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땅, 예루살렘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 미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다는 발표를 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기에 지금까지는 누구도 이를 실행에 옮긴 적이 없다. AIPAC의 영향력 때문에 부시도 공약으로만 이야기 했을 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이제는 이 이슈가 예전보다 국제정치에서 덜 민감한 사안이라는 뜻이거나, 트럼프가 워낙 파격적이라는 의미이겠지…)

예루살렘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이 모두 신성한 땅으로 여기는 곳이다. 유대교는 성전이 있었던 곳이기에, 기독교는 이에 더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이기에, 이슬람은 모하메드가 하늘로 승천한 곳이기에 그러하다. 현대에 와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크게보자면 이스라엘-중동, 더크게는 기독교-이슬람)의 중심이 되었다.

2년전에 구약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를 되새긴 적이 있다. 생각이 나서 공유한다. 구약은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이 같이 경전으로 인정하는 책이기에 두 종교에 모두 동일한 의미가 있다.

혹시나 모를 오해를 막고자 덧붙이자면, 예전 포스트가 이스라엘이나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혀 정치적인 입장없이 성경을 그자체로 독해했던 내용을 옮긴 포스트이다.

몇천년전 이야기를 현대의 문맥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일은 각자가 딛고서있는 믿음과 지적인 풍토, 정치적인 신념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예전 포스트
시편 121편: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2015년 11월 12일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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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예루살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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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난사와 악에 대하여

 

지난 주말 있었던, 라스베가스 총기난사를 트럼프 대통령은 pure evil이라고 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서 시편 34편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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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is close to the brokenhearted and saves those who are crushed in spirit (NIV Psalm 34:18)”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 (새번역 시편 34편 18절)”
 
트럼프가 인용한 성경 구절은 직접적으로 악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편 34편의 문맥을 보면 (바로 2절 앞에서도 언급이 되듯이) 시의 저자인 다윗이 느끼는 위로는 악을 징벌하는 절대자의 정의 구현 약속 안에서 이루어진다.
 
“but the face of the Lord is against those who do evil, to blot out their name from the earth. (NIV Psalm 34:16)” “주님의 얼굴은 악한 일을 하는 자를 노려보시며, 그들에 대한 기억을 이 땅에서 지워 버리신다. (새번역 시편 34편 16절)”
 
공연장 옆 건물 32층에서 (개조된) 기관총을 난사해 400여명이 넘는 사상자가 생긴 사건을 두고서 an act of pure evil이라고 부르는 데에 동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건을 듣고서 사람이 사람에게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경악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evil이라는 단어에 대한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찜찜함은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한 반감에서 온 것은 아니다. 이러한 류의 참사에 대해 evil이라고 칭하는 것은 트럼프 이전 부터 있어왔던 정치적인 수사이다.
 
작년 올랜도 참사 직후, 스티븐 콜베어 쇼 (미국 토크쇼)에서 보수논객 Bill O’Reilly 빌 오라일리를 초대했다. 오라일리는 “This guy was evil.” 이라고 한다. 그리고 콜베어는 묻는다. “What is the proper response to evil?” 오라일리의 답변은 명쾌하다. “Destroy it. You don’t contain evil, because you can’t. You destroy evil. ISIS is evil, and Mateen is evil.”
 
악을 지칭하는 정치수사 중에서는 2002년 부시의 ‘악의 축 axis of evil’ 언급이 가장 유명하다. 그는 당시 이란, 이라크, 북한을 3대 악의 축으로 꼽았다.
 
어떠한 존재를 악으로 지칭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악의 존재를 없애고 승리해야 한다는 논리적인 귀결을 가져온다. 세계를 선과 악의 대결로 이해하는 조로아스터교는 궁극적으로 선의 승리와 악의 패배라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problem of evil 악의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그럼에도 어느 하나 속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는, 연구를 해왔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어떻게 악이 허용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그리고 칼빈에까지 이른다.
 
내게도 이는 항상 쉽지 않은 문제였다. 악의 문제에 대해서 최근 가장 공감한 생각은 악에 대한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의미가 없을 뿐이니라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악에 대한 질문은 도덕적인 권위를 전제하고서 시작한다. 악에 대한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로 바꾸는 것이 맞다. 그게 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이다.
 
악을 강조하는 정치적인 수사에서 오는 다른 찜찜함은 악을 강조하면 시스템의 문제를 간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전통에 따라) 악이라는 것이 인류의 조상에게서부터 내려오는 원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면, 어떠한 사회 제도나 규정도 그 악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 악에 대해서 (종교적인 해결책을 제하고 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은, 악을 규정하고, 그리고 악의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이를 총기 이슈에 적용해서 말한다면, 총기 범죄는 악한 사람에게서 일어나기 때문에 총기 규제가 근본적으로 무용하다는 결론을 내게 된다.
 
