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를 재조명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요며칠 나는 종교개혁이 세상에 남긴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잊기전에 정리해본다.
나는 예전부터 루터보다는 에라스무스가 좋았다. 루터를 생각하면 혁명가, 확고한 신념의 고집스러운 신앙인이 떠오른다.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불확실성과 현실의 모호함을 그대로 존중했다. 온건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루터와 끝까지 대립했다. 그는 종교개혁가들의 스승이었지만 종교개혁을 끝내 지지하지 않았다. ‘우신예찬’을 통해서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했지만, 그의 개혁은 카톨릭의 안에 있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카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여생을 마친다.
나는 ‘자유주의자’ 에라스무스의 경건함, 소박함, 신중함, 정직함이 더 좋다.
Erasmus (1466-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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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올렸던 에라스무스 포스트
회색인간 에라스무스 (2015년 3월 5일자)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정말 비텐베르크 성당에 게시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종교개혁을 1517년 10월 31일로 기념하는 것은 루터의 말년에 가서 이루어진 종교개혁 신성화 작업의 일환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루터가 주교에게 반박문을 보냈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를 한다.
사실 날짜가 뭐그리 중하겠는가. 95개조 반박문을 계기로 종교개혁이 시작이 되었지만 종교개혁이 전파된 것은 그 이후에 루터가 목숨을 걸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 신념은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a Gratia 오직 은혜 라는 그의 사상이다. (물론 여러가지 우연도 따랐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번 포스트 참조.)
루터에 대해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그가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로 대체했다. 여타의 고전이 그러하듯이, 모든이가 똑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당장 루터 이후에 개신교는 수많은 교파로 갈리게 된다. 이에 양심/사상의 자유라는 관념이 형성 된다. 사상의 자유가 성경을 해석하는 일과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17세기만 해도 모든 사상은 성경(또는 기독교)이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종국에 사상의 자유가 자유, 인권, 그리고 개인의 발견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역사가 명쾌하게 설명이 되는게 항상 불편하다. 종교개혁이 이 모든 일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까지 인정을 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 과정은 짧지도 깔끔하지도 않았다.
1517년에 루터가 던진 불씨로 인해 16-17세기 유럽은 전쟁터가 되었다. 구교와 신교는 200년 가까이 싸움을 한다. 종교라는 이름 아래서 벌어진 학살, 강간, 파괴는 21세기 시리아/이라크, 미얀마와 남수단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큰 차이가 없다. 이 난장판은 Peace of Westphalia 1648 베스트팔렌 조약, Act of Tolerance 1689 신교 자유령을 지나고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그래서 그 시대의 사상가들 그러니까 로크 같은 사람이 들고나온 사상이 ‘관용의 정신’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를 개인의 영역으로 한정해야한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정말 흥미로운 건 구교와 신교가 목숨을 걸고 싸우던 그 시기에 오히려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은 타종교 (카톨릭/개신교/정교회)에 상당히 관용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이슬람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참고자료: Christianity, Islam, and Locke (the Economist, 2015년 2월 3일자)
John Locke (1632-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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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볼테르, 루소, 흄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이를 발전시켜 결국 이신론/무신론에 이른다. 여기에 더해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구조의 변화들이 기독교의 세속화를 부추겼다. 현대에 와서 기독교는 개인의 신념으로 한정되고, 정교분리는 상식이 되었다. 현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현대화된 기독교가 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믿는다. 그 기독교는 중세인이 믿었던 기독교와는 상당히 다른 믿음이다.
다시 루터로 돌아오자. 그래서 루터가 500년전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게 ‘개인’, ‘인권’, ‘자유’로 연결되는 시발점이 되었을까? 그럴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보는 관점과 자신이 발을 딛고 서있는 생각의 뿌리에 따라 다르겠지.
사실 루터는 자신의 고집스러움, 반골기질이 역사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믿음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불렀다는 것. 그리고 또 그로인해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사상이 꽃피게 되었다는 사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다보면 참 묘한 감정이 든다.
