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니즘과 예루살렘 – There is neither Jew nor Gentile

며칠전 미대사관 예루살렘 이전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몇가지가 빠졌다. 괜한 오해만 사겠다 싶다. 추가로 몇자 더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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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며칠간 뉴스를 지켜본 결과로는 트럼프의 이번 결정이 중동 정세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논란은 많이 되고 있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예전처럼 중동 정세의 중심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 아마도 그런 판단하에 트럼프의 깜짝 발표가 있었겠지.

다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입지가 중동에서 더 약해질텐데, 트럼프는 별로 상관 안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트럼프 핵심 지지층인 미국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두팔벌려 환영하고 있으니까. 대표적으로 친트럼프계 Paula White 목사는 환영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녀는 트럼프 정부 evangelist 자문 위원장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http://www.cnn.com/2017/12/06/politics/american-evangelicals-jerusalem/

기독교계가 모두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미국 공화당을 지지하는 복음주의 계열 기독교인은 열정적인 환호를 보였다. 반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deep concern 깊은 우려’를 표명했고, 정교회쪽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사실 오랜기간 애증의 관계였다. 이를테면 루터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유로 경멸했고, 이는 나치 인종청소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럼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내가 알기로 이스라엘과 유대인, 비유대인 (성경 용어로는 Gentile 이방인)을 보는데에 크게 2가지 관점이 있다.

첫번째는 시오니즘에 동질감을 느끼는 보수 복음주의 계열의 관점이다. 이쪽이 정치적으로는 공화당의 hawkish policy에 동조하는 분들이다.

이쪽 주장을 성경에서 근거를 찾자면 대표적으로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 로마서 11장을 들 수 있다. 유대교는 선민사상에 기반한다. 그러나 본인이 유대인이 었던 바울은 예수교의 신앙과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러면서 비유대인을 접붙인 올리브나무에 비유한다.

그리고 26절에 이르러서 이렇게 말을한다.

all Israel will be saved. As it is written: “The deliverer will come from Zion; he will turn godlessness away from Jacob.” (NIV) 그후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쓰인 말씀과 같습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올 것이니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제거할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지난번 포스트에도 시온산에 대해 언급을 했는데,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중에 하나이고, 종종 예루살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는 (유대인에게) 신성한 산이다. 그러니까 보수 복음주의 쪽에서는 이에 근거해서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예수를 믿게되면 예수가 재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난번 포스트
종교의 땅, 예루살렘(12월 7일자)

시오니즘에 공감하지 않는 다른 한쪽이 근거로 대는 구절은 갈라디아서 3장이다. 이 또한 바울의 편지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는 할례와 믿음을 둘러싼 갈라디아인들의 신학 논쟁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다.

할례는 유대인의 징표이다. 당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명확히 갈라서기 이전이었고, 따라서 어떤이들은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절차 중에 하나라는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믿는 믿음외에 다른 징표가 있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3장 28-29절에서는 신분제 사회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There is neither Jew nor Gentile, neither slave nor free, nor is there male and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If you belong to Christ, then you are Abraham’s seed, and heirs according to the promise. (NIV)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므로 유대인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상속자들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갈라디아서 선언 이후, 더이상 기독교에서 ‘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종이나 종교나 성별이나 신분에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존재로 초대되었다.

여담이지만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내가 성경에서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이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막부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 하나에 감복해서 예수에 귀의하기도 했고 목숨을 내어놓기도 했다.

대충 정리해보자. 예루살렘이 가지는 의미는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떤이에게 예루살렘은 유대인에게 회복되어야 할 물리적인 장소이기도 하고, 어떤이에게는 유대인과 타민족은 별다른 차이가 없기도 하다.

사실 미국 (또는 일부 한국)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를 넘어서기도 한다. 트럼프가 종교적인 인물은 아닌 것이 분명하기에 그의 정치적인 메세지는 분명해 보인다. (외교적으로는 손해만 봤다는게 대다수의 분석이고)

예루살렘은 목놓아 울뿐이다. 그 조그마한 땅에 수천년간 종교적/정치적/지정학적 의미가 얽히고 설켜 흘린 피가 얼마인가.

