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대상의 산업중에서 (B2C) 혁신이 더딘 산업 중에 하나가 자동차 산업이다. 자동차 산업에 혁신이 진행되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이 변할 듯.
원문: The Entrant’s Guide to The Automobile Industry (ASYMCO)
번역: 초보자를 위한 자동차 산업 입문 (뉴스 페퍼민트)
소비자 대상의 산업중에서 (B2C) 혁신이 더딘 산업 중에 하나가 자동차 산업이다. 자동차 산업에 혁신이 진행되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이 변할 듯.
원문: The Entrant’s Guide to The Automobile Industry (ASYMCO)
번역: 초보자를 위한 자동차 산업 입문 (뉴스 페퍼민트)
페친 중에 경제 전문가들이 몇 있다. 불평등은 세계적인 이슈인 관계로 자주 이야기 되는 주제 중에 하나이다. 페친의 페친이신 ‘채훈아빠’님께서 지니계수의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불평등과 소득 재분배 관련 내용을 잘 정리해 주셨기에 공유한다.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비교적 쉽게(?) 정리해주셨다.
링크: 우리나라 분배 구조의 변화 추이와 생애주기 효과 – 한국 소득 불평등의 원인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
요약하자면,
– 97년 외환위기 이후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는 것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지니계수로 보았을 때)
– 원인은 ‘신자유주의’, ‘디지털 환경으로의 급격한 변화’ 등을 꼽을 수 겠다.
– 그러나, 급격한 노령화로 인한 부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근거: 성명재 교수 연구자료) 정도 이다.
(출처: “채훈아빠”님의 블로그, 재인용)
불평등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정치적 입장과 가치관에 따라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하기에 논의가 쉽지 않다. 나는 아무래도 데이터를 근거로 이야기하는 분들의 이야기가 좀더 신뢰가 간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불평등의 문제가 우리나라 만의 문제는 아니며, 전세계가 고민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불평등의 문제는 빈곤의 문제와 구분해서 봐야한다. 둘을 함께 보기 시작하면, 논의가 진행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나라 빈곤 문제에 관한 대응은 선진국과 비교해 미흡하다.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빈곤의 문제에 선진국 중에서 가장 무관심하다는 미국과 비교해서도 현저히 그러하다.
여기서 부터 논의가 시작되면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너무 나이브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회색분자이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좀 불편하다. 내가 보는 세상은 항상 불투명하고 딱잘라 말하기 어려운 모습만 가득하다. 그렇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흑백 논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하우징어 (Johan Huizinga, 1887 – 1945)는 에라스무스(1466-1536)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썼다.
The ideal joy of life is also perfectly idyllic in so far that it requires an aloofness from earthly concerns and contempt for all that is sordid. It is foolish to be interested in all that happens in the world; to pride oneself on one’s knowledge of the market, of the King of England‘s plans, the news from Rome, conditions in Denmark. The sensible old man of the Colloquium Senile has an easy post of honor, a safe mediocrity, he judges no one and nothing and smiles upon all the world. Quiet for oneself, surrounded by books.- that is of all thing most desirable.
– Erasmus and the Age of Reformation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 세속적 관심사로부터의 초연함과 지저분한 것들에 대한 경멸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원적 즐거움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장의 물품 가격을 잘 알고, 영국 왕의 원정계획에 대해 소상하고, 로마에서 온 소식을 잘 알며, 덴마크의 생활환경을 꿰뚫고 있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인가? <대화집>에 나오는 현명한 노인은 그리 높지 않은 명예의 자리에서 안전하고도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판단치 않으며, 이 세상에 대해 미소를 짓는다. 책들로 둘러싸인 채 늘 고요하게 있으면서 자족하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 (에라스뮈스 평전 – 요한 하위징아 저, 연암서가)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불확실성과 현실의 모호함이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건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와 끝까지 대립했다. 그는 수많은 종교개혁가의 스승이었지만 종교개혁을 끝내 지지하지 않았다. <우신예찬>을 통해서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했지만, 그의 개혁은 항상 카톨릭의 안에 있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카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여생을 마친다.
후세는 루터의 이름을 기억한다. 당대에 학문적 깊이와 고고함으로 존경을 받았던 에라스무스는 지금에 와서 유약한 지식인, 이도저도 아닌 신학자 정도로 매도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루터는 개신교의 아버지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기치는 서양 정신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그러할 지라도 나는 루터가 아닌 에라스무스에 더 끌린다. 루터의 신학에 동의하지만 경건함/소박함/정직함/신중함이라는 가치를 지닌 ‘자유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영락없는 회색분자인듯 하다.