1517년을 생각해본다. 나는 여전히 에라스무스가 좋다. 내가 그시대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교회 내부에서의 조용한 개혁을 해보려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나 다시 루터를 생각해보면, 변곡점에 이른 어떤 순간이 오면 신은 혁명가의 손을 빌어 물줄기를 바꾸는 걸 즐기는 것 같다.
오늘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500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니까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
올초에 독일과 루터에 관한 이야기를 끄적인 적이 있어 재공유한다.
재공유 하면서 당시 역사적 배경을 되새겨 보았다.
한 페친분이 언급하셨는데, 돌이켜보면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여러가지 우연의 요소가 있었다. 관점에 따라 그 우연을 신의 섭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역사의 필연성이라고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보름스 회의 (Diet of Worms) 직후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납치해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기지 않았다면, 그는 얀후스나 틴들 같은 순교자가 되었을 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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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t of Worms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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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그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지내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지 않았다면. 또는 활자술의 발명이 없어서 그의 번역과 이후 팜플랫들이 널리 퍼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는 종교 개혁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 지 모른다.
지난 번 루터와 독일에 관한 글은 아래 참조.
독일에서 성악을 전공하신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독일에서 합창단원을 하다가 지금은 스위스 시립 합창단원으로 직장을 얻어 정착하셨다. 그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독일은 동네마다 합창단이 잘 조직 되어있고 안정적으로 운영이 된다고 한다. 특히 여자 알토 파트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어서 구직이 비교적 수월하다고 했다.
합창단 일자리가 많아서 원한다면 (그리고 심심하고 단조로운 유럽 생활에 만족한다면) 성악 전공자가 독일에 정착하기 쉽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성악 유학을 가는 분들 중에 이탈리아로 가시는 분들은 귀국하시는 분들이 많고 독일 쪽은 남는 분들이 꽤 된다고 들었다.
신학도 아울러 전공하신 그분께서는 독일에는 기독교의 유산이 사회 전반에 여전히 남아있다고 몇차례 언급 했다. 지금은 독일도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세속국가라고 봐야하지만 문화/사회적으로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기반으로 기틀을 잡은 나라이고 그 중에서 루터의 영향이 가장 컸다.
이왕 음악이야기로 수다를 시작했으니, 오케스트라를 예로 들자. 독일에는 130여개의 오케스트라가 있다. 독일에는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가 80개쯤 되니까 (위키피디아 기준) 왠만한 도시는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는 말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규모이다. 그렇게 많은 오케스트라 운영이 가능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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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성악을 전공하신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독일에서 합창단원을 하다가 지금은 스위스 시립 합창단원으로 직장을 얻어 정착하셨다. 그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독일은 동네마다 합창단이 잘 조직 되어있고 안정적으로 운영이 된다고 한다. 특히 여자 알토 파트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어서 구직이 비교적 수월하다고 했다.
합창단 일자리가 많아서 원한다면 (그리고 심심하고 단조로운 유럽 생활에 만족한다면) 성악 전공자가 독일에 정착하기 쉽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성악 유학을 가는 분들 중에 이탈리아로 가시는 분들은 귀국하시는 분들이 많고 독일 쪽은 남는 분들이 꽤 된다고 들었다.
신학도 아울러 전공하신 그분께서는 독일에는 기독교의 유산이 사회 전반에 여전히 남아있다고 몇차례 언급 했다. 지금은 독일도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세속국가라고 봐야하지만 문화/사회적으로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기반으로 기틀을 잡은 나라이고 그 중에서 루터의 영향이 가장 컸다.
이왕 음악이야기로 수다를 시작했으니, 오케스트라를 예로 들자. 독일에는 130여개의 오케스트라가 있다. 독일에는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가 80개쯤 되니까 (위키피디아 기준) 왠만한 도시는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는 말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규모이다. 그렇게 많은 오케스트라 운영이 가능하려면 그만큼의 관객이 있어야 한다. 독일인에게 철마다 클래식 공연장에 가는 일은 자연스럽다. 앞서 언급한 그분은 독일인이 이렇게 음악을 사랑하는 민족이 된 것을 루터의 영향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음악이 그리스도인에게 종교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사탄과 싸우는 무기가 된다고 했다. 반면에 루터는 미술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마침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이번주에 관련한 기사가 나서 공유한다. 해당 기사는 루터가 독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적고 있다. 그 예중에 하나가 음악에 대한 애정이다. 독일인이 클래식 콘서트를 즐기는 건 일종의 정례화된 종교 행위 같은 느낌까지 준다. 루터가 독일에 끼친 영향은 음악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디자인, 출판, 경제관 등 사회 전반에 걸쳐있다.
