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격률 이론으로 본 미국 수정헌법 2조

재미나게 읽은 이번주 이코노미스트 기사 하나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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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미국 수정헌법 2조를 언어철학자 폴 그라이스의 cooperative principle 협동의 원리를 들어 풀어준다. 수정헌법 2조는 총기를 소지할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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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rice (1913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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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폴 그라이스의 pragmatics 화용론 부터. 기사에서 인용한 폴 그라이스 이론은 협동의 원리 중에서 conversational maxims 대화격률이다. 용어가 여럿 등장해서 어렵게 들리지만, 상식적인 이야기라서 나 같은 언어학 비전공자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격률은 나는 법칙 쯤으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대화할 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법칙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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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격률 중에서 maxim of relation 관련성 격률이 있다. 이건 대화가 문맥상 관련이 있는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법칙이다. 그런데 그라이스 이론에 따르면 대화 참가자는 (누가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모두 문맥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일부로 이 법칙을 깨면서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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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이런거다. 남편이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데, 부인이 묻는다. “어디 갔다 왔어?” 남편 왈, “ 나 바람핀 거 아니야.” 그럼 이건 아내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관련성 격률에 따르면 어디갔다 왔냐는 질문에 관련있는 답을 해야하는데, 남편이 이 법칙을 깼기 때문에 답변은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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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maxim of quantity 양의 격률이란게 있다. 이건 대화하는 사람들끼리 필요한 정보를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공유한다는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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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예를 들어보자. 마눌님이 남편이 책읽는 모습을 보고서 묻는다. “뭐 읽고 있어?” 남편 왈, “책.” 이러면 남편은 양의 격률을 깬 거다. 마눌님이 이미 책을 보고 있는 걸 알고서 물었는데, 그냥 책이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양의 격률을 따른다면, 책의 제목이나 주제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남편은 양의 격률을 깨면서 “방해하지 마.” 같은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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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수정헌법 2조로 돌아오자. 수정헌법 2조는 의외로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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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State)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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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헌법은 1791년에 제정 되었다. 1791년 이라하면 지금같이 돌격소총이나 권총은 없을 때이다. 화승총, 그러니까 심지에다 불붙여서 총쏘던 그런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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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를 휴대할 권리가 명시된 구절이 미 연방정부에 저항할 주정부의 권리와 민병대를 조직할 권리를 전제하면서 언급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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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지적하면서 총기 규제론자들은 총기를 가질 권리는 민병대를 조직하는 일에만 한정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 논리에 따르면 현대에 와서 미국인은 총기를 소지 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18세기 의미의 민병대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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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덧붙이자면 당시 민병대는 정부가 소집하면서 무기를 지급하는게 아니고 자기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무기를 들고 나와서 모인다. 한국 기준으로 예를 들자면 민방위 소집할 때 무기를 나눠 주는 게 아니고, 집집마다 자기 총을 가지고 있다가 동원령이 선포되면 그 총을 가지고 나오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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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폴 그라이스의 대화격률로 가보자. 대화격률을 따르면 문장에서 무의미한 정보는 없다. 민병대를 말하는 구절과 총기소지의 권리를 말하는 구절은 모두 개별적으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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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DC v Heller case에서 대법원관 Antonin Scalia 역시 대화격률과 같은 논리를 사용한다. DC v Heller 건은 수정헌법 2조가 사냥이나 호신용으로 총기를 소지할 권한을 보장하는 가에 대한 소송이었다. Scalia는 두 구절이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maxim of relation) 그는 판결문에서 개인의 총기 소지는 free state의 보안에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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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n Scalia (1936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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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수정 헌법 2조는 호신용 총기 소지를 허용한다고 따로 명시하지 않는다. 만약 법안 제정자가 호신용 총기 소지를 의도했다면, 그를 추가로 명시하는 행위는 양의 격률도 위배한다. (굳이 명시할 필요가 없음에도 명기 했기 때문에.) 반대로 법안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필요한 정보를 누락해서 격률을 위배한다. 그러니까 양의 격률을 따르면 수정헌법 2조는 호신용 총기의 소지를 금하는 의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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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DC v Heller 건 영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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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언어학으로 보면 수정헌법 2조가 꼭 총기소유를 옹호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는가 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Jeffrey Kaplan이라는 언어학자의 의견도 소개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총기소유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더이상 18세기 관점의 민병대도 없고 free state도 없기에 전제가 거짓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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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물이 무한정 사용이 가능한 자원이라고 하자. 그래서 지주들이 모여서 땅을 개간하는데 쓰는 물은 무한정 쓸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100년이 지나서 물이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고 한자. 그러면 그 법이 여전히 유효한가? 화용론의 관점에서는 이미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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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정리를 여기서 마친다. 너무나도 간략한 수정헌법 2조. (애초에 헌법에다 호신용 총기 소유는 금한다 라고 했다면 헌법의 의도가 확실했겠지만…) 이를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문맥에 따라 해석하는 일은 현대 미국인들에게 큰 숙제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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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헌법 2조를 제정한 이도 이제는 없고, DC v Heller를 판결한 Scalia도 고인이다. (물론 그들이 악의로 미국 총기 문화를 만들고자 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의 말은 남아서 아직까지 수많은 현대 미국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시위와 폭력에 대하여

