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지 선정 2018 올해의 국가

해마다 크리스마스 즈음, 이코노미스트지는 올해의 국가를 선정한다. 선정기준은 원래부터 넘사벽 국가가 아니라 그해에 가장 드라마틱한 성과를 보인 나라이다.

관련 기사

The Economist’s country of the year 2018 (12월 18일자)

연말은 왠지 뭔가를 뽑아야 할 것 같은 때이고, 거기에 올해의 국가 뽑는 거 더하는게 어색할리가 있을까. 그치만 따져보면 올해의 국가를 뽑는 건 어지간히 어려운 일이다. 국가라는게 한해 반짝 잘됐다고 계속 잘되는 것도 아니고, 한번 크게 삽질했다고 선진국이 갑자기 개도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는게 쉬운일도 아니고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데…

2017년 이코노미스트지는 올해의 국가로 프랑스를 선정했다. 작년 말엔 그만큼 마크롱의 개혁에 거는 기대가 컸었다. 그치만 노란 조끼 운동으로 올 겨울 기세가 완전 꺽인 프랑스(와 마크롱)를 보면, 역시 한두해 반짝 한 걸 가지고 나라를 평가하는게 얼마나 어려운가 실감하게 된다.

작년에 2위에 올랐던건 한국이었다. 작년 세계인의 눈에는 한국의 존재감이 끝장이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박근혜 탄핵, 이재용 수감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문대통령의 외교 점수도 높았는데, THAAD 로 인한 중국의 위협을 최소화하고 트럼프의 한미 FTA 취소 협상을 교묘하게 연기 시킨 것에 큰 점수를 부여했다.

혹시나 오해를 줄이고자 덧붙이자면, 나는 한국 정치를 잘 모르고, 문대통령을 지지도 비난도 안하는 편이다. 대통령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작다. (물론 트럼프는 미국 사는 내게 큰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견디기 힘들다.) 삶의 기쁨과 고뇌를 한 인물에 투영해서 생각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어떤 인간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외신이 한국을 보는 시각도 필요 이상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 외부인의 시선이기에 신선하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여지를 던져 주지만, 결국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일 뿐이다.

어쨌든…

작년에 이코노미스트지가 한국 말고 프랑스를 선정한 이유는 여전한 북한의 위협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작년만 해도 남북 관계는 몹시나 험악했다. 뉴스를 볼 때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나더라. 그러던게 신년사와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평화무드가 조성 되었고, 올 상반기는 한국인들이 평화 euphoria를 경험했다. 만약 올해의 국가 선정이 연말이 아니고 여름이었다면, 한국이 선정되었으리라.

그럼 2018년 올해의 국가는 어딜까. (자조 유머의 달인) 영국 사람들 답게, 영국을 뽑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영국처럼 부유하고, 평화로우며, 안정된 나라도, 순간적인 감정으로 이뤄진, 대책없는 결정으로 나라가 일순간에 헌정 위기의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는 타산지석이 충분한 선정 사유가 된다는 것. ㅎㅎㅎ

영국을 제치고(?) 2018년 올해의 국가로 선정된 곳은 아르메니아다.

아르메니아. 부패가 만연한 가난한 나라에서 올해 무슨 일이 있었나. 독재자 세르지 사르키산이 사퇴를 했다. 사르키산은 2008년 부터 10년동안 대통령을 했다. 아르메니아 헌법상 삼선이 불가능했고, 사르키산은 내각제로 개헌을 하고 총리가 되는 편법을 쓴다. 눈가리고 아웅에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에 사르키산은 하야한다. 이후 선거에서 70%의 지지를 받은 야당 지도자가 총리를 이어받았다. 언론들은 이를 아르메니아 벨벳 혁명이라고 부른다.

물론, 아르메니아는 여전히 쉽지 않다. 열강에 둘러 쌓여 있는데,( 터키/러시아/범아랍권) 그나마 친러시아을 표방하며 생존을 모색하는 가난한 나라이다. 아제르바이젠과의 영토 분쟁이 재발할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그럼에도 이코노미스트지가 아르메니아를 올해의 나라로 선정한 것은, 여러모로 열악한 상황임에도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가능성을 보여줬다는게 이유이다.

아르메니아 인이여, 건투를 빈다!

