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미래 – 오바마 대통령의 커뮤니티 컬리지 무료화 계획에 대한 잡담

TomHanksApr09

며칠전에 톰행크스가 뉴욕 타임즈에 I Owe It All to Community College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2년제 커뮤니티 컬리지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그곳에서 배운 지식이 어떻게 현재의 배우 생활에 도움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뉴스 페퍼민트에 번역 되어 있으니 한글판을 읽고 싶은 분들은 오늘의 나를 만든 커뮤니티 칼리지(뉴스페퍼민트)를 참조하면 된다.

뜬금없이 톰행크스가 이 글을 기고한 이유는 지난 8일 오바마 대통령이 테네시의 한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전국의 커뮤니티 컬리지를 무료로 개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Obama Plan Would Help Many Go to Community College Free: NYT) 처음에는 나는 이 계획을 들었을 때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보니 아주 불가능하지 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현재 미국의 커뮤니티 컬리지들은 30%의 예산만을 등록금에서 조달(NYT)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학의 경우 4년제를 포함해서 60~70%(출처:대학교육연구소)) 또 커뮤니티 컬리지의 경우는 지금도 장학금 같은 방식으로 70~90%의 학생들이 무료로 등록하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600억 달러의 예산을 공화당에서 통과시킬리는 만무하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학교를 무료로 개방했을 때 일단 등록하고 보려는 학생들이 생길 것이며 (free rider의 문제), 수준낮은 4년제 대학은 어려워 지는 등 (2년제가 공짜라면 허접한 4년제에 누가 가겠는가?)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필요한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되지 않은 현시점에서)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여기서 부터는 정리되지 않은 제 생각을 써본 글이니 그냥 재미로만 읽어 주세요. 군데 군데 논리의 구멍이 뻥뻥 뚫린거 찾기 쉽습니다. ^^ ————————————————————-

이 뉴스가 내 관심을 끈 것은 대학의 미래에 대해서 미국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 있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바마는 교육 이슈를 이야기 하기 좋아한다.) 사실 대학의 미래는 항상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지만 이야기 하기 조심스러운 소재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들이 대학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각자가 대학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고 학문을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대학의 목적을 어떻게 보는가 이다. 모든 것을 투자 대비 가치로 따지기 좋아하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대학은 신분 상승의 수단 또는 대졸 임금 프리미엄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만 대학을 본다면 2010년대 지금에 와서 대학교육은 실패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데에는 몇가지 근거가 있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캡처

(출처: 한국은 인적자본 일등 국가인가 (KDI), 채훈아빠 블로그 재인용)

KDI의 최근 통계 자료에 따르면, 가장 위의 파란색 점선이 고졸 대비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임금 프리미엄인데, 1980년대의 80%에서 현재로 오면 60%까지 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캡처

(source: wealth by degree (economist))

또 위의 이코노미스트 자료를 보면, 빨간 점선이 OECD 평균 대학 진학률인데, 30년 만에 약 18% 정도 증가 한 것을 볼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대학진학률은 높아지는 추세이고 대학의 임금 프리미엄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관련해서 관심있으신 분들은 링크 자료로 들어가면 참고자료 리스트가 잘 정리되어 있다. 참조하시길.)

그러나 대학이 단순히 임금 상승을 위한 수단인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견해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이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내 식으로 이해를 하면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라는 이야기 이다. 심지어는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하는 경영학 마져도 (내가 공부했을 때 느낀 바로는) 기업 현장의 실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영학이라고 하는 학문을 하는 것이다. 기업에서 후배 직원을 받아본 사람들은 느끼겠지만, 아무리 대학에서 잘나가는 친구였다고 하더라도, 실무에 바로 투입되어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학문하는 곳으로서의 대학이라는 개념은 근대에 와서 정립이 된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는 대학이라는 곳은 엘리트 계층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1970년대 그러니까 대학진학율이 10% 정도이던 시절에는 대학생들이 고졸/중졸을 보는 시선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19세기 만해도 미국사람들에게 대학이라는 곳은 목사가 되기 위해 가는 곳이었고 따라서 라틴어와 희랍어를 필수로 가르켰다. 그이후 라틴어가 필수 과목에서는 사라졌지만, 20세기 초까지도 대학생들은 남을 돕기 위해 대학에 간다고 말했다고 한다. (출처: 최후의 교수들, 프랭크 도나휴)

