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세상에 남긴 것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를 재조명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요며칠 나는 종교개혁이 세상에 남긴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잊기전에 정리해본다.

나는 예전부터 루터보다는 에라스무스가 좋았다. 루터를 생각하면 혁명가, 확고한 신념의 고집스러운 신앙인이 떠오른다.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불확실성과 현실의 모호함을 그대로 존중했다. 온건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루터와 끝까지 대립했다. 그는 종교개혁가들의 스승이었지만 종교개혁을 끝내 지지하지 않았다. ‘우신예찬’을 통해서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했지만, 그의 개혁은 카톨릭의 안에 있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카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여생을 마친다.

나는 ‘자유주의자’ 에라스무스의 경건함, 소박함, 신중함, 정직함이 더 좋다.

Erasmus (1466-1536)

.

2년전 올렸던 에라스무스 포스트
회색인간 에라스무스 (2015년 3월 5일자)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정말 비텐베르크 성당에 게시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종교개혁을 1517년 10월 31일로 기념하는 것은 루터의 말년에 가서 이루어진 종교개혁 신성화 작업의 일환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루터가 주교에게 반박문을 보냈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를 한다.

사실 날짜가 뭐그리 중하겠는가. 95개조 반박문을 계기로 종교개혁이 시작이 되었지만 종교개혁이 전파된 것은 그 이후에 루터가 목숨을 걸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 신념은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a Gratia 오직 은혜 라는 그의 사상이다. (물론 여러가지 우연도 따랐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번 포스트 참조.)

루터에 대해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그가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로 대체했다. 여타의 고전이 그러하듯이, 모든이가 똑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당장 루터 이후에 개신교는 수많은 교파로 갈리게 된다. 이에 양심/사상의 자유라는 관념이 형성 된다. 사상의 자유가 성경을 해석하는 일과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17세기만 해도 모든 사상은 성경(또는 기독교)이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종국에 사상의 자유가 자유, 인권, 그리고 개인의 발견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역사가 명쾌하게 설명이 되는게 항상 불편하다. 종교개혁이 이 모든 일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까지 인정을 한다고 하자. 그러나 그 과정은 짧지도 깔끔하지도 않았다.

1517년에 루터가 던진 불씨로 인해 16-17세기 유럽은 전쟁터가 되었다. 구교와 신교는 200년 가까이 싸움을 한다. 종교라는 이름 아래서 벌어진 학살, 강간, 파괴는 21세기 시리아/이라크, 미얀마와 남수단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큰 차이가 없다. 이 난장판은 Peace of Westphalia 1648 베스트팔렌 조약, Act of Tolerance 1689 신교 자유령을 지나고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그래서 그 시대의 사상가들 그러니까 로크 같은 사람이 들고나온 사상이 ‘관용의 정신’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를 개인의 영역으로 한정해야한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정말 흥미로운 건 구교와 신교가 목숨을 걸고 싸우던 그 시기에 오히려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은 타종교 (카톨릭/개신교/정교회)에 상당히 관용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이슬람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참고자료: Christianity, Islam, and Locke (the Economist, 2015년 2월 3일자)

John Locke (1632-1704)

.

어쨌든 볼테르, 루소, 흄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이를 발전시켜 결국 이신론/무신론에 이른다. 여기에 더해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구조의 변화들이 기독교의 세속화를 부추겼다. 현대에 와서 기독교는 개인의 신념으로 한정되고, 정교분리는 상식이 되었다. 현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현대화된 기독교가 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믿는다. 그 기독교는 중세인이 믿었던 기독교와는 상당히 다른 믿음이다.

다시 루터로 돌아오자. 그래서 루터가 500년전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게 ‘개인’, ‘인권’, ‘자유’로 연결되는 시발점이 되었을까? 그럴수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보는 관점과 자신이 발을 딛고 서있는 생각의 뿌리에 따라 다르겠지.

사실 루터는 자신의 고집스러움, 반골기질이 역사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믿음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불렀다는 것. 그리고 또 그로인해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사상이 꽃피게 되었다는 사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다보면 참 묘한 감정이 든다.

1517년을 생각해본다. 나는 여전히 에라스무스가 좋다. 내가 그시대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교회 내부에서의 조용한 개혁을 해보려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나 다시 루터를 생각해보면, 변곡점에 이른 어떤 순간이 오면 신은 혁명가의 손을 빌어 물줄기를 바꾸는 걸 즐기는 것 같다.

독일과 루터의 유산

독일에서 성악을 전공하신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독일에서 합창단원을 하다가 지금은 스위스 시립 합창단원으로 직장을 얻어 정착하셨다. 그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독일은 동네마다 합창단이 잘 조직 되어있고 안정적으로 운영이 된다고 한다. 특히 여자 알토 파트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어서 구직이 비교적 수월하다고 했다.

