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주목할 만한 2018 올해의 책 100권 리스트에서

그제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 리스트 감상을 올렸는데, 쓰다보니 책수다가 갑자기 떨고 싶어서 몇개 더 올린다. 책수다를 떨다보면 사그라들어가는 책에 대한 애정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고… 어쨌든. NYT 올해의 책은 10권이 올라오는데 이 리스트는 열흘 전쯤 올리는 주목할만한 올해의 책 100 개 중에서 추린다. 100개 리스트에서 관심있게 봤던 책들을 꼽아봤다. 100권 리스트는 아래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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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Notable Books of 2018 (NYT, 11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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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AL DISCORD – Erasmus, Luther and the Fight for the Western Mind By Michael Massing
예전에 포스팅을 올린 적이 있는데, 나의 관심사 중 하나는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애증 관계이다. 그리고 이책은 딱 그 이야기를 다룬다. 어찌 관심이 안갈 수 있겠는가. 다만 이 책의 가장 큰 난관은 분량이다. 1000 페이지. 벽돌책 중에 갑류이다. Chapter 1 만 읽고서 책장을 직행한 다음 장식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럼에도 두 인물의 드라마는 나의 지름신을 부르기에 충분하다. 고고한 학자 에라스무스는 혁명가 루터의 사상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나, 루터의 혁명을 거부한다. 역사는 종교개혁가 루터를 기억하지만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살아남아서 르네상스/인문주의라는 이름으로 후세에 영향을 남긴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는 계몽주의와 리버럴리즘의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현대로 끌고 오자면 이 둘의 대립은 cosmopolitanism과 유럽식 리버럴 분파 (에라스무스의 후예들?), 미국식 근본주의와 복음주의(현대판 루터의 후예들?) 경쟁관계로 볼 수도 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 돌아가자면 나는 성향상 에라스무스를 더 좋아한다. 그리고 루터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의 선이 굵은 명확한 논리, 지적인 용기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말년에 있었던 정치적인 횡보와 반유대주의의 씨앗을 뿌린 일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예전에 올렸던 에라스무스 관련 포스팅은 아래 링크
회색분자와 에라스무스 (2015년 3월 5일자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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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BLACK By Esi Edugyan
이 소설은 올해의 책 10권 목록에도 있다. 맨부커상 short list에도 올라간 책이라 나름 주목받은 책이기도 하다. 책의 배경은 1830년대 영국령 바베이도스. 참고로 1834년은 영국이 노예 해방을 한 해이고 책의 주인공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이다. 배경만 따져보자면, 흑인 노예의 고통스러운 삶이 펼쳐질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모험소설이다. 주인공 워싱턴 블랙은 그의 백인과 열기구를 타고 세계 여행을 한다. 열기구로 대서양을 건너기도하고, 북극을 도보로 건너기도 한다. 조난을 당하고 구조선을 타며, 결국에는 캐나다로 돌아온다. 나는 plot을 읽으면서 생뚱맞게도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가 떠올랐다. 어찌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지는 않다. 나디아 자체가 해저 2만리를 바탕으로 그려진 이야기이며, 시대적인 배경도 유사하고, 흑인이 주인공인 이야기인지라. 단지 소설은 그러한 스팀펑크 느낌은 없는데, 그냥 내가 그 이야기를 떠올린거다. 어쨌든 내가 이책을 읽게 된다면 왠지 나디아 이야기 추억에 다시 젖지 않을까 싶긴하다. 내가 그렇게 좀 생뚱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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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ED: A Memoir By Tara Westover
이책 역시 10권 리스트 중에 하나이다. 내가 이책을 만약 읽게 된다면 책이 서점에 많이 깔려서가 아닐까 싶다. 자주 보다보면 왠지 손에 가니까. 그만큼 베스트셀러이긴하다. 책 내용은 몰몬교 집안에서 홈스쿨링으로 자란 분의 자서전. 말이 좋아 홈스쿨링이지, 그녀의 홈스쿨링은 세상과의 접촉을 단절로 읽힌다. 그의 부모는 세상 지식을 독소로 보았고, 지하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쉽게말해 세상과 단절된 여성의 성장기이자 (이여자는 나중에 독학으로 옥스퍼드대에 진학한다.), 끊임없는 지식을 향한 욕구 이야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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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O THE RAGING SEA – Thirty-Three Mariners, One Megastorm, and the Sinking of the El Faro By Rachel Slade
이 책은 2015년 있었던 화물선 El Faro 침몰을 묘사한 논픽션이다. 이책이 인상적인 점은 대부분의 대화나 사건 묘사가 화물선의 블랙박스 기록과 침몰 순간을 찍은 승무원들의 기록, 가족과 친구를 향한 마지막 작별의 문자들에 기초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퍼팩트 스톰’ 같이 이전에 해상 재난을 다룬 대부분 기록들이 상상에 기초를 한다면 이제는 실제의 생생한 기록들로 내러티브를 재구성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재난 영화/기록에 그닥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래도 세월호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월호 역시 이런 기록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쯤이면 누군가는 그런 기록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4년이 지난 지금 돌아볼 때, 그게 그렇게 정치적인 사건이 되어야 했을까 싶고, 그저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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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N PRISON – A Reporter’s Undercover Journey Into the Business of Punishment By Shane Bauer
이 책 역시 10권 리스트에 들어간 책. 미국의 영리 교도소에 위장 취업으로 들어간 한 저널리스트의 르뽀. 미국의 교정제도에 대한 관심은 아무래도 산타님의 관련 포스트들을 보고서 생겼다. 미국은 (규모면으로) 넘사벽급의 세계 최대의 죄수를 가지고 있다. 정부 재정으로 감당이 안되기에 영리 교도소가 운영되고 있는데, 이게 전체의 10% 정도이다. 저자는 루이지에나에 형무소 직원으로 취업하는데, 위장취업이 들키기 까지 4개월을 일했다고 한다. 비참한 현대판 노예의 실상을 고발한다. 저자는 미국 영리 교도소가 예전 노예 농장을 모델로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미국 목화 농장의 최대 생산지 중의 하나가 영리 교도소 이기도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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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10권짜리 올해의 책 리스트 감상은 링크 참조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0. 들어가며