그렇지만 지금의 대학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면 대학에 진학한 공대생의 상당수가 미적분을 제대로 못하는 수준이고, 영문과에 진학했다고 하지만 원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어찌보면 이는 당연한데 60~70%가 대학에 진학하는데, 그 모두가 학문을 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다. 만약 전국민의 절반 이상이 대학을 진학한다고 하면, 대학은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교양을 가르키는 곳이 맞다고 본다. 그리고 정말 학문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이상의 고등 교육 과정(대학원이 되었든, 연구소의 형태가 되든…)을 만드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오바마의 커뮤니티 컬리지 무료화 제안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세계적으로 대학진학률이 높아지는 것은 (우리나라 만의 현상은 아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만큼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지식의 양은 점점 쌓였기에 12년의 의무 교육과정으로는 현대인에게 기본적인 교양의 수준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커뮤니티 컬리지 무료화는 어떤 의미에서 13년의 정규 교육과정 (미국의 경우는 kindergarten 1년이 더 해져서 13년이다.) 에다가 2년의 추가 교육과정을 정규로 더하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당연히 국민들 사이에 합의가 필요하다. 교육의 문제를 단순히 잘살기 위한 투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대학과정을 정규교육화 (즉 세금을 집행하여 무료 또는 무료에 가까운 교육과정으로 만드는 것) 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80~90%가 대학에 진학한다면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으로 프리미엄이 붙을 수가 없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반대로 대학 교육을 교양있는 시민으로 키우기 위한 기본 소양을 키우는 것 (고등학교와 유사한 그 연장 선상의 어떤 것)이 라고 본다면 전국민에게 정규 교육과정으로 제공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학의 경우도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것이 100년 남짓 되었을까?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그 모습대로 나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p.s. 쓰다가 보니 무슨 레포트도 아니고 주장하는 글도 아닌 이상한 뻘글이 되었네요. 지금까지 하던 포스팅과 또다른 형태의 글입니다.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다지 전문성도 없는데, 논란이 될만한 주장만 늘어 놓은지라 포스팅하기 망설여 졌는데, 그냥 길게 쓰고 지우기도 아까워서 포스팅합니다. 의견이 있으시면 댓글로 달아주셔도 좋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가계부채

회사에 부하직원이 있다. Denzel 이라는 20대 초반의 신입사원이다. (미국남자는 군대를 안가니까…^^) 그친구가 며칠전 퇴근할 때 차가 막혀서 고생한 적이 없느냐고 묻는다. 그랬다고 하니 바로 자기차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차가 퍼져서 길거리에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폐차직전인 차를 몰고 다닌다. 그친구는 돈을 모아서 좋은 차를 사기 위해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 처음 와서 놀란 건, 길거리에 폐차직전인 차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뒷 유리창이 깨진 상태에서 비닐로 대충 가려서 다니는 차, 부러진 백미러를 청테이프로 칭칭감아서 다니는차 등등 정말 우리기준으로는 어떻게 저러고 다닐까 싶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차없이 버스/지하철을 이용을 하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뉴욕/LA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미국에서 차가 없이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달만 살아봐도 가족 수만큼 차를 굴려야하는 미국 삶을 이해하게 된다.

차뿐만 아니라 대학을 갈 때는 대학 학자금이 필요하고,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집을 사게 되었을 때 모기지까지 빚을 지게 된다. 딱히 낭비를 해서라기 보다는 젊은 시절에는 가진 게 몸뚱이 밖에 없고 수입이 작은데 생활의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빚을 지게 되고 결국 이 빚을 갚다가 끝나게 되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미시경제학에서도 연구되어진 토픽인데, 1950년대 모딜리아니 교수는 Life cycle income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관련 도표는 아래와 같다. 쉽게 말하면 지출은 어느정도 일정한데 수입이 못따라 주기 때문에 30대까지는 빚을 지고 산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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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연구는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뤄진 것이고, 우리나라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나는 막연하게 다르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우리나라 사례에 대한 통계자료를 KDI에서 발표하였기에 공유해 본다. 다른 각도에서 본 데이타들이 더 있는데 흥미 있는 분들은 원문을 보시기 바란다.