합창단 일자리가 많아서 원한다면 (그리고 심심하고 단조로운 유럽 생활에 만족한다면) 성악 전공자가 독일에 정착하기 쉽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성악 유학을 가는 분들 중에 이탈리아로 가시는 분들은 귀국하시는 분들이 많고 독일 쪽은 남는 분들이 꽤 된다고 들었다.

신학도 아울러 전공하신 그분께서는 독일에는 기독교의 유산이 사회 전반에 여전히 남아있다고 몇차례 언급 했다. 지금은 독일도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세속국가라고 봐야하지만 문화/사회적으로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기반으로 기틀을 잡은 나라이고 그 중에서 루터의 영향이 가장 컸다.

이왕 음악이야기로 수다를 시작했으니, 오케스트라를 예로 들자. 독일에는 130여개의 오케스트라가 있다. 독일에는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가 80개쯤 되니까 (위키피디아 기준) 왠만한 도시는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는 말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규모이다. 그렇게 많은 오케스트라 운영이 가능하려면 그만큼의 관객이 있어야 한다. 독일인에게 철마다 클래식 공연장에 가는 일은 자연스럽다. 앞서 언급한 그분은 독일인이 이렇게 음악을 사랑하는 민족이 된 것을 루터의 영향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음악이 그리스도인에게 종교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고 이를 통해 사탄과 싸우는 무기가 된다고 했다. 반면에 루터는 미술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마침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이번주에 관련한 기사가 나서 공유한다. 해당 기사는 루터가 독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적고 있다. 그 예중에 하나가 음악에 대한 애정이다. 독일인이 클래식 콘서트를 즐기는 건 일종의 정례화된 종교 행위 같은 느낌까지 준다. 루터가 독일에 끼친 영향은 음악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디자인, 출판, 경제관 등 사회 전반에 걸쳐있다.

물론 나는 어떤 하나의 요인이 (이경우에는 루터라는 사람이)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독일만 봐도 루터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자니 섭하다. 독일에는 칸트 같은 사상가, 바하/헨델/베토벤 같은 음악가, 하이젠 베르크 같은 과학자 처럼 독일 뿐 아니라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어쨌든 기사 자체는 재미나게 읽었다. 내용 정리/저장 해둘 겸 해서 공유한다.

해당기사: The Economist | Charlemagne: Nailed it (1월 5일자)

1529MartinLuther.jpg

마틴 루터 (1483-1546)

.

그러면 루터는 독일의 어떤 분야에 영향을 끼쳤을까. 첫째 독일인의 미적인 감각이 그러하다. 루터는 기독교인은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실용적이고 소박한 바우하우스 스타일은 루터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 후에 스웨덴에도 영향을 미쳐 IKEA 스타일이 되었다고. (루터교는 북유럽에도 전파되었다.) 생각해보면 루터교 목사의 딸인 메르켈 총리나 본인이 루터교 목사인 요하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은 소박한 이미지의 사람들이다. 옆나라 프랑스의 화려함과 비교하면 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또 독일은 출판 시장이 크다.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큰 시장이라고. 루터와 연관지어 생각해보자. 루터는 성경을 독어로 번역 배포 하면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빈부/남녀/노소에 관련없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는 독일의 문맹률을 낮추는데에 공헌한다.

마지막으로 독일인의 경제 관념이다. 막스 베버가 1904년 ‘프로테스타티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을 통해 논증한 바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베버가 말한 신교는 주로 칼빈주의와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를 말한다. 칼빈은 세상의 모든 직업은 숭고하다고 보았다. 베버에 따르면 칼빈의 사상은 개인이 부를 추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독일식 자본주의는 영미권 자본주의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부채를 최소한으로 가져가고 인플레이션 억제에 우선순위를 두는 독일 경제의 방향성은 (물론 전후 극악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바에서도 기인하겠지만) 루터의 사상에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구원 이후에 기독교인이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독일어로 work는 beruf이고 직업은 (영어 calling) berufung 이다. 어원이 같다. Gerhard Wegner라는 한 신학자 역시 북유럽과 독일 복지의 뿌리를 루터식 사회주의 Lutheran socialism에서 찾았다.

루터의 유산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루터는 유대인을 배척했다.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유에서다. 어떤면에서 루터의 생각은 전후 독일인의 유대인 혐오에 사상적인 배경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해당 기사는 세상의 권위에 순종하라고 설교하고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군주를 지지했던 그의 보수적인 성향이 현재 독일인의 국민성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올해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정확하게 5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니까 1517년 10월 31일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 사실 지금에 와서 독일이 기독교 국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카톨릭을 포함해도 기독교인은 삼분의 일이 채 되지 않는다. 특히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비텐베르크는 지금에 와서 유럽에서도 가장 비종교적인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독일 관련 이야기에서 종종 루터의 유산을 발견하곤 하는데, 그럴때마다 역사에 실재했던 한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실감하고서는 깜짝 놀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