Image result for armenia

Heat wave

폭염. 내게 가장 가혹했던 폭염은 2003년 여름 유럽에서 였다. 물론 신병 훈련 때도 잊지 못하지. 6월 군번이라 나름 혹서기에 신병훈련을 했다.
.
2003년 여름 제대하고서 큰 세상을 보겠다며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과장 좀 보태서 군장 만큼 무거운 배낭을 매고서 서유럽을 한달 정도 걸어다녔는데, 마침 그때가 서유럽 최악의 폭염이였다.
.
2003년 폭염은 44.1도를 기록했고 프랑스에서만 15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자크 시락 프랑스 정부는 자연재해에 대책없이 무력했다. 분노한 프랑스인들은 정부를 비난한다. 이후 각국 정부는 폭염을 정의하고 폭염주의보/경보 제도를 운영하게 된다. 현재는 전세계의 2/3 정도가 폭염 경보 제도를 운영한다고.
.
그럼에도 폭염의 정의는 어렵다. UN 산하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국제 기상 기구는 heat wave폭염을 “marked warming air, or the invasion of very warm air, over a large area; it usually lasts from a few days to a few weeks.” (광범위한 지역이 공기로 인해 더워지는 현상. 수일에서 수주 동안 지속된다.) 라고 정의 한다.
.
상당히 모호하기 짝이 없다. 기준 온도도 없고, 기간도 ‘수일에서 수주’라고 말할 뿐이다. 이게 그럴수 밖에 없는게 지역마다 덥다는 기준이 다르니까.
.
예를 들자면 세계최고 온도 기록을 가진 캘리포니아주 Furnace Creek의 폭염 기준이 서울과 같을 수 없다. 여긴 1913년에 56.7도를 기록했다. 빨간 머리앤으로 유명한 캐나다 PEI 같은 경우는 27도만 넘어도 폭염으로 본다. 한국 같은 경우는 33도 이상 기온이 2일 이상 되면 폭염 주의보를 35도 이상 기온이 2일 이상 되면 폭염 경보를 발행한다.
.
사실 최고 온도로만 위험한 정도를 파악하기에 한계가 있다. 습도, 대기 오염 정도, 바람세기, 밤의 최저 온도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나라 마다 지역마다 익숙한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온도가 다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측정이 쉽고 직관적이라 대개는 최대 기온과 지속 일수를 기준으로 삼는다.
.
나라마다 기준이 다르기에 기후학자들이 폭염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데에는 애로 사항이 있다고 한다. 그치만 아직까지는 폭염의 기준은 어디 사는가에 따라 다르다.
.
관련 기사 및 자료
What is a heat wave? (the Economist, 7월 23일자)
Image result for heat wave

프랑스 대선에서 드러난 교회의 분열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나타난 (가톨릭) 교계 표심에 대한 기사.

세계 각지에서 보이는 양극화의 물결은 프랑스 카톨릭 계도 예외가 아닌듯. 강력한 세속주의를 기반으로 한 나라 프랑스에서도 종교/윤리 문제가 이번 대선에서 이슈가 되었다는 내용이 흥미로워 저장해 둔다.

프랑스 대선에서 드러난 교회의 분열 (가톨릭 뉴스, 5월 11일자)

Image result

Emanuel Macron (1977- )

.

다가오는 프랑스 대선

이번주 이코노미스트지 메인 사설을 공유한다. 그리고 요즘 하는 생각도 덧붙인다.

France’s next revolution: The vote that could wreck the European Union (the Economist, 3월 4일자)

두달 앞둔 프랑스 대선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제 좌/우 대결이 아닌 열린사회/닫힌사회의 대결로 세상이 바뀐다고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 해왔는데 그 축소판이 이번 프랑스 대선이다.

‘Frexit’를 내걸고 ‘프랑스 우선주의’를 말하는 르펜이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이고, 그에 대응하여 유럽연합을 지켜낼 사람으로 떠오른 인물은 39세 마크롱이다. 마크롱 역시 고작 작년에 En Marche! 당을 창당한 아웃사이더.

