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유치원 잡담 (한국식과 미국식??)

아이가 한국에 세달 가량 들어가 있다. 세달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서 한국말도 가르킬 겸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세달 등록을 받는 데가 거의 없었는데, 찾아보니 집앞에 한 곳 있었다. 한영 병용 유치원이라 좀 비쌌지만 아이를 집에 두기만 하면 심심해 할테다.

한국식과 미국식??

한달 가량 유치원에 다녔다. 아이가 몹시 즐거워 한다. 자리가 있는 반이 한살 어린 6세 반이었다. 한살 어린 동생들 사이에서 왕언니 노릇하는 게 좋은가 보다.

언제나처럼 수다스러운 아이는 매일 유치원 소식을 전해준다. 어제도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유치원이 재미있어? 미국하고 뭐가 달라?” “뭐~ 재미있지. 근데 가끔 선생님이 무서울 때가 있어.” “어떻게 무서운데?” “선생님이 화나면 진짜 무서워~ 엄마보다 무섭다니까. 무서운 표정을 짓고서 말을 지~인~짜 빨리해.” “그럼 (빠른 톤을 흉내내면서) 이리 앉으세요. 그렇게 하면 안돼요. 뭐 이런식으로?” “그것 보다 더더 빨리.” “(눈을 부릅뜨고서 좀더 빠르게) 빨리 앉아요. 뭐 이렇게?” “조금 비슷하네.”

“너두 가끔 혼나?” “아니 나 말고 다른 애들한테. 말을 잘 안듣더라구.” “그치만, 미국도 선생님들이 혼낼 때는 무섭잖아. Ms. Libby도 ‘Don’t do that. Sit down here.’ 뭐… 이렇게 말하지 않아?” “뭐 그렇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선생님이 그렇게 무섭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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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flickr)

아이가 잠이 들고, 아내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까 아이랑 얘기 하는 것 들었지?” “응” “내가 보기엔 한국 애들이 좀더 버릇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 어버이날 학부모 참관수업 갔을때 보니까 좋게 말해서는 아이들을 통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더라구.” “그것도 애들 나름이지. 미국도 다루기 힘든 애들은 힘들잖아.” “그렇긴 하지만… 한국 6세반이랑 동급인 pre-K* 다니는 애들은 순진했던 것 같은데. ” “그렇긴 하네.” “미국 교육이 좀더 자립심을 키우는 방식이고, 미국 부모들이 더 엄하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그건 case by case지. 으이구, 우리 자식이나 잘 키우지 별 걱정이야.”

그렇긴 하네. 별 걱정이다.

(*미국은 만 5세는 kindergarten, 만 4세는 pre-K을 다닌다. kindergarten 부터 의무교육 과정이다.)

된장 발음 영어

딸아이는 발음에 좀 민감한 편이다. 가끔 나오는 내 된장 발음이 거슬리는 지 교정해주기도 한다. 좀더 어릴 때는 다른 사람들 영어 발음에 참견을 할 때도 있었다. 발음 교정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으니, 가족 말고는 하지 말라고 아이에게 가르쳤다. 다행히 지금은 남의 발음을 교정 하려 들지 않는다.

아이 유치원이 한영 병용 유치원이라, 한국 선생님도 영어를 쓴다. (원어민 선생님도 따로 있긴 하다.) 그런데 아이가 한국 선생님의 영어 발음이 거슬렸나보다. 슬쩍 선생님에게 가서 자기한테는 영어를 안써도 된다고 했단다. 선생님 입장에서, 영어권에서 온 딸아이가 호응을 잘 해주어야 영어수업하기가 수월할 텐데, 오히려 딸아이는 한국어 쓰기를 더 좋아하니 그것도 문제이긴 하다.

+ 덧: 지난 주에 써둔 글을 정리해서 오늘 포스팅했음.

딸과의 대화 모음 (집안일/성경/반대말에 대한 잡담)

첫번째

아내: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설겆이를 하다가) 일이 해도해도 끝이 안나.
딸램: (무심한 듯 앉아있다가) 집안일은 원래 그런거야.

으이구 애늙은이.

두번째

오늘은 아이에게 성경에 있는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아이가 물었다. “아빠, 엘리야 선지자는 남자야? 여자야?” “남자.” “왜 이렇게 성경에는 남자가 많아? 나는 여자인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남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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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딸아이에게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라는 표현을 가르쳐 주었다. 며칠후 딸아이가 시끄러운 곳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쥐살은 듯이 시끄럽네.”

가끔 우리말의 상투적인 표현을 뒤집어 보아도 재미있다. 그러면서 표현의 유래/의미/어감을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두가지 언어 사용이 만드는 번역체 말투들 – 우리집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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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두 나는 영어와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과 한집에서 살다보니, 소위 말하는 번역체 말투를 생활 속에서 가끔 본다. 영어로 생각한 단어를 한국말에 대응하는 단어로 말하다 보니 생기는 어색한 경우. and vice versa (또는 그 반대 경우.)