마지막으로 성경 한구절만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예레미아 7:34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기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I will bring an end to the sounds of joy and gladness and to the voices of bride and bridegroom in the towns of Judah and the streets of Jerusalem, for the land will become desolate. NIV

독일인의 과거사 기억

3명이 죽었다. 지난 주말에 버지니아 샬럿스빌에 모였다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blood and soil’을 외쳤다고 한다. 독일어로 하면 이는 ‘blut und boden’ 즉 ‘피와 땅’이고 나치의 슬로건이었다.

자연스레 독일이 생각난다. 그것도 약 100여년 전의 독일 말이다.

독일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현대의 독일인들은 유대인 학살과 나치와 연관된 과거에 대해 꽤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에 가면 골목골목 마다 바닥에 작은 명판 같은 걸 볼 수 있다. 그 명판에는 그 주소에 살았다가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개개인의 기억은 사라져도 이름은 영원히 남기겠다는 의지이다.

마침 오년전 독일에 갔을 때 찍어둔 사진과 그당시 적어둔 메모가 있어 공유한다.

유대인과 독일의 반성 (2014년 7월 3일 포스트)

내가 믿는 기독교 : 2. 유대교와 기독교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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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근에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 발견한 사실이 있어서 사족을 붙입니다. (발견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의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유대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구약 성서는 대부분이 바벨론 유수 기간에 씌여진 책입니다. ‘바벨론 유수’라고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70년 가량 유대인이 바벨론의 포로로 유랑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성경은 ‘바벨론 유수’기간 문서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전해 내려오던 판본도 상당수 유실되었다가 이시기에 학자들에 의해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 성서는 기본적으로 exile literature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성서 뿐만 아니라 exile literature (본국에서 쫓겨나서 방랑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정서가 있습니다. exile literature의 특징은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이러했더라면…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나라가 강대했던 시기를 이상으로 그립니다. 전통음악을 듣고, 고향의 향수에 젖어 삽니다. 바벨론 유수의 시기에 유대인들은 모여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서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멀어진 모습을 반복해서 되새기면서 울고 회개를 합니다. 여기 구약성경의 느헤미야기를 인용합니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중략)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 에스라 제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모든 백성을 타일렀다. (느헤미아 8:4-9)

그들이 읽었던 율법은 모세오경(성경 처음의 5권) 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유수’기간에 씌여졌던 열왕기서/역대서는 일종의 역사서인데 모세오경의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들을 평가합니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다윗왕이 가장 이상적인 왕이지요. 그 이후로는 왕들의 죄악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이야기 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기간에 그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꿈꾸게 됩니다.

이제 신약의 시대로 넘어옵니다. 예수는 새로운 율법을 말하지요. 예수는 성전을 허물러 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말하는 율법은 구약의 율법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대인의 메시아는 그들이 기대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따르려는 열심에 대해 경계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세오경의 율법을 더 잘 지키고자 했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을 비난합니다. 바리새 계열 유대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지키려고 세부의 지침과 가르침을 만들어서 지켰던 사람들이죠. (당연히 모세오경과 율법에 근거합니다.) 심지어 예수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으로 당시 율법학자들과 랍비들을 욕합니다. 그리고서 제자들에게 문자적으로 율법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는데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완성하러왔다고 주장하는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완성합니다. 아시다시피 유대교와 기독교는 구약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쓰인 신약은 기독교만의 경전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나 예수가 말한 율법의 완성은 조금 논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인듯합니다.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도 한번 나누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이 이야기들은 제 개인적인 견해이며 신학/역사를 전공한 분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페르시아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에스더

아이를 키우면서 그나마 잘한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매일 자기전에 성경을 읽어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내가 무척이나 자상한 아빠인 듯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일 읽어주었던 것은 아니고 귀찮은 날은 모른척 건너뛰기도 자주했다. 또 우리 마나님의 잔소리에 못이겨서 억지로 읽어준 적도 많이 있었고, 지금은 성경책 읽어달라는 아이의 성화에 마지못해 읽어줄 때도 많다.

