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근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중의 하나가 바로 윤치호 일기다. 윤치호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 계몽운동의 한축이였던 사람이다. 그는 60년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는데 처음 4년은 한자로 그다음 3년은 한글로 그리고 1889년 부터는 영어로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공부를 위해서 영어 일기를 썼다고 하나 나중에는 습관도 되었고 프라이버시 유지를 위해서 계속 영어로 썼다고 한다.
최근 문창극 총리내정자 논란으로 윤치호가 언론에서 언급되고 있다. 윤치호는 단순히 친일파로 분류하기에는 애매한 사람이다. 일신영달만을 생각했던 이완용 같은 인물하고는 다른 부류라 하겠다. 박노자씨도 윤치호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 중에 하나이고 나도 관심이 있다. 100년 전에 밴더빌트와 애틀란타에 있는 에모리에서 신학을 전공했다는 게 왠지 묘한 동질감을 불러 온다. 물론 그의 친일적인 행적과 사회 지도층이지만 방관적인 모습을 취했던 일에는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윤치호는 명망가의 서자 집안에서 태어 났다. 16살때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 유학을 했고 젊은 시절 김옥균,서재필 등의 갑신정변의 주역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윤치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그때 미국은 제3차 영적 대각성 운동 중이었다. 그는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예수를 믿게 된다. 그는 또한 미국에서 서구 문명의 힘을 체험하는 동시에 뿌리깊은 인종차별을 경험한다. 그의 일기 중에는 유학시절 감리교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큰 충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에서 미국안에 흑인 들을 다 쓸어버려야 한다는 설교했던 것이다.
윤치호는 일제시절 계몽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이었기에 3.1 운동 당시에 민족대표로 서명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거부했고 이후 일본이 ‘황국신민설’을 주장할 때 이에 동조해 완전한 친일파로 돌아서게 된다. 이부분 부터는 윤치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나는 윤치호란 사람이 자기 배부르기 위해 친일을 했다기 보다는 근대화의 모델을 일본에서 찾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인종차별을 경험한 그가 일본에서 답을 찾은 것은 이해 가는 부분이 있다.
어학면에서 윤치호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제대로 영어를 사용한 거의 최초의 한국 사람이다. 그는 영한사전이 없던 시절에 일본에서 독학으로 영어를 깨쳤다. 그는 일기에 미국 사람들 기준으로도 상당히 고급 영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가 만약 그 재능을 사용해서 서양의 고전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면 현대 한국어에 일어의 영향이 좀 적었을 거라는 아쉬움도 있다. 알다시피 근현대 한국에서 서양 고전들은 대부분 일어판을 재번역해 출판되었다.
동시대 사람으로 ‘친미(?)’를 했던 서재필과는 유사하면서 다른 면이 많다. 서재필 또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미국으로 도피하는데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난민 신분으로 들어가서 낮에는 막일을 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다가 독지가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마친다. 그는 대학시절 중국어/일어로 된 의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때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한국 사람 최초로 미국 의사가 된다.
서재필은 미국 사람과 결혼한 후 법적으로도 미국사람이 된다. 그는 한국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지만, 이는 핏줄이 한국 사람이어서 그런 부분이 컸고 본인은 항상 자신을 미국 사람이라고 말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일가가 멸족을 당했기 때문에 조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애매한 것이 이해가 안가는 것 아니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도 영어만 사용했다고 한다. 윤치호의 일기에서도 윤치호가 서재필의 이러한 면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나온다. 서재필은 이승만보다 먼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 받지만 거절한다.
‘친미’를 했던 ‘친일’을 했던 아니면 ‘친노’를 하던 당시 지식인들은 어떤 측면에서 선택을 해야했다. 물론 김구 선생과 같이 독립주의 노선을 주장한 분도 계시지만, 조금 이상주의적이지 않나 하는게 나의 의견이다.
기독교인이면서 미국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내 입장에서 윤치호 서재필 이야기를 들으면 선배 이야기 듣는 그런 느낌이 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그리고 세상이 많이 바뀐 지금도 이 두사람의 고민이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밑에 댓글로 썼던 내용인데 본문으로 오는게 맞을 걸 같아서 덧붙였습니다.)
윤치호는 YMCA 운동로 우리나라 기독교의 계몽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의 기준으로 철저히 현실적인 상황 판단에 의한 친일과 계몽운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이 ‘한국인은 무지하니까 주님의 축복으로 변해야 한다’는 70~80년대 한국 교회의 메세지에 영향을 끼친 것을 완전히 부인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성장한 한국교회….) 이러한 한국교회식 계몽주의는 공산주의자의 박해를 피해서 남하한 초기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반공주의 전통과 함께 한국교회의 중요한 역사적인 뿌리 중에 하나입니다. 문창극 같은 인물이 우리나라 교계의 역사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사상이 어느정도 필요했던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이미 계몽사상은 100여년, 그리고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60여년이 지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그 전통과 신학을 뛰어넘을 인물이나 고민들이 없었다는 데에 지금의 문제가 온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어려움과 반성들이 새로운 신학과 사상의 발견의 계기가 되고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서 긍적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연관글:
+ 덧 (2015년 9월 15일): 이글을 블로그 초창기에 포스팅 했습니다. 지금와서 읽어보니 생각이 덜 영글은 부분이 꽤 보입니다. 왠지 부끄러워져서 비공개로 돌릴까 싶어집니다. 그러다가 이 글은 예전의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자료인 듯 하여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