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기적에 관하여

지난주 교회에서 성찬식이 있었다. 내가 딱히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사실은 믿음이 좋다는 말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성찬식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이니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과 기적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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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나는 열혈 신앙인이었다. 지금도 신앙이 없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간 여러 교회를 접하면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강산이 몇번 바뀌는 걸 보면서, 존경하던 분들의 모습이 변하는 걸 보면서, 한국교회/미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나자신의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지적인 기반이 여러차례 바뀌면서, 먹고사니즘에 매몰되어 한참을 고분분투 하며 살다가, 그리고 가정을 가지고 다시금 살아가는 의미를 생각하다보니, 지금와서 바라보는 신앙은 20대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구약에 등장하는 신의 잔인함이나 이질적인 문화/종교에 대한 intolerances 불관용 같은 것은 이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대의 나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던 이야기들이었을 테다. 이를테면 요시야왕의 우상파괴 운동이 21세기 도덕관념으로 어떻게 용납될 것인가? IS가 알레포의 유적들을 파괴한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그렇다면 16세기 크롬웰이 성모상을 불태운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사실 이런 이슈는 상당히 다면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에서 뜨거운 남부 동상 철거 운동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인권과 평등을 계몽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믿음이라고 본다면, 남부의 동상들은 노예와 미국의 원죄를 나타내는 상징이고, 인권을 신봉하는 현대인에게 반드시 파괴되어야 할 우상일테다.

물론, 그리고 당연히도, 내가 남부의 과거나 노예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고, 요시야가 파괴했던 바알 성상과 바알신앙의 문란함/잔혹함에 어떤 호감을 가진 것도 아니다. 다만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슈들의 복잡함을 잠시 생각해본 거지…

작년에는 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 믿음의 근간이 복음주의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는데, 그것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한 많은 부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으며,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

대학시절 변증 차원에서 공부하고 지나갔었다. 그러나 지금와서 다시금 생각해보면 예수의 부활과 기적들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몇년전에 개인적으로 정리해본적이 있다. 그러나 여러차례 페북으로 소개했기에 마지막에 링크만 남겨두고 대신 최근 읽었던 뉴욕타임스 칼럼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의 칼럼들이다. 크리스토프는 예수의 가르침을 존경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예수의 부활, 동정녀 탄생, 오병이어의 기적 등등…)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종교계의 지도자들에게 물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입니까?

첫번째 칼럼에서는 기독교 변증으로 유명한 팀 켈러 목사에게 물었다.

Am I a Christian, Pastor Timothy Keller?

팀 켈러는 단도직입적이다. If something is truly integral to a body of thought, you can’t remove it without destabilizing the whole thing. 예를 들자면 이런거다. 지구온난화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린피스의 보드 멤버인 것이 말이 안된다. 속좁다고 말할 수 있다.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신앙인은 아니다.

두번째 칼럼에서 크리스토프는 이번에 좀더 리버럴한 크리스찬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물었다. 카터는 평생을 지역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해왔다.

President Carter, Am I a Christian?

카터는 말한다. 과학을 믿는 내게 이를테면 6일 안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반대로 나는 신약을 믿고 이는 신약에 나오는 동정녀 출산과 예수의 부활을 포함한다.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못한다.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크리스토프는 묻는다. 예수는 화합을 가르쳤으나 종종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배제의 행동을 해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터는 대답한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이렇게 말하죠.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저는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배제를 말하는 이들은 제가 이해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 삶을 산다고 봅니다.

크리스토프는 묻는다. 나는 당신이 복음주의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오류가 없다고 종종 말합니다. 또 종종 성경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당신은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나요?

카터는 대답한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모순들을 성경이 여러 저자들이 쓴 책이고 진본임을 나타내는 증거로 봅니다. 성경의 초기 저자들이 거짓된 이야기를 썼다면 모순들을 삭제했겠죠. 저는 성경에서 예수의 가르침의 정수와 사도바울의 초대 교회에 쓴 편지들을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모순이 나타날 때는 저는 평등과 인권에 기반하여 어떤 것을 믿을까 결정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칼럼에서 크리스토프는 뉴왁의 Tobin 추기경에게 묻는다.