아이에게 성경원문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은 그 수준에서 맞지 않는 일이라 아직까지는 어린이 성경을 읽어주고 있다. 처음 시작은 아이가 만 3세 였던 2012년. 그때 읽어 주었던 책은 아가페에서 나온 ‘아장아장 성경’, 그리고 2013년 읽어 주었던 성경은 ‘두란노 어린이 그림 성경’. 2014년 지금은 ‘두란노 이야기 성경’을 읽어주고 있다.

매해 수준이 조금씩 높히고 있는데, 지금의 책은 만 5세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듯 하여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면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언급한다던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를 묘사한다던지… 어린 딸에게 살인이라는 이야기를 묘사 해야하는 순간에는 혹시라도 이 아이가 ‘살인’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하나 조마조마 하며 빨리 넘어가곤 했었다. 그런데 구약에는 생각보다 살인의 장면이 많이 나오더라. 어느 시점에서는 그냥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성경에서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약속을 하는 이야기. 몇번을 다시 읽어달라고 한다. 그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우고서 my favorite이라는 표시를 해두었다. 아브라함이 별을 ‘하나, 두울, 세엣.’ 하고 세는 장면에서는 항상 웃음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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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Victors – The Banquet of Esther and Ahasuerus

이번주에 아이에게 읽어주는 본문은 에스더 이야기이다. 혹시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중에 성경에 친숙하지 않은 분을 위하여 내용을 짧게 설명하면 이렇다. 에스더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페르시아의 장관이었던 하만은 유대인을 증오하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계략을 사용하여 아하수에로 왕이 모든 유대인을 말살시키라는 칙령을 내리도록 한다. 유대인이었던 왕비 에스더는 지혜로운 방법으로 왕의 민족말살 명령을 거두게 하고, 하만 장관은 실각을 하게 된다.

성경의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줄 때마다 무척 조심스럽다. 성경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구약의 경우에는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이라는 온전한 인격체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자칫 잘못 읽혔다가는 공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만의 하나님으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특히나 성경 원문 그대로가 아닌 짧게 축약된 이야기의 경우는 편집자의 시각이 은연중에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성경의 사건중에 몇가지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의 이야기가 그렇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살던 모든 민족을 말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토착민을 몰아내고 인종청소를 하라는 이야기인데,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는 비윤리적인 일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부분에 학자들의 의견은 몇가지로 나뉘는데, 나는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이었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던 고대인에게 있어서 전쟁에서의 압승은 말살이라는 표현으로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죄악이 넘쳐흐르는 가나안 민족에 대한 징벌의 개념으로 나온 결론이 진멸(殄滅)이다.

형이상학에 깊이가 일천하며 신학/윤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이문제를 더 깊이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수준의 형이하학적인 이야기는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는 이스라엘 민족 입장에서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폭력에서 시작되었다는 정도이다. 성경 속의 가치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석하고 시대적 맥락을 무시할 때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에스더 이야기는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말살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때 유대민족은 다른 민족을 말살할 수 있는 입장보다는 몰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더욱 많았었다. 에스더 이야기가 기록되었던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을 재건하던 때이다.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에스더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는 위로의 메세지이다.

이번주에 에스더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하나 알게 된것은 이제 아이에게 ‘권선징악’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몇달 전에 창세기와 사무엘서를 읽어줄 때만 해도 누군가가 죽거나 위험에 처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던 아이였다.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에게 확인하는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아빠, 하만은 나쁜 사람이야? 아하수에로 왕은?” 지금은 누가 선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인지부터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위험에 처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괜찮아 하나님이 다 지켜 주실 건데 뭘… 나중에 나쁜 사람들은 다 벌받지?” 이렇게 물어본다. 아이가 어디서 권선징악의 개념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성경책을 읽어가며 자연스럽게 형성이 된 것일까? 아니면 요새 즐겨보는 ‘번개맨’이라는 만화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일까?