곧 세월호 참사 1주년이다. 추모의 의미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가 길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생각해보고, 읽어보고, 공부한 다음에, 글을 쓰는 정도 일 것 같다. 주제가 워낙 무거우니 만큼 글도 길다. 이렇게 긴 글임에도 나의 이야기는 일반론적인 또는 근본적인 이야기에만 머무를 예정이다.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이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지적 부탁한다.

목차

0. 들어가며
1. 헴펠의 역설 – 귀납적 지식의 한계
2. 귀납적 지식과 인과론 – 회의주의자의 세상 보기
3. 자신의 법칙으로 살아가기
4. 신정론 (Theodicity) –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5. 볼테르와 루소 – 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6. 시스템적인 접근 – 루소의 답장
7. 힐스버러 참사 – 20세기의 참사
8.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개인적인 접근
9. 미시적 해체의 오류 – 개인적인 접근 vs. 구조적인 접근
10. 마치면서

1. 헴펠의 역설- 귀납적 지식의 한계

헴펠의 역설(Hempel’s raven paradox) 이라는 것이 있다. 독일의 논리학자 헴펠(1905-1997)이 귀납적 추론과 직관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예이다. 설명을 위해 고등학교 때 수학시간에 배운 명제에 대해 복습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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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선은 역(conversion), 녹색선은 이(inversion), 파란색선이 대우(contraposition)이다. 대우관계는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예를 들자면, ‘1) 전기가 나가면(P)는 불이 꺼진다(Q).’ 와 ‘2) 불이 켜져 있으면 (~Q) 전기가 들어온 것이다. (~P)’는 대우관계이고 1)이 참이면 2) 역시 논리적으로 참이다.

헴펠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까마귀는 검다. (All ravens are black.)

(2)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 (대우) (Everything that is not black is not a raven.)