물론 나는 어떤 하나의 요인이 (이경우에는 루터라는 사람이)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독일만 봐도 루터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자니 섭하다. 독일에는 칸트 같은 사상가, 바하/헨델/베토벤 같은 음악가, 하이젠 베르크 같은 과학자 처럼 독일 뿐 아니라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어쨌든 기사 자체는 재미나게 읽었다. 내용 정리/저장 해둘 겸 해서 공유한다.
해당기사: The Economist | Charlemagne: Nailed it (1월 5일자)
마틴 루터 (1483-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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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루터는 독일의 어떤 분야에 영향을 끼쳤을까. 첫째 독일인의 미적인 감각이 그러하다. 루터는 기독교인은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실용적이고 소박한 바우하우스 스타일은 루터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 후에 스웨덴에도 영향을 미쳐 IKEA 스타일이 되었다고. (루터교는 북유럽에도 전파되었다.) 생각해보면 루터교 목사의 딸인 메르켈 총리나 본인이 루터교 목사인 요하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은 소박한 이미지의 사람들이다. 옆나라 프랑스의 화려함과 비교하면 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또 독일은 출판 시장이 크다.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큰 시장이라고. 루터와 연관지어 생각해보자. 루터는 성경을 독어로 번역 배포 하면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빈부/남녀/노소에 관련없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는 독일의 문맹률을 낮추는데에 공헌한다.
마지막으로 독일인의 경제 관념이다. 막스 베버가 1904년 ‘프로테스타티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을 통해 논증한 바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베버가 말한 신교는 주로 칼빈주의와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를 말한다. 칼빈은 세상의 모든 직업은 숭고하다고 보았다. 베버에 따르면 칼빈의 사상은 개인이 부를 추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독일식 자본주의는 영미권 자본주의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부채를 최소한으로 가져가고 인플레이션 억제에 우선순위를 두는 독일 경제의 방향성은 (물론 전후 극악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바에서도 기인하겠지만) 루터의 사상에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구원 이후에 기독교인이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독일어로 work는 beruf이고 직업은 (영어 calling) berufung 이다. 어원이 같다. Gerhard Wegner라는 한 신학자 역시 북유럽과 독일 복지의 뿌리를 루터식 사회주의 Lutheran socialism에서 찾았다.
루터의 유산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루터는 유대인을 배척했다.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유에서다. 어떤면에서 루터의 생각은 전후 독일인의 유대인 혐오에 사상적인 배경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해당 기사는 세상의 권위에 순종하라고 설교하고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군주를 지지했던 그의 보수적인 성향이 현재 독일인의 국민성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올해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정확하게 5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니까 1517년 10월 31일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 사실 지금에 와서 독일이 기독교 국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카톨릭을 포함해도 기독교인은 삼분의 일이 채 되지 않는다. 특히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비텐베르크는 지금에 와서 유럽에서도 가장 비종교적인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독일 관련 이야기에서 종종 루터의 유산을 발견하곤 하는데, 그럴때마다 역사에 실재했던 한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실감하고서는 깜짝 놀라곤 한다.
