말들은 사실 그저 푸념이다. 푸념을 내가 너무 진지하게 여기는 걸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네편과 내편을 갈라 놓고서 이제 내편이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으니 너는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통령에게 나라의 모든 것을 맡겨두고 이제 책임은 모두 그쪽이다. 대통령 선거가 중요하긴하지만 정치의 모든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물건을 사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고, 자녀를 키우는 모든 일이 크게 보면 정치의 연장선이고 우리의 목소리이다.

정치 이야기를 이왕 꺼낸 김에 몇가지만 더 써보려 한다. 정치 이야기는 워낙 첨예하게 갈리고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에 내가 좋아하는 주제는 아니다. 나는 불필요한 오해로 진보나 보수 어느 한쪽의 프레임으로 씌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정치와 떨어져 살 수도 없는 일이고 나도 이시점에서 내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해두고자 몇자 적어본다.

진보의 정체성이 무엇일까? 나는 진보의 정체성이 대안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거에서 우리가 야당에게서 듣는 목소리는 정권심판과 반새누리당이었다. 그들에게 대안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듣는 것이 그렇고 최소한 내가 듣는 것이 그렇다. 대안 없이 진보세력이 여당의 도덕성을 문제 삼거나 정권심판만을 이야기 한다면 설사 단기적인 승리를 얻는다 하더라도 길게 봐서는 패배이다. 싸움을 통한 승리는 상대를 완전히 짓밟는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하다. 선거를 통해 60:40으로 이기면 무엇하나? 그렇다면 이제 남은 40은 적인가? 이제 그들을 억지로라도 교육시키던가 아니면 늙어서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더이상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어떤 생산적인 논의의 가능성 조차 닫은 분들에게 무슨 이야기가 가능하단 말인가.)

보수층은 진보세력을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악으로 인식하고 진보는 현정권을 적으로 인식하여 그들과 싸워 이기려 한다. 적당히 중간을 지키자는 애매한 자세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현정권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정권심판은 대안이 아니고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들 대다수는 정치에 관심 없으며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새로운 가치를 주지 못하면서 기존의 정권에 반대하는 모습은 그저 싸우는 것으로 비추고 정치에 대한 염증만을 불러 일으킨다.

너무 곁길로 샜다. 다시 간디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짓자.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하지만 인도제국은 힌두와 무슬림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게다가 종교분쟁으로 인도인들은 서로를 죽인다. 이에 간디는 죽을때까지 단식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기적같이 전쟁이 멈춘다. 그러나 얼마후 간디는 암살당한다. 결국 인도제국은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 독립을 하게된다. 지금도 인도는 파키스탄과 크고 작은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

오늘로 28일째라고 들었다. 광화문에 계시는 그분도 큰일 생기지 않고 누구의 가슴도 찢어지지 않은 채로 진정한 의미의 화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캡처

이번주 목요일에 회사에서 ‘Take your child to work day’ 행사가 있었다. 행사는 오전과 오후 순서로 되어있었는데,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회사소개를 하고 회사 투어를 했고 오후는 카니발이 있었다. 카니발에서는 각 부서별로 부스를 마련해서 솜사탕을 팔거나 물풍선 던지기, 링던지기 같은 가벼운 게임을 했는데 수익금은 donation한다. 딸아이는 어려서 오전순서는 참여하지 않고 오후의 카니발만 참석했다. 카니발이 끝나고 내 책상도 잠깐 들렸는데 딸애는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동료들에게 인사도 시켰다. 아이도 즐거워 했고 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식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는 아이가 위험할까봐 뾰죽한 물건을 치우기도 하고, 몸에 좋거나 맛있는 음식을 아이를 위해 따로 챙겨두기도 한다. 아이가 교양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태교도 하고, 커서는 책도 읽히며 음악회나 미술관도 데려가고 박물관에 따라가기도 한다. 아이가 사는 세상이 좀더 좋았으면 하는 마음에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환경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도덕이니 규범이니 하는 것도 아이가 없는 사람의 마음과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천양지차이다.

한 블로거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희망’인 이유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가르쳐 주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격암님의 블로그: 아이들이 어른들의 희망인 이유) 우리는 지켜야할 소중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행동한다. 최소한 걱정한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무신경하게 지나쳤던 술집들이나 위험한 환경은 부모가 된 사람들의 눈에는 걱정꺼리이다. 아무리 악한이라고 하더라도 자식이 보고 있는 앞에서 떳떳하게 범죄를 저지르지는 못하는 법이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어버이날이 되면 몇몇 부모들은 카네이션을 달고 회사에 출근한다. 대부분 부장/차장님들이다. 평소에는 ‘쪼으는 데’에 숙달된 분들이시다. 내 기분탓인지 그분들도 카네이션을 달고 있는 그 순간 만은 조금더 너그럽고 유한 모습을 보이셨던 것 같다. 아이들은 우리가 한숨 돌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주는 존재이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내 정체성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성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었던 시절에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때 나를 지켜주었던 것은 아이에게 매일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하기로 한 약속이다. 매일 지키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이와 한 약속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사실 그 시간은 내가 가르키는 시간이라기 보다는 배우는 시간이었다. (예전글: 페르시아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에스더) 아이는 진정 어른의 선생이다.

저출산은 우리나라의 서글픈 현실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단순히 부담이나 짐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울고 웃고 그리고 우리는 배운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한 친구가 있다. 그의 다짐이 진심에서 나온 것인줄 알기에 또 아니라고 하기에는 별다르게 설득할 말이 없기에 더욱 서글프다. 부모만을 의지하며 연명해가는 갓난아이들, 세상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면서 질문을 쏟아내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의식하면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들이 있는 한 세상은 희망이 있다.

이쯤에서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미국에서 그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발 떨어진 입장이었다. 대다수 나의 친구들이 이미 부모가 되었기 때문인지 그들에게 충격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형참사 자체의 참혹함도 있지만 그 대상이 아이들이 었다는 데에서 더욱 큰 슬픔이 있지 않았나 싶다. 계속되는 뉴스와 소식들에서 대한민국은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강하게 느꼈던 것 같다. 부모의 심정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부모인 것을 자각하는 것 그 자체로도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은 행동한다. 그것이 아이들이 어른들의 희망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