재인용: 채훈아빠 블로그 (가계 부채의 연령별 구성변화)

원출처: KDI 현안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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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데이타를 보면 미국의 경우 life cycle hypothesis가 상당수 맞는 것을 볼 수 있다. 왼쪽 차트에서 미국은 20/30대는 소득대비 부채가 높다가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부채비율이 작아진다. 한국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채의 비율이 커지고 있다.

이렇게 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딱히 통계자료나 연구자료를 본적은 없다. 그래서 미국/한국에서 다 살아본 내 경험을 토대로 몇가지 가설을 세워보았다. 딱히 연구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머리속에서 나온 생각이기에 누가 반론들어오면 할 말은 없다. 근거자료나 인사이트가 더 있으신 분 있으면 알려주시라.

첫번째 가설 – 노년층은 부동산은 사두면 득이된다는 전략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이분들은 10%씩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를 지내온 세대이고 부동산 불패 신화를 여전히 믿는 분들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분들에게는 빚을 지고 무리를 해서라도 자산을 늘리는 것이 체득된 재테크 지혜이다.

두번째 가설 – 20/30대의 빚을 50/60대가 감당하고 있다. 지금의 50/60대는 부모님이 소팔아서 공부를 시키신 은혜를 경험한 세대이다. 당연히 자식의 학자금/전세자금/혼수는 부모의 부담이다. 그러나 이분들이라고 몇억씩하는 전세금/학자금을 땅을 파서 만들어 내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주택담보 대출로 대학등록금/결혼자금을 마련해 주셨을 것이다.

세번째 가설 –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세제도가 젊은 층의 주택 구입 부담을 줄여주었다.

사실 전세제도에 대한 이야기는 논란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미국에서 피같은 렌트비를 몇년정도 날리면서 살다보니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린 게 전세라는게 상당히 세입자에게 유리한 특이한 제도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집을 사거나 월세를 사는 선택을 해야한다. 그러다보니 안정된 중산층에 들어갔는가 하는 기준이 자기 명의의 집이 있는가? 월세를 사는가가 기준이 될 때가 많다. 그렇지만 자기 이름으로 집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은 빚이다. 모기지라는 상품이 20~30년의 장기 대출이기 때문에 복리로 집값을 갚다보면 이자가 원금보다 커지게 된다. 요즘은 이율이 4% 조금 못되는데, 계산해 봤더니 30년 복리면 원금의 90% 가까이 이자를 지불한다. 3억짜리 집을 샀다면 5~6억을 지불하는 셈이다. 저금리 시대인 요즘도 그러한데 예전에는 돈벌어서 은행에 다 갖다 바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을 듯.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세가 있어서 다르다. 어디선가 전세는 본질적으로 사금융이다라고 말하는 글을 본적이 있다. 전적으로 동감하는데, 쉽게 말하면 세입자는 집주인한테 돈을 빌려주고 그 대신 그만큼의 렌트비를 안내는 구조이다. 작은 자본으로 사금융의 채권자가 되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노력하면 집장만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외국에 비해서 쉽게??) 전세금에 대한 은행이자는 월세보다 훨씬 싸고, 전세금을 전액 상환 가능하다고 가정하면 당연히 전세가 세입자에게 유리하다. 이걸 왜 사금융이라고 하냐하면, 전세금 규모의 돈을 생전 처음 보는 집주인에게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는 행위가 전세제도가 아니고서는 도대체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세입자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집주인 입장에서는 다르다. 적은돈으로 레버리지 효과를 누려서 집을 사는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세제도가 없다면 외국이라면, 은행에서 대출을 해서 집을 구입해야하는데, 은행이 아닌 개인간의 거래(전세금)로 돈을 조달하기 때문에 렌트비라는 기회비용을 포기하는 것이다. (사금융이기 때문에 은행보다 높은 이자비용이 든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세입자 입장만 경험했다. 집주인은 투자 수단으로 전세를 놓지만, 마치 시세에 비해 싸게 해주면 선심을 쓰는 양. 비싸게 올리면 시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양 행동한다. 누가 누구한테 선심을 쓰는 건 아닌 금융거래(?)인데, 마치 채무자가 갑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구조이다. 누군가는 전세제도로 이득도 얻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으니 (부작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 이정도로 마무리…)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한 제도 인 것이다.

이 특이한 구조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옛날에는 부동산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말하는 사람있을 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2000년대 만해도 주택청약으로 집사고, 전세끼고 집사고 해서 꾸준히 모으라는 재테크 조언을 여러 어른들한테 들었었다.

