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과 한국 언론의 살인사건 서술 방식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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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BBC)

2년 동안 채플힐에 살았었다. 미국에서 흔한 총기사건도 이 동네에서는 거의 없었다. 이 조용한 대학도시에 최근에 이슬람인을 대상으로 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다.

근데, 인상적인 것은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루는 태도였다. 기사는 빼곡히 사실을 바탕으로 쓰인다. 명확한 출처가 기재된 것은 기본이다.

deulpul님께서 미국과 한국의 살인사건 기사 서술 방식을 비교/분석해주셨기에 공유한다.

들풀.넷: 무슬림 부부 살해사건 기사

블랙 스완(나심 탈렙 저)을 읽는 中

요즘 블랙스완(나심 탈렙 저)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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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던대로 금융을 가장한 인문학 책이다. 그가 말하는 학문과 학자들에 대한 독설은 왠지 통쾌한 면이 있다. 다양한 철학/수학/사상/역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논점이 명쾌하여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아직 1/3도 못 읽었는데 공감하는 내용이 많다. 몇가지 노트해 둔 내용을 공유한다. 그리고 원서로 읽고 있는데, 블로그 독자를 위해 내 나름대로 번역해 보았다. 참고로 내 번역은 의역이 심해서 거슬릴 수도 있다.

첫째

History is opaque. You see what comes out, not the script that produces events, the generator of history. There is a fundamental incompleteness in your grasp of such events, since you do not see what’s inside the box, how the mechanisms work. What I call the generator of historical events is different from the events themselves, much as the minds of the gods cannot be read just by witnessing their deeds. You are very likely to be fooled about their intentions. (The Black Swan, Nassim Taleb)

내맘대로 번역: 역사를 이해하기란 힘든일이다. 우리는 역사의 결과물을 알수는 있지만 역사를 만드는 근원을 볼 수는 없다. 역사라는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고, 어떤 메커니즘이 작용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미완성 작업일 수 밖에 없다. 내가 역사를 만드는 근원이라고 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들 그 자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고 해서 운명의 신들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우리는 운명의 장난에 쉽게 속아넘어간다. (블랙스완 중에서)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고? 아직 결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 쓰나? 마찬가지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처음부터 잘 살겠나? 소설을 쓰는 일은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 따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일로 시작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은 누구나 없다. 그건 소설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소설은 시작된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나의 노트: 역사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인생이 되었든, 그것은 다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일이 쉽지 않은 것은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데에 있다. 다 살아보기 전에는 그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의 일을 돌이켜 보는 일이란, 왜곡이 심한 백미러(distorted rear-view mirror)를 보는 것과 같다. 지나간 일들은 하나의 관점으로 평가(assess)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고, 그 관점과 일치하지(aligned) 않는 사건들은 생략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가 김중혁의 표현을 빌자면, ‘뭐라도 되겠지.’라면서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의 일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둘째

Platonicity is what makes us think that we understand more than we actually do. (The Black Swan)

플라톤과 그의 추종자들의 방식은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내맘대로 주석: 화이트헤드는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했다. 내 맘대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현대의 학문은 실제를 이원화하고 쪼개고, 객관화 시켜서 이해하는 플라톤의 방법론에서 시작했다. 현대의 플라톤의 제자들은 모든 현상을 확률이나 이론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만든 이론/사상은 black swan과 같은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은 예기치 못한 사태가 왔을 때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장거리 비행을 대비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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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pedia)

아무리 많이해도 익숙해 지지 않는게 몇가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장거리 비행.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열다섯시간. 그 시간을 좁디 좁은 비행기에 갇혀있다 보면 수명이 며칠은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내 기대수명이 80년이면 79년 360일 쯤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노트북을 장시간 사용하거나 overload하면 발열로 인해 수명이 줄어 드는 데, 꼭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 기지개도 켜보고, 복도를 이리저리 다녀보고, 영화도 보지만 좀처럼 시간이 안간다. 어떤이들은 알콜의 힘을 빌어 잠을 청하기도 하는 것 같다. 조심해야한다. 과음하다가 바비킴된다.

