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랭의 신학펀치 – 제6회 ‘창세기 이야기는 왜 다른 신화와 비슷한가요?’

Origianlly Posted 03/12/2014 @ facebook

많이 생각 해봤지만 그다지 입밖으로 내본적은 없는 주제다. 과학과 기독교, 신화와 성경… 창조과학의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과학적인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받아왔다. 어쨌든 구원교수님이 마지막에 언급한 두가지 입장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두번째 입장, 즉 인류는 역사적으로 공통적인 경험을 해왔고 이것이 각기 다른 신화에서 유사한 모티브로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사람이 성경을 썼다는 사실이 성경의 가치를 절대 훼손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옛날 성경이 쓰여질 때부터 오랜 세월 성경이 전수되고 확립 되어지는 과정에서 성령이 주재하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믿음 아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낸시랭의 신학펀치 – 제4회 ‘큐티(QT)식 성경읽기는 문제가 되나요?’

Originally posted 02/19/2014 on facebook

큐티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 중에 간혹 큐티를 오늘의 운세 보듯이 하는 분이 있다. 어느 한 단어나 한 구절에 꽂혀서 성경 전체의 맥락을 무시한 채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하여 적용하려고 드는 분… 신년이나 생일에 맞춰 그날의 말씀을 찾아 랜덤한 성경구절을 찾아 그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는 분 등… 이러한 모습이 신년운세를 알기위해 점집을 찾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나님 말씀을 매일 진심으로 읽는 것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큐티는 참으로 유익한 신앙적 전통이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에게 큐티는 적용꺼리를 억지로 꺼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종종 지워주곤 한다. 그러한 적용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성경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간혹 설교에서조차 끊어 읽기 큐티식 성경해석을 발견했을 때는 그 답답함이 얼마나 큰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성경을 맥락에 맞게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듯 싶다.

복음 자체가 어려운 내용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시 가장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서 가르키신 말씀이니 말이다. 하지만 교회사를 되돌아 보자. 교회가 가장 세속화/계급화 되었던 중세시대에 낮은 자를 위한 예수님의 복음은 헬라어/그리스어로 숨겨져서 가진자의 성경이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마틴루터가 종교개혁 초창기에 했던 일(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서 금속활자로 성경을 보급했던 것)은 무척이나 적절하다. 아마도 현대의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일 중에 하나는 평신도에게서 너무나 멀어져버린 성경 말씀을 제대로/쉽게 풀어서 낮은자에게 돌려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 종교개혁/미국 대각성운동이 그러했던 것 처럼 그러한 일이 다시 이루어 진다면 그 유익은 교회 뿐 아니라 우리가 몸담은 세상에도 바람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짧게 쓰려다 오늘도 사설이 길어 졌다… ㅋ

(덧붙임 02/12/2015)

예전에 지나가듯 잡상을 적어둔 내용인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날이 너무 서있다. 근대 의외로 이글이 조회수가 높다. 지울까도 싶었지만, 당시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현재도 동일하기 때문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글에서는 큐티의 단점 만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큐티는 분명히 매일매일 성경을 마음에 새기려는 분들에게 귀한 도구이다. 다만 지나친 일반화, 원 의미의 변질,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적용의 위험성 또한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이글을 읽고서, 평소 성경도 안읽고 성경 공부도 안하는 분이 ‘누가 그러는데, 큐티 안좋은 점도 있다고 하더라. 큐티 안해도 된다.’ 이렇게 말씀 하시면 정말 오해하시는 거다.

낸시랭의 신학펀치 – 제2회 ‘세종대왕은 지옥에 가나요?’

내가 느끼기에 성경은 그리 친절한 책은 아니다. 성경은 각 책마다 다른 저자의 관점과 뚜렷한 목표의식이 닮겨 있긴 하지만 인생의 모든 문제와 질문에 시원시원한 즉답을 주지는 않는다. 복음이 전파된 적이 없던 곳에서 구원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를 괴롭혔던 적은 없지만, 몇몇 분들에게는 꽤 중요한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프로그램 후반부에 나오는 공동체적인 관점에서의 구원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은 내게도 생각의 단초를 던져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