우리나라 상황도 많이 바뀌고 있다. 집값은 예전처럼 오르지 않는 것 같고, 한국 계신 분들하고 이야기 해보니 전세비를 2년만에 몇천을 올려줘야 해서 이사를 갔다는 분들도 많다. 전세가 거의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아주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예전보다는 줄어들 것이다.) 게다가 20대는 학자금 대출때문에 아우성이니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빚갚다가 끝나는 사회가 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아울러서 하나 우려스러운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개인금융은 대부분 원금을 갚지 않고 이자만 갚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게 집값이 무작정 올랐던 시절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수입이 없는 노년 세대에게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기본적으로 이자와 원금을 같이 갚는 구조이다. (명세서를 보면 principal and interest라고 나온다.) 또 다른 차이는 우리나라는 대부분 대출이 주택담보 대출로 퉁쳐서 빌려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집을 살 때 발생하는 mortgage loan과 집을 담보로 창업을 하거나 결혼자금을 사용하는 경우는 home equity loan으로 구분하여 빌려주고 home equity loan의 경우는 더 리스키 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자가 높다. 우리나라는 일회적인 소비에 대해서 대출이 쉽다보니 더 위험해 보인다.

이런 이야기는 하다보면 한도 끝도 없고 할 이야기도 많긴 한데, 그냥 이정도로 마무리 지어야 겠다. 나야 평범하게 그냥 미국 살면서 어떻게 하면 렌트비를 줄일까 궁리하는 1인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자료도 찾아보고 관심은 많지만 딱히 답은 없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빚도 안지고 내 미래도 저당잡히지 않나 고민은 많지만, 처자식 먹여살리는데에 도망갈 구멍이 보이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별 욕심없이 최대한 빚 적게 지고 아끼면서 사는게 답인 것 같기도 하구…

딸내미한테 한수 배우다

서비스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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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 전, 동네 한인 마트에 갔었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딸아이는 화장실이 급했고, 아내와 같이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을 다녀온 뒤, 아내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하는 말이 “여긴 참 화장실 관리가 엉망이야.” 맞장구를 치느라 나도 보탰다. “남자 화장실도 그렇던데. 이 마트 수준도 알만하네. 여기 식료품을 어떻게 믿고 사겠어. 담엔 웬만하면 다른 마트 가야겠다.”

장을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딸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 한다. “아빠, 그런 이야기는 사람들 있는데서 하지마. 혹시라도 마트 사람이 들었으면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어?” “그래, 맞다. 다음부턴 조심 할께.”

일곱살 딸아이에게 한수 배웠다.

왜 비행기에서 신분 격차를 새삼 느낄까?

땅콩회항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하루 이틀 이야기하다가 말겠거니 했는데 해를 바꿔가면서 모두들 한소리씩한다. 굳이 내가 거기에 한마디를 보탤 이유는 없다. 그런데 유독 사람들이 비행기 1등석 이야기에서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며칠전 한 기사를 읽다가 내 나름데로 실마리를 찾았다. 기사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뉴스 페퍼민트: 왜 항공사는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어하는가

Newyorker 원문: Why Airlines Want to Make You Suffer
BY TIM WU

이야기인 즉슨, 항공사들이 수익을 위해서 점점 더 이코노미석 승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consumer report에 따르면 지금 미국 4대 항공사의 가장 넓은 이코노미석 좌석은 1990년대 가장 좁은 좌석보다 작다고 한다. (source: Think airline seats have gotten smaller? USA Today)

1등석/비즈니스석/이코노미석의 차별은 미시경제학으로 보면 개인별로 다른 consumer surplus를 최소화하는 가격을 책정해서 수익을 최대화하려는 가격정책의 일환이다. 싸게 티켓을 사고 싶은 사람들은 좁은 자리에 타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돈을 주고라도 서비스를 사고 싶은 사람은 더 비싼 요금을 감수한다는 논리이다.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이야기이고, 1990년대에는 그렇게 비행기 티켓 가격을 책정했던것 같다. 그런데 요즘 기업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항공사들은 기본적인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그 불편을 피하고 싶으면 좀더 돈을 주고 좋은 서비스를 이용하라는 메세지를 주는 것이다.

