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자

158_185_738

올가을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번역/출간되었다. 그는 돈이 돈을 버는 속도(r)가 경제 성장률(g)보다 빠르다고 이야기 했고, 잘사는 사람이 더 잘살게 될 뿐이라는 주장을 통계적/실증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가 던진 화두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아주 시의 적절해보인다.

나의 짧은 인생 경험으로 보건데, 있는 집 사람들은 대체로 착하다. 예의바르고 교양이 있다. 고등학교/대학교/대학원 시절에 만나본 있는 집 자제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세상에 찌든 느낌이 없다고 해야하나.

같은 맥락에서 사회지도층들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인간적으로 좋은 분일 가능성이 높다. 삼성에 일할 적에 먼발치에서 이재용씨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예의바르고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듣기로는 정몽준씨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유한 동네 아저씨라고 한다. (돈이 좀 있으신 동네 아저씨라서 그렇지…ㅎㅎ) 돈이 있으면 구질구질하게 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일까?

구질구질하게 산다는건 무엇일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은 시절. (크리스찬이니까 주안에서라는 단서를 달긴 했더랬다.) 그시절 나에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은 죄였다.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내 미래는 내가 개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어찌 그리 만만하기만 할까. 몇번 깨져보면 그래도 아쉬운건 몇푼 되지 않는 통장잔고, 한국에서의 학벌, 나이가 몇개인데 하는 자존심 같은 것이다. 남자라는게 어찌보면 한줌밖에 안되는 가진 것으로 호기 부리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어른이 되면 그 방식이 조금 세련될 뿐이지…

쉽게 돈을 벌면 구질구질하지 않게 살 수 있을까? 쉽게 돈버는 일 치고 떳떳한 일이 없다. 남의 등쳐먹고 사는게 가장 쉽게 돈버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감옥에 가 마땅한 일.

30대/40대가 되면 사회의 일원이 되고 책임을 지고 살아야하는 입장에 서게된다. 사람들이 큰 돈 때문에 구질구질하게 살까? 오히려 대부분은 작은 일 때문에 구질구질해진다. 회사에 몇년 더 있었다는 것, 나이 몇살 더 먹었다는 것, 갑의 위치에 있다는 것 등등… 뭐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움켜잡는 길이 구질구질하지만 편하게 살아가는 법이다. 누가 처음부터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겠냐마는 나이 먹고보면 별 수 없는게 사람인지라 젊은 시절의 활력은 모두 저만치 가버리고 조금이나마 편하게 살고 싶어진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우리 아버지는 아들을 구질구질하게 살게 하고 싶지 않으셨다. 딱히 넉넉한 적은 없이 살았던 우리가족. 그래도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해본 기억은 없다. 내가 중학교 다닐 즈음, 아버지께서 소득이 없어 고생하셨다. 그래도 부모님은 그것 때문에 내게 부담을 지우신 적은 없었고, 어떻게 가계가 굴러 갔던 것 같다. 내게 조금이라도 유한 부분이 있다면 아버지의 희생 때문이었으리라.

아직은 활력이 남아있는 30대 중반이다. 젊게 사는 것은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해야만 할 일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구질구질하지 살지 않기를 바라며 젊음을 바치셨는데, 아들이 나이가 들었다고 구질구질하게 살아서는 안될 일이다.

내가 조금 구질구질하게 살다면, 그래서 재산이 조금 더 쌓인다면, 나의 자식은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의 도움이 될런지도… 그러나 그것은 나를 사랑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배반이고, 자식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편해지려고 한다면 나는 한없이 구질구질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읽은 ‘노인과 바다’의 한구절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I told the boy I was a strange old man,” he said. “Now is when I must prove it.” The thousand times that he had proved it meant nothing. Now he was proving it again. Each time was a new time and he never thought about the past when he was doing it.

“내가 이상한 노인이라고 그 애한테도 말했지.” 그는 말했다. “이제 그걸 증명해 보일 때야.”과거에 이미 수천 번이나 증명해 보였다는 사실을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그걸 다시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다. 언제나 매번 새로 처음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과거를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백면서생(白面書生): 오직 글만 읽고 세상 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