좌파 사회당과 우파 공화당이 바꾸어가며 집권하던 프랑스 정치지형을 생각하면 참 생경한 선거가 될 것 같다. 기존의 프레임으로 보면 르펜을 극우, 마크롱을 중도좌파 정도로 봐야 할 텐데, 그런 식의 프레임이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극우로 분류되는 르펜은 여성 인권과 히잡 금지를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하고, (일부) 동성애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중도좌파 마크롱은 친기업적인 정책을 이야기 하고 노동법 완화를 말한다. 좌/우파 (또는 보수/진보) 프레임으로 바라보면 잘 이해도 가지 않고, 어쩌면 표를 얻기 위한 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논리적인 방향성과 토대가 있다.

히잡관련 이전 포스트
프랑스와 세속주의 laïcité (라이시테) 2016년 8월 30일 포스트

선거 결과는 어찌될까?

이코노미스트지는 여론조사를 근거로 르펜의 당선이 어렵다고 본다. 그런데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을 겪고 나니, 과연 그럴까 싶다. 게다가 양자대결 여론 조사에서도 르펜은 꾸준한 상승세. 물론 르펜 당선, 아직 갈길이 멀다. 그치만 동시에 가시권에 들어왔다.

정치에 별다른 스탠스가 없다. 특히 보수/진보 논쟁에는 별로 개입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러나 소위 nationalism으로 분류되는, 애국심을 말하는 분들은 좀 무섭다. 파시즘의 향기가 느껴진다고 하면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일까.

내가 이해하기로 파시즘은 nationalism과 궁합이 잘 맞는다. 그리고 전체주의와 맞닿아 있다. 파시즘의 뿌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희생자라는 태도, 자신의 집단에게 피해를 가져다준 (또는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상정한) 적을 만드는 일, 그 적을 법률/도덕의 적용범위 안에 두지않는 자세, 이성이나 지식보다는 자신이 신뢰하는 지도자의 직감을 우월하게 보는 믿음, 힘에 대한 과도한 숭상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 참 무력함을 느끼는데, 아무래도 내가 먹물 끄나풀 정도 되는 사람이라서 그럴지 모르겠다. 이데올로기 광풍을 겪었던 20세기 초반 지식인들은 지나치게 무력했다.

예전에 내게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는 너무나 초현실적이었다. 아우슈비츠 옆에 산처럼 쌓인 신발/머리칼/안경/이빨 같은 풍경들. 그런게 어찌 공감이 될 수가 있겠는가.

다시 한번 옛날 책이나 뒤적여 볼 생각이다. 관심갖고 읽으려고 모아둔 책은 아트 슈피겔만 ‘Maus,’ 한나 아렌트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커트 보네거트 ‘Slaughterhouse 5’

언제나 그렇듯이 책 만 사두고서 장식품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Image result for mausImage result for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Image result for slaughterhouse 5

마린 르펜을 지지하는 젊은이들

마린 르펜과 그의 국민 전선을 지지하는 젊은 층에 대한 심층 취재 기사를 공유한다.

Image result for marine le pen

Marine Le Pen (1968-)

.

The French millenials marching behind Marine Le Pen (New Stateman, 2월 21일자)

미국과 유럽의 nationalist들에게 애국심이라는 키워드는 만능이다. 이들은 프랑스를 다시금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르펜의 연설에 열광한다. 트럼프와 브렉시트 지지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위대한 과거로의 회귀를 꿈꾼다. 기존의 정치가들에 대한 환멸과 새로운 정치에의 희망이 그들에게 동일하게 비치는 건 우연일까.

한 20대 젊은 여성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프랑스 접경지역에 사는 이 여자는 룩셈부르크에서 일하고, 가끔 독일에 쇼핑하러 간다. 그녀는 ‘Frexit’를 지지하지만, 지금처럼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일에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We’ve never had problems to work in Luxembourg. Why would that change?” (정말 거기서 끝날까?)

설명을 덧붙이자면, 르펜은 공약집에서 생겐 조약을 없애고 대체하는 다른 정책(?)을 펼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름만 바꾼 생겐으로 밖에 읽히지 않긴 하다만… (르펜의 155 공약집 링크)

핵심 지지층이 정책 실현의 가능성이나 디테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애국심’, ‘정체성’에 집중하고 ‘이민문제’를 화두로 삼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The Arab of the future by Riad Sattouf

뉴요커에 소개된 만화.

capture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한 에피소드를 봤는데, 재미나게 읽었다. 아트 슈피겔먼의 ‘마우스’ (영문위키 링크) 랑 유사한 느낌이다. 기회가 닿으면 전편을 서점에서 사서 볼까 싶기도하다.