미국 기업들은 pricing에서 다양한 통계 기법을 활용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격정책을 내 놓을 때는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를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운송업계에서도 마케팅부서의 상당수가 pricing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몇년전 구직활동을 할 때, 이쪽 업계 분위기에 맞추어서 델타항공/FedEx에 면접을 준비하면서 프라이싱 관련된 토픽들을 몇개 준비했던 기억도 있다. 특히나 항공업계는 pricing 분야를 선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해보았다. 현대 사회에서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은 신분의 차이를 의미한다. 신분제가 분명했던 예전과 같이 노골적인 차별은 거의 없어졌다. 대신 돈을 지불해서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특권이고 능력이다. 차별화된 호텔/운송수단(열차,비행기)/근사한 외식은 중산층의 사치이거나 특권층의 당연한 권리이다. 비싼 식당이나 호텔에 갔을 때 불만족을 느끼면 내가 이돈을 내고 이런 서비스를 받다니라면서 불쾌해진다. 서비스업의 본질이란게 어쩌면 사람들에게 이러한 환상을 파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좌석의 class는 이러한 계급 차이를 노골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에서 직접적으로 모욕감을 느꼈던게 아닐까.

영화하는 사람들은 운송 수단에서 계급구조를 잘 간파하고 있는 듯 하다. 재작년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이러한 계급의 차이를 주된 영화의 소재로 삼고 있고, ‘타이타닉’에서도 귀족과 평민들의 차이를 1등석과 3등석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이를 피부에 와닿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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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비즈니스석을 탄 적이 있다. 뉴욕에서 서울로 갈 때 였는데, 오버부킹되는 바람에 업그레이드 되었다. 나는 대접받는게 익숙치 않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섯살난 딸내미는 금새 적응해서 즐기더라. 비행중에 이코노미석에 타신 어르신과 마주쳤는데, 딸아이보고 귀엽다고 하시다가 비즈니스석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서 부러운 눈길을 주며 말하셨다. 나는 이나이 먹도록 이코노미만 타고 살아왔는데, 저 어린게 어찌 비즈니스석을 탔을까 라면서…

뭐 어찌 되었든 비즈니스석도 아닌 일등석에 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하고 별로 상관있게 느껴지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비즈니스석도 돈낭비라는 생각이 들고 별로 부러워 한적은 없지만, 좁아터진 미국 국내선에서 처자식 불편해 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돈 좀 더내고 편하게 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끔 든다.

광명시에 들어온 이케아

한국에는 이케아가 이슈인가부다.

조립하는 수고로움과 가구의 짧은 수명 때문에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지만, 얇은 지갑 사정을 따지다 보면 결국 가게 되는 곳이 이케아다. 그렇지만 조립하는데서 재미를 느끼고 (하다보면 레고 조립하는 류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ㅎ) 합리적인 가격으로 집안 꾸미는 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이케아 만한 놀이터가 없다.

세상은 한참 글로벌화 되었는데, 규제하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고, 만만한 놈 때리는 언론의 모습도 그대로이며, 심지어는 속이 빤히 보이기 까지 한다.

관련 웹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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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의 ‘권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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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태도가 나쁜 자에게는 대답하지 말고, 대답하는 태도가 나쁜 자에게는 묻지도 말고, 말하는 태도가 나쁜 자에게는 듣지 말며, 시비조의 사람과는 논변하지 말라.

반드시 도에 따르는 사람과 접촉하고 도를 따르지 않은 사람은 피할 것이다. 몸가짐에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라야 도의 이치를 말할 수도 있고, 안색이 부드러운 사람이라야 도의 극치를 말할 수 있다.

아직 서로 말할 수 없는 사람과 말하는 것을 일러 소란스럽다고 하며, 서로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말하지 않는 것을 일러 감춘다고 하며, 표정을 관찰하지 않고 말하는 것을 일러 장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군자는 소란을 떨지 않고 감추지 않으며 눈먼 장님 노릇을 하지 않도록 그 자신을 삼가 조심해야 한다. <시(詩)>에 이르길, ‘저 사람은 교제가 조금도 소홀하지 않아 천자가 상을 내리는 구나’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순자>, <권학(勸學)>)

(출처: 블로그 내마음의 풍경 (재인용))

온라인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고 논쟁한다. 근데 어느 순간엔가 논쟁함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특히나 상대방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을 때에 더욱 그러하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논쟁을 벌이는 행위 자체가 무척이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이다.