NYT에 실린 Nicholas Mirzoeff 교수 (NYU media학과) 의 대담을 공유한다. 요약과 함께 내 생각이 섞여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원문을 참조할 것을 부탁드린다.

시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시위가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라는 보도를 자주 듣는다. 그 경우, 시위가 폭력적이다, 아니다의 기준은 시위과정에서 기물 파손이 있었는가, 시위대와 경찰 간에 물리적 충돌이 있었는가, 경찰이 물리력을 행사했는가에 있다.

그러나 시위에 있어서 폭력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주위에서 같은 뉴스 보도를 보고서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매일 보지 않는가. 왜 그럴까.

일반적으로 시민은 정부의 폭력에 대해서 관대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타당하다. 사회 계약의 관점에서 시민은 ‘보호’, ‘안전’, ‘치안’을 대가로 정부에게 폭력의 독점권을 양도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치안’유지를 위해 사회의 ‘안정’을 위해 규제를 하고 공권력을 행사한다.

시민들이 정부의 폭력 독점을 인지하는 시점은 정부의 정당성이 약화되었을 때이다. 대표적인 예로 ‘독재 정권’에 대한 시위와 ‘식민 정권’에 대한 항거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도시락 폭탄 투척 사건을 보자. 일본 제국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이는 명백한 폭력이고 테러 행위이다. 당시 대다수의 일본 시민이나 일본의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조선사람들은 이를 테러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정당성을 지지하지 않는 (나를 포함한) 현대의 한국인들은 윤봉길의 행위를 의거로 본다.

동일한 관점을 ‘민주화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부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시위대는 폭도들이고, 이를 진압하는 정부의 공권력은 정당한 질서 유지 활동으로 읽힌다. 그 반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이미지가 이러한 상반된 시각의 대립과 균형(?)을 한번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를 테면 역사를 바꾼 보도 사진들이다. 대표적으로는 최근 시리아 난민을 주목하게 만든 Aylan Kurdi의 사진이 그러하고, 한국의 예로는 김주열의 주검사진 (또는 소문)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도 사진은 정치적이다. (여기서 나는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가치 중립적으로 사용했다.) 사진은 시선과 메세지를 담기 마련인데, 폭력의 독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피해자의 사진은 약자의 시선을 보여주고, 폭력을 독점하는 정부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정부의 폭력 독점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정부의 폭력 독점을 견제하는 대표적인 예는 미국 수정헌법 2조이다. 그리고 수정헌법 2조는 미국에서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석이 되고 있다.

나는 수정헌법을 둘러싼 논쟁의 옳고 그름과 이론적인 배경을 떠나서,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인 총기 소유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