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독점 규제 논란과 그 역사

미국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 중 하나인 워렌 의원이 최근 공약으로 테크 대기업들, 즉 아마존/구글/페북의 분할을 내세워서 화제이다. 심지어는 한국 뉴스에서도 보도를 할 정도.

미국판 재벌개혁워런아마존·페북·구글 분할 (조선일보, 3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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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 주제에 다소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핸펀으로 메모를 남겨본다.

기사만 보면 지상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이게 왠일인가 싶지만, 독과점 (특히 테크기업의) 이슈는 최근 미국 경제/정치 쪽에서 이미 상당히 뜨거운 이슈이다. 이쪽으로 급진적인(?) 경제학자들은 테크기업의 모노폴리를 monopsony 수요독점 이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반독점 운동은 소위 New Brandeis Movement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워렌은 New Brandeis Movement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정치인 중에 하나이다.

2016년 워렌이 open market event에서 한 연설은 일종의 New Brandeis Movement의 요약문으로 들릴 정도이다. 참고로 연설문 링크를 남겨둔다. 11페이지 분량이고 주석이 친절하게 달려있어 추가 공부를 하기에도 좋다.

2016 엘리자베스 워렌 반독점 정책 연설 전문 (2016년 6월 29일자)

뉴 브랜다이즈 운동 관련해서 최근 기사는 아래 NYT 기사를 참조하면 될 것 같다. 아래 기사는 독점법 관련 젊은 스타 법학자 리나 칸 (30세)을 소개하고 있다.

Amazon’s Antitrust Antagonist Has a Breakthrough Idea (NYT, 2018년 9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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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점 관련 논쟁의 역사를 좀 살펴보자. 1890년 루즈벨트의 Sherman Act와 1914년 우드로 윌슨의 Clayton Act를 우선 봐야할 것 같다. Sherman Act는 지금 엑손 모빌의 전신인 스탠다드 오일과 American Tobacco Company를 분할 시키는 근거가 된 법이다. 그리고 그당시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루이스 브랜다이즈 대법원 판사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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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다이즈의 말을 하나 인용해보자면, “We may have democracy, or we may have wealth concentrated in the hands of a few, but we can’t have both.” 이 있다.

2세기 전의 이 말이 현대 미국 젊은이들에게도 상당히 공감을 주지 않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반독점 운동을 ‘뉴 브랜다이즈 운동’이라고 명명한게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셔먼 액트 시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자 반독점의 흐름은 피크를 친다. 기업이 커지면 연방정부가 눈여겨 보기 시작했고, 자영업자 같은 분들이 소송을 걸면 법원은 항상 ‘소위’ 약자의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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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자. 1966년 von’s grocery case. 60년에 지역 마트를 사서 캘리포니아에 진출한 회사가 반독점법에 걸린다. 합병 이후에도 그회사의 지역 시장 점유율은 7.5%에 불과함에도.

1967년 Utah pie case. 전국구 규모의 냉동 파이 회사가 싼 가격을 무기로 지역 파이 시장에 진출하려 했으나, 동네 파이 가게의 시장을 잠식한다는 이유로 반독점에 걸린다. 물론 소송건 파이가게가 지역독점을 하고 있고 이로 돈을 번다는 건 안 비밀.

판결문 링크
1966 US v. Von’s Grocery Co.
1967 Utah Pie v. Continental Baking Co.

상황이 이쯤 되자 사람들이 반독점 규제에도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에 이르자 반독점의 기세는 누그러들었다. 그 기세가 완전히 꺽어진건 1978년 Robert Bork 판사에 의해서다. (참고로 Bork 판사는 DC circuit의 판사로 재직했고 레이건에 의해 대법원 판사 후보에 올랐으나 의회 인준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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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k 판사는 지금까지도 반독점법 관련 고전으로 읽히는 Antitrust Paradox라는 책을 출판한다. 시카고 로스쿨 출신 Bork는 시카고의 밀턴 프리드먼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세운 독점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consumer welfare에 해가 되는가 아닌가였다.