유교는 논쟁 자체나 논리적인 완결성보다는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가 많은데, 2000년이 지난 순자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보편타당한 지혜로 다가 온다는 것이 신기하다.

잊기 전에 남겨두려고 포스팅한다.

러시아 디폴트위기를 보며 드는 짧은 생각

전세계와 맞짱뜨던 러시아가 심상치 않다. 올초만해도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사태를 일으키며 구소련이 부활하나 싶더니, 요즈음에는 디폴트 위기에 처해있다.

NYT에 실린 어제일자 지표들이다.

Charting a Crazy 24 Hours in Global Markets (New York Times)

찾아보니 유럽/미국의 경제제재 조치와 최근 유가하락이 러시아 경제를 휘청이게 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80년대 소련의 붕괴는 오일쇼크와 맞물려 있었다. 러시아는 지나치게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원관련 산업제외하고는 전무한 실정이니, 원자재 값이 조금만 흔들려도 나라 경제가 휘청거릴 수 밖에 없다.

몇달전에 주유소에서 기름값이 싸졌다고 좋아했는데, 평범한 사람들의 호주머니 사정과는 별개로 세계 정치는 요동을 치는 구나. IMF 이후 15년만에 우리나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는데,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의 누군가는 이러한 일들로 완전히 다른 아침을 만나겠지?

아울러서 올초에 이코노미스트에서 봤던 카툰이 생각나서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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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conomist: Kal’s cartoon)

2014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에볼라 전사들 (Ebola Figh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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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에서 올해의 인물로 ‘에볼라 전사들(Ebola Fighters)’을 선정했다. 편집자 Nancy Gibbs는 선정이유로 ‘They risked and persisted, sacrificed and saved.’라고 말했다. 기사에 따르면 수십년간 아프리카의 미신 같이 존재했던 전염병이 세계구급 전염병으로 되어가고 있을 때, 아프리카의 정부들, 세계보건기구(WHO)는 방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위험을 무릎쓰고 달려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국경없는 의사회(MSF), Samaritan’s Purse와 기독교 구호단체 의료진들이었다.

Nancy는 아래와 같이 말하며 선정이유를  마무리 짓는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분들을 위해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분들 때문에 우리가 발뻣고 잘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Ebola is a war, and a warning. The global health system is nowhere close to strong enough to keep us safe from infectious disease, and “us” means everyone, not just those in faraway places where this is one threat among many that claim lives every day. The rest of the world can sleep at night because a group of men and women are willing to stand and fight. For tireless acts of courage and mercy, for buying the world time to boost its defenses, for risking, for persisting, for sacrificing and saving, the Ebola fighters are TIME’s 2014 Person of the Year.

Time지 기사 link

역사는 소수의 지도자들보다는 이름없는 진정한 영웅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2014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 선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를 읽으며

누구하고 약속한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포스팅을 해왔는데, 열흘 정도 블로그를 방치해두었다. 집에 3주간 손님이 머물렀고, 이번주는 친구가 다쳐서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11월 들어서는 글쓰고, 그림 그리는 창작하는 쪽의 잉여질보다는 책을 읽고, 컴퓨터 게임하고, 영화를 보는 소비쪽의 잉여질에 열을 더 내고 있다. 몇년간 꽤 바쁘고 힘에 부치게 살았는데, 올해는 원없이 잉여질을 하며 산다. 아이도 조금 컸고, 미국에서 삶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회사도 한국 생각하면 몹시 널널한 편…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 나란 인간이 게으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야지 잉여질도 좀더 생산적이 될 텐데, 이건 그냥 소모적으로 내가 만든 세상에 침잠해 가는가 싶다.

10대 때는 소설을 꽤 좋아했는데, 한동안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보지 않았다. 살아가는 일은 소설보다 치열하고, 훨씬 더 다양한 관점과 진실을 보여주는데, 굳이 소설에서 무언가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문학은 때로 작가의 관점에서 일말의 진리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작가가 묘사하는 배경을 능동적으로 마음에 그려보고, 사건을 상상해보고, 그리고 인물에 자신을 투영해보는 일종의 과정을 거쳐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해도 시간 소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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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가장 소모적인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사랑 이야기.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On Chesil Beach이다. 한국에도 체실비치에서 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것으로 안다. 굳이 이언 매큐언을 고른 것은 영미 문학권에서 핫한 작가를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눈으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글책을 구해보는 건 돈도 시간도 아까우니 그냥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영어책을 보자는 귀차니즘도 있었고…