시리아계 프랑스인인 작가가 자신의 어린시절 시리아에서의 기억을 만화로 옮겼다. 만화가 묘사하는 시리아인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계인이다. 서구사회와 시리아를 비교하면서 항상 불만에 쌓여있다. 이슬람권에 사는 세속주의자이고, 세속주의자인 동시에 미신적인 전통도 어느 정도 따른다. 아버지를 묘사하는 작가 본인도 시리아와 프랑스에 걸쳐있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경계인을 묘사한 이야기에 끌리는 걸보면 경계인이라는 우리 가족의 정체성이 필연이었나 싶기도 하다.

MEMORIES OF A CHILDHOOD SPLIT BETWEEN FRANCE AND THE MIDDLE EAST, the New Yorker, 9/29

유럽인의 긴휴가에 대한 수다

산타크로체님이 프랑스의 긴 휴가에 대한 좋은 글을 올려주셨다.

프랑스의 긴 여름휴가와 우울증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 (산타크로체 포스트)

산타님 포스트 만큼 영양가는 없지만, 프랑스 휴가하니까 생각나는 얘기들이 있어서 그냥 잡담.

미국 항공사 델타에 다니는 친구 얘긴데, 그친구가 프랑스의 국적기 ‘에어프랑스’와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더랬다. 프로젝트가 한참 바쁘게 돌아가던 즈음에 그쪽 회사 중요 담당자가 자기 다음주 부터 휴가라고 신나서 말하더랜다. 그냥 상식적으로 휴가라면 길어야 열흘 갔다 오는 건가보다 하고 흘려 들었는데, 갑자기 10주 짜리 휴가를 가버린 것. 담당자하고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두절. 다행히 그친구가 워낙 회사에서 초짜 시절에 벌어진 일이라 중요한 프로젝트가 아니어서 일정을 조정하면서 적당히 넘어갔지만, 프랑스 긴 휴가의 위력을 새삼 느낀 사건이었다고.

프랑스가 대표적으로 휴가가 긴 것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유럽도 대체로 휴가가 길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목적이 멋진 휴가를 가기 위해서 라고 생각 하더라.

친한 친구 중에 독일인이 있는데, 그 쪽 분들은 휴가 계획을 일년 전부터 세워두고 치밀하게 준비한다. 미리부터 치밀한 준비를 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독일인이다. 어쨌든 그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유럽인은 일년에 한번 뿐인 휴가를 최대한 멋지게 누리기 위해 돈을 벌고 일을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여담이지만, 유럽인은 생겐조약으로 유럽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혜택을 누린다. 생겐조약의 경제적인 효익을 떠나서 유럽인들은 국경을 초월한 자유로운 이동을 정말 중요한 문제로 본다.

그에 비하면 미국사람의 휴가란 우울하기 짝이 없어서 (so pathetic ㅠㅠ) 길이가 짧은 건 둘째치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휴가중에도 업무를 놓지 못한다. 이메일 체크는 기본이고, 아예 노트북까지 싸들고 가서 업무를 하는 분도 있다. 성과중심의 업무 평가가 일상화 되어 일이 빵꾸라도 나면 순전히 그사람 책임. 성과가 안나거나 회사가 어려우면 바로 자르는게 상식이라, 내가 아는 어떤 분도 휴가에서 돌아와보니 책상이 치워져 있더라는 이야기를 하더라.

하지만, 유럽도 호시절은 이제 지난 듯 하다. 사실 프랑스의 긴휴가도 ‘에어 프랑스’ 같은 준 공기업 같은 회사나 가능한 일이고, 그것도 베이비부머가 주역이 되어 일하던 시절에나 통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예전 휴가지에서 만난 한 프랑스인과의 대화에 따르면 그렇다…) 산타님이 포스팅 한 내용처럼 이제 긴 휴가 혜택은 유럽인에게도 호사스런 일인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유럽인과 미국인의 일에 대한 자세는 다르다. 예전에 이 주제로 유럽사람들과 이야기한 일이 있었는데, 한 프랑스인이 항변하기로는, 유럽의 근로 시간당 생산성은 오히려 미국을 능가한다고 했다. (숫자를 보여주면서…) 유럽인은 효율성 대신에 삶의 여유를 택했다나 뭐래나.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도 유럽가서 살아야하나 싶기도 하다.