+ 참고자료: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 – 그의 생활방식에 대하여
말과 글은 그사람의 지적인 수준을 드러낸다. 5년 전인가 서울에서 지하철에 탔을 때 였다. 한 이쁘장하게 생긴 처자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그 처자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 좀 신기했다. 그처자는 ‘대박’이라는 단어 만을 사용하여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대박~’, ‘대~에~박’, ‘대!박!’. 아 하나 더 있다. ‘왠일이니?’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다. ‘Oh my God!’와 ‘you know’이다. 나도 처음에는 미국 사람스러운 감탄사를 적절하게 섟어주는 것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내다보니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 오히려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도 그랬고 나도 그렇고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슬랭이나 욕을 먼저 배운 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쓰고 나면 네이티브에 가까워 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처음 우리말 욕을 배웠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왠지 표현을 속 시원하게 한 것 같았다. 자극적인 표현은 내 속에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는 꾸밈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꾸밈말(부사,형용사)은 더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말을 할 때에 꾸밈말을 필요이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표현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말의 기본 구조, 그러니까 주어, 동사, 목적어를 사용하고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불필요한 단어를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고 논리적인 언어 사용을 노력하다 보면 불필요한 꾸밈 말이 본질을 흐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딱딱 끊어지는 단문을 좋아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취향의 문제이다. 말에서 곁가지를 다 치고 필요한 내용만 남기면 취할 것이 많지 않다. 마치 그림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를 다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추상적인 몇개의 선인 것과 같다. 어떤이들은 장식적인 말과 장식적인 그림을 좋아하지만, 나는 본질만 남아 있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서 듣는/읽는/보는 사람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너무 말/표현이 과하면 부담스럽다. 쓰는/말하는/그리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단문을 잘 쓰지 못하며, 과도한 표현을 할 때가 많다. 나의 문제는 한 문장에 너무 많은 생각을 집어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 글을 쓸때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중구난방이 되곤 한다. 심지어는 과함에 대해 논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생각을 사용하고 있어 민망하다. 그래서 글은 다듬어야 하고 계속 다듬을 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
요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을 읽고 있다. 카버 아저씨 작품의 미덕은 딱 필요한 그만큼만 말한다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하루키는 꾸준히 카버의 책을 읽으면서 말의 리듬감과 호흡을 조절하는 감을 유지한다고 한다. 나는 하루키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문장은 매력적이다. 문장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빼고 나면 거기서 독자는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빼기에만 집중하면 논리가 흐트러진다. 글을 쓰는 사람은 머리속에 모든 생각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넘어가기가 쉽다. 그러나 논리의 고리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글은 죽어버린다. 그래서 글을 잘 쓰기는 어렵다. 딱 필요한 만큼만 들어가고 빠져야 한다. 너무 과하면 부담스럽고, 너무 적으면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반복해서 글을 다듬으면 해결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그래서 프로페셔널 문장가들은 대부분 엉덩이로 글을 쓰는가 보다.
+ 덧: 이 글은 참고로 퇴고를 하지 않았다.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적어봤는데, 나는 프로페셔널 작가가 아니니까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블로그만 하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다.
어른이라고 해서 슬픔을 다루는 법을 아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울고 슬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약이다.

딸아이랑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Daniel Tiger’s Neighborhood. 그중에서 나의 favorite song을 공유한다. 나는 기분이 다운될 때 이노래를 듣는다. ㅎㅎ (민망)
아참 가사도 공유하는게 좋겠지?
It’s ok to feel sad sometimes, little by little, you’ll feel better again.
It’s ok to feel sad sometimes, little by little, you’ll feel better again.
When you are feeling down. It’s ok to feel sad, but little by little, you’ll see it won’t always be bad.
It’s ok to feel sad sometimes, little by little, you’ll feel better again.
It’s ok to feel sad and it’ ok to cry, but little by little, the sadness will say bye-bye.
It’s ok to feel sad sometimes, little by little, you’ll feel better again.
시기심의 원인은 나의 불안에 있다. 다른 사람들은 매일 노력해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는 거 같은데, 나만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다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자신만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시기심을 좋은 에너지로 바꾸려면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나는 남들과 다르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시기심을 느낄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서로를 시기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김중혁이 캐는 창작의 비밀> 중에서
작가 김중혁이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칼럼 중에서 따왔다. 그가 롤프 하우블의 <시기심>을 읽고서 든 생각이라고 한다. 불안은 나를 갉아먹는다. 시기심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린다면, 우리는 서로 더 나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많은 분들이 IS와 무슬림을 동일시 한다. 듣는 무슬림 기분 나쁘다. 무슬림은 시아가 있고 수니가 있으며, 그 안에서도 차이가 많다. IS는 그중에서도 왕따 같은 애들이다.