그러니까 현대의 기준으로, 또는 Bork 판사의 기준으로, 브랜다이즈가 주장한 이야기는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경제학을 모르는 사람이 할법한 이야기인 것이다. 실제로 일부 경제학자들은 뉴 브랜다이즈 운동을 hipster economy 라며 무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지금 계속 논란이 되는 불평등의 문제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던 시장경제의 약속은 어디로 가고, 독점 (또는 monoposony) 는 왜 점점 심화되고 있고, 자영업/중소기업들은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M&A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실제적인 의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다.

참고로 이건 최근 벌어지고 현상이고 팩트이다. (해결책이나 분석은 자신이 밟고 있는 이념의 토대에 따라 상이할 수 있겠지만…) 관련해서 3년전에 자료를 정리한 적이 있는데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될 것 같다.

커져가는 반기업 정서, 그리고 독과점 이슈 (2016년 9월 29일자)

너무 주저리주저리 길어졌는데 점심시간도 끝나가니 내 의견을 남기고 마무리를 지으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얘기에 내가 답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벌려놨으니 아직 정리가 안된 생각이라도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아서.

사실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에 들어서 논란이 되는 반독점 규제 이슈는 애매하기 짝이 없고 답도 없다. Antitrust paradox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부분 소비자가 손해보았는가 물어본다면 대답이 어렵다.

소셜 미디어는 (광고를 제외하면) 소비자에게 공짜이기에 페북이 독점한다고 해서 광고가 귀찮은 이상의 어떤 경제적인 해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소비자는 페북에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 정보라는게 페북수준으로 데이타를 모으기 전까지는 돈되기 힘들고, 그렇게 신경쓰는 사람도 드물다.

비즈니스 모델만 거칠게 보자면 구글도 뭐 매한가지고. 애플/아마존이 독점한다고 해도 소비자 입장에서야 싸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 준다면야 뭐…. (한가지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독점 논쟁의 중심에 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지금 완전히 이미지를 쇄신했고 심지어는 페이스북/아마존과 비교해 착한 기업 이미지까지 있다.)

결국 현대에서 문제가 되는 독점은 경제학의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부의 집중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따라오는 권력의 집중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게 아닐까. 그 옛날 브랜다이즈는 독점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문제로 보았었다. 생각해보면 권력을 분리한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미국적이다. 나는 미국 정치철학은 근본적으로 권력을 분리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가끔 실리콘밸리 쪽 분들을 만나면 드는 생각이 이분들은 혁신을 하다보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분들이구나 싶을 때가 있다. 존경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배배꼬인 생각이 든다. 세상과 동떨어져 보이는 고고한 자태가 어디까지 가능할까. 정치도 규제도 딴 세상 이야기이고 숭고한 혁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듯이 말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배배꼬인 관점이다. 나는 그분들의 열정과 선의를 믿는다. 그리고 그를 통해 변화하는 세상에서 누리며 살고 있다. 당장 이 메모도 아이폰으로 페북에다 남기고 있는 걸. 그러나 사람과 선의를 믿는 것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제는 주체 못하고 커진 힘에 더이상 책임감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아닐까. 페이스북이 최근 곤혹을 겪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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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미국 대사 예일대 졸업식 축사 중에서

이번 주에 예일대 졸업식에서 있었던, UN 미국 대사의 졸업식 축사의 일부분을 옮긴다. 오역이 있을 수 있으니, 아래에 원문도 첨부한다.

“우리는 번거롭게 생각하는 과정이 없이 귀에 듣기 좋은 여론을 즐긴다. (We enjoy the comfort of opinion without the discomfort of thought.)” 존 F 케네디는 1962년 이런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우리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할 때, 아니면 검색을 할 때도 그 결과는 이전 검색 히스토리나 위치에 기반한 알고리즘에 의해 결정 됩니다. 우리가 얻는 주된 정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정보들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없이 듣기좋은 여론이 되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편향성을 거스르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작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특히 여러분이 중요하게 여기는 주제에 대해서는 말이죠. 그러나 여러분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보다 그들과 소통을 하는데에 관심이 있다면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르고, 반대로 동시에 나와 다른 의견의 그들이 정말로 옳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We enjoy the comfort of opinion without the discomfort of thought.” That was John F. Kennedy, in 1962. But the problem has only become worse. From the Facebook and Twitter feeds we monitor, to the algorithms that determine the results of our web searches based on our previous browsing history and location, our major sources of information are increasingly engineered to reflect back to us the world as we already see it. They give us the comfort of our opinions without the discomfort of thought. So you have to find a way to break out of your echo chambers.