그래도 왜 사랑이야기일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한참 피가 끓던 나이에 남녀상열지사에 뜨거운 가슴을 품어본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는 항상 어설펐다. 게다가 30을 넘기고서는 사랑은 별 관심사가 아니다. 결혼하고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이제 만나는 여자와 썸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인 것도 있을 정도였다. 썸은 은근한 긴장감을 주고, 긴장감이란 대체로 기분 좋은 류의 긴장감이지만, 그 긴장감은 내가 좋아하는 편안함과는 반대기제이다.

어쨌든, 책얘기로 들어가서… 책에서 첫날밤에 대한 묘사는 구체적이다. (몸의 구석구석을 표현하는 명사, 신체접촉에 관련되는 동사를 사전에서 좀 찾아봐야했다.) 육체로 시작되는 감정의 파장. 그리고 엇갈리는 말들. 내가 20대 청년 일 때 읽었다면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상황들이다.

작가는 사랑 이야기를 참 먹먹하게 하고 있다. 이야기는 잔잔하게 차곡차곡 쌓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몰아친다. 결국 책장을 덮으면 진한 여운이 남는다. 플롯을 쫀쫀하게 짜는 것, 디테일한 묘사에서 작가의 꼼꼼함이 느껴진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atonement도 한번 봐야 겠다.

인터스텔라 / Big Hero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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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려서 영화관에 잘 가지 못하는데, 지난 주는 기회가 되어서 영화를 두개나 보았다. 하나는 인터스텔라. 다른 하나는 Big Hero 6이다.

Big Hero 6는 아직 한국에 개봉하지 않은 디즈니 애니매이션이다. 찾아보니 내년 1월달에 개봉한다고 하더라. 마블/디즈니/픽사 라인이고, 미국에서는 개봉하자마자 인터스텔라를 밀어내는 괴력을 보였다.

하긴 인터스텔라가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그다지 흥행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다. (듣기로는 손익분기점 간신히 맞출 정도라나?) 미국사람들이 심각한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인것 같기도 하구… ‘놀런’ 감독 말처럼 우리나라 관객의 지적수준이 높아서 일 수도… 어쨌든 우리나라에는 ‘놀런’ 브랜드가 확실히 자리잡은 것 같다.

Big Hero 6는 샌프란소쿄(샌프란시스코와 토쿄의 합성어)가 배경이다. 주제는 ‘너드가 세상을 구할 것이다.’ 정도? 영화 곳곳에서 샌프란시스코와 일본의 풍경이 섞여서 나온다. 아닌게 아니라 만화는 어디선가 보았던 클리쉐들로 범벅되어있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흥미로운 요소들을 마구 섞었는데 그게 억지스럽지 않고 재미있게 짜여져있다. 꽤 잘빠진 애니매이션이고 한국사람들도 좋아할만한 요소들이 많아서 내년에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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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역시 재미있었다. 나는 고딩시절 과학자를 꿈꾸었다. 책으로 보았던 사건의 지평선, 웜홀, 블랙홀 같은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데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학 너드가 아니었던 아내도 3시간동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놀란이 만들어 내는 스토리텔링의 힘에서 나왔던 것 같다.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쉬운 가족애와 사랑 이야기를 절묘하게 섟어서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더라.

인터스텔라를 이야기하면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이야기 안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전체에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오마주가 가득차있다. 어찌보면 신선함은 없는 영화이다. 영화적인 아이디어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서사 방식 역시 닮아 있었다. (기승전결이 아님.) 다른 점은 큐브릭의 영화는 불친절했고 (대사가 거의 없어서 대부분 졸기 쉽상이다.), 놀란은 다양한 기교를 쏟아부어서 이야기에 몰입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음악/음향효과/편집/CG/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이야기까지 모두 영화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나저나 Big Hero 6는 우리 딸과 같이 보았는데, 후회중이다. 딸아이는 영화에서 나온 마스크 쓴 악당이 꿈에 나온다며 삼일 동안 잠을 설치고 있다. 절대 무섭거나 아이들이 보기 힘든 영화가 아니다. 그냥 우리 딸이 좀 심하게 예민한 편이다. 새벽에 잠을 설친 딸을 달래느라 나까지 잠을 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