(3) 내 애완용 까마귀는 검다. (My pet raven is black.) : 1번을 지지하는 예시

(4) 이 녹색 물건 (검은색이 아닌)은 사과 (까마귀가 아닌)이다. (This green (and thus not black) thing is an apple (and thus not a raven).): 3번을 지지하는 예시

직관적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사과를 보면서 까마귀가 검다는 것을 증명하다니.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맞다. 헴펠의 역설은 귀납적 접근의 한계를 드러낸다. 헴펠의 역설에 의하면, 까마귀가 검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세상의 모든 검지 않은 것을 모아서 까마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헴펠의 역설에다 시간의 개념을 더해 볼까. 우리는 까마귀가 검다라고 말하기 위해 과거에 존재했던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모든 까마귀를 가져다가 검다라는 것을 확인해야 까마귀가 검다라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다. 만약 3년 뒤에 파란 새를 한번 찾아봤는데, 알고보니 까마귀였다면 이 역시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2. 귀납적 지식과 인과론 – 회의주의자의 세상 보기

헴펠의 역설은 존재한다. 그러면 귀납적 지식이 무의미 할까. 감히 내가 어찌 인류가 쌓아올린 방대한 지식의 대부분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은 수천년에 걸친 관찰과 경험의 축적으로 발견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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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볼까. 케플러(1571-1630)의 법칙(Kepler’s laws of planetary motion) 같이 귀납적인 관찰로 발견된 법칙은 뉴턴(1643-1727)의 만유인력의 법칙 (Newton’s laws of motion)의 토대가 되었다. 실험과 관찰, 확증이라는 과학의 방법론은 지식의 근간이고 인류의 지식은 그렇게 발전해 왔다. 사족으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귀납적인 지식이 아니다. 모든 물체는 질점(부피는 zero이면서 무게를 가지고 있는 가상의 점)으로 환원된다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형이상학적인 법칙이다.

귀납적 지식이 무의미하지 않다면, 나는 헴펠의 역설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굳이 말하자면 인류의 지식에 경외감을 가지되 틀릴 수도 있다는 겸허함을 가지자는 정도가 아닐까 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어떤 법칙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말하는 진리/법칙/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법칙이라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의지가 들어갈 여지가 적은 편이어서 비교적 보편타당하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인간의 일을 다루는 학문 (이를테면 사회과학, 경제학, 경영학 등등….)은 되먹임 (feedback)이 클 수 밖에 없다. 학자들이 석유자원의 고갈을 경고할 때, 인류는 셰일혁명으로 예측을 뒤집었다. 멜서스의 비관적인 인구론은 농업혁명으로 가뿐히 무시되었다.

너무 학문적인 이야기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누구나 인생관, 지혜 같은 것을 가지고 살고 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순간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다.’ ‘세상에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 ‘가족과의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 같은 철학/법칙들은 누구나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러한 지혜들은 개개인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확증되어진 것이고, 부모님이나 인생의 선배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의 법칙과 마찮가지로 삶의 지혜 또한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자신의 법칙으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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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열심히 살았어. 다시 산다고 해도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할 꺼야.”

최대치가 여옥을 보고서 죽기전에 한 마지막 대사이다. 학도병이었던 최대치는 세월의 풍파에 마적단, 남파 간첩, 인민군 장교, 빨치산으로 살아간다. 그는 도덕을 무시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그는 강해지고  싶어서, 또 나중엔 무력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한 길을 고집한다.

예전에는 박상원 같은 반듯한 사람이 좋았다. 이제 나이가 든 걸까. 최대치 같이 살아보자고 발버둥 치는 그런 사람들이 더 안스럽다. 누구나 열심히 산다. 그것이 사회를 변화시킬 정의이던지, 자신과 가족을 먹여살릴 돈이 던지, 아니면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던지, 도저히 내려 놓을 수 없는 자존심이던지… 인간은 무언가를 위해서 달려가고 있다.

열심히 살아온 누군가에게 당신은 존재 자체가 틀렸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나 삶의 법칙/관점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그것이 남을 해하는 것이던, 자연을 해하는 것이던 간에 말이다. 누군가에게 옳은 것은 자신에게 그른 것이기도 하다. 모순된 세상에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 철학자들은 세상에 대해 여러 관점을 내 놓는다.

17세기. 세상의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고 우주는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과 세계에는 기계적인 인과 관계만이 있을 뿐이라는 데카르트 적인 세계관이 부딪쳤다.