This is tougher than it sounds, especially when it comes the issues you care most about. But it is in your interest to engage the people you disagree with, rather than shutting them out or shutting them up. Not only because it gives you a chance to challenge their views, and maybe even change them. But also because sometimes, they may just be right.

출처 및 동영상 클립

The United States ambassador to the UN says your Facebook feed is keeping you from making the world better

연설문 전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Get Close’ (Huffington Post)

Samantha Power UN 미국 대사

How You’re Making Facebook a Money Machine

일사분기 어닝콜과 주가를 기준으로 기업을 판단하자면, 애플이 주춤하고 페북은 여전히 잘나간다고 한다.

페이스북 발표에 따르면 이용자 한 사람당 광고 매출이 $11.86이라고 (북미 기준, 1Q/2016).

관련 기사

새삼스레 (이미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내가 점심시간이나 딴청 피울 때, 아니면 짬내서 잠깐씩 글올리고 그러는게 다 페북의 광고 단가를 올려주는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사들처럼 실력있는 기자를 채용하고 양성할 필요없이 생태계만 만들어 두면 사람들이 알아서 광고 가치를 올려주니 참 좋은 비지니스 모델이다. (물론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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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techcrunch)

발터 벤야민 글 발췌

셀프서비스 식당 “아우게이아스” – 발터 벤야민

“혼자서 식사를 한다는 것. 이것은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 제기되는 가장 강력한 이의다. 혼자서 하는 식사는 삶을 힘겹고 거칠게 만들어버린다. 혼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영락하지 않기 위해 엄격하게 살아야 한다. 은둔자들은, 이것 때문만 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소한 식사를 했다. 음식은 더불어 먹어야 제격이다. 식사하는 것이 제대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나누어 먹어야 한다. 누구와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는 식탁에 함께 앉은 거지가 매 식사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나누어 주는 것이었지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담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음식을 나누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사교 또한 문제가 된다.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사람들은 서로 평등해지고 그리고 연결된다. 생 제르망 백작은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식탁 앞에서 음식을 탐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이미 대화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자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자리를 일어서는 곳에서는 경쟁의식이 싸움과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다.”

+ 덧

어쩌다 벤야민이 눈에 들어와 글들을 퍼다 나르고 있다. 몇년쯤에 우리나라에서도 꽤 유행한 철학자로 알고 있는데 글이 매력적이다. 불친절한 글의 전개(논리의 흐름을 독자와 전부 공유하지 않는다.)가 그를 어려운 철학자 반열에 올려 놨나보다. 아니면 번역의 문제일 수도.

그의 글 만을 놓고 봤을 때는 영락없이 트위터/페이스북 글쓰기이다. 이건 페북 중독자가 셀프서비스 식당에서 혼자 밥먹다가 뜬금 없이 든 생각을 포스팅한 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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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가 – 발터 벤야민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간다는 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그 소망의 실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실현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즉 그 실현이 목표에 정확하게 합당한 실현이 되는지, 아니면 탐욕스럽고 흐리멍덩하게 소망에 자신을 탕진하는지는 길을 가고 있는 자의 훈련 여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신을 절제하면서 불필요하거나 장황하거나 어슬렁거리는 동작들을 피하면 피할수록, 모든 신체의 자세는 자신에게 그만큼 더 족하게 되고, 그 신체를 더욱더 적절하게 운용하게 된다. 열악한 작가는 착상이 많이 떠올라 그 착상들 속에서 기력을 탕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열악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냉철하게 말할 줄 모른다.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

Walter Benjamin

너무 잦은 포스팅에 대해서

말이 너무 많으면 공해가 된다. 예전에 한참 힘들 때, 다른이가 올린 페북 포스팅을 보면서 짜증이 난 적이 있다.

‘페북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시간을 죽이는 곳이다!’

요새 내 포스팅의 빈도가 너무 잦다. 누군가는 내 포스팅을 보고서 예전의 나와 같이 짜증을 내고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PostItNotePad

피시통신 시절부터 나의 게시 원칙은 ‘하루에 하나 이상 글을 올리지 않는다.’ 였다. 글을 두개 이상 올리게 되면 읽는 사람들이 피로를 느낀다. 게시자에게 개인적인 애정이 있거나 친목질을 하는게 아니라면 게시물 도배 행위는 누군가에게 소외를 가져온다.