Cardinal Tobin, Am I a Christian?

Tobin 추기경은 답한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에게 더 말할 여지가 있다는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았다면, 예 저는 당신이 그의 영역안에 있다고 봅니다.

크리스토프가 묻는다. 저는 예수의 가르침을 존경하지만 기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예수 시절에야 아테네 여신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걸 믿는 시절이였으니 기적을 믿는게 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 2017년 지금에도 물위를 걸었다는 것과 몇개의 빵과 물고기를 뻥튀기 해서 수천명을 먹였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Tobin 추기경은 답한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걸 믿을 자유가 있지요. 기독교인들도 비기독교에서 나온 지혜를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요. 사실 가장 놀라운 기적은 incarnation 성육신입니다. 기독교인은 태초이전에도 계셨고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우리가운데 왔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그 외의 것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적들은 마술쇼가 아닙니다. 기적들은 모두 하나님이 누구신지,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프의 관련 칼럼은 지금까지는 이렇게 세개 이다. 발췌를 했으니 관심있는 분은 원문을 읽기를 권한다. 칼럼은 재작년부터 기독교 주요 절기, 그러니까 부활절과 성탄절에 쓰고 있으니 올해 부활절도 이어질지 모른다. 생각해보니 기독교의 주요 절기는, 어쩌면 당연히, 기적과 연결되어 있다. 부활절은 부활에, 성탄절은 동정녀 출산에

마지막으로 아직까지도 읽을 때마다 감격하는 파스칼의 말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The supreme function of reason is to show man that some things are beyond reason.” – Blaise Pascal

재인용: How Can I Possibly Believe That Faith Is Better Than Doubt?

+ 덧: 예전에 내가 정리했던 개인 신앙 이야기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2015년 2월 28일)

내가 믿는 기독교 : 6.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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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두 글에서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가지 해법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서야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인 ‘대속’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정리하자면, 저는 물질적인 방법은 환경을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방법은 나를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속의 방법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집니다. 불확실성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불확실성의 문제를 ‘죄’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제가 글의 처음부터 죄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굳이 불확실성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죄’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람이 스스로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0-26)

저는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죄에 관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K님의 글을 통해서 이해한 바로는 독실한 무슬림이 선행을 통해 악행을 덮으며, 그로 인해 알라의 죄사함을 받는 것이 무슬림의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목적은 결국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시고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Picture of a wooden Christian cross on St. Cuthbert’s Isle, Holy Island, Northumberland. St Cuthbert’s Isle is a small island used as a retreat by both Aidan and Cuthbert.

이것이 바울이 이야기하고 예수가 말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시대의 기준에 맞추어 조정한 것이 아닙니다. 일전에 E님께서 마태복음 5장을 인용하셔서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신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구절은 유대인이 지켜왔던 율법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기준에서 살인과 간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살인과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않은 것에 그쳤습니다. 예수는 이것에서 한발 더 나아간 해석을 한 것이지요. 살인과 간음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누구도 죄인의 기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 인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본질을 흐렸던가 싶기도 합니다. L님도 오늘 글을 올린다고 했으니, 저도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그럼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4.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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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이야기에 이어서 몇가지 이야기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오늘은 K님의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그러니까 ‘대속’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대속에 대한 이야기는 좀 길어 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속에 이야기는 그 전제(인간의 상황)가 없이 설명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게 ‘대속’ 이야기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은 ‘성경’과 ‘대속’이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L님이 신학을 공부 했던 입장에서 성경적인 관점으로 잘 설명해 주리라 믿습니다만, 거기에다 제 신앙고백을 덧붙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아서 이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불확실성과 금융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금융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가 그나마 조금 아는 주제이기도 하고, (저는 MBA에서 금융을 전공했습니다.) 현대 물질 문명이 불확실성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야기의 실마리를 푸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 능력한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보겠습니다.

