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 계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무한경쟁의 삶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는 각박해지고 이제 부모님 세대에 있었던 고속성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내가 먹여살리는 가족이라도 숨쉬고 살게 하려면 나라도 경쟁에서 조금 높은 고지를 점해야만 한다. 젊은 세대들은 권위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지만 너무나도 견고한 세상의 게임의 룰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젊은 세대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미국 또는 미국식에 대한 반발은 아마도 여기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 사람들의 사고 방식으로는 경쟁은 아름다운 것이고 건강한 경쟁이 세상을 발전하게 하는 동력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다. 사소한 것도 불만이 있다면 넘어가지 않는 그들이지만 경쟁에서 졌다면 깨끗이 승복한다. 당일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 받는다면 군소리 없이 바로 짐을 싸는 사람들이다. 직속상사가 자기보다 스무살 정도 아래의 핏덩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이 있다면 불만없이 따라주고 깍듯이 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무한 경쟁 논리의 본산인 미국 사람들은 모두 불행하고 만족하지 못하며 살것 같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한국사람들이 더욱 만족하지 못하며 스트레스 받으며 살고 있다. 높은 자살율과 낮은 출산율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다. 왜 그럴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다양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성공이라는 것을 정해진 잣대에 맞추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세분화하고 서열화한다. 최근에 뉴스 중에 ‘감히 네가 연세대 동문이라고?” 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연세대 안에서도 입시 출신 별(정시합격, 수시합격, 장수생, 농어촌 전형 등등…)로 골품제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이러한 세태가 어디 연세대 학생들의 문제이겠는가? 기사화 되지 않았을 뿐이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어디를 가서도 이러한 식의 시선과 판단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가장 중첩되어 있고 치열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대학입시이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미국이 이상적이고 이러한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이다. 미국 또한 명문대가 존재하고 암묵적인 서열이 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스탠포드 등등 같은 부동의 명문대가 있고 아이비리그 학교가 있고 주립대가 있으며 커뮤니티 칼리지가 있다. 그리고 명문대를 나오는 것이 사회적인 성공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정도로 세세하게 학교간 등급을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 마다 잘하는 분야가 다르고 개성이 뚜렷해서 어느 학교가 좋은가 하는 논쟁은 거의 무의미하다. 또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서 좋은 학교 또는 직장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려있다. 오히려 미국 사람들은 인간승리 드라마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식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교육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은 교육 현장에서 드러나는 문제가 단순히 교육 시스템이나 교육관계자들의 자질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학교이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나의 세대나 우리 부모의 세대와는 확실히 다르다. 이들은 고등학교의 존재 목적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며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볼때 학교는 졸업장을 주는 것 말고는 의미가 없다. 시험대비 만을 위한 지식이라면 또는 스펙을 쌓기 위한 교육이라면 학교 말고도 사교육 시장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는데 졸업장을 위해서 수업을 참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를 억압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선택할 권리를 준다면 또는 다른 대안이 있다면 억압 만을 가져다 주는 학교에 누가 앉아 있겠는가?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요즈음의 아이들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다. 아직 사회에 발도 디뎌보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묻는다. 법을 지키고 착하게 살면 손해보는 게 아닌가?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직장을 얻고 성공하는게 맞는가? 그들은 이미 연예 뉴스에서 병역기피를 매일 보고 있고, 쪽집게 과외로 지름길을 따라 가는 삶의 요령을 배우고 있다. 우리 세대처럼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순진한 아이들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실은 그 깊이가 일천하다는 것이다. 내가 삶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배웠던 순간은 경제적인 불확실성이 있지만 끝까지 버텨봤던 순간, 그리고 내가 가진 열악한 조건과 현실을 알게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그때 였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많은 것을 알지만 얇게 알기 때문에 오히려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서 세상의 부조리를 읊어댈 뿐이다. 이것이 아이들만의 또는 젊은 세대들만의 문제인가? 아이들이 이러한 질문을 했을때 자신있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글을 주섬주섬 정리해보련다. 다시 다양성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세상에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정말 손을 꼽을 정도로 적다. 어느 한가지 방법이 맞고 다른 방식은 틀리다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권위주의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경쟁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내가 세계를 보는 관점은 경쟁과 개개인의 욕망이 세상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기심과 경쟁심리가 때로는 지저분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방향을 볼 때 건전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은 인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다만 그경쟁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쟁이라면 모든 이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반대해야할 미국식(?)은 바로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극단적으로 만약 우리의 인생을 수능을 보듯이 점수화 시키고 등수화 시켜버린다면 우리 모두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대다수는 상위 10%에 들어가지 못해 불행할 것이며, 상위 10%에 들어가는 사람은 1%에 들어가지 못해서 불행할 것다. 상위 1%에 들어가는 사람은 상위 1% 밖으로 밀려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다. 모두가 지는 게임이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1등을 할 수 있다. 또 어떤 순간에서 1등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다. 살면서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1등을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고3때 수능을 보고 모든 것을 점수화했던 그 순간처럼 삶의 모든 가치들을 그렇게 획일화하고 단순화 시켜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