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설교는 기적과 신앙에 대해서였다.
아무래도 부활절에 곱씹을 만한 주제여서 예전에 갈무리해두었던 글을 다시 읽어봤다. 칼럼 주제는 의심하는 신앙에 대해서이다. 즐겨읽는 NYT 철학 연작 칼럼 기사이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에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 신앙에서 거리낌이 된적이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 관심사인 적도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기적에 대한 각자의 태도가 개개인의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오늘 설교는 기적과 신앙에 대해서였다.
아무래도 부활절에 곱씹을 만한 주제여서 예전에 갈무리해두었던 글을 다시 읽어봤다. 칼럼 주제는 의심하는 신앙에 대해서이다. 즐겨읽는 NYT 철학 연작 칼럼 기사이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에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 신앙에서 거리낌이 된적이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 관심사인 적도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기적에 대한 각자의 태도가 개개인의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한 목사님께서 스탠포드 철학백과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EP) 에 있는 삼위일체 교리 발전사를 번역해 올려 주셨다. 재미있게 읽었기에 저장해 둔다.
목차
1부: 서론
2부: 기독교 성경
2-1: 구약
2-2: 신약
3부: 신경들의 발전
3-1: 325년까지
3-1-1. 삼위일체와 유일신 (The One God in the Trinity)
3-1-2. 테르툴리아누스
3-2: 325-381: 아리우스 논쟁
3-3: 니케아 합의 이전
3-3-1.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3-3-2. 아우구스티누스
3-3-3. 아타나시우스 신경
4부: 중세의 삼위일체 이론들
4-1: 토마스 아퀴나스
4-2: 요한 둔스 스코투스
5부: 중세 이후
아우구스티누스 (354-430)
.
저는 기독교 관련 포스팅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제가 별로 종교적인 사람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기독교가 제게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신앙을 빼고서 포스팅을 하는 것은 모순이더군요.
꽤 긴 연재였는데, 주제가 너무 무겁다보니 다른 주제를 중간에 포스팅하기도 생뚱맞았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소소한 제 얘기를 주로 할 생각입니다. 제가 그린 그림도 올리고, 딸램 이야기도 하고, 미국사람들 뒷담화도 할 생각입니다. 뭐, 가끔은 기독교 이야기도 하겠지요.
연재를 보시고 혹시라도 기독교에 관심이 생긴 분들은 질문을 주셔도 좋습니다. 체계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잘(?) 답변을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나누는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럼 한국에 계신분들은 좋은 밤 되시고, 미국에 계신 분들은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아참 중동/유럽에 계신 분들을 빠뜨렸네요. 지금 이미 주무시고 계시겠군요.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중동에 계신 L형, 그리고 E형수님도 좋은 밤 되세요.
딸램이 놀아달라고 조르네요. 이만 자리를 뜹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들어가며: 대부분 저의 포스팅은 기독교 신앙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만, 오늘 이야기는 개인 기독교 신앙에 관련한 이야기이고 기독교의 전제가 깔려 있므로 기독교에 알레르기를 일으키시는 분은 읽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늘 쓰는 글도 역시나 일종의 일기입니다.
(Image source: wikipedia) 사해버전 성경 (Est. 408 BCE to 318 CE)
내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점검하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이고 하나는 ‘십자가’이다. ‘성경’은 나의 신앙이 성경의 하나님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성경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에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부활하신 십자가 사건과 보혈의 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는 믿음이 다른 종교와 다르게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인식에서 그러하다.
성경을 어떻게 믿느냐는 쉽지 않은 신학적인 문제이다. 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답하는 과정은 수월하지 않다. 종국에는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나로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내게는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오늘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고 생각을 정리 해보고자 이 글을 적어본다.
첫번째는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저자가 작성한 원문 그대로 인가 하는 문제이다. 가장 최근에 쓰여진 신약 같은 경우도 2000년이 지난 문서이고 구약 같은 경우는 350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원본이 아니고 가장 원본에 가깝다는 사해문서 조차도 몇백년에 걸쳐 베껴 쓰인 책이다. 또한 정경도 몇차례의 공의회 이후에 정립된 것이니 우리가 오늘날 보는 성경은 원본에 얼만큼 가까운지 알기 힘들다.
두번째 이슈는 최근에 생각하게 된,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진리라는 것은 언어에 갖혀있다. 언어에 갖혀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언어는 세계를 표현하지만 본질과 정확하게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의 사고가 언어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고자체도 언어 속에 갖히기도 한다.
두가지 이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느껴본 적이 있겠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다른 관점과 자아가 생긴다. 물론 분명히 나는 똑같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영어를 사용할 때와 한국어를 사용할 때의 나는 미묘하게 다르다. 제스쳐도 달라지고 사고를 전개하는 방식도 달라지며, 목소리나 발성법까지 달라진다. 이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차이를 만들 뿐 아니라 때로는 내 관점까지 바꾼다.
이를테면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나는 무의식 중에 상대가 나보다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를 염두에 둔체 말을한다. (이것은 존댓말이 없는 영어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고 한국어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인식 체계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라는 한계가 있는 도구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헬라어/히브리어로 제한되어 지는 것인가? 또 우리가 읽는 성경의 헬라어/히브리어는 현대의 우리가 이해하는 헬라어/히브리어와 일치하는 것 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제 아이와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했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일테지만 그것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 왔다. 언젠가 누구에게 들었본적이 있는 이야기 일테지만, 내게 새롭게 느껴졌으니 감사할 일이다.
