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의리, 한국의 정, 그리고 미국인의 인간관계

‘미국인은 문서로, 일본인은 의리로, 한국인은 정으로 계약을 맺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모든 사람들을 일반화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화와칼

원래 의리라는 말은 일본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자로는 義理라고 쓰고 일본사람들은 /Giri/라고 발음한다. 미국인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이 의리를 일본 특유의 민족성으로 보았다. 그는 <국화와 칼>에서 이런 말을 했다.

중국이나 유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닐뿐더러 동양의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본 특유의 범주로서, 의리를 고려하지 않으면 일본인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리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와 연결되는데 그래서 인지 일본인들은 은혜를 갚는(報恩) 이야기에 항상 깊은 감동 받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면에서 이 의리라는 것은 상당히 폭력적인 행동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만 그 사람의 적인 상대에게는 무자비하다. 일본인들은 개개인으로는 참 좋은 사람들이지만 집단으로는 섬뜩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일본 회사와 비즈니스를 할 때도 의리라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한국 회사를 다닐 때 일이었다. 회사가 추진하는 사업중에 하나가 일본 한 회사의 특허권과 연결되어 분쟁이 될 뻔한 적이 있었다. 연구 단계부터 회사는 특허 관련 법을 사전에 검토를 했었고 법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사업을 진행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해당 일본회사가 그 일을 알게되었고, 그 일본 회사는 사전에 자기 회사에 양해를 구하지 않은 우리 회사의 태도에 분노했다. 그들은 한국 회사가 신의를 저버린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대부분의 사업 결정은 이해득실이나 계약관계보다도 신의를 지키느냐가 우선된다. 당시 나는 원가 담당자였기 때문에 해당 일본 회사에서 만드는 재료를 계속 사용할 경우와 아닌 경우를 비교하는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었다. 그래서 비교적 생생히 기억하는 편이다. 당시 회사는 국제법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향후 비즈니스를 생각해서 상당한 금액의 로열티를 지급하는 선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었다.

서양에는 의리라는 개념이 없다. 일본의 무협영화나 만화들은 사나이들끼리의 의리가 주제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소재는 서양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형제애(brotherhood)나 동료애(companionship) 같은 소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의리와는 다르다. 위키피디아에서 Giri를 검색해보면 duty / obligation / burden of obligation으로 번역되어 있다. 딱히 와닿지는 않는다. 번역할 만한 적당한 단어가 없는 것 이다. 일본적인 개념의 의리는 조직사회의 관계보다는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사무라이와 주군(다이묘)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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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의리라는 말이 큰 유행을 했다. 김보성의 의리 광고와 홍명보의 의리 축구는 올해 최고로 화끈한 topic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말하는 의리는 일본의 의리와 많이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의리는 어찌보면 ‘정(情)’에 가깝다. 의리를 말할 때 우리는 친구 간에 끈끈함을 떠올린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도 소주 한잔 마시거나 (남자들의 경우), 시어머니 흉을 보고 나면 (여자들의 경우) 다음날 부터는 바로 절친이 되어 속마음까지 다 보여준다. 이런 풍경은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것 같다.

cold-shoulder

일본 사람도 우리 기준으로 차갑지만 미국 사람은 더하다. 예를 들어 미국 회사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오늘 무슨일을 잘해주었다고 하자. 그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하겠지만 그게 전부다. 다음날 만났을 때 그 사람은 나에게 더 친하게 굴지 않는다. 같이 운동하거나 술을 마신 이후에도 이것은 마찮가지 이다.

반대로 내가 잘못을 한 경우도 그렇다. 한번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다음날 그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 실수에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또 그 실수를 통해서 내가 무능하다거나 불성실하다는 판단이 들지 않는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 별로 의미가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실수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계산적으로 이루어 질 때가 많다. 미국 사람들은 필요가 없으면 굳이 관계를 맺지도 않고 친분도 생기지 않는다.