많은 분들이 에볼라때문에 아프리카 사람과 접촉하길 꺼려한다. 듣는 아프리카 사람들 기분나쁘다. 에볼라는 서아프리카에 퍼졌다.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는 비행기로 7시간 거리다. 프랑스 파리까지는 6시간. 누구도 파리와 에볼라를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분들이 일부 기독교인의 비리를 듣고 기독교를 욕한다. 듣는 기독교인 기분 나쁘다. 성경을 배우는 것과 실천하며 사는 것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도 다양한 사람이 있다.
외국인이 한국사람에게 김정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당황스럽다. 북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고, 우리를 북한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할 때, 도쿄에 가봤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행여라도 일본과 한국을 같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싶어 차이를 열심히 설명해 본다. 근데 의미 없다.
어떤 분이 유럽은 이렇다라고 말하면, 궁금하다. 어디 유럽을 말하는 것일까. 복지를 말할 때 북유럽/독일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 관광을 말할 때는 프랑스/이탈리아를 말하는 것 같기도하다. 유럽을 통째로 말하는 건 한국/일본을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보다도 훨씬 무모하다.
사람들이 미국을 하나의 인격체처럼 말하면 당혹스럽다.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상호 경쟁 시스템이 작용하는 미국을 하나로 보기는 참 어렵다. 정부/군대/상원/하원/학계/기업/남부/동부/서부 등등… 모두 다른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따로 행동하는 entity들이다.
B형이라고 괴팍하고 한 성깔하는 시크한 남자라고 지레 짐작해버린다면, 기분 나쁘다. 내가 시크한건 맞지만 무지하게 부드럽고 상냥한 남자다.
저는 기독교 관련 포스팅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제가 별로 종교적인 사람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기독교가 제게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신앙을 빼고서 포스팅을 하는 것은 모순이더군요.
꽤 긴 연재였는데, 주제가 너무 무겁다보니 다른 주제를 중간에 포스팅하기도 생뚱맞았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소소한 제 얘기를 주로 할 생각입니다. 제가 그린 그림도 올리고, 딸램 이야기도 하고, 미국사람들 뒷담화도 할 생각입니다. 뭐, 가끔은 기독교 이야기도 하겠지요.
연재를 보시고 혹시라도 기독교에 관심이 생긴 분들은 질문을 주셔도 좋습니다. 체계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잘(?) 답변을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나누는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럼 한국에 계신분들은 좋은 밤 되시고, 미국에 계신 분들은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아참 중동/유럽에 계신 분들을 빠뜨렸네요. 지금 이미 주무시고 계시겠군요.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중동에 계신 L형, 그리고 E형수님도 좋은 밤 되세요.
딸램이 놀아달라고 조르네요. 이만 자리를 뜹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들어가며: 언제나 그렇듯이 제 포스팅의 일차 목적은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만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내용이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분들은 이번 연재를 읽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연재는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으며 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글은 이슬람교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글의 독자는 ‘성경과 기독교에 의문을 가진 이슬람 교인’인 셈입니다. 이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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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두 글에서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가지 해법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서야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인 ‘대속’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정리하자면, 저는 물질적인 방법은 환경을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방법은 나를 변화시켜서 불확실성에 대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속의 방법은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집니다. 불확실성의 문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불확실성의 문제를 ‘죄’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제가 글의 처음부터 죄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굳이 불확실성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죄’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람이 스스로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3:20-26)
저는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면서 죄에 관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K님의 글을 통해서 이해한 바로는 독실한 무슬림이 선행을 통해 악행을 덮으며, 그로 인해 알라의 죄사함을 받는 것이 무슬림의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목적은 결국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시고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야기하고 예수가 말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시대의 기준에 맞추어 조정한 것이 아닙니다. 일전에 E님께서 마태복음 5장을 인용하셔서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신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 구절은 유대인이 지켜왔던 율법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기준에서 살인과 간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살인과 간음을 하지 않은 사람을 죄인으로 보지 않은 것에 그쳤습니다. 예수는 이것에서 한발 더 나아간 해석을 한 것이지요. 살인과 간음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누구도 죄인의 기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 인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본질을 흐렸던가 싶기도 합니다. L님도 오늘 글을 올린다고 했으니, 저도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그럼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연재글 목차)
+ 이슬람과 기독교
+ 유대교와 기독교
+ 기독교의 방식 (대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