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분자와 에라스무스

나는 회색분자이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좀 불편하다. 내가 보는 세상은 항상 불투명하고 딱잘라 말하기 어려운 모습만 가득하다. 그렇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흑백 논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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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문화사가 하우징어 (Johan Huizinga, 1887 – 1945)는 에라스무스(1466-1536)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썼다.

The ideal joy of life is also perfectly idyllic in so far that it requires an aloofness from earthly concerns and contempt for all that is sordid. It is foolish to be interested in all that happens in the world; to pride oneself on one’s knowledge of the market, of the King of England‘s plans, the news from Rome, conditions in Denmark. The sensible old man of the Colloquium Senile has an easy post of honor, a safe mediocrity, he judges no one and nothing and smiles upon all the world. Quiet for oneself, surrounded by books.- that is of all thing most desirable.
– Erasmus and the Age of Reformation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이 세속적 관심사로부터의 초연함과 지저분한 것들에 대한 경멸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원적 즐거움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장의 물품 가격을 잘 알고, 영국 왕의 원정계획에 대해 소상하고, 로마에서 온 소식을 잘 알며, 덴마크의 생활환경을 꿰뚫고 있어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인가? <대화집>에 나오는 현명한 노인은 그리 높지 않은 명예의 자리에서 안전하고도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판단치 않으며, 이 세상에 대해 미소를 짓는다. 책들로 둘러싸인 채 늘 고요하게 있으면서 자족하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하다. (에라스뮈스 평전 – 요한 하위징아 저, 연암서가)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인물이다. 그는 세상의 불확실성과 현실의 모호함이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건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와 끝까지 대립했다. 그는 수많은 종교개혁가의 스승이었지만 종교개혁을 끝내 지지하지 않았다. <우신예찬>을 통해서 카톨릭의 부패를 비판했지만, 그의 개혁은 항상 카톨릭의 안에 있었다. 결국 에라스무스는 카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여생을 마친다.

후세는 루터의 이름을 기억한다. 당대에 학문적 깊이와 고고함으로 존경을 받았던 에라스무스는 지금에 와서 유약한 지식인, 이도저도 아닌 신학자 정도로 매도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루터는 개신교의 아버지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기치는 서양 정신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그러할 지라도 나는 루터가 아닌 에라스무스에 더 끌린다. 루터의 신학에 동의하지만 경건함/소박함/정직함/신중함이라는 가치를 지닌 ‘자유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는 영락없는 회색분자인듯 하다.

+ 참고자료: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 – 그의 생활방식에 대하여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말과 글

말과 글은 그사람의 지적인 수준을 드러낸다. 5년 전인가 서울에서 지하철에 탔을 때 였다. 한 이쁘장하게 생긴 처자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그 처자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 좀 신기했다. 그처자는 ‘대박’이라는 단어 만을 사용하여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대박~’, ‘대~에~박’, ‘대!박!’. 아 하나 더 있다. ‘왠일이니?’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다. ‘Oh my God!’와 ‘you know’이다. 나도 처음에는 미국 사람스러운 감탄사를 적절하게 섟어주는 것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내다보니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 오히려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도 그랬고 나도 그렇고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슬랭이나 욕을 먼저 배운 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쓰고 나면 네이티브에 가까워 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처음 우리말 욕을 배웠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왠지 표현을 속 시원하게 한 것 같았다. 자극적인 표현은 내 속에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는 꾸밈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꾸밈말(부사,형용사)은 더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말을 할 때에 꾸밈말을 필요이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표현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말의 기본 구조, 그러니까 주어, 동사, 목적어를 사용하고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불필요한 단어를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고 논리적인 언어 사용을 노력하다 보면 불필요한 꾸밈 말이 본질을 흐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딱딱 끊어지는 단문을 좋아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취향의 문제이다. 말에서 곁가지를 다 치고 필요한 내용만 남기면 취할 것이 많지 않다. 마치 그림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를 다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추상적인 몇개의 선인 것과 같다. 어떤이들은 장식적인 말과 장식적인 그림을 좋아하지만, 나는 본질만 남아 있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서 듣는/읽는/보는 사람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너무 말/표현이 과하면 부담스럽다. 쓰는/말하는/그리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단문을 잘 쓰지 못하며, 과도한 표현을 할 때가 많다. 나의 문제는 한 문장에 너무 많은 생각을 집어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 글을 쓸때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중구난방이 되곤 한다. 심지어는 과함에 대해 논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생각을 사용하고 있어 민망하다. 그래서 글은 다듬어야 하고 계속 다듬을 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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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을 읽고 있다. 카버 아저씨 작품의 미덕은 딱 필요한 그만큼만 말한다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하루키는 꾸준히 카버의 책을 읽으면서 말의 리듬감과 호흡을 조절하는 감을 유지한다고 한다. 나는 하루키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문장은 매력적이다. 문장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빼고 나면 거기서 독자는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빼기에만 집중하면 논리가 흐트러진다. 글을 쓰는 사람은 머리속에 모든 생각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넘어가기가 쉽다. 그러나 논리의 고리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글은 죽어버린다. 그래서 글을 잘 쓰기는 어렵다. 딱 필요한 만큼만 들어가고 빠져야 한다. 너무 과하면 부담스럽고, 너무 적으면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반복해서 글을 다듬으면 해결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그래서 프로페셔널 문장가들은 대부분 엉덩이로 글을 쓰는가 보다.