1921년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리스크, 불확실성, 그리고 이윤’이라는 책을 발표합니다. 그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경제 활동에는 리스크(risk)와 불확실성(uncertainty)이 존재하는데, 리스크는 계측이 가능한 대상인 반면에 불확실성은 계측이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현대 금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금융학은 거칠게 말하자면 (특히 금융공학의 경우) 이 리스크에 대해서 다루는 학문입니다. 1970년대에 들어 블랙과 슐츠는 통계학/미적분학을 기반으로 블랙-슐츠 방적식을 발표합니다. 이 방정식이 발전해서 1990년대 금융공학이 학문으로 태어납니다. 현대의 주식시장에서 옵션과 트레이딩, 파생상품은 상당수가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문제는 현대의 금융이론은 리스크(계측 가능한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불확실성(계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008년에 있었던 금융위기에 세계 경제가 대책없이 무너지기만 했던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는 이것이 금융만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물질문명, 즉 자본주의는 인간의 방법으로 각종 상황에 대해서 대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작해야 일부 계산 가능한 리스크에 대해서만 대처가 가능할 뿐입니다.

주로 학문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기실 불확실성의 문제는 우리가 매일 마주치며 사는 문제 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매일 끼니를 챙겨 먹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 교통법규를 준수하고 삽니다.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입고, 외부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을 짓습니다. 인간은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확실성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마주한 불확실성은 결국에는 죽음의 문제에 이르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나 인간은 죽게 마련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 (친구/가족)은 역시 언젠가는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결국 사람은 죽기 마련인데 아둥바둥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항상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할 방법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외면합니다. 계측가능한 리스크에 집중하고 계측이 불가능한 불확실성은 외면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누가복음 1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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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freebibleimages.org)

현대인은 불확실성의 문제를 자신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물질적인 해결책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현대인은 공허함을 가지고 삽니다. 물질적인 해법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허무주의에 다다릅니다.

심지어 현대에 와서는 종교조차도 이러한 물질적인 방법을 해법으로 내 놓기도 합니다. 어떤이들에게는 교회나 절에 가는 것 조차도 더 소유하기 위해서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2. 유대교와 기독교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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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근에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 발견한 사실이 있어서 사족을 붙입니다. (발견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의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유대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구약 성서는 대부분이 바벨론 유수 기간에 씌여진 책입니다. ‘바벨론 유수’라고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70년 가량 유대인이 바벨론의 포로로 유랑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성경은 ‘바벨론 유수’기간 문서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전해 내려오던 판본도 상당수 유실되었다가 이시기에 학자들에 의해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 성서는 기본적으로 exile literature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성서 뿐만 아니라 exile literature (본국에서 쫓겨나서 방랑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정서가 있습니다. exile literature의 특징은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이러했더라면…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나라가 강대했던 시기를 이상으로 그립니다. 전통음악을 듣고, 고향의 향수에 젖어 삽니다. 바벨론 유수의 시기에 유대인들은 모여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서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멀어진 모습을 반복해서 되새기면서 울고 회개를 합니다. 여기 구약성경의 느헤미야기를 인용합니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중략)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 에스라 제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모든 백성을 타일렀다. (느헤미아 8:4-9)

그들이 읽었던 율법은 모세오경(성경 처음의 5권) 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유수’기간에 씌여졌던 열왕기서/역대서는 일종의 역사서인데 모세오경의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들을 평가합니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다윗왕이 가장 이상적인 왕이지요. 그 이후로는 왕들의 죄악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이야기 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기간에 그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꿈꾸게 됩니다.

이제 신약의 시대로 넘어옵니다. 예수는 새로운 율법을 말하지요. 예수는 성전을 허물러 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말하는 율법은 구약의 율법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대인의 메시아는 그들이 기대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따르려는 열심에 대해 경계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세오경의 율법을 더 잘 지키고자 했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을 비난합니다. 바리새 계열 유대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지키려고 세부의 지침과 가르침을 만들어서 지켰던 사람들이죠. (당연히 모세오경과 율법에 근거합니다.) 심지어 예수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으로 당시 율법학자들과 랍비들을 욕합니다. 그리고서 제자들에게 문자적으로 율법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는데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완성하러왔다고 주장하는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완성합니다. 아시다시피 유대교와 기독교는 구약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쓰인 신약은 기독교만의 경전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나 예수가 말한 율법의 완성은 조금 논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인듯합니다.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도 한번 나누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이 이야기들은 제 개인적인 견해이며 신학/역사를 전공한 분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