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나타난 (가톨릭) 교계 표심에 대한 기사.
세계 각지에서 보이는 양극화의 물결은 프랑스 카톨릭 계도 예외가 아닌듯. 강력한 세속주의를 기반으로 한 나라 프랑스에서도 종교/윤리 문제가 이번 대선에서 이슈가 되었다는 내용이 흥미로워 저장해 둔다.
프랑스 대선에서 드러난 교회의 분열 (가톨릭 뉴스, 5월 11일자)
Emanuel Macron (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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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나타난 (가톨릭) 교계 표심에 대한 기사.
세계 각지에서 보이는 양극화의 물결은 프랑스 카톨릭 계도 예외가 아닌듯. 강력한 세속주의를 기반으로 한 나라 프랑스에서도 종교/윤리 문제가 이번 대선에서 이슈가 되었다는 내용이 흥미로워 저장해 둔다.
프랑스 대선에서 드러난 교회의 분열 (가톨릭 뉴스, 5월 11일자)
Emanuel Macron (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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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회색분자이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좀 불편하다. 내가 보는 세상은 항상 불투명하고 딱잘라 말하기 어려운 모습만 가득하다. 그렇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흑백 논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하우징어 (Johan Huizinga, 1887 – 1945)는 에라스무스(1466-1536)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썼다.
The ideal joy of life is also perfectly idyllic in so far that it requires an aloofness from earthly concerns and contempt for all that is sordid. It is foolish to be interested in all that happens in the world; to pride oneself on one’s knowledge of the market, of the King of England‘s plans, the news from Rome, conditions in Denmark. The sensible old man of the Colloquium Senile has an easy post of honor, a safe mediocrity, he judges no one and nothing and smiles upon all the world. Quiet for oneself, surrounded by books.- that is of all thing most desirable.
– Erasmus and the Age of Reformation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 세속적 관심사로부터의 초연함과 지저분한 것들에 대한 경멸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원적 즐거움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장의 물품 가격을 잘 알고, 영국 왕의 원정계획에 대해 소상하고, 로마에서 온 소식을 잘 알며, 덴마크의 생활환경을 꿰뚫고 있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인가? <대화집>에 나오는 현명한 노인은 그리 높지 않은 명예의 자리에서 안전하고도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판단치 않으며, 이 세상에 대해 미소를 짓는다. 책들로 둘러싸인 채 늘 고요하게 있으면서 자족하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 (에라스뮈스 평전 – 요한 하위징아 저, 연암서가)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불확실성과 현실의 모호함이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건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와 끝까지 대립했다. 그는 수많은 종교개혁가의 스승이었지만 종교개혁을 끝내 지지하지 않았다. <우신예찬>을 통해서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했지만, 그의 개혁은 항상 카톨릭의 안에 있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카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여생을 마친다.
후세는 루터의 이름을 기억한다. 당대에 학문적 깊이와 고고함으로 존경을 받았던 에라스무스는 지금에 와서 유약한 지식인, 이도저도 아닌 신학자 정도로 매도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루터는 개신교의 아버지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기치는 서양 정신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그러할 지라도 나는 루터가 아닌 에라스무스에 더 끌린다. 루터의 신학에 동의하지만 경건함/소박함/정직함/신중함이라는 가치를 지닌 ‘자유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영락없는 회색분자인듯 하다.
+ 참고자료: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 – 그의 생활방식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