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의 통화

간만에 딸하고 통화했다. 기록해두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잊기전에 적어둔다.

딸내미가 한참 새로 생긴 장난감을 설명해주고, 여섯살 먹은 아이스러운 말장난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톤을 낮추며 말한다.

딸: 아빠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아?
나: 보고 싶지… 그치만 전화로는 볼 수가 없잖아?
딸: 음… 그치만 눈 감고 그 사람 생각하면 볼 수가 있다.
나: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딸: 내가 맞춰볼께. 아빠는 지금 편한 옷입고 누워서 통화하는 거 아냐?
나: 어떻게 알았지? 아빠는 잠옷입고 있었는데.
딸: 내가 볼 수 있다고 그랬잖아. (깔깔깔) 근데 나 발 시렵다.
나: 흠… 네가 발이 차면 아빠 배에다 넣고 뎁히고 그랬는데… ㅋㅋ 으~으~ 지금 생각만해도 차갑다.
딸: (깔깔깔) 맞아. 흠… 그얘기 들으니까. 지금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흐음…

아빠와 딸관계라서 다행이다. 이 녀석 크면 남자 여럿 울릴 것 같다.

이케아 충격

이케아 충격

Originally posted 04/07/2014 @ facebook

이케아는 DIY와 합리적인 가격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다. Swedish life style experience랄까? 우리집 가구의 80프로 이상이 이케아 가구다. 미국와서 한달동안 이케아 가구 조립하느라 고생했던 기억, 업그레이드 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동경으로 이케아를 벗어나려고 해보지만 이것 저것 따지다 보면 어느새 이케아로 향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케아의 전략은 현지화보다는 스웨덴 스타일 밀어붙이기랄까? 스위스 체류하던 시절 이케아 갔을 때도 미국이랑 대동소이한 레이아웃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냥 아이쇼핑차 이케아 들렸다가도 쇼룸 돌다보면 싸다싶어 뭔가를 사게 되는 마법이 있다. 하다못해 마지막에 만나는 캔들 섹션에서 양초라도 하나 사게 된다. 이케아가 정체되어 있는 한국 가구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길 기대해본다. 경쟁이란 단기적으로는 기업에게 고통이지만, 일단 소비자에게는 언제나 이득이고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윈윈이다.

엄마와 딸, 그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다 (리빙센스)를 읽고서

원문:

매거진캐스트 : 엄마와 딸, 그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다_RELATIONSHIP (제공 : 리빙센스)

Originally posted 03/25/2014

모녀지간은 말로도 풀기 힘든 특별함이 있는 듯 하다.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와는 또다른 무엇이다.

남녀를 떠나서도 부모로 부터의 온전한 독립이라는 주제는 가슴을 찌른다. 나 자신부터도 부모로부터 독립 (물질적/정서적/경제적) 하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독립이라는 건 나이와 그다지 연관이 없다. 오히려 삶의 큰 이벤트와 연관이 있다고 해야하나?

그 때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문득 찾아온다. 어떤이는 유학을 계기로, 어떤이는 결혼을 계기로, 어떤이는 자신이 부모가 됨으로서, 어떤이는 부모의 아픔을 계기로, 어떤이는 취직을 계기로 독립의 시점을 맞이한다. 부모님이 훌륭하고 좋은 분일 수록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인격적인 관계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IOC, 피겨 판정논란에 “공식항의 없으니 입장도 없다”

<올림픽> IOC, 피겨 판정논란에 “공식항의 없으니 입장도 없다”

IOC: There’s no figure skating judging controversy

요새 워낙 김연아 선수 이야기가 많아 나까지 한마디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늘은 링크된 기사 내용보다는 우리나라 언론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오늘 아침 출근전에 USA 투데이를 읽다가 IOC가 공식 항의 없이는 조사가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글을 보고서 퍼서 share했더랬다. 그런데 몇시간 뒤에 회사 출근해서 네이버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같은 내용의 기사가 한국말로 그대로 옮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구성 조차 바뀌지 않은 번역한 내용이었다. 혹시라도 출처에 대한 언급이 있을까 다시 읽어 보았다. 마치 본인이 쓴 기사 인양 쓰여져 있었다. 속사정은 잘 모르니 내가 오해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빠른 보도가 경쟁력인 통신사로서 연합뉴스가 핫 이슈인 내용을 빨리 전달하고자 하는 절실함은 이해가 가지만, 출처 정도는 밝히는게 최소한의 직업 윤리가 아니었을까? 사실 우리나라 언론이 외신이 전하는 내용이 엄청난 권위를 가진 내용인양 번역한 다음 ‘타임지 보도에 따르면…’으로 시작되는 기사들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눈에 거슬린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말해보기도 전에 외국 사람들의 눈치를 먼저 봐야 하는가? 국민들이 그런 뉴스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국내 언론사들이 그런 모양새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의 언론도 조금만 수준이 높았으면 한다. 그리고 출처조차 밝히지 않고 본인이 작성한 양 쓰여진 뉴스는 기본도 안된 글이 아닐까?

인문학자 강신주는 어떻게 ‘문화권력’이 되었나 – 미디어스

Originally posted 02/11/2014 @ facebook

인문학자 강신주는 어떻게 ‘문화권력’이 되었나 – 미디어스

최근 강신주라는 분이 한국에서는 뜨거운 감자인듯 하다. 하지만 공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내게는 여전히 기술의 진보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강한 믿음이 있다. 포스트 모던시대에 이런 믿음은 너무나도 구시대적인 사고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는 우리에게 이러한 논의가 너무 배부른 투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부 인문주의자들은 자동차가 환경에 가져온 해악을 말하며 자전거와 대중교통의 활성화를 이야기 한다. 맞는 말이다. 나도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 하는 일이 전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식이 있는 환경론자/인문주의자라면 세탁기나 전기를 없애자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탁기가 인류에 가져온 유익을 생각해보자. 불과 우리의 할머니 또는 증조 할머니 세대만 해도 머리에 빨래감을 지고 개울가에서 양재물에 빨래방망이로 힘겹게 세탁이라는 이름의 중노동에 시달려 왔을 것이다.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평생을 세탁과 아궁이밥 짓기, 다듬이질 등의 고된 노동을 해왔던 것이 바로 우리네 할머니 세대의 일상적인 삶이다. 그뿐인가? 굳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대다수의 아낙들은 자기 몸의 1/5의 무게를 지닌 빨래감을 머리에 이고서 하루에도 수키로를 오가며 물을 기르고 빨래를 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의 폐해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오는 해악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도 우리의 삶에 풍요와 윤택함을 가져다주는 이름모를 엔지니어와 기업가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혼 적령기’란 말 들어보셨나요? – 시사In

Originally posted 02/04/2014 @ facebook

‘이혼 적령기’랑 말 들어보셨나요?

결혼한지 벌써 9년차다. 나두 혹시 이혼 적령기?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돌싱도 생겨나고. 우리 세대가 부모님 세대들과 비교해서 참을성이 많이 나빠진건 아닐 텐데… 부모님 세대를 보면 그냥 남들 사는데로만 해도 어느정도 만족해가며 살았던 것 같은데… 대한민국이 왜 이렇게 살기가 각박해졌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