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과 틀림 / 같음과 옳음 (로마서 14장 22절)

최근 교회에서 설교를 듣다가 새롭게 발견한 성경구절이 있어서 공유한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음미해 볼만한 내용이 있는 듯하여 포스팅하기로 했다. 물론 이 글은 나의 다른 블로깅도 그러하듯 그저 잊기전에 남겨두는 메모/일기 같은 글이기도 하다. 내가 읽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So whatever you believe about these things keep between yourself and God. Blessed is the one who does not condemn himself by what he approves. (Romans 14:22, NIV)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새번역)

예전에 성경의 로마서를 읽을 때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죄(1~2장)/칭의(3~5장)/성화(6~8장)/하나님의 주권(9~11장) 부분에 집중할 때가 많았고, 실제적인 적용 (12장 이후)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랬다. 14장에 이르러서 바울은 부정한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대학시절에는 기독교인의 음주 이슈에 적용하는 구절로만 이 14장을 읽었기에 바울이 이야기 하는 많은 부분을 놓쳤다.

로마서 14장에 친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당시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 신자와 유대교 배경이 없는 기독교 신자가 섟여 있었다. 따라서 유대교가 금지하는 부정한 음식들을 먹는 것에 대한 논란이 생겼고, 바울은 14장에서 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울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날을 중요시 여기고는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는 예수의 죽음을 토대로 세워진 곳이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22절이 나온다.

이 편지는 기본적으로 교인을 향해 쓰인 편지이다. 그래서 우선되는 적용은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하는게 맞을 듯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토대가 된 교회에서 교인들은 서로에게 서로의 잣대를 들이대어 판단하지 말라고 한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나의 짧은 경험으로는 종교인은 대부분 옳고 그름에 대한 감수성이 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어떤 계기가 생긴다면 아주 맹렬하게 싸우는 사람들이다. 생각나는 여러가지 예가 있지만 굳이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을 듯 하다. 예전 이야기를 예로 들면 옛날 사람들은 저렇게 하찮은 것으로 싸웠나 싶을 것이고, 진행중인 이야기를 예로 들면 본인의 관점이 연결지어져서 불필요한 논쟁만 불러 일으키지 싶다.

내가 22절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바울이 말한 신념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신념, 혹은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지만, 그 방향이 다른 이에게 향한다면 ‘판단(judgement)’에 그치게 된다. 인간은 판단을 받고서 고치기 보다는 반발하고 상처 받는다. 게다가 그 판단이라는 것이 평소에 신뢰하던 사람으로 부터 온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대부분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 (죄/칭의/성화/주권)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이 내게 오늘 더 다가 왔던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교회에서의 다툼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많은 충돌/다툼/갈등 들이 ‘옳고 그름’의 문제에 있어서 오기 때문에 그러하다.

도덕이나 가치 같은 것은 때로 사람들의 차이(좌/우, 근본주의/세속주의 등등…)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흔히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도덕 감각을 갖고 있다는 가정 때문에 쉽게 간과되는 문제 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아이를 때려서라도 훈계를 시키는 것이 옳은가?’, ‘안전 기준법을 지키지 않아 다친 사람들을 국가에서 얼마나 책임져야 하는가?’, ‘무례한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느 수준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각자가 가진 도덕의 감각에 따라 다를 것이고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러한 이슈들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듯 하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한 이야기를 사회이슈/도덕 감정까지 끌고 가는 것은 약간의 비약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를 사회에서도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것이 유의미한 비약이다. 바울은 말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자신의 신념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일이며, 나아가서 그 신념대로 사는 것 자체가 그사람에 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도덕감각의 화살이 다른 사람에게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삶을 진지하게 살아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바울은 이런 사람을 가르켜 복되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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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메모 차원에서 도덕 감각에 관해 들어볼만한 TED 강의를 공유한다. NYU의 business school의 교수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의 강의이다. 물론 그 분이 성경이야기나 은혜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사람은 무신론자이다.) 그는 강의에서 도덕 감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다섯 가지 채널을 통해 설명한다. 워낙 많은 내용을 18분에 압축해서 전달하려고 하다보니 소화하기가 쉽지는 않다.