Image result for eiffel tower

일상이 된 테러의 위협

아내는 9/11 때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내는 사건 후 일주일 간 매케한 냄새가 도시에 가득했다고 말했다. 분진이 하늘을 자욱하게 뒤덮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슬픔에 잠겼고, 지인들의 생사여부를 이야기 했다. 뉴스는 추가테러의 우려를 이야기했다. 두려움, 슬픔, 추모의 행렬, 그리고 어수선함 가운데서 21세기가 시작되었다.

지금도 아내는 마음이 번잡한 날이면 테러 꿈을 꾼다.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말이다.

Image result for 911

아래 첨부한 이코노미스트지 기사를 보면,

2001년 테러 공격 이후, 미국은 엄청난 돈을 보안과 첩보 강화에 쏟아부었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2009년까지 대략 일년에 80조원을 추가로 사용했다고 한다. 강화된 공항/항공 안보로 인해 지금에 와서는 민간 항공사가 테러의 수단이 되는 일은 드물다.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2010년대 IS의 등장과 IS 브랜드 테러는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외로운 늑대’의 등장은 고도의 훈련된 테러리스트와 조직이 없이도 테러가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달 전에 있었던, 니스 테러 사건을 보고서 나는 이제 테러 방지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나쁜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트럭을 운전하면서 사람들이 밀집된 장소를 질주하는 것을 어떻게 사전에 방지한단 말인가.

니스에서 문제가 불거진, 부르키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나는 ‘프랑스의 수영복 전쟁’을 포스팅하면서 프랑스에서 수영복이 이슈가 되는 이유를 세가지로 꼽은 바 있다. 첫째는 ‘라이시떼 laïcité’, 둘째 여성의 평등, 마지막으로는 테러의 위협이다.

(눈치 챈 사람은 없겠지만, 이어서 부연설명 포스트를 했다. 첫째는 라이시떼에 대해 설명했고, 둘째로는 터키의 세속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여성의 평등에 대해 이야기했고 오늘은 테러와 안보 위협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부르키니가 안보에 위협이 될까?

말도 안된다. 수영복에 무기나 폭탄을 감춘다고? 하려고 마음먹으면 못할바는 없겠지만 그 노력이면 어떤 옷도 테러의 수단이 되지 않을까.

프랑스인은 부르키니를 금지하는 비합리적인 조치를 과반이 넘게 지지하고 있다. 비상사태가 18개월 이상 지속되는 프랑스의 안보 위협상황과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지난주 사르코지는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부르키니 이슈를 첫 논쟁꺼리로 들고 나왔다. 마린 르펜의 국민전선은 작년 12월 1차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바 있다. (물론 알다시피 결선 투표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두번의 선거를 치르는 프랑스의 투표방식을 생각해보면, 누가 알겠는가, 내년 결선투표가 사르코지와 마린르펜의 대결이 될 수도 있다. 그 경우 프랑스 대선에서 선택은 초강경과 덜 초강경한 후보자로 좁혀진다.

니스 테러 이후, 67%의 프랑스인이 정부가 테러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도 안보는 뜨거운 주제로 떠올랐다. 곧 있을 대선 토론의 핵심 쟁점은 안보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테러가 일반인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끼치는가.

오바마가 올초에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죽을 확률은 욕조에서 목욕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확률보다 낮다고. 욕조에서 죽을 확률은 백만분에 일이고, 이슬람 테러로 미국에서 죽을 확률은 (올해 Orlando와 San Bernadino 사건을 기준으로) 오백만분에 일이다.

첨부한 이코노미스트지 기사에 공감한다. 테러전은 이제 서구사회에게는 심리전이 되었다. 서구사회는 오랜 시간 열린 사회와 자유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열린 자세는 그만큼 자신을 위험에 노출하는 행동이다. 자신감과 상호신뢰가 없이 가능하지 않다.