1. 우리 아내

신혼 때, 아내는 설겆이를 하고 나서 그릇을 꼭 말려두라고 당부하곤 했다. 나는 착한 남편이니까 아내가 말한대로 했다. 우리 집에는 식기 건조기가 따로 없기 때문에 그릇을 말려두려고 찬장에 순서대로 줄을 맞추어 뒤짚어 엎어두었다. 물기가 빠지면 그대로 마르겠지.

이상한 낌새를 챈 아내가 내게 다시 이야기 한다. “그릇을 말려 두라고 하지 않았나? 왜 그냥 둬?” “말한 대로 말리고 있어.” “페이퍼 타월로 말렸어?” “아니.” 그제서야 나는 아내가 말리라고 하는 의미를 깨달았다. 영어로 ‘dry’는 자연적으로 말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물기를 닦아낸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 마눌님은 지금도 ‘dry’를 그대로 한국말로 옮겨서 ‘말린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닦기 보다는 젖은 채로 뒤집어 놓는다. 지금은 못알아 들어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이다.

2. 딸내미 사례 1

우리는 미국에 살기 때문에 딸애에게 영어를 따로 가르치지 않는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이나 친구 사이에서 자연스레 배우는 걸로 충분하다. 우리 걱정은 사실 아이가 한국어를 잊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미 한국 보다 미국에서 산 시간이 더 길었는데, 당연한 거다.

그래도 가끔은 영어의 뉘앙스는 가르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오해를 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이다.

재작년 아이가 다섯살 때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이가 놀이터에 나가면서 신발을 신어야 했다. 그런데 신발이 스스로 신기에는 조금 어려웠던 모양이다. 한쪽을 간신히 신어보다 잘 안되서, 선생님에게 도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근데 우리는 아이에게 어떻게 영어로 공손히 말하는지 가르친 적이 없다. 아마도 때쓰는 뉘앙스로 선생님에게 명령조로 말했던 것 같다. (영어로 공손하게 말하는 것이래봐야 별건 없고, ‘Could you~?’ 나 ‘Please’를 붙여서 말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에게 공손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please’라고 말해야 신을 신겨줄 것이라고 했단다. 아이는 ‘please’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괜히 토라져 버렸다. 아무말도 없이 선생님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한쪽만 신발을 신고서 놀이터에서 놀았단다. (우리 딸이 은근 자존심이 강하다.)

딱히 대단한 일은 아닐 수 있지만, 조심은 해야 겠다 싶었다. 아이 엄마가 선생님께 상황 설명을 했다. 아이에게는 부탁을 할 때는 ‘please’라고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담부터 딸아이는 ‘please’라는 말을 참 잘한다. 근데 너무 잘하다 보니까 한국말을 할 때도 말 끝마다 ‘제발’을 붙인다는 게 문제다. 아마도 아빠한테 공손하게 말하느라고 ‘please’에 해당하는 ‘제발’을 붙이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조르는 말처럼 들려서 거슬릴 때가 있다.

3. 딸내미 사례 2

작년 가을에 한국에서 친구 가족이 우리집에 와서 머무른 적이 있다. 그 집 아들이 우리 딸보다 한살이 많은데 같이 잘 논다. 딸애는 오기도 전에 벌써 신이 났다. 유치원에서도 선생님한테 한국에서 오빠가 온다고 몇번을 자랑한 듯 하다.

선생님이 하루는 궁금해 하며 묻는다. 딸아이가 한국에서 ‘brother’가 온다고 몇번을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 생각에는 ‘친오빠’는 아닌 것 같은데 누가 오느냐고 묻는다.

영어로는 ‘brother’라고 하면 ‘친오빠’를 말하고 이 경우에는 ‘friend’라고 하는게 더 맞았을 터. 우리 말을 굳이 영어로 옮기니까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4. 내 경우

언어 능력이 월등하게 뛰어나신 우리 마눌님이나 딸아이하고 내가 비교할 수준이나 되겠나. 사실 나는 번역체를 논할 정도도 못된다. 시간이 흘러도 영어는 안늘고, 한국말은 자꾸 까먹는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영어로 문장을 쓰면서 우리말로 글쓰는 스타일도 조금 바뀌긴 했다. 이를 테면 문장이 길어질 때 쉼표를 많이 사용한다. 우리 말은 글을 쓸 때 쉼표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데, 영어는 잘 끊어줘야 효과적인 의사 표현이 가능하다. 원래는 단문이 의사표현에 효과적인데, 내가 단문을 잘 못 쓴다. 절충안으로 쉼표를 무지하게 쓴다.

또 하나는 요새 한국말 할 때 무의식 중에 내가 단수/복수를 제대로 쓰고 있나 점검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은 단/복수가 분명하지 않은데 그걸 분명하지 않게 말하니까 뭔가 덜 말한 찜찜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영어를 할 때 수일치를 제대로 하는 건 아니다. 역시 영어는 안늘었는데 한국말만 이상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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