미국사람들은 낯선사람과 친구의 차이가 크지 않다. 전혀 처음보는 사람도 절친처럼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그 다음날 언제그랬냐는 듯이 차갑다. 물론 그들도 정말 친한 친구와 덜친한 친구들이 있지만, 친한 친구가 우리나라의 죽마고우 같은 정도로 가까운 느낌은 없다.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낯선사람에게는 한없이 차갑다. 그렇지만 일단 친구의 범주에 들어가면 한없이 가까워진다. 정말 끈끈한 민족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은 일종의 큰 규모의 가족 같은 관계이다. 그래서 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안면만 트게 되면 바로 ‘오빠’/’동생’/’삼촌’/’이모’ 이다. 그리고 조금만 친해지면 참견을 못해서 안달이다. ‘왜 결혼을 안하냐?’ ‘살은 언제 뺄꺼냐?’ ‘애기는 안가지냐?’ ‘둘째는 안났냐?’ 외국 사람이 들으면 불쾌할 것 같은 참견을 서슴없이 우리끼리는 하고 산다.

[1]우리가 남이가 로고

내가 느끼기에는 우리는 회사나 사회, 국가도 이렇게 일종의 가족같이 여기지 않나 싶다. 누군가 밤늦게 고생해서 야근하면 딱히 내가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같이 남아서 커피라도 한잔 타주는 게 우리 식의 ‘정’이다. 처음 미국 회사에서 일 시작했을 때, 보스가 야근을 해야 한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 업무가 익숙치 않아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 미안해서 남아 있었다. 보스는 어이없어 하면서 니가 왜 여기 남아있는가 묻는다. 우리나라도 예전 같지 않아서 점점 덜해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정’으로 묶여있다. 서로 엮여 사는게 지긋지긋 하다고 말로는 그러지만 그놈의 ‘정’ 때문에 매몰차게 뒤돌아 서지 못한다.

이렇게 보니 딱히 어떤게 좋다/나쁘다 말할 성질의 것은 없는 것 같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는 싫다. 좋은것만 골라서 가졌으면 좋겠으나 ‘좋고 나쁨’은 동전의 양면 같이 하나로 붙어있다. 미국에 살다보면 한없이 차가운 미국사람에 정떨어지다가도 이것저것 남의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세상이 편하기도 하다. 그래도 누구든 자신한테 익숙한게 좋은 법이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 사는 게 제일로 좋다.

한국사람들은 왜 외국에서 서로 피할까?

미국 몇년 살면서 외국에 체류하는 한국 사람에 대한 특이한 점 하나를 알게 된게 있다. 한국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많은 곳을 일부러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도 한국 사람만큼 정이 넘치고 끈끈한 사람들이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인사 나누고 고향이나 학교 등등의 호구조사를 하고서 공통분모를 찾는다. 하나라도 유사점이 있으면 바로 형/아우를 규정하고서 절친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다니는 건 어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처음에는 나는 그런게 이상하게만 여겨졌는데, 조금 지내다보니 나도 어떨때는 한국사람들하고 만나는게 불편할 때가 있다. 금새 친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 엮이게 되는게 부담스러운 거다. 사람사이의 관계가 좋게 되기만 한다면야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난다는 것 만큼 좋은 일이 없겠지만, 꼭 모든 사람이 나와 맞을 수는 없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특히나 이민사회는 그다지 넓지 않기 때문에 한번 알게 된 사람은 계속 얼굴을 마주치며 살아야한다.