최근에 들은 바로 그의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 Why Good People Are Divided By Politics and Religion)’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책에서 나아가서 신념이 형성되는 세가지 원칙에 대해 ‘도덕 심리학’의 관점에서 잘 풀어놓았다고 한는데, 재미있을 것 같다. 읽을 책이 참 많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지역, 성별, 연령, 빈부, 정치로 인해 여러 면에서 사분오열된 형국이다. 나는 이 책이 쓸모 있는 도구가 되어, 한국인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더불어 보다 풍요롭고 보다 공정한 사회를 창조해 가는 데 가치가 있기만 하다면, 한국인들이 편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서 아이디어와 정책을 구하게 되길 희망해 본다. -조너선 하이트, 한국어판 서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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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재학중인 학교 후배와 잠깐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다른 전공의 졸업반과 마찬가지로 MBA 졸업을 앞둔 사람들의 고민도 취업이다. 미국 취업을 생각하는 그 후배에게 몇가지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사실 내가 줄 수 있는 소소한 팁 정도는 이미 그도 알고 있었기에 굳이 별 말이 필요 없었다. 밥이라도 사주려고 했는데 여건이 되지 않았다. 다음번에 아틀란타에 올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맛있는 밥을 사주마 하면서 그를 보냈다.

한국에서 자라서 교육을 받은 토종 된장남이 미국 현지 취업 기회를 잡는 일은 흔치않다. 한국과 미국의 게임의 법칙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러하다. 특히 문과 계열은 취업시장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물론 영어로 native와)과 프로페셔널한 태도(미국 기업문화에 맞는), job과 industry에 대한 열정 등으로 승부를 봐야하는데 문화와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크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년의 내가 생각났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깨어짐을 경험했었다. 졸업을 1주일 앞두고서야 job offer를 받았고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였었다. 당시 나는 가족 기숙사에 있었는데, 규정상 졸업 후 한달안에 짐을 빼야 했다. Job도 없었고 미국에 가족/친구도 없는데, 그동안 늘려놓은 세간살이들과 부양가족을 데리고서 어디로 이사해야 할 지 답이 없었다. 미국에 가져온 얼마 안되는 돈은 학비로 거의 썼기에 당장 생계도 고민해봐야 할 판이었다.

세상에는 매일 생계의 위협을 마주하며 사는 분들도 많다. 이정도의 경험은 그분들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다만 개인적으로 내가 하고 싶고, 해야한다고 믿었던 일을 하려고 하면서 맞닥드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을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런 때에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확실해야만 버틸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 선택의 무게를 부양 가족들에게도 지워야 할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몇가지 없다는 것이 나를 작게 만들었다. 낮아지는 시간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지금은 job을 구했으니 나름 해피엔딩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는 곳간을 늘일 걱정을 하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누가복음 12장 13-21절)이다. 20대 때 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물질 만을 추구하는 삶과의 결별이다. 한때 그러한 삶이 선교사가 된다던가 full time social worker가 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면에서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은 소위 ‘사역’의 길을 말할 때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기독교 사역자/선교사/사회 봉사로 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폭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물질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똑같이 밥먹고, 가족들 부양하며, 애쓰며 땀흘리며 산다. 거친 세상에서 아둥바둥 사는 모습이 별로 다를 리는 없다. 그러나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행위를 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진지한 그리스도 인은 물질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만약 부가 따라 온다면 그것은 본질이 아니고 덤 같은 것이다.

다만, 진지한 그리스도 인은 물질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재능을 물질적인 부를 축적하는데에만 쏟는 사람들에 비해서 힘든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그어 주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다. 여기 전문을 옮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오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소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현대인의 성경, 마태복음 6장 9-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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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이 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처음 부분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두번째 부분에서는 사람의 일에 대해 말한다. 바로 두번째 주제로 전환할 때 처음 나오는 언급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기도문은 산상수훈 중에 나오는 기도문이다. 따라서 이 전환을 산상수훈의 큰 주제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았을 때 의미가 남다르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생계에 대한 염려에 대해 기도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 이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새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새를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중략)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모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덤으로 주실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마태복음 6장 26-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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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하자. 내가 선택한 길들이 숭고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럴 깜냥도 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또하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면 부자가 된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읽었다면 선입관 또는 기분 탓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이 너무 거대하게 들려서 왠지 그 대가(?)가 엄청난 부나 편안함을 보장할 것 같은 생각이 든것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은 필요한 딱 그 정도를 주시고, 굶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나의 경우는 낙담을 경험했을 때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말이 참 많은 위로가 되었다.