mail.naver

몇년전 유행한 유머중에 하나가 ‘연애를 글로 배웠습니다.’ ‘키스를 글로 배웠습니다.’이다. 나는 그러한 유머를 볼 때마다 배꼽을 붙잡고 웃는다. 내가 그 유머에 자지러지는 이유는 왠지 모르게 내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새로운 경험에 항상 목말라 있었고, 그 갈증을 해결했던 방법은 주로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나를 매료 시켰던 것은 주로 역사이야기, 세계 전래 동화, 각국의 신화, 성경이야기, 탐정소설, SF 소설 같은 것들이다. 딱히 분야가 정해져 있던 것 같지는 않고 잡식을 했는데 한가지 공통되는 점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소설은 우리의 삶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대부분의 인기 있는 통속소설이라는 것은 인기가 있을 법한 소재와 인물을 사람들의 판타지와 적당히 버무려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단순히 재미 있는 소재만을 가져온다고 해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허접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작가는 소설 속에서 세계를 창조하는데, 이때 작가의 세계관이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 히어로물의 세계관이라고 하면 슈퍼맨/배트맨이 등장하여 초인적인 힘으로 세계를 구하지만 괴로워하거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세계관이라 하면 뉴욕에 사는 매력적인 직장여성들이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우정을 나누기도 하면서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관은 소설속에만 존재하는 법칙 같은 것인데 우리가 대부분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안들거나 싫어지는 이유는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불행하게 생을 마치는 식의 세계관이 탐탁치 않고, 어떤이는 모두가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다며 지루해 한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세계관과 맞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세계관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야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세상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은 영화와 소설 속의 세상을 실제와 혼동할 때가 있다.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은 소설과 다르다. 만약 뉴욕에 한번도 와보지 못한 사람이 섹스 앤 더 시티나 프렌즈가 그리는 뉴욕이 정말이라고 생각하고 똑같이 살려고 한다면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행동은 코메디의 소재로 적합하다. 연애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무협소설이나 연애소설에 나오는 것을 현실로 생각하고 연인에게 행동한다면 가장 빵점인 연애를 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소설/공연예술에 목을 메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 특히 그러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이야기라는 것이 별로 의미 없게 여겨지는 순간이 왔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얄팍하며, 어떤 이야기는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어떤 소설은 그저그런 세계관을 독특한 문체만으로 잔뜩 치장했을 뿐이다. 너무 뻔하다. 내가 알고 느끼는 세계와 작가들이 그리는 세계가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소설읽기를 멈추었다. 소설보다는 자기계발서를… 영화보다는 예능프로를… 즐겨보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책은 (저자가 다른 경우에도!) 그저 동어 반복일 경우가 많다.

이제 책하고 화해를 할까 싶다. 검증된 고전의 경우에는 조금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지혜 같은 것이 있다. 10대에 읽었던 ‘노인과 바다’는 그저 낚시꾼의 허무한 귀환 정도의 재미없는 글이었다. 조금 나이가 들어 만나는 헤밍웨이는 자연의 위대함, 인간의 의지를 찬양하는 작가이다. 어린시절 톨스토이의 단편은 그저 재미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한번 종교/삶과 씨름을 해본 후에 만나는 톨스토이는 소박한 이야기에 닮긴 경건함이다.

여전히 사람과 관계 맺기에 미숙한 한 백면서생의 이야기였다.

글쓰기 중독

다운로드

인터넷에서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 시리즈를 발견했다. (링크: 고종석 “글쓰기의 쾌감, 중독되면 끊을 수 없어”) 글쓰기 특강 연재의 대부분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일맥 상통하는 듯.

특별히 공감한 두 부분

“달리는 사람에게 고비를 넘기고 나면 찾아온다는 marathoner`s high가 있다면 글 쓰는 사람에게는 writer’s high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첫 번째 독자이기 때문에 글을 읽으며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이 제법 마음에 드는 순간, 그 쾌감을 맛보게 되면 거기에 중독되어 계속 쓰게 된다는 거였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고종석은 몇 가지 작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하나는 글을 쓸 때 행갈이에 신경 쓰라는 말이었다. 의외로 많은 수강생들이 행갈이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나의 문단은 하나의 생각 덩어리이기 때문에 문단을 제대로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단을 잘 나눌 수 있다는 건 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글을 읽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 듯하다. 고종석은 또 문단나누기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내가 처음 글쓰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연습했고 지금도 신경쓰는 부분은 문단 나누기와 한 문단에 한가지 생각만 담기이다. 아직도 그게 쉽게 되질 않는다. 공감가는 글을 만나고서 박수가 쳐졌다.

나는 글을 쓸 때 나쁜 습관이 많이 있다. ‘수동태의 문장을 즐겨 쓴다.’ ‘만연체의 문장을 쓴다.’ ‘쓸데없는 부사와 겹조사로 겉멋을 부린다.’ 등등… 내 사고 체계가 명료하지 못해서 머리속의 생각을 처음 글로 옮겨 놓으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나열일 경우가 많다. 나는 나의 글을 교정을 볼 때는 이런 부분에 몹시 주의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본다.

가장 간결하면서도 글맛이 있도록 글을 쓰는 작가로 유명한 사람은 헤밍웨이이다. 그가 말한 글쓰기에 대한 언급도 여기 몇자 옮겨본다. 그러고보니 헤밍웨이와 고종석은 기자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구나.

“글을 쓰는 일은 잘해야 외로운 삶을 사는 겁니다. 작가를 위한 단체는 외로움을 덜어주지만 글이 좋아지는가 하는 점에는 회의가 듭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면 작가의 공적인 위상은 올라가지만 작품의 질이 떨어질 때가 종종 있죠. (노벨상 수상소감 중에서)”
“내가 이룬 성공은 모두 내가 아는 것에 관한 글을 써서 이룬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심성이 많아질 뿐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두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네. 자신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완벽한 글, 그게 아니면 멋진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 그다음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쓰네. 그녀가 읽거나 쓸 줄 아는지, 또는 생존인물인지 고인인지 상관하지 않고 말일세.”

요즈음의 나를 보면 글쓰기에 중독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제 조금 숨도 고르고 쉬어가며 글을 써야겠다. 내공이 부족한데다가 생업이 있는 사람인데 이러다가 주화입마에 빠질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