당시 두가지 세계관을 조화롭게 이해해보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라이프니치(1646-1716)이다. 그는 우주가 겉으로 볼 때 기계론적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데카르트적인 방식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기계를 창조한 신이라는 존재를 잊지 않고 언급한다. 그는 세계를 통해서 신의 목적과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4. 신정론 (Theodicity) –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근대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을 한다는 것은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했다. 가장 성공에 근접했던 과학자는 뉴턴이 아니었을까 한다. 뉴턴이 엄청난 양의 신학서적을 저술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뉴턴은 자신을 과학자가 아닌 신학자로 여겼다. 뉴턴은 과학 보다 신학에 관련된 책을 더 많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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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과 동시대의 과학자 중에 라이프니치(1646-1716)가 있다. (앞의 라이프니치와 동일인이다.) 미분을 발명하기도 한 그는 신정론(Theodicity)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유신론자였던 그는 전지(omniscience), 전능(omnipotence)하며 선한 존재 (omnibenevolence)인 신이 창조한 세계는 완벽하다고 보았다.

I form the light, and create darkness: I make peace, and create evil: I the LORD do all these things. (Isaiah 45:7)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킨다.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한다. (이사야 45장 7절)

*덧: 라이프니치는 아마도 이사야서의 이 구절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1710년에 신정론(Theodicy: Essays on the Goodness of God, the Freedom of Man and the Origin of Evil)이라는 책을 쓴다. 신정론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신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첫 번째 악은 모든 피조물의 불완전한 성질에서 비롯된다. 완벽하다면 그것은 신이고, 악할 수가 없다. 두 번째 악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악이다. 신은 자연의 악을 꼭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죄에 대한 벌로서, 또 때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더 큰 악을 저지하거나 보다 더 큰 선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의 악을 원할 수 있다. 세 번째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 악은 인간의 자유의 결과이다. 신은 가장 선한 것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고, 이에 따라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선’ 뿐만 아니라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신은 ‘악’을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악을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용: 철학여행까페[41]다양성과 조화를 추구한 철학자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론 또는 어떠한 다양한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 배후에는 신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5. 볼테르와 루소 – 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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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에게 정의가 있고 신도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 신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이라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다. 볼테르

1755년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한다. 이 지진으로 리스본 사람의 1/10이 죽는다. 볼테르는 이를 두고서 시를 쓴다. 그는 이 시로 당시 대세였던 라이프니치의 신정론을 비판한다. (영어 번역본 링크) 이 시는 왜 무고한 사람이 죽는가? 왜 하나님은 재난을 허용하는가? 재난을 만든 신은 왜 존재하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루소이다. 이 시를 편지로 받은 루소는 볼테르를 반박하는 답장을 쓴다. 루소는 ‘리스본의 지진은 신의 섭리가 아니다. 리스본 시내에 밀집 지역을 만들고, 다층 주택을 지은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재난에 대비해 적절한 대책을 마련했다면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답변한다. (영어 번역본 링크)

루소와 볼테르/라이프니츠를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루소는 재난에서 신의 존재를 고려 대상에서 빼버렸다. 말하자면 재난은 어디에서 왔는가.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를 멈추었다는 것이다.

18세기의 유럽은 철저하게 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곳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대형 사고가 나면, 누구나 신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현대인은 모든 인과를 신과 연결짓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분노를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심리이다. 나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을 때 분노와 답답함이 가득했다. 선장/회사/해경/정부를 파고 드는 하나하나 기사에 반응하고 우울해 했었다. 아마 리스본 대지진 때, 유럽인들은 비슷하게 신에게 의문을 제기했던 것 같다.

6. 시스템적인 접근 – 루소의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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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볼테르에게 답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 do not see how one can search for the source of moral evil anywhere but in man…. Moreover … the majority of our physical misfortunes are also our work. Without leaving your Lisbon subject, concede, for example, that it was hardly nature that there brought together twenty-thousand houses of six or seven stories. If the residents of this large city had been more evenly dispersed and less densely housed, the losses would have been fewer or perhaps none at all. Everyone would have fled at the first shock. But many obstinately remained . . . to expose themselves to additional earth tremors because what they would have had to leave behind was worth more than what they could carry away. How many unfortunates perished in this disaster through the desire to fetch their clothing, papers, or money?

내가 이해한 루소의 관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이러하다. 사고가 났을 때,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가에 집중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신), 사고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사고는 누군가 (또는 신)의 잘못으로 발생하지만, 동시에 사회 시스템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 (물론 루소는 시스템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조직 문화, 정부의 시책, 법령, 관련 산업의 인센티브 시스템 등등이 하나하나 맞물려서 사고가 발생하고 더 커진다. 사고에서 잘못한 사람과 조직을 찾기에 급급하면 시간이 흐르고 다른 이슈에 묻혀버리게 된다.