한국인의 다른 특징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존댓말의 문화이다. 존댓말에 관련한 내 생각은 이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다. (미국사람들에게 나이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존댓말이다. 존댓말을 사용하게 되면 무의식중에 손위/손아래를 따지게 되고 손위사람에게는 존중을 손아래사람에게는 복종을 요구한다. 나는 한국의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문화가 존댓말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경험과 연륜이 있는 사람에게 존경과 존중을 표시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단순히 숫자적으로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사람이 옳다거나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매우 복잡한 관계 속에 얽혀서 살고 있다. 우리는 나이, 학번, 입사동기, 사돈, 선배, 후배 이 모든게 얽혀서 서열을 정하는 복잡한 시스템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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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임수정의 ‘내아내의 모든것’을 재미있게 본적이 있다. 거기서 임수정은 눈치안보고 독설을 퍼붓는 사람이지만 밉상은 아닌 캐릭터로 나온다. 그중에서 인상깊었던 한 장면이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와이프들끼리의 모임 장면이다. 이러한 모임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거기서 와이프들끼리의 관계는 남편의 직급으로 규정된다. 한 아주머니가 임수정에게 말을 한다. “와이프가, 눈치가 아주 많이 없네!” 이때 임수정은 그 사모님들에게 말을 한다. “눈치를 안 보고 살아서 그래요. 예의만 지키면 눈치는 안봐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영화의 큰 맥락과 관련이 없는 장면이었지만 내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미국와서 한국 아이들과 미국아이들의 차이점을 하나 발견한게 있다. 한국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누가 형이고 언니인지 먼저 따진다. 그런데 아이들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한가지가 있다. 미국은 학기가 가을에 시작하기 때문에 보통 9월이나 10월 생들이 학교를 빨리 간다. 거기서 바로 복잡한 호칭 문제가 발생한다. 나이가 같은데 학교를 먼저 갔기 때문에 형이라 해야 할지 언니라 해야할지 애매해 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빠른 xx년생이랑 비슷한 상황이다. 이게 미국아이들에게는 별로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그 아이들은 학년이 높다고 해서 존댓말을 쓰는 것도 아니고 호칭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학교를 먼저 갔을 뿐이다.

미국 아이들도 생일이 빠른 아이들이 보통 리더십이 더 있기는 하다.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논 이야기를 들어봐도 생일이 빠른 아이들이 놀이를 주도할 때가 많다. 선생님/학생 역할 놀이를 할때 생일이 빠른 아이들이 선생님 역할을 맡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또래에 비해 성숙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리더십이지 존댓말이나 호칭으로 인위적으로 생기는 리더십은 아니다.

한국인은 나이를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몇살에는 취직을 해야하고, 몇살에는 결혼을 해야하며 아이를 나아야하고 등등 모든것이 나이에 맞춰져서 되어질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문화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문화라는 것은 각자 모두 이유가 있고 옳고 그르다기 보다는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이러한 부분은 정말 아쉽다.

미국사람과 한국사람의 정서 차이

개인적인 경험이라 일반화가능한지 모르겠으나, 내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미국사람들은 겉으로는 매우 나이스 한 사람들인데, 나중에 평가나 뭐 이런면에서는 정말 매정하다. 반면에 한국사람들은 결혼 왜 안하냐는 둥, 옷이 왜 그모양이냐는둥, 간섭하고 사생활 침해를 당연한 듯 해대고 잔소리 작열이지만 정이 많아서 막상 평가에는 박하지 못한 편이다.

한국사람들이 미국오면 적응된후에는 허니문 피리어드가 온다. 이때는 미국사람들의 나이스함과 쿨함이 좋아보인다. 그치만 그건 잠깐, 오래 지나다보면 꼭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는 걸 발견한다. 이사람들은 그냥 다른 사람에 무관심할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미국사람들이 무슨 피도눈물도 없는 사람들인것 같지만, 미국사람들 개개인은 착하다. 그냥 다를뿐이다. 개인 사정 이야기하면서 징징거리면 그런 사정 다 봐주고 또 도와주려고 선뜻 나서는게 미국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 감정 상하게 하는 걸 될수있으려면 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절대로 단점을 대놓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우리나라 얘기로 돌아오면, 우리 박대통령님의 요지부동한 지지도 우리의 국민성에서 온 측면이 없잖아 있다고 본다.

흠… 최근 대통령 지지율 관련 기사 보고서 든 생각을 짧게 남기려다 또 길어졌다. 오늘의 짧은(?) 잡설 한마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