이번 비행에는 뭘하고 시간을 죽일지 고민해 봤다. 책도 몇 권 들고 갈 생각이고, 아이패드도 풀로 충전해서 들고갈 생각이다. 기내 상영 영화가 중요하다. 예전보다 나아진게 있다면, 내가 영화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VOD(video on demand)이다. 2년 전인가 대한항공 미주노선을 타봤는데, 채널을 돌리는게 아니구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거다. 감격했다. 비즈니스를 탄 느낌이었다. (비즈니스는 진작에 이런 시스템이 었다.) 십년 전에 캐나다 갈 때였나 노트북을 들고 탔는데, 지뢰찾기 게임을 했었다. 탈때는 분명히 하수였는데, 내릴 때 쯤 되니 고수가 되어 버렸다. 한계 상황에서 인간의 집중력은 무한 증가한다.

몇달째 만지작 거리고 있는 초고 상태인 글들을 완성 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블로그 게시판에는 40개 가량 드래프트 상태로 저장되어 있는 글들이 있다. 어떤 글은 주제만 메모 되어 있는 글들도 있고, 어떤 글들은 개요만 짜놓은 글들도 있다. 어떤 글은 거의 다 썼는데, 영 올리기가 찜찜해서 임시 저장 해둔 놈들도 있다. 딸램과의 이야기,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각 나라별 커뮤니케이션 방식, 돈에 대한 내 나름의 경제학적/사회학적/철학적/성경적 고찰 시리즈 등등. 꽤 오랜 시간 생각에 물을 주고 이런 저런 잡다한 메모를 모으다보면 그럴 듯한 글이 될 때가 많은데, 그정도 글이 나올라면 몇 번 글이 뒤집어 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경우는 산책을 하거나 샤워를 할 때 좋은 생각이 많이 나오는데, 비행기 안에서는 그렇게 생산적이기 힘들 것 같다. 이건 실현 불가능한 생각인듯.

아내는 비행할 때 먹을 것을 준비한다. 이착륙을 대비해서는 껌과 사탕을 준비하고, 중간중간 유용한 과일도 준비한다. 이착륙 할 때는 기압 때문에 귀가 먹먹해진다. 나는 침 몇번 삼키면 괜찮아 지는데, 아내는 꽤 힘들어 한다. 그럴 때 껌과 사탕은 조금 도움이 된다. 몇년 전 부터 귀마개도 사용해 봤는데, 아내가 꽤 만족한다. 고통을 줄여주니 꽤 기특한 도구이다. 기내식을 계속 먹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항공사 입장에서 나름 신경써서 식단을 구성하는 것일 테지만, 먹는 입장에서는 곤욕이다. 아무래두 기압이 낮은 곳에서 대량으로 조리를 하기 때문에 냉동식품의 퀄리티 이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계속 앉아 있어서 소화도 안될 지경인데 이런 음식을 먹고 있자니 사육당하는 가축의 느낌이 든다. 장거리 비행을 하고서 내리면 몇시간은 속이 부글거리고 그 좋은 나의 먹성도 사라진다. 아내는 귤이나 신선한 과일을 준비하는 데, 이게 그나마 낫다.