내가 포스팅하는 목적은 메모하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자주 포스팅하게 된다. 예전에는 수첩에 생각을 적곤 했는데, 페북에 적어보니 메모를 공개하는 데에서 오는 장점이 있다. 소통을 통해서 생각이 넓어진다. 또, 공개하기 때문에 생각을 한번더 가다듬게 된다. (단점도 있는데, 잠깐 메모하러 들어왔다가 다른 분들 포스팅에 눈길을 주는 바람에 타임머신을 타버린다.)

그래도 역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이에게는 너무 잦은 포스팅은 공해이다. 그런 분들은 조용히 unfollow버튼을 눌러 주시기를 바란다. (unfriend가 아니다. 그거 누르면 상처받을지 모른다. ㅎㅎ) 그러면 내 메모들 (또는 like/comment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 덧: 며칠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블로그에 옮겨왔습니다.

내가 페북을 하는 6가지 이유

Originally posted 06/30/2014

1. 처음 시작은 미국애들하고 네트워킹 하기 위해서. 그때가 2011년 인데, 학교 친구들이 계정 하나씩 다가지고 있더라.

2. 기존의 친구들과 인연의 끈 유지. 친한 친구들도 멀리 살다보면 자주 보기 힘들고, 그렇다고 미국에서 용건도 없이 뜬금없이 연락하기는 좀 우습다. 가끔 페친들이 올리는 애기들 사진 보거나 소식을 간간히 들으면 오랫만에 봐도 덜 어색하더라. 나처럼 오랜기간 외국생활하는 사람에겐 꽤 유용하다.

3. 소소한 재미… 또는 노출병(?). 내가 어디 있다고 태그 올리고 먹방하는 거나 가끔 가은이 사진 올리는 것 생각보다 재미있더라. 별 의미 없이 시작했다가 끊지 못하고 계속함.

4. 시사 따라 잡기. 몇몇친구들은 페북을 시사 토론의 장으로 사용하는데, feed만 봐도 최근 이슈들을 따라 잡을 수 있다. 진보 성향의 포스팅이 대부분이라 편향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럭저럭 똑똑해지는 느낌도 있어서 좋음.

5. 이건 최근에 생긴 이유인데, 일기 쓰기 또는 생각 정리. 나는 항상 일기를 꾸준히 쓰는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생각해보니 일기는 독자가 없어서 그렇지 않았나 싶다. 페북은 나름 독자를 상정하고 쓰기 때문에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이 된다. 페친중에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영어도 섟어 쓰는데, 그런 글들은 영어권 사람들도 염두에 두고 쓰는 글. 이해해 주시길. 댓글을 안달아서 안보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다 말하더라…

6. 홀아비 생활이 심심했다. 아내와 딸내미가 한 삼개월 한국 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동안 한국말을 한번도 안하고 살았더라. 회사에서는 원래 영어만하고 살고, 딱히 한인 커뮤니티를 위주로 생활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한국말로 수다 떨일이 없었다. 한달정도는 괜찮았는데, 요새는 좀 심심해졌나부다. 페북을 좀 심하게 했다.

이번주 일요일이면 가족들이 온다. 이제 좀 덜 심심해질 것 같구. 페북 중독도 덜해질 듯… ㅎㅎ

쉐릴 샌드버그 – 로켓에 자리가 있으면 올라타라

이제는 한국에도 꽤 유명한 쉐릴 샌드버그.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여성 리더 중에 하나다. 이 동영상은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졸업식 연설. 나름 꽤 유명한 동영상이라 이미 본 페친들도 있을 듯. 꽤 된 거지만, 한글자막 버전을 최근에 봐서 공유함. 성공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깊었고, 직장에서의 여성 이야기를 풀어나간 뒷부분도 재미있게 봤다.

쉐릴 샌드버그 좋아하시면, 여성리더에 대한 강연이 TED에 있으니 찾아보시길. 한글자막도 있어 부담없이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분이 이미 페이스북에서도 이룰것을 다 이뤘기 때문에 정계로 나서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