쉽지 않은 길을 가는 분들, 그리고 지금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매일 힘쓰는 분들에게 예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길 기도한다.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들어가며: 대부분 저의 포스팅은 기독교 신앙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만, 오늘 이야기는 개인 기독교 신앙에 관련한 이야기이고 기독교의 전제가 깔려 있므로 기독교에 알레르기를 일으키시는 분은 읽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늘 쓰는 글도 역시나 일종의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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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pedia) 사해버전 성경 (Est. 408 BCE to 318 CE)

내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점검하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이고 하나는 ‘십자가’이다. ‘성경’은 나의 신앙이 성경의 하나님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성경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에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부활하신 십자가 사건과 보혈의 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는 믿음이 다른 종교와 다르게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인식에서 그러하다.

성경을 어떻게 믿느냐는 쉽지 않은 신학적인 문제이다. 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답하는 과정은 수월하지 않다. 종국에는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나로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내게는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오늘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고 생각을 정리 해보고자 이 글을 적어본다.

첫번째는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저자가 작성한 원문 그대로 인가 하는 문제이다. 가장 최근에 쓰여진 신약 같은 경우도 2000년이 지난 문서이고 구약 같은 경우는 350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원본이 아니고 가장 원본에 가깝다는 사해문서 조차도 몇백년에 걸쳐 베껴 쓰인 책이다. 또한 정경도 몇차례의 공의회 이후에 정립된 것이니 우리가 오늘날 보는 성경은 원본에 얼만큼 가까운지 알기 힘들다.

두번째 이슈는 최근에 생각하게 된,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진리라는 것은 언어에 갖혀있다. 언어에 갖혀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언어는 세계를 표현하지만 본질과 정확하게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의 사고가 언어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고자체도 언어 속에 갖히기도 한다.

두가지 이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느껴본 적이 있겠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다른 관점과 자아가 생긴다. 물론 분명히 나는 똑같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영어를 사용할 때와 한국어를 사용할 때의 나는 미묘하게 다르다. 제스쳐도 달라지고 사고를 전개하는 방식도 달라지며, 목소리나 발성법까지 달라진다. 이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차이를 만들 뿐 아니라 때로는 내 관점까지 바꾼다.

이를테면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나는 무의식 중에 상대가 나보다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를 염두에 둔체 말을한다. (이것은 존댓말이 없는 영어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고 한국어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인식 체계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라는 한계가 있는 도구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헬라어/히브리어로 제한되어 지는 것인가? 또 우리가 읽는 성경의 헬라어/히브리어는 현대의 우리가 이해하는 헬라어/히브리어와 일치하는 것 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제 아이와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했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일테지만 그것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 왔다. 언젠가 누구에게 들었본적이 있는 이야기 일테지만, 내게 새롭게 느껴졌으니 감사할 일이다.

바로 성령이다. 나는 하나님(성부), 예수님(성자)에 집중하고 성령에 대해서는 무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진리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인 것이다. 성령을 단순히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존재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어제 아이와 읽었던 말씀은 베드로 후서 였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후서 1:20-21

참고로 여기서 예언은 앞을 보는 예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서와 모세오경 그러니까 구약을 말한다. 즉 신약 이전에 쓰여진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언어의 불완전함과 인간적인 저자의 관점까지 넘어서는 성령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자면, 필사의 불완전함/정경 체택 과정의 인간적인 부분/그리고 번역의 불완전함을 뛰어 넘어 성령은 역사한다고 믿는다. 성령이 없이는 교회와 신앙이 쌓아올려 질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인용하고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하고 있다. 성경과 언어에 대한 생각을 한 후에 요한복음을 읽으니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이었다. 그 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을 이기지 못하였다. (새번역 요한복음 1장 1-5절)

+덧붙이며: 제 블로그 방문객은 대부분 기독교인이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기독교인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이 글을 읽으셨다면 논리적으로 비약을 느끼실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논리/과학이 아니며,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인 믿음으로 뛰어넘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성령이 하는 영역이라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 그리고 바울이 말한 자기 비움과 자족