딸아이는 워낙 어려서 부터 장거리 비행에 자주 데리고 다녔더니 비행기가 자기 세상이다. 비행기에 앉으면 바로 담요와 쿠션을 뜯어보고 만져본다. 우선은 자리부터 편하게 만든다. 열 몇 시간의 비행이 순탄하기 위해서는 안락함이 중요하다. 그다음에는 안전 메뉴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도 읽는다. 주로는 그림을 보지만, 그래도 그게 무슨 재미일까. 하긴 동물원에 가서도 동물보다 지도를 더 재미있게 보는 녀석이니 거기에 그려진 그림이 큰 재미를 줄런지도 모르겠다. 그다음엔 주위를 살핀다. 앞으로 뒤로 놀만한 아줌마/할머니가 없나 살핀다. 아이의 놀이 상대로는 할머니/할아버지가 딱이다. 손녀 생각이 나는지 그 분들은 비행기 안에 있는 꼬마들의 좋은 친구가 된다. 몇시간은 그정도로 버틸 수 있다. 그것마져 지루할 때는 어린이 프로를 찾는다. 몇년 전까지는 뽀로로가 큰 도움이 됐다. 몇 시간은 더 버틸 수 있다.

그 다음은 승무원 언니들. 딸애는 승무원과 친해두면 뭐라도 하나 더 나온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한국말, 영어, 몸짓, 발짓, 표정을 다 동원해서 애교를 부리고 어떻게든 그들의 시선을 잡아챈다. 서비스를 하는 분과 친해지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비스가 만족스럽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이는 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만족을 나타낸다. 어디서 사람들을 기분좋게 하는 법을 배웠을까 궁금해진다. 조금은 가엽기도하다. 두살 무렵 부터 부모의 유랑에 동참을 시켰으니 말이다. 서울, 제주, 채플힐, 뉴욕, 애틀란타, 마이애미, 런던, 취리히, 로마, 프랑크프루트 등등. 좋은 경험이 되었을 거라고 말해보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겐 환경이 자주 바뀌는 건 큰 스트레스이다. 만 네살이 될 때까지는 장거리 비행을 하고 나면 꼭 일주일을 아펐다. 한번은 딸때문에 마일리지를 모아서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한 적이 있지만, 매번 그렇게 여행할 수는 없을 터이다.

이번 비행에는 가족이 없다. 일정 때문에 아내와 딸이 먼저 한국에 들어가고, 나는 따로 갔다가 따로 돌아와야 한다.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장거리 비행 무사히 잘 마쳤으면 좋겠다.

딸과의 대화 모음 (집안일/성경/반대말에 대한 잡담)

첫번째

아내: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설겆이를 하다가) 일이 해도해도 끝이 안나.
딸램: (무심한 듯 앉아있다가) 집안일은 원래 그런거야.

으이구 애늙은이.

두번째

오늘은 아이에게 성경에 있는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아이가 물었다. “아빠, 엘리야 선지자는 남자야? 여자야?” “남자.” “왜 이렇게 성경에는 남자가 많아? 나는 여자인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남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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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딸아이에게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라는 표현을 가르쳐 주었다. 며칠후 딸아이가 시끄러운 곳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쥐살은 듯이 시끄럽네.”

가끔 우리말의 상투적인 표현을 뒤집어 보아도 재미있다. 그러면서 표현의 유래/의미/어감을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야후의 구원투수 – 마리사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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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The daily signal)

야후는 내게 한동안 잊혀진 이름이었다.

3년 전인가 구글 출신 여자 CEO를 영입한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아직 안망했나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마전 알리바바와 관련해 이름이 들렸을 때는 쉽게 사라지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여전히 미래가 밝아보이지는 않다만, 그래도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마리사 마이어의 야후 (naver letter)

카풀을 하다가 있었던 일

며칠전에 아내가 딸친구들 카풀을 해주면서 있었던 이야기.

Portrait

(image source: wikipedia)

아내는 운전을 했고 아이들 셋은 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딸: My mom had a haircut over the weekend. But I don’t like it.
Hailey: Hmm… I sorta like it.
Ashley: People feel long hair is prettier. I like long hair too. I’d like to grow my hair long like Rapunzel.

아내는 들으면서 어이가 없었다구.