정치인들은 기존의 서구의 가치관이라는 전통을 내세우면서 이를 정쟁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언론도 이에 동참하여 이슈를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나도 올랜도 참사 이후 얼마간 힘들어서 뉴스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앞에도 언급했듯이 테러의 위협은 ‘욕조의 위협’ 보다 작은 수준이다.

트럼프의 안보분야 보좌관인 Michael Flynn은 작년에 테러의 위협을 묘사하면서 “terrorism is committed to the destruction of freedom and the American way of life.”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공감한다.

테러의 위협을 원천봉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지난 15년 간 전 세계가 노력했으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을 뿐이다. 이제는 테러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한다.

참고자료
Terrorism – Learning to live with it, the Economist, 9월 3일자

이슬람과 서구문명 관련 포스트
프랑스의 수영복 전쟁
프랑스와 세속주의 laïcité (라이시테)
여성의 의복과 종교에 대한 단상들
이슬람 여성 복장을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면서…
일상이 된 테러의 위협

여성의 의복과 종교에 대한 단상들

1.
터키의 노벨문학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정치소설을 하나 쓴 적이 있다. 제목은 ‘눈’이다. ‘눈’에는 아래와 같은 세속주의자와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대화가 나온다. (편의상 A와 B로 칭한다.)

Image result for orhan pamuk

Orhan Pamuk (1952 – )

.

A: 여자들이 히잡을 벗고 머리를 내놓는 것이 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지? 히잡을 벗으면 유럽인들의 대우가 달라지나?

서구화에 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B: 나도 딸자식이 있어. 히잡을 쓰지 않았지. 아내가 히잡을 쓰는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난 여식에게도 간섭하지 않네. (중략) 내 딸은 ‘아버지, 저 역시 모든 여학생들이 히잡을 쓰고 들어오는 교실에 머리를 드러내놓고 입실하는 용기를 내지는 못할 거예요. 할 수 없이 히잡을 쓸 거예요.’ 라고 말했네.

히잡을 쓰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세속주의자의 항변이다.

이어서 B: 내 딸의 변명은 동시에 다른 많은 터키 여성의 변명이기도 하네. 여성이 히잡을 벗는다면,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더 편하고, 더 존경받는 위치에 있게 될 걸세.

히잡이 여성을 억압한다는 세속주의자의 의견이다.

A: 히잡은 여성을 불편, 겁탈, 모욕으로부터 보호하고, 사회 속에 더 편히 나갈 수 있게 만들어. 과거에 밸리 댄서였던 멜라핫 샨드라를 포함해 나중에 히잡을 쓰게 된 많은 여성들이 밝혔듯이, 히잡은 여성들로 하여금, 길거리에서 남자들의 동물적인 감정에 호소하는가하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다른 여성들과 경쟁을 하고 이 때문에 화장을 해대야 하는 가련한 존재에서 벗어나게 했지.

Image result for orhan pamuk kar

오르한 파묵, ‘눈’

.

참고로,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다. 그리고 프랑스와는 반대로 이슬람의 입장에서 세속주의, 즉 정교분리 원칙을 채택한 나라이다. 프랑스처럼 학교에서 히잡을 금지하였었다. 그러나 2013년에 이 법은 폐지 되었다.

참고자료: 세속주의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 사람들은 왜 에르도안에 열광할까? (산타크로체 블로그)

두사람의 대화는 평행을 달린다. 서로 귀를 막고 대화를 하던 끝에 근본주의자 A는 세속주의자 B를 살해한다.

2.
‘눈’에서 내가 인상깊게 읽은 다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세속주의자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도 아닌 주인공 카는 이렇게 말한다.

“터키에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가장 숭고한 사고 가장 위대한 창조자와 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 어떤 단체에 들어가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3.
세속주의자들은 무슬림 여성의 히잡을 벗기는 일이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히잡을 쓰는 여성의 결정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인 무형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히잡착용은 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이 소수인 곳에서는 히잡착용이 반대로 사회적인 압력에 저항하는 행위이다.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이를 세속주의에 대한 무슬림 집단의 분노라고 말한다.

Image result for hijab

히잡을 쓴 여성 (출처: wikipedia)

.