16세기 초반, 종교개혁 시기의 중심인물 에라스무스. 나는 그를 좋아한다. 그는 대표적인 회색인간이었고, 경건한 자유주의자였다.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하우징어 (Johan Huizinga, 1887 – 1945)는 에라스무스(1466-1536)를 아래와 같이 평했다.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 세속적 관심사로부터의 초연함과 지저분한 것들에 대한 경멸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원적 즐거움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장의 물품 가격을 잘 알고, 영국 왕의 원정계획에 대해 소상하고, 로마에서 온 소식을 잘 알며, 덴마크의 생활환경을 꿰뚫고 있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인가? <대화집>에 나오는 현명한 노인은 그리 높지 않은 명예의 자리에서 안전하고도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판단치 않으며, 이 세상에 대해 미소를 짓는다. 책들로 둘러싸인 채 늘 고요하게 있으면서 자족하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 (에라스뮈스 평전 – 요한 하위징아 저, 연암서가)
관련한 이전 포스트: 회색분자와 에라스무스(2015년 3월 5일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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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100개를 저장할 때마다 중간 결산을 하고 있다. 300번 째 중간 결산을 할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떠들었다. 내가 아는 이상, 그리고 능력이상 떠들기도 했다. 예전에 한 번 적었듯 나에게 블로그는 내 자신과의 대화이다. 나의 포스트들은 일차 독자가 나이고, 내가 읽고서 만족하면 그걸로 족하다. 글을 써두고서 시간이 흐른 뒤에 읽어보면 예전의 나를 만나게 된다. 이전에도 블로그에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종종했지만, 이는 내가 그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었고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글을 쓰면서 나를 드러내려고 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글들이 있는데, 나를 빼고서 글을 쓴다면 쓰레기 더미를 재생산하는 것 밖에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보니, 최근의 포스트들은 몇개는 그나마 봐줄만 했고, 몇개는 별 의미가 없었다. 요즘 관심사가 주로 시사적인 이야기에 치우치다보니 고요하게 앉아서 책을 보며 자족할 일도 별로 없었다. 뉴스에 지나치게 열중하면, 얼굴을 찌푸리고 판단하기 시작하며 중심을 잃기 쉽상이다.
어쨌든 중간 결산이니까 재미삼아 통계도 내어봤다. 300번 째 포스팅 때 누적조회수가 18000건 이었고 지금은 약 31000건 정도이다. 중간 결산 때마다 트래픽이 대략 두배 정도 는다. 과분한 관심이고 동시에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조회수가 높았던 15개의 포스트를 정리해보았다. 조회수가 높았다고 좋은 글이었던 것은 아니고 몇몇 글은 지금 읽어보니 몹시 부끄럽다. 어떤 포스트들은 시의적절했고, 어떤 포스트들은 제목이 선정적이어서 관심을 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떤 계기가 되었든, 포스트들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생각을, 그리고 배움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즐거운 일이다. 내 포스트들이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었다면 그또한 감사할 일이다.
1위: 엑셀 Y축 물결무늬 차트 그리기
2위: 주요국가 부동산 가격 추세 그래프
3위: 일본의 의리, 한국의 정, 그리고 미국인의 인간관계
4위: 현대 경제학의 6가지 주요 이론: 1.정보 비대칭
5위: 미국회사와 cultural fit
6위: 아나키스트: 천황 암살을 계획했던 가네코 후미코
7위: 측은지심(惻隱之心)
8위: 미국 이민 생활의 어두운 단면 – Crime in Atlanta
9위: 미국의 중산층 그리고 맞벌이 부부의 삶
10위: 한국 방문중에 느낀 점들
11위: 유가가 곡물가격에 미치는 영향
12위: 1st work anniversary!
13위: 한국사람들은 왜 외국에서 서로 피할까?
14위: 강세와 발음 – Atlanta, fantastic, coyote
15위: 현대 경제학의 6가지 주요 이론: 2.금융시장의 불안정성 – 민스키 모멘트
순위에 들지 못했지만 쓰면서 재미있었던 포스트 21개를 보태자면
이슬람과 서구사회 (연재), 브렉시트 (연재), 자메이카 육상 선수의 비밀, 미국 낙태 이슈 정리 (연재), 미국 총기 규제 이슈 정리 (연재), IS와 이라크 내전, 2016 미국 대선 관련, 내가 놓친 2015년 미국 트랜드 6가지, 내가 믿는 기독교 (연재), 발음/관사/전치사 이야기, 시편 121편 :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온라인에서 나를 얼마나 드러내는 것이 좋을까, 참나무를 훑고 가는 바람소리, 데스틴 여행기 (연재),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말과 글, 누군가 정리해둔 외신 추천글에 필받아서, First day of school, 아이 교육에 대해 올바로 질문하는 법, 맥도날드의 기억들, 번역가, 편집자, 그리고 지적 노동, THE MISTRUST OF SCIENCE – Atul Gawande (New Yorker)
가 있다.
