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기독교 : 6.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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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두 글에서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가지 해법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서야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인 ‘대속’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정리하자면, 저는 물질적인 방법은 환경을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방법은 나를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속의 방법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집니다. 불확실성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불확실성의 문제를 ‘죄’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제가 글의 처음부터 죄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굳이 불확실성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죄’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람이 스스로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0-26)

저는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죄에 관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K님의 글을 통해서 이해한 바로는 독실한 무슬림이 선행을 통해 악행을 덮으며, 그로 인해 알라의 죄사함을 받는 것이 무슬림의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목적은 결국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시고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Picture of a wooden Christian cross on St. Cuthbert’s Isle, Holy Island, Northumberland. St Cuthbert’s Isle is a small island used as a retreat by both Aidan and Cuthbert.

이것이 바울이 이야기하고 예수가 말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시대의 기준에 맞추어 조정한 것이 아닙니다. 일전에 E님께서 마태복음 5장을 인용하셔서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신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구절은 유대인이 지켜왔던 율법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기준에서 살인과 간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살인과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않은 것에 그쳤습니다. 예수는 이것에서 한발 더 나아간 해석을 한 것이지요. 살인과 간음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누구도 죄인의 기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 인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본질을 흐렸던가 싶기도 합니다. L님도 오늘 글을 올린다고 했으니, 저도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그럼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5.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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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저는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해법중에서 물질적인 방법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정신적인 방법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철학의 모습이 될 때도 있고 종교의 모습이 될 때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방법이 주목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 입니다. 물질적인 방법이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방법이라고 하면, 이것은 나 자신에 집중하는 방법입니다. 물질적인 방법이 추위를 견디기 위해 옷을 더 껴입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신적인 방법은 건강을 키워서 추위가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철학/사상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신적인 방법에는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RELIGIONES

(image source: wikipedia)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종교별로 다양합니다. 이를테면, 불교의 경우는 참선을 하고, 유대교는 율법을 암송합니다. 또, 이슬람은 꾸란을 암송합니다. 저는 이러한 방법이 종교적인 열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준은 다를 지언정 (율법/꾸란/불경 등등…) 자신을 갈고 닦는 행위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K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이슬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K님께서 댓글을 단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실제로 이슬람에서는, 죄를 지으면 동물을 잡는 행위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죄를 지은 후 ‘진정으로’ 참회할 때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인데, 자신이 ‘진정으로’ 참회하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냐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값비싼 것도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 포기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양이나 소는 고기나 우유의 근원이 되는 등 경제적 가치가 뛰어나 모두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그렇게 값비싼 것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함으로써 선행이 쌓이는 것이고, 선행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악행이 용서받는 것입니다. 꾸란에서 희생물을 잡는 것과 관련하여 말하길 ‘동물의 고기를 하나님께서 받는 것이 아니며 동물의 피를 하나님께서 받는 것도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대들로부터의 경외심을 받는 것이라'(그 의미의 번역, 꾸란 제22장 37절)

K님께서는 동물을 잡는 행위에 대해서 선행을 쌓는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이말이 이슬람에서 알라께 용서를 받는 다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앞에서 제가 이야기 했듯이 나라는 존재의 행위가 강조되어 있는 것이지요.

제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지는 않지만, 나의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두가지 방법 (정신적인 방법/물질적인 방법)이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가진 존재 이기 때문에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쳐져 있다면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현대 문명은 너무나도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부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외를 가져왔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더욱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대인들은 지구 환경을 너무나도 훼손시켰습니다. 저는 그것이 인류가 환경을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온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기독교 역시 종교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많은 부분은 정신적인 해법에 속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는 많은 분들이 교회를 정신수양을 하는 곳으로 여깁니다. 기독교도 종교의 하나이고 그러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정신수양으로만 보기 어려운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대속’이라는 개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

내가 믿는 기독교 : 2. 유대교와 기독교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christian-jew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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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근에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 발견한 사실이 있어서 사족을 붙입니다. (발견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의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유대교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구약 성서는 대부분이 바벨론 유수 기간에 씌여진 책입니다. ‘바벨론 유수’라고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70년 가량 유대인이 바벨론의 포로로 유랑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성경은 ‘바벨론 유수’기간 문서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전해 내려오던 판본도 상당수 유실되었다가 이시기에 학자들에 의해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 성서는 기본적으로 exile literature의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성서 뿐만 아니라 exile literature (본국에서 쫓겨나서 방랑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정서가 있습니다. exile literature의 특징은 후회와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이러했더라면…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텐데…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나라가 강대했던 시기를 이상으로 그립니다. 전통음악을 듣고, 고향의 향수에 젖어 삽니다. 바벨론 유수의 시기에 유대인들은 모여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서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멀어진 모습을 반복해서 되새기면서 울고 회개를 합니다. 여기 구약성경의 느헤미야기를 인용합니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중략)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학자 에스라 제사장과,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이 날은 주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말고 울지도 말라고 모든 백성을 타일렀다. (느헤미아 8:4-9)

그들이 읽었던 율법은 모세오경(성경 처음의 5권) 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유수’기간에 씌여졌던 열왕기서/역대서는 일종의 역사서인데 모세오경의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들을 평가합니다. 모세오경에 따르면 다윗왕이 가장 이상적인 왕이지요. 그 이후로는 왕들의 죄악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이야기 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기간에 그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꿈꾸게 됩니다.

이제 신약의 시대로 넘어옵니다. 예수는 새로운 율법을 말하지요. 예수는 성전을 허물러 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말하는 율법은 구약의 율법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유대인의 메시아는 그들이 기대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따르려는 열심에 대해 경계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세오경의 율법을 더 잘 지키고자 했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을 비난합니다. 바리새 계열 유대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지키려고 세부의 지침과 가르침을 만들어서 지켰던 사람들이죠. (당연히 모세오경과 율법에 근거합니다.) 심지어 예수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으로 당시 율법학자들과 랍비들을 욕합니다. 그리고서 제자들에게 문자적으로 율법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는데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완성하러왔다고 주장하는 예수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완성합니다. 아시다시피 유대교와 기독교는 구약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쓰인 신약은 기독교만의 경전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나 예수가 말한 율법의 완성은 조금 논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인듯합니다.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도 한번 나누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이 이야기들은 제 개인적인 견해이며 신학/역사를 전공한 분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1 (물질적인 해법)

+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 2 (정신적인 해법)

+ 기독교의 방식 (대속)

+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를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