세상에 일어나는 다양한 병리현상을 ‘사회적인 (또는 구조적인) 폭력’으로 보는가 아니면 개인의 도덕적인 선택의 문제로 보는가는 의견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나는 이 두가지 관점 중 어느 하나에도 만족한 적이 없다. 나는 총기 난사에 관련해서 이 문제를 그렇게 근본적으로 끌고 가는 자체가 너무나도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까지 끌고 가면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미국의 정치 시스템에 피로함을 느낀다.
 
+ 덧. 아래는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 전문이다.

오지만디아스와 시편 89편

자연과 인간 문명의 허망함에 대해서 언급한 김에. (이전 포스트)

article에 언급된 영시를 찾아보았다. 일부를 인용한다.

Ozymandias by 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앞부분 생략)

And on the pedestal these words appear:
아래 받침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My name is Ozymandias, king of kings: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 왕이다.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내 위업을 보라, 그대들이여, 그리고 절망하라!”

Nothing beside remains: round the decay
그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Of that colossal wreck, boundless and bare,
그 거상의 잔해 주변에는 끝없이 텅 빈,

The lone and level sands stretch far away.
외롭고 평평한 사막이 멀리 뻗쳐 있다.

오지만디아스는 람세스 2세의 그리스식 이름이다. 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파라오로 추정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집트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에 위대했던 한 왕의 조각상에는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라고 써있었다고. 그 웅장한 조각상이 사막위에 버려진 모습은 시인의 마음에 어떤 감흥을 일으켰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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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pedia)

아울러서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있어서 같이 인용해둔다.

내 생명이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는 모든 인생을 정말 허무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자가 어디 있으며 무덤에 들어가지 않을 자가 어디 있습니까? (현대인의 성경, 시편 89:47-48)

그리고 참고로 시의 저자 퍼시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남편이다.

시편 121편 :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들어가며

오늘은 성경 이야기.

전에도 언급했지만, 내가 포스팅하는 목적은 지나가는 생각을 활자에 붙잡아두고 정리하기 위함이다. 이 글도 그런 이유로 썼다.

(내 생각엔) 비교적 객관적으로 성경을 기술 했으나, 기독교에 앨러지 반응이 있는 분들이 굳이 참아가며 읽을 필요는 없다. (재미없고 길어서 읽을 것 같지 않지만.)

시편을 시로 읽기

시편은 성경의 다른 책과는 달리 시로 쓰여졌다.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고 시적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번역시가 으레 그러하듯 원어의 형식미는 옮기기가 어렵다. 그래서 시편을 읽으면서 이게 원래 시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할 때가 많다.

시편 121편은 꽤 유명하다.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한번도 121편을 시로 읽어본 적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라면 당연히 있어야할 음율, 절제된 형식, 응축된 사고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내가 읽어본 중에는 NIV 버전 번역이 시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NIV 번역 전문을 옮긴다.