7. 힐스버러 참사 – 20세기의 참사

현대에 일어난 대형 참사 중에 힐스버러 사고가 있다. 1989년 FA 결승전에서 96명이 압사 사고를 당했다. 이 사건은 영국인 모두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캡처
(image source: Hillsborough was real living hell, The Munster Express)

위의 사진은 힐스보로 참사 당시 데일리 미러 표지이다.

이 사건이 일어 났을 당시 경찰은 무질서한 팬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유족들은 희생자의 오명을 씻기 위해 Hillsborough Family Support Group (HFSG)와 Hillsborough justice Campaign (HJC)을 구성한다. 이 사건 이후에는 영국 축구계는 매해 사고를 기억하는 추모를 한다. 또한 영국의 스포츠, 공연 안전 시스템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 과정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 겼다. 결국에는 사고의 백서라고 할 수 있는 보고서를 내기에 이른다. 이 보고서는 45만 페이지에 이른다. 다만 이 ‘제대로 된’ 보고서는 사고가 일어난 지 23년 만인 2012년이 되어서야 나왔다.

8.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개인적인 접근

돌아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아마 나는 이쯤에서 루소의 관점이나, 시스템적인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끝내도 될 듯하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러한 접근이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교훈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시스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개인의 문제는 남는다. 시스템적으로 개선이 이뤄지고 난 이후에도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위험 천만한 곳이며 불행은 나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다. 진정한 위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다. 위험에 닥쳤을 때 인간은 참 무력하다.

나의 질문은 도돌이표 처럼 돌아온다. ‘신은 잔인한 존재인가?’ ‘왜 삶에는 고통과 위험이 있는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해결 되지 않는다. 신에 대해 변론하고자 여러 신학자들은 답을 내놓는다. 역사적으로 라이프니츠 뿐 아니라 정말 많은 논쟁과 이야기 들이 있어왔다. 나는 누구의 손도 못들어 줄 것 같다.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직관적으로, 느낄 뿐이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볼테르도 루소의 답장을 받고서도 그다지 속이 시원하지 않았던가보다. 그는 아예 책을 한권 쓴다. 그게 바로 풍자소설로 유명한 ‘캉디드’이다. 소설 속에서 캉디드는 처음에는 ‘All is well’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낙관주의자 였다. 그는 정말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생고생을 한다. 고향에서 추방당하고, 군대에 납치되었다가, 사기도 당하고, 노예선에 팔렸다가, 결국은 결혼을 해서 안정되는가 싶었지만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다. 결국 그는 낙관주의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캉디드는 이런 말을 남긴다. ‘그러나 우리는 밭을 갈아야 한다.’ 캉디드는 거대 담론에 파묻히기 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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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미시적 해체의 오류 – 개인적인 접근 vs. 구조적인 접근

미시적 해체의 오류

문제를 끊임없이 미시적으로 나눈다. 결국은 아무 문제도 없고 책임자도 없다. 그저 끊임없이 나눌 뿐이다. 거시적 태도는 도식적 틀 속에 갇히곤 하지만, 미시적 태도는 폭력의 문제를 무화시키고 본질을 해체시켜 버린다. 분석이 아니라 핑계거리를 나열할 뿐이지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세세히 나누다 보면 아유슈비츠의 학살도, 용산 철거민 사건에도, 세월호에도 책임자는 없다. 지젝이 사이비 들뢰즈 아류들에게 지적한 대목이다. 게다가 나누다가 이득이 생기면, 나눈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계속 나누며 이득을 감춘다. (출처: 김응교 교수 페이스북)

균형잡힌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뜨거운 사안을 다룰 때는 더욱이나. 누군가는 내 글을 보면서 미시적 해체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겠다 싶다. 그럴지도. 나는 거시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폭력을 더 못견디는 사람이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다.