뒷자리에 앉아서 머리 품평을 하는 유치원생 아가씨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을 아내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여명의 눈동자’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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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을 한국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드라마가 있다. ‘여명의 눈동자’. 드라마는 우리들에게 많은 장면을 남겼다. 대표적인 장면은 철조망을 넘어서 최대치와 여옥이 나누는 키스장면.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를 기점으로 티비 드라마에서 키스 장면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여명의 눈동자는 당시 중학생이던 나에게 과하게 자극적인 드라마였다. 우선, 드라마가 정신대라는 소재를 다룬 방식은 피끓는 청소년이었던 나에게 성적인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 최대치는 살아있는 뱀을 뜯었고, 일본 군인과 싸우면서 칼에 찔려서 실명의 위기에 처했다. 그뿐인가, 제주 4.3과 빨치산 이야기는 공산당이 괴물이다라는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커다란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았던 이유는 자극이 아니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물들과 그들의 사랑이었다. 여명의 눈동자의 세계관은 이후 김종학 사단이 만든 ‘모래시계’에도 이어진다. 드라마의 인물들과 그들의 사랑 방식은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한동안 나를 사로잡았었다. 나의 이상형은 채시라 누님과 고현정 누님이었다.

사랑은 시대의 소용돌이를 뚫고서 비극적으로 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지고지순해야 했으며,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나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역사의 장난질 속에서 징그럽게 살아남으려 했던 대치/태수가 되기도 했었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려 했던 박상원이 되기도 하였다. 90년대를 수놓았던 김종학의 드라마들은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 세계관에 영향을 미쳤었다.

얼마전 친구가 페북에서 여명의 눈동자를 언급했다. 추억이 실타래처럼 딸려오길래 몇자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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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게 이 드라마를 생각할 때 기억나는 아주 사소한 장면이 있다. 제주 4.3의 와중이었던가 아니면 지리산에서 였던가. 한 공산주의자와 최대치가 나누는 대화이다. 그 공산주의자는 산을 오르는 와중에 이런 대사를 친다.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죠? 이데올로기 때문에 동족끼리 서로 이렇게 죽이니.” 아마도 그는 작중화자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당의 지령에 따르는 공산주의자로서, 아주 단면적인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런 대사를 치다니, 이질적이지 않은가. 나중에 혹시라도 송지나 작가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한번 물어보리라. (20년도 더 된 옛날이라 기억이 분명치는 않다. 여튼 이질적이었다는 것과 이데올로기, 아이러니라는 단어를 썼던 것은 분명하다.)

권남훈 교수님 세월호 단상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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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훈 교수님의 글. 이글이 쓰여진 시점 (작년 4월)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차분하고, 균형잡혀있는 시각에 감탄한다.

세월호에 대한 단상 1

이슈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라도 한마디 보태기에 바쁜 페북세상을 보면, 때로는 침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참 귀하게 여겨진다. 침묵하는 것이 방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하고 열심히 생각해서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대형사고는 연쇄적인 부실이 중첩되어 일어난다. 그 고리 중간의 누구 하나 만이라도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면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터. 그러나 아쉽게도 그 고리의 중간을 이어가는 ‘이름 없는 영웅들’은 빛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역할을 잘한다면, 사고는 없을 것이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세상을 그나마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고 생각한다.

허락받지 않고 글을 링크 걸었는데, 전체공유로 되어 있는 글이기에 권교수님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집밖 풍경 스케치와 딸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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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스케치 해봤다. Focal point 잡는 거나, 그림의 밸런스를 잡는데서 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더 손대기 귀찮아서 그냥 이상태로 마무리.

Olivia also drew me and herself drawing. Don’t miss her details (UNC shirt and the buildings on my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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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램이 그린 ‘아빠와의 미술시간’이다. 자세히 보면,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 속에는 빌딩과 수풀이,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는 학교 마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자기의 그림 속에는 거울 같이 자신의 그림이 한번 더 비춰진다. (그림 속의 그림)

딸아이가 그린 자기 모습 때문인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유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