A song of asc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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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ift up my eyes to the mountains—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My help comes from the Lord,
the Maker of heaven and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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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not let your foot slip—
he who watches over you will not slumber;
indeed, he who watches over Israel
will neither slumber nor sl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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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watches over you—
the Lord is your shade at your right hand;
the sun will not harm you by day,
nor the moon by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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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will keep you from all harm—
he will watch over your life;
the Lord will watch over your coming and going
both now and forever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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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옮기고 보면 121편이 4연으로 된 시라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일정한 형식 또한 갖추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각 연의 1행과 2행이 한쌍이고, 3행과 4행이 또다른 한쌍이다. 한 연에서 1,2행과 3,4행은 대조의 관계일 때도 있고 (1연 같은 경우), 보충해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4연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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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돈된 시의 양식은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준다. 잘은 모르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읽는 다면 읽는 맛이 더욱 강하리라 추측한다. 시편은 원래 낭독을 위한 글이고 선율이 붙은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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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시를 분석해 본 사람이라면 같은 방식으로 시편의 시들을 분석해도 재미있다. 121편에는 대조적 심상,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서로 대구하는 구절, 반복되는 이미지 같은 분석거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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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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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V에는 시편 121편의 제목이 ‘a song of ascents’으로 되어 있다. 한글로는 ‘올라가는 노래(?)’ 쯤 될 것 같다. (한글) 새번역에는 좀더 친절하게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KJV나 다른 번역본을 보아도 성전과 순례자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새번역이 좀더 친절하게 의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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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로 치자면 추석, 설날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대신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이 있다. 어떤 면에서 무슬림이 메카를 순례하는 일과도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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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성전에 올라가는, 즉 예루살렘을 걸어서 올라가는 유대인의 입장이 되어 시를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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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시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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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저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산을 본다. 한글로는 단수인 산이지만 영어로는 복수인 mountains이다. 예루살렘 성을 둘러보면 동쪽에 감람산(Olive Mountain), 서쪽에는 시온산 (Zion Mountain)이 있다. 성 자체도 모리아 산(Moriah Mountain) 위에 위치한다.  예루살렘은 산으로 둘러쌓인 천혜의 요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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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ains
(이미지 출처: http://www.returntogod.com/jerusalem/mountains.htm)
1)감람산, 2)모리아산, 3)시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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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 때문일까? 예루살렘 언덕길을 올라가는 사람들은 요새를 보면서 웅장한 느낌을 받는 것 같다. 비슷한 소재의 노래가 또 있다. 시편 125편이다. 125편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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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감싸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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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래는 순례자가 산을 올려다 보는 지점까지 동일하다. 그러나 그 이후는 다르다. 125편은 산에서 하나님을 연상하여 그 속성을 찬양한다. 반면에 121편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산을 창조한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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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125편에서는 (산의 속성)=(하나님의 속성)이고, 121편에서는 (산)<(하나님)이다. 121편에서 묘사하는 하나님은 우주적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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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1편과 감정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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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문학은 화자의 경험(또는 상상)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것을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능동적으로 연결지을 때에 문학이 힘을 가진다. 이 과정을 다른 말로 하면 감정이입이다. 121편에서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후크(hook)는 1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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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시편 121편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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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일차 독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싼 산들과 예루살렘 요새를 보면서 안정감을 느낀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현대의 독자가 시를 읽는다면 산 대신에 나를 둘러싼 보호막을 떠올리는 것이 시를 읽는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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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를 블로그에 쓴 적이 있었다. 불확실성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가장 세속적이면서 현대적인 방법은 물질적인 해법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것은 합리적인 해법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입장에서 예측이 가능한 리스크를 최소화 하며 대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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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자면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매일 끼니를 챙겨 먹는다. 교통사고를 피하고자 교통법규를 준수하고 산다.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입고, 외부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을 짓는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열심히 수능을 준비한다. 인간은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확실성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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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in 70AD -- a painting by David Roberts (1796-1849).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in 70AD —
a painting by David Roberts (1796-1849).

(image source: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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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요새는 AD 70년에 로마 티투스장군에게 함락된다. 결사 항전을 선택했던 유대인은 대다수 굶어 죽었고 그들이 의지하던 요새는 완전히 무너진다. 로마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270만의 예루살렘 사람중에서 110만명이 죽고, 9만 7천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하니, 초토화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멸망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책이름은 The War of the Jews이고 영역본은 전문이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다. (링크) 이후 티투스는 개선 장군이 되고, 칠년 후에 황제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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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 당시 고대인의 숫자 개념은 조금 달랐다는 것은 감안해서, 270만/110만 이라는 숫자는 조금 과장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참고2. 요세푸스의 책에서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이야기는 Book 5, Book 6에 나온다. 참고3.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는 8권에 예루살렘 몰락이 기술되어 있다. 로마인 이야기는 널리 읽히는 책이지만, 그녀가 유대/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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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121편을 읽다 보면 창조자인 하나님에게까지 시선이 올라가게 된다. 내가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은 1연에서 였다. 개인적인 삶의 경험과 실패의 기록들, 인간적인 보호막이 때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깨달음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보면 시편의 저자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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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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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에서 감정이입에 성공한 독자들은 2연, 3연, 4연을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후는 창조자이며 우주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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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은 졸지 않는 하나님께서 낙상을 막아준다는 이야기이고,
3연은 그가 그늘이 되어서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에서 지켜준다는 이야기,
4연은 영원의 존재가 언제나 순례자들을 지켜준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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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이스라엘의 사막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는 순례자가 겪을 수 있는 현실적인 위협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우주적인 존재가 그들을 지켜준다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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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이 노래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시가 어떻게 낭독되고 불려졌을 지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2연/3연/4연을 같이 부르면서 감정을 고양시키고 기뻐했을 것이다. 이는 현대의 교회에서 시편으로 만든 찬양을 부르면서 교인들이 같이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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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그리스도인이라면, 힘들 때 이 시를 읽으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 과정은 문학이 주는 치유의 효과와 유사하다. 그 위로의 감정은 순례자의 처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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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족 하나 만 더. 나는 읽으면서 하나님이 그늘이 되어서 순례자를 밤의 달빛에서 지켜 주신다는 이야기가 이상했다. 달빛이 무슨 해를 끼친단 말인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달빛을 오래 쐬면 정신병이 온다고 믿었다. 생각해보니, 미치광이라는 뜻의 lunatic이라는 단어는 달(lunar)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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