+ 덧: 이 글은 참고로 퇴고를 하지 않았다.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적어봤는데, 나는 프로페셔널 작가가 아니니까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블로그만 하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다.

It’s ok to feel sad sometimes

어른이라고 해서 슬픔을 다루는 법을 아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울고 슬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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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랑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Daniel Tiger’s Neighborhood. 그중에서 나의 favorite song을 공유한다. 나는 기분이 다운될 때 이노래를 듣는다. ㅎㅎ (민망)

아참 가사도 공유하는게 좋겠지?

It’s ok to feel sad sometimes, little by little, you’ll feel better again.
It’s ok to feel sad sometimes, little by little, you’ll feel better again.
When you are feeling down. It’s ok to feel sad, but little by little, you’ll see it won’t always be bad.
It’s ok to feel sad sometimes, little by little, you’ll feel better again.
It’s ok to feel sad and it’ ok to cry, but little by little, the sadness will say bye-bye.
It’s ok to feel sad sometimes, little by little, you’ll feel better again.

민간인 – 김종삼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 (1921-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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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기교 없이 본인이 겪은 사건을 담담히 묘사한다. 시를 읽는 사람은 그 상황을 머리속에 그리면서 더욱 깊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진실된 언어 사용만이 이끌어 낼 수 있는 공감이다.

시기심

시기심의 원인은 나의 불안에 있다. 다른 사람들은 매일 노력해서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내는 거 같은데, 나만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다들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자신만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시기심을 좋은 에너지로 바꾸려면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나는 남들과 다르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시기심을 느낄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서로를 시기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김중혁이 캐는 창작의 비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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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중혁이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칼럼 중에서 따왔다. 그가 롤프 하우블의 <시기심>을 읽고서 든 생각이라고 한다. 불안은 나를 갉아먹는다. 시기심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린다면, 우리는 서로 더 나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B형 남자의 불편함

많은 분들이 IS와 무슬림을 동일시 한다. 듣는 무슬림 기분 나쁘다. 무슬림은 시아가 있고 수니가 있으며, 그 안에서도 차이가 많다. IS는 그중에서도 왕따 같은 애들이다.

많은 분들이 에볼라때문에 아프리카 사람과 접촉하길 꺼려한다. 듣는 아프리카 사람들 기분나쁘다. 에볼라는 서아프리카에 퍼졌다.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는 비행기로 7시간 거리다. 프랑스 파리까지는 6시간. 누구도 파리와 에볼라를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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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일부 기독교인의 비리를 듣고 기독교를 욕한다. 듣는 기독교인 기분 나쁘다. 성경을 배우는 것과 실천하며 사는 것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도 다양한 사람이 있다.

외국인이 한국사람에게 김정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당황스럽다. 북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고, 우리를 북한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할 때, 도쿄에 가봤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행여라도 일본과 한국을 같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싶어 차이를 열심히 설명해 본다. 근데 의미 없다.

어떤 분이 유럽은 이렇다라고 말하면, 궁금하다. 어디 유럽을 말하는 것일까. 복지를 말할 때 북유럽/독일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가 관광을 말할 때는 프랑스/이탈리아를 말하는 것 같기도하다. 유럽을 통째로 말하는 건 한국/일본을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보다도 훨씬 무모하다.

사람들이 미국을 하나의 인격체처럼 말하면 당혹스럽다.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상호 경쟁 시스템이 작용하는 미국을 하나로 보기는 참 어렵다. 정부/군대/상원/하원/학계/기업/남부/동부/서부 등등… 모두 다른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따로 행동하는 entity들이다.

B형이라고 괴팍하고 한 성깔하는 시크한 남자라고 지레 짐작해버린다면, 기분 나쁘다. 내가 시크한건 맞지만 무지하게 부드럽고 상냥한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