4.
나는 꽤나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에서 컸다. 여름이 되면 나의 교회는 성도들의 복장을 주의시키는 일을 잊지 않았다. 서로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짧은 치마, 끈나시, 슬리퍼를 자제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오면 어김없이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5.
법으로 복장을 규제하는 프랑스, 터키의 사례와 한국 보수적 교회안에서의 복장 권고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종교는 여성의 복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6.
꾸란을 우선 보자. 히잡의 근거가 되는 구절은 33:59이다.

“예언자여 그대의 아내들과 딸들과 믿는 여성들에게 베일을 쓰라고 이르라 그때는 외출할 때라 그렇게 함이 가장 편리한 것으로 그렇게 알려져 간음되지 않도록 함이라 실로 하나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꾸란에 근거하여, 무슬림들은 히잡이 여성을 보호한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강간과 모욕, 불필요한 시선에서 여성을 자유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는 소설 ‘눈’에서 등장하는 근본주의자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고린도전서 11:5)

천주교에서 미사를 볼 때에 여성이 흰천을 쓰는 전통은 이에 근거한다. 다만 현대에 와서 천주교는 이를 강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교는 성경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 전통을 폐지 시켰다.

7.
내가 아는 바로는 무슬림에게 신앙은 꾸란을 글자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꾸란은 알라의 말씀이다. 아랍어로 쓰인 경전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는 무슬림은 원어의 의미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번역본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제한한다. (예를 들어 아랍어를 모른다거나…) 그리고 신자에게 아랍어를 배울 것을 권장한다.

이슬람과 교회(여기서는 천주교, 기독교를 합쳐서 교회라고 그냥 칭하기로 한다.) 모두 동일하게 ‘경전’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번역된 성경도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글자 그대로를 따르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을 더욱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사소해보이는 이 변화는 생각보다 큰 차이를 가져왔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이슬람을 중세(선지자 무하메드 시절)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게 만들었다면, 교회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관습에 열린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8.
시간이 된다면 이어서 교회가 종교개혁 이후 어떻게 바뀌었는지 (특히 이슬람과 비교해서), 그리고 존 로크를 살펴보면서 세속주의와 계몽주의가 서구사회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볼 계획이다.

종교적인 주제의 포스트는 부담스럽지만, 어쨌든 burkini를 시작으로 연결되는 이번 포스트에서 종교 이야기를 빼놓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9.
오늘의 이야기를 맺으며 성경과 하디스(이슬람의 또다른 경전)를 인용한다. 둘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 그리고 의복 논쟁을 둘러싼 나의 결론 이기도 하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Allah does not look at your figures, nor at your attire but He looks at your hearts [and deeds]” Chapter 1 – Hadith 7

관련 포스트
프랑스의 수영복 전쟁
프랑스와 세속주의 laïcité (라이시테)
여성의 의복과 종교에 대한 단상들
이슬람 여성 복장을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면서…
일상이 된 테러의 위협

프랑스와 세속주의 laïcité (라이시테)

지난번 프랑스의 수영복 전쟁 포스트에 이어서, 프랑스의 세속주의 전통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자 한다.

지난번 포스트에 한 분께서 프랑스가 전신수영복 burkini 금지를 하면서 수녀복은 허용하는 모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셨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

실제 이번 이슈 이후에 이를 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트윗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https://t.co/MTlIuAbQ4E

다만 현대에 와서 프랑스의 세속주의 Laïcité 원칙 적용은 ‘성직자’에 한해서는 예외가 적용된다. 이슬람에만 차별을 한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 프랑스에서는 (대형)십자가를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것도 금지되고, (이미 지어진 성당은 문화유산으로 간주하여 예외로 본다.) 동일한 원칙으로 유대교의 상징 다윗의 별을 전시하는 것도 금지되고 있다. 최근에는 관청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구유 장식도 불법 판정을 받은 바 있다.