나는 회색분자이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좀 불편하다. 내가 보는 세상은 항상 불투명하고 딱잘라 말하기 어려운 모습만 가득하다. 그렇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흑백 논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하우징어 (Johan Huizinga, 1887 – 1945)는 에라스무스(1466-1536)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썼다.
The ideal joy of life is also perfectly idyllic in so far that it requires an aloofness from earthly concerns and contempt for all that is sordid. It is foolish to be interested in all that happens in the world; to pride oneself on one’s knowledge of the market, of the King of England‘s plans, the news from Rome, conditions in Denmark. The sensible old man of the Colloquium Senile has an easy post of honor, a safe mediocrity, he judges no one and nothing and smiles upon all the world. Quiet for oneself, surrounded by books.- that is of all thing most desirable.
– Erasmus and the Age of Reformation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 세속적 관심사로부터의 초연함과 지저분한 것들에 대한 경멸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원적 즐거움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장의 물품 가격을 잘 알고, 영국 왕의 원정계획에 대해 소상하고, 로마에서 온 소식을 잘 알며, 덴마크의 생활환경을 꿰뚫고 있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인가? <대화집>에 나오는 현명한 노인은 그리 높지 않은 명예의 자리에서 안전하고도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판단치 않으며, 이 세상에 대해 미소를 짓는다. 책들로 둘러싸인 채 늘 고요하게 있으면서 자족하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 (에라스뮈스 평전 – 요한 하위징아 저, 연암서가)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불확실성과 현실의 모호함이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건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와 끝까지 대립했다. 그는 수많은 종교개혁가의 스승이었지만 종교개혁을 끝내 지지하지 않았다. <우신예찬>을 통해서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했지만, 그의 개혁은 항상 카톨릭의 안에 있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카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여생을 마친다.
후세는 루터의 이름을 기억한다. 당대에 학문적 깊이와 고고함으로 존경을 받았던 에라스무스는 지금에 와서 유약한 지식인, 이도저도 아닌 신학자 정도로 매도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루터는 개신교의 아버지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기치는 서양 정신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그러할 지라도 나는 루터가 아닌 에라스무스에 더 끌린다. 루터의 신학에 동의하지만 경건함/소박함/정직함/신중함이라는 가치를 지닌 ‘자유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영락없는 회색분자인듯 하다.
+ 참고자료: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 – 그의 생활방식에 대하여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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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이뤄지는 토론을 보면서 저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적는 이야기는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저는 신학/역사/인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일이 없기 때문에 깊이에 한계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해왔던 부분이고 저의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제 생각을 몇자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저는 L님과 K님의 토론을 보면서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이 꾸란을 접근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꾸란은 선지자 무하메드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슬람은 꾸란의 단어 (아랍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암기하며,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종교입니다.
제 생각은 선지자 모하메드가 중세(6~7세기)의 인물이 었다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무슬림의 모든 행동의 근거는 모하메드의 계시에 바탕합니다. 그런데 중세의 도덕관념과 세계관은 현대인의 눈으로는 몹시 이질적입니다.
저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류는 변해왔고 이슬람 세계는 중세의 가치관(정확히 말하자면 모하메드의 계시)을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비무슬림의 눈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중세의 종교관은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주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므로서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더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려는 신학 연구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성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 시절에 가장 열중했던 일이 독일어 성경 번역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아랍어로 씌어진 꾸란의 원문 자체를 신성시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접근법인 것이지요.
종교개혁 이후에도 서양의 세계관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근대/현대로 오면서 인류가 겪었던 가장 큰 변화중에 하나가 ‘개인’의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와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사회라는 개념은 비교적 생긴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당시 새로운 개념이었던 ‘individualism’을 ‘self-reliance’라는 말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개인주의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self-reliance’라고 정의한 것이지요.
당시 철학자들 사이에서만 논의되던 이야기는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20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개인의 가치를 고귀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류는 인권을 신경쓰기 시작했고 여성의 인권도 비약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비무슬림의 눈으로 무슬림 사회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눈에는 이슬람 국가에서 인권은 무시되고, 여성은 억압된다고 비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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