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ver Beach by Matthew Arnold

마음이 헛헛해져 예전에 읽던 영시를 꺼내 봤다. 이번에는 직접 번역도 달았다. 영문과 출신이면 알 수도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시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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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 love, let us be true
아, 사랑이여, 진실하자
To one another! for the world, which seems
서로에게! 왜냐하면 세상은
To lie before us like a land of dreams,
마치 꿈의 땅처럼 우리 앞에 놓여있는 듯 하고,
So various, so beautiful, so new,
그토록 다채롭고, 그토록 아름다우며, 그토록 새롭게 보여질 지라도,
Hath really neither joy, nor love, nor light,
진실로 그곳에는 기쁨도 사랑도 빛도 없는,
Nor certitude, nor peace, nor help for pain;
확실한 것도 평화도 고통을 덜어줄 도움도 없는 그러한 곳이기 때문이다.
And we are here as on a darkling plain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어스름한 평원 위에 있다.
Swept with confused alarms of struggle and flight,
전투와 패주의 혼란스런 경고에 압도된
Where ignorant armies clash by night.
어둠속에서 무지한 군대들이 충돌하는 바로 그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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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ver Beach 중에서 by Matthew Arn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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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마지막인 이 구절은 두번 읽어야 한다. 한번은 순서대로, 두번째로는 인과관계를 따져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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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두번째 줄 접속사 for를 기준으로 뒷부분이 말하는 바, 밤에 전쟁을 하고 있음에도 누구와 무엇과 싸우는지도 모르는 그러한 상황, 세상에 확실한 것도 없으며 고통만이 가득한 그 곳임을 알고 있음에도, 아니 정확히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시인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for를 쓴다.) 앞의 진술은 서로에게 진실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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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시에서 말하는 love는 뭐고 시의 청자는 누구일까? 이 시가 신혼여행에서 쓴 시라는 걸 생각하면, 사랑이라고 부른 대상을 부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리고 시가 다루는 소재의 크기를 고려해보면, 좀더 크게 혼란한 세상에 던져져 낙담한 사람들을 향한 속삭임이라고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이렇게 읽는 근거는 바로 다음줄에 있는 one another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두명이서 서로간에를 말할 때는 each other를 쓸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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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아놀드가 살았던 빅토리아 시대를 돌이켜보면, 아놀드의 의심과 고뇌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게다가 바로 전 연에는 그 유명한 sea of faith 라는 표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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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조금 헛헛했던 나에게 돌아온다. 조그맣게 속삭여본다. 내가 붙들고 있는 그 조그마한 진실마저 흔들리고, 평안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그 순간. 서로에게 진실하자. 아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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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덧대기
1. 현대인의 감성으로 이 시가 다소 아재스럽게 읽히는 것은 이 시가 노래하는 주제가 워낙 거창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여러 시인과 작가들에게 변주가 되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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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전에 이안 매큐언의 체실비치에서를 읽은 적이 있는데 배경설정이 이 시에서 따온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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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체실비치에서는 워낙 소품이긴 한데, 묘사와 구성이 쫀쫀해서 영화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달에 영화로 개봉한다고. 예고편을 보건데 영화도 좀 소품 같은 느낌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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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를 읽으며

누구하고 약속한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포스팅을 해왔는데, 열흘 정도 블로그를 방치해두었다. 집에 3주간 손님이 머물렀고, 이번주는 친구가 다쳐서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11월 들어서는 글쓰고, 그림 그리는 창작하는 쪽의 잉여질보다는 책을 읽고, 컴퓨터 게임하고, 영화를 보는 소비쪽의 잉여질에 열을 더 내고 있다. 몇년간 꽤 바쁘고 힘에 부치게 살았는데, 올해는 원없이 잉여질을 하며 산다. 아이도 조금 컸고, 미국에서 삶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회사도 한국 생각하면 몹시 널널한 편…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 나란 인간이 게으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야지 잉여질도 좀더 생산적이 될 텐데, 이건 그냥 소모적으로 내가 만든 세상에 침잠해 가는가 싶다.

10대 때는 소설을 꽤 좋아했는데, 한동안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보지 않았다. 살아가는 일은 소설보다 치열하고, 훨씬 더 다양한 관점과 진실을 보여주는데, 굳이 소설에서 무언가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문학은 때로 작가의 관점에서 일말의 진리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작가가 묘사하는 배경을 능동적으로 마음에 그려보고, 사건을 상상해보고, 그리고 인물에 자신을 투영해보는 일종의 과정을 거쳐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해도 시간 소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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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가장 소모적인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사랑 이야기.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On Chesil Beach이다. 한국에도 체실비치에서 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것으로 안다. 굳이 이언 매큐언을 고른 것은 영미 문학권에서 핫한 작가를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눈으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글책을 구해보는 건 돈도 시간도 아까우니 그냥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영어책을 보자는 귀차니즘도 있었고…

그래도 왜 사랑이야기일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한참 피가 끓던 나이에 남녀상열지사에 뜨거운 가슴을 품어본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는 항상 어설펐다. 게다가 30을 넘기고서는 사랑은 별 관심사가 아니다. 결혼하고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이제 만나는 여자와 썸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인 것도 있을 정도였다. 썸은 은근한 긴장감을 주고, 긴장감이란 대체로 기분 좋은 류의 긴장감이지만, 그 긴장감은 내가 좋아하는 편안함과는 반대기제이다.

어쨌든, 책얘기로 들어가서… 책에서 첫날밤에 대한 묘사는 구체적이다. (몸의 구석구석을 표현하는 명사, 신체접촉에 관련되는 동사를 사전에서 좀 찾아봐야했다.) 육체로 시작되는 감정의 파장. 그리고 엇갈리는 말들. 내가 20대 청년 일 때 읽었다면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상황들이다.

작가는 사랑 이야기를 참 먹먹하게 하고 있다. 이야기는 잔잔하게 차곡차곡 쌓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몰아친다. 결국 책장을 덮으면 진한 여운이 남는다. 플롯을 쫀쫀하게 짜는 것, 디테일한 묘사에서 작가의 꼼꼼함이 느껴진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atonement도 한번 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