작년에 이야기가 많이 되었던 샤를리 에브도 같은 경우도 어떤 면에서는 세속주의 Laïcité 정신에 기초한 단체로 볼 수 있다. 이 잡지는 이슬람은 물론이고 가톨릭과 모든 종교단체를 조롱하고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반은 이슬람혐오가 아닌 무신론(또는 반종교)에 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프랑스의 반종교정책은 유럽에서도 강경한 편이라 (타종교에 대한 포용력이 큰) 한국적인 정서에서도 심하다 싶을 정도이다. 2011년 사르코지 정권에서 laïcité는 더욱 강화되어 1946년 부터 65년간 방송된 기독교 라디오 설교도 금지된 바 있다.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기위해 내 입장부터 밝힌다. 지난번에 전신수영복 burkini 금지에 대한 포스팅을 하면서도 프랑스의 조치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었다. 사실 나는 프랑스의 세속주의와 공화주의적 전통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미국적인 개인주의에 좀더 공감하는 편이다.

지난번 포스트에 언급했듯이 프랑스와 미국은 다문화를 수용하는 데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나는 공화주의 전통을 근간으로하는 프랑스식 모델이 지금에 와서는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프랑스가 말하는 관용(똘레랑스)은 공화주의 원칙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한다. 공화주의 원칙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유, 평등, 박애, 세속주의, 애국주의가 이 공화주의의 근간이다.

프랑스 헌법 1조는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프랑스는 분할될수 없고, 종교에 의해 통치되지 않으며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La France est une République indivisible, laïque, démocratique et sociale.” 헌법 첫문장부터 프랑스는 세속주의국가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와 종교와의 대립은 프랑스 혁명 (1789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정부는 당시 교회의 재산을 몰수한다. 당연히 로마 교황청은 격렬하게 반대를 한다. 이에 프랑스는 두차례 로마를 침공한다. (1798년, 1809년) 혁명정부는 가톨릭을 앙시앵레짐의 한축으로 여겼고, 프랑스 헌법에 충성서약을 하지 않은 성직자들을 범법자로 몰았다.

images

앙시엥 레짐을 풍자하는 그림

.

참고자료:  나폴레옹은 왜 교황과 화해했을까? (nasica 블로그)

이후 나폴레옹은 교황청과 화해를 하게 되는데, 가톨릭을 프랑스의 주요 종교로 인정하는 대신 교회를 프랑스 정부의 관리 아래 두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교(政敎) 협약 (Concordat)이다. (1801년)

Image result for Concordat

Concordat

.

이후에도 프랑스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분명히 했는데, 현대적 의미에서 세속주의 laïcité 는 1905년 제3공화국의 정교분리 법에 근거한다. 그리고 프랑스인은 모든 공적인 장소를 ‘종교 청정 지대’로 만들고자 한다. 그들의 기준으로는 공공장소에서의 종교행위는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학교에서 종교 복장이나 종교 행위를 금하는 법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가 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종교 상징물을 금지하는 법은 1937년 제정되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이법들이 제정될 그 당시만 해도 프랑스는 비종교적인 국가이었기에 별다른 논란이 되지 않기도 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들어 프랑스의 인구 구성은 변하기 시작한다. 북아프리카 옛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에서 이민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대다수 무슬림들이었다. 다만 이들 이민 1세대들은 자발적으로 프랑스에 넘어온 이들이었기에 프랑스의 세속주의에 저항이 크지 않았다.

무슬림 2세/3세들이 오히려 종교적으로 근본주의화된다. 방리유라고 불리는 변두리에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히잡/니캅/부르카 등의 이슬람 전통복장 착용은 일종의 분노의 표시이며, 무슬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프랑스의 다문화 정책은 여러모로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는 약 10% 가량으로 추산된다. 세속주의를 전면으로 내세운 프랑스의 정신은 이들을 공화주의를 거부한 2등 시민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다시 세속주의와 정교분리 원칙 이야기로 돌아오자. 아무리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사상을 고려하더라도, 개인의 자유와 복장 선택을 억압하는 프랑스의 정책은 여전히 비판 받을 만하다. 내가 느끼기에도 프랑스의 세속주의 정신은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로 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듯 하다.

이상이 내가 burkini 이슈를 프랑스의 정체성 문제로 보는 이유이다.

관련 포스트
프랑스의 수영복 전쟁
프랑스와 세속주의 laïcité (라이시테)
여성의 의복과 종교에 대한 단상들
이슬람 여성 복장을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면서…
일상이 된 테러의 위협

참고자료
The deep roots of French secularism, BBC, 2004년 9월 1일자
1905 French law on the Separation of the Churches and the State (영문 위키피디아)
Laïcité (영문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