10. 마치면서

이제 정말 1년이 지났다. 끝으로, 누군가의 친구이고, 자식이었던 고인에게 삼가 명복을, 그리고 유가족에게도 위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책읽는 中: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Chapte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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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고 있는 책이 있다. 로버트 피어시그의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이다. 1974년 출간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철학책으로 알려진 이책은 한국에는 몇년전에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11살 아들과 17일간 모터사이클 횡단 여행을 한 이야기인 이책은 기본적으로 여행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문학/종교를 아우르는 방대한 철학적 탐험기이다. 이 책을 잡고서 읽다가 문득 문득 드는 생각들을 포스팅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Chapter 2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주인공은 모터사이클에 문제가 생겨 정비를 받는다. 정비공은 무심한 태도로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해머와 정(cold chisel)으로 냉각기를 두둘겨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주인공은 무언가 잘못된 느낌을 받고서 정비를 중단하고 모터사이클을 가지고 정비소를 나온다. 나중에 본인이 천천히 정비를 하면서 결국 문제를 찾아 낸다.

여기서부터는 몇자를 그대로 옮기고 싶은데, 내게 한글 번역본이 없는 관계로 직접 번역하여 옮긴다. 심각한 정도로 의역을 했고 내가 이해한대로의 재구성이다. ㅎㅎ

우리는 모두 구경꾼들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에 대해 별 고민이 없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20세기가 왜 이렇게 잘못가고 있는가?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품고서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단절(separation)’에 대해 조금씩 살펴보려고 한다. 서두르지 않겠다. 서두르는 것은 20세기의 독이다. 우리는 서두르는 동시에 사려깊을 수 없다. 나는 느리지만 사려깊게 그리고 꼼꼼히 살펴볼 것이다. 내가 시어핀(sheared pin: 위에서 말한 모터사이클 고장의 원인)을 찾았던 그 태도(attitude)로 말이다. 내가 시어핀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태도 때문이었다.

We were all spectators. Caring about what you are doing is considered either unimportant or taken for granted. On this trip I think we should notice it, explore it a little, to see if in that strange separation of what man is from what man does we may have some clues as to what the hell has gone wrong in this twentieth century. I don’t want to hurry it. That itself is a poisonous twentieth-century attitude. When you want to hurry something, that means you no longer care about it and want to get on to other things. I just want to get at it slowly, but carefully and thoroughly, with the same attitude I remember was present just before I found that sheared pin. It was that attitude that found it, nothing else.

모터사이클은 현대의 물질 문명과 기술을 상징한다. 사실 내가 슬쩍 건너 띤 chapter 1에서 저자는 기술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삶에 대해 말을 했다. 이제 chapter 2에 와서는 생각하지 않고 기술(현대 문명)을 받아 들일 때 그것은 우리를 망친다고 말을 하고 있다. 주체와 객체를 띄어내고 구경꾼이 된다면 우리는 폭력적이 되어 질 수 밖에 없다.

이야기가 너무 철학적이고 사변적이 되어간다. 원래 책의 화두가 그렇긴 하다. 이왕 이야기를 이렇게 끌고 간 김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Eichmann in Jerusalem)’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Eichmann_in_Jerusalem_book_cover

EichmannTrial

(image source:http://www.real-debt-elimination.com/real_freedom/Propaganda/holocaust/eichmann_trial.htm)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 계획 실무를 책임졌던 인물인데, 도피 생활 끝에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된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었던 것은 생각과 달리 아이히만은 악마적인 인물이라기 보다는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학살을 할 수 있었을까? 재판 과정을 지켜본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아이히만에 대해 이렇게 평을 한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것(thoughtlessness)’이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때, 그저 메뉴얼 대로 따르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문명의 모습을 한 괴물이 되고 만다.
최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만 덧붙이려고 한다. 내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사건 그 자체이다. (주: 다만 지금 뉴스에 나오고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은 사건 이후의 장례식에 대한 논의이다. 이 사건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장례식을 반년 정도 끌고 가고 있다. 장례식은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리일 터인데 누구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아무도 이 장례식을 끝내려고 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직접적/간접적 가해자 모두는 이러한 평범한 일반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 보통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메뉴얼 대로 따랐을 뿐이다. 심지어 몇몇은 그 메뉴얼마저도 무시하고 생각을 하기를 멈추고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얼굴을 선장에게서, 소유주에게서, 관료들에게서 보았다. 어쩌면 이미 세계가 너무나 커질 대로 커져서 그 속에 부품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을 잊고서… 그리고 공감하는 능력을 잃고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얼굴과 무심함을 바로 내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 그때가 가장 섬뜩하고 무섭다. 그 핑계는 다양하다. 효율적이 되려고, 바쁘니까, 모두들 그렇게 하니까… 등등. 표정없이 살지 말자, 생각하며 살자, 괴물이 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