바로 성령이다. 나는 하나님(성부), 예수님(성자)에 집중하고 성령에 대해서는 무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진리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인 것이다. 성령을 단순히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존재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어제 아이와 읽었던 말씀은 베드로 후서 였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후서 1:20-21
참고로 여기서 예언은 앞을 보는 예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서와 모세오경 그러니까 구약을 말한다. 즉 신약 이전에 쓰여진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언어의 불완전함과 인간적인 저자의 관점까지 넘어서는 성령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자면, 필사의 불완전함/정경 체택 과정의 인간적인 부분/그리고 번역의 불완전함을 뛰어 넘어 성령은 역사한다고 믿는다. 성령이 없이는 교회와 신앙이 쌓아올려 질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인용하고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하고 있다. 성경과 언어에 대한 생각을 한 후에 요한복음을 읽으니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새번역 요한복음 1장 1-5절)
+덧붙이며: 제 블로그 방문객은 대부분 기독교인이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기독교인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이 글을 읽으셨다면 논리적으로 비약을 느끼실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논리/과학이 아니며,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인 믿음으로 뛰어넘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성령이 하는 영역이라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Origianlly Posted 03/12/2014 @ facebook
많이 생각 해봤지만 그다지 입밖으로 내본적은 없는 주제다. 과학과 기독교, 신화와 성경… 창조과학의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과학적인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받아왔다. 어쨌든 구원교수님이 마지막에 언급한 두가지 입장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두번째 입장, 즉 인류는 역사적으로 공통적인 경험을 해왔고 이것이 각기 다른 신화에서 유사한 모티브로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사람이 성경을 썼다는 사실이 성경의 가치를 절대 훼손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옛날 성경이 쓰여질 때부터 오랜 세월 성경이 전수되고 확립 되어지는 과정에서 성령이 주재하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믿음 아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Originally posted 02/19/2014 on facebook
큐티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 중에 간혹 큐티를 오늘의 운세 보듯이 하는 분이 있다. 어느 한 단어나 한 구절에 꽂혀서 성경 전체의 맥락을 무시한 채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하여 적용하려고 드는 분… 신년이나 생일에 맞춰 그날의 말씀을 찾아 랜덤한 성경구절을 찾아 그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는 분 등… 이러한 모습이 신년운세를 알기위해 점집을 찾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나님 말씀을 매일 진심으로 읽는 것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큐티는 참으로 유익한 신앙적 전통이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에게 큐티는 적용꺼리를 억지로 꺼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종종 지워주곤 한다. 그러한 적용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성경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간혹 설교에서조차 끊어 읽기 큐티식 성경해석을 발견했을 때는 그 답답함이 얼마나 큰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성경을 맥락에 맞게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듯 싶다.
복음 자체가 어려운 내용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시 가장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서 가르키신 말씀이니 말이다. 하지만 교회사를 되돌아 보자. 교회가 가장 세속화/계급화 되었던 중세시대에 낮은 자를 위한 예수님의 복음은 헬라어/그리스어로 숨겨져서 가진자의 성경이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마틴루터가 종교개혁 초창기에 했던 일(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서 금속활자로 성경을 보급했던 것)은 무척이나 적절하다. 아마도 현대의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일 중에 하나는 평신도에게서 너무나 멀어져버린 성경 말씀을 제대로/쉽게 풀어서 낮은자에게 돌려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 종교개혁/미국 대각성운동이 그러했던 것 처럼 그러한 일이 다시 이루어 진다면 그 유익은 교회 뿐 아니라 우리가 몸담은 세상에도 바람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짧게 쓰려다 오늘도 사설이 길어 졌다… ㅋ
(덧붙임 02/12/2015)
예전에 지나가듯 잡상을 적어둔 내용인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날이 너무 서있다. 근대 의외로 이글이 조회수가 높다. 지울까도 싶었지만, 당시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현재도 동일하기 때문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글에서는 큐티의 단점 만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큐티는 분명히 매일매일 성경을 마음에 새기려는 분들에게 귀한 도구이다. 다만 지나친 일반화, 원 의미의 변질,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적용의 위험성 또한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이글을 읽고서, 평소 성경도 안읽고 성경 공부도 안하는 분이 ‘누가 그러는데, 큐티 안좋은 점도 있다고 하더라. 큐티 안해도 된다.’ 이렇게 말씀 하시면 정말 오해하시는 거다.
내가 느끼기에 성경은 그리 친절한 책은 아니다. 성경은 각 책마다 다른 저자의 관점과 뚜렷한 목표의식이 닮겨 있긴 하지만 인생의 모든 문제와 질문에 시원시원한 즉답을 주지는 않는다. 복음이 전파된 적이 없던 곳에서 구원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를 괴롭혔던 적은 없지만, 몇몇 분들에게는 꽤 중요한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프로그램 후반부에 나오는 공동체적인 관점에서의 구원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은 내게도 생각의 단초를 던져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