고작 만 5세 딸아이 성경책 읽어주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ㅎㅎ 아마도 아빠로서 어린시절에 읽어주는 책이 이 아이에게 어떤 가치를 심어줄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지금은 5살 수준에서 권선징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정도로 만족한다. 사실은 만족하는 게 아니라 대견스럽다. 아이이지 않은가? 세상사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러한 시각에서 발전이 없다면 그 또한 문제이겠지만, 권선징악은 윤리의 뼈대를 세워주는 훌륭한 기본틀 정도는 된다.

오늘은 자식을 키우면서 생각하게 되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보았다. 별거아닌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신학/윤리/역사 같은 복잡한 주제를 건드리는 것을 보니까 병인 듯 하다. 딱딱하고 재미 없는 이야기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지금 가자에서 죽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

유대인과 독일의 반성

 

Originally posted 06/04/2014 @ facebook

독일에 가면 길거리에서 금속으로 된 표식에 새겨진 이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독일어를 모르기에 그냥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케이블 매설’ 표지 같은 건 줄 알고 지나쳤다. 그 모습을 본 잉그릿이 이게 뭔지 설명해 준다. 이 표지는 표시가 된 곳 앞에 살던 사람들 중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2012년 당시 그 이야기를 듣고 찍은 사진이다. 그러고 보니 도로 곳곳에 이러한 표식들이 있었다. 한 골목에 많게는 수십 개의 이름들이 있다. 당시 유럽에 살던 900만 명의 유대인중의 2/3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이러한 아픔의 흔적들이 유럽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2번의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 초는 정말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시기였다. 모두가 자신의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고 서로를 증오했다. 사회주의자는 자본가 계급을 적으로 생각했고, 자본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멸시했으며, 혼란의 와중에 등장한 파시스트들은 무질서와 ‘나와 다름’을 죄악시하며 하나로 똘똘 뭉쳐서 다른 민족/국가에 폭력을 쏟아 부었다. 아시아에서는 뒤늦게 제국주의의 물결에 합류하고자 했던 일본이 서구의 왜곡된 모습을 황국신민 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서 주변 국가들을 괴롭혔고, 미국인들은 흑인/native American에 대한 학대를 당연시 했다. 이러한 광기의 끝 무렵에 탄생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그 내부에서의 사상갈등으로 서로 죽고 죽인다. 스탈린의 피의 대숙청 때 사상자는 2백만으로 까지 추산되고 있다.

폭력의 시대를 겪고서 유럽 사람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똘레랑스 (관용)’이다. 어원은 허세의 끝장을 보여주는 프랑스 사람들에게서 나온 말이지만 내게는 가장 울림이 큰 가치 중에 하나이다. (쓰고 보니 politically correct한 말은 아니군…ㅎㅎ)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들이대는 것의 폭력적 결말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가치인 것이다.

이제 20세기 초는 너무나도 먼 옛날이다. 그 시절을 체험한 이는 모두 무덤 속에 잠들어 있고, 이제는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게 미국이나 한국이나 보수/진보의 갈등이 점점 커지는 것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가끔 온라인에서 보이는 글들도 소위 어르신의 입장에서 보면 선동이라는 생각이 들겠다 싶은 내용도 있고, 그 어르신들이 대응하는 행태도 너무나도 20세기 스타일이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타자 입장에서 봤을 때, 단편적인 사실만 보고서 감정적으로 서로 헐 뜯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음모론적인 이야기가 사실인냥 받아지는 경우도 많고…

이제 나도 세상의 때도 조금 묻고 좌절도 겪고 하다 보니, 지금 내가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죽고 못사는 것이 나중에 보면 별일 아닌 게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게 역사라는 관점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