오늘은 좀 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 이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회 참여/소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종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결론은 기쁨/행복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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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장자 초상화)

장자의 4편 인간세(人間世)는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의 대화로 시작을 한다. (주: 안회는 공자의 수제자이고 공자의 자는 중니임) 원문: 장자 인간세편

안회가 중니를 만나 여행을 떠나겠다고 청했다. 이에 중니가 물었다.
” 어디로 가려는가?”
” 위나라로 떠나려 합니다.”
” 어째서 위나라로 가려 하는가?”
” 제가 듣기에 위나라 왕은 나이가 젊은데다가 행실이 사나워 나라일을 가벼이 경영하고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백성을 죽도록 함부로 내버려 두어 시체가 흡사 연못에 무성한 파초와도 같이 많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일찍이 선생님께서,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들어가라, 어진 의사에게는 환자가 많이 모이는 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대로 다스리는 방법을 강구하면 위나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니가 말했다.
” 어허! 자네가 가면 필시 형벌을 받을 걸세. 무릇 도란 번거로움을 멀리 해야 되는 법이네. 복잡해지면 마음이 요동하게 되지. 자기 마음이 흔들리면 근심 걱정에서 구해 낼 수도 없다네. 옛 지인(至人)은 먼저 자신이 도를 갖춘 연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갔다네. 자네 자신도 아직 본래 면목을 회복하지 못했으면서 난폭한 사람의 행동을 어느 겨를에 막겠는가?’

그러자 안회는 공자에게 열심히 한결같이 설득하면 안되냐고 묻는다. 공자는 이에 안된다고 한다. 또 안회는 내 의견을 말하지 않고 옛성인들의 말에 인용하여 설득하겠다고 하니 공자는 그것도 안된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잘 안와닿는 사람들을 위해 비유를 하자면 이렇다. 어떤 학생이 수업시간에 술담배의 해악에 대해 배우고서 선생님께 묻는다. “선생님, 제 친구는 술담배를 합니다. 제가 오늘 수업시간에 배운대로 술담배의 안좋은 점을 설명하고 진심을 보여주면 친구가 술담배를 끊을까요?” “아니다. 알코올과 니코틴의 독성은 누구나 다 안다. 심지어 담배곽에도 니코틴과 타르의 해악을 경고하고 있다. 진심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애연가/애주가가 술담배를 끊을 것 같으냐? 오히려 건방지다고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술의 해악에 대한 하버드대의 연구 결과와 독일의 흡연 극복 사례를 기분상하지 않도록 보여주면 그 친구가 마음을 돌이키실까요?” “아니다. 그렇게 하면 친구에게 두들겨 맞지는 않겠지만 사람이 변하지는 않을꺼야.”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안회의 안타까운 마음에 있다. 술담배 같이 문제가 분명한 것은 덜 복잡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이야기 하거나, 정치를 이야기 하거나, 종교와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장자가 살았던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안회는 이제 모르겠다고 하고 공자에게 어쩌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이때 바로 공자가 말하는 것이 심재(心齋)라는 것이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심재이니라.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동양 사상에 조예가 없는 내가 심재에 대해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렴풋이 내가 이해하기로는 심재의 핵심은 자기를 비운다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장자>의 전체 문맥으로 보았을 때 물흐르는 듯이 사는 삶을 말하지 않나 싶다. <장자>는 물흐르는 듯이 사는 삶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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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렘브란트, 감옥 안의 바울>

이제 바울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바울의 편지 중에 하나가 빌립보서이다. 바울은 평생 열렬한 기독교 전파자의 삶을 살았는데, 처형당하기 몇년 전에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가 바로 성경의 빌립보서이다.

바울은 빌립보 편지에서 계속해서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 속에 있는 기쁨을 묘사하면서 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기뻐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기쁨이라는 것은 편한 상황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고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그의 이런 인생의 자세는 흡사 달관한 도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빌립보 편지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의 모습에서 ‘자기 비움’을 발견한다. 빌립보서 2장 7절에서 그는 예수에 대해 ‘자기를 비웠다고(개역개정)’고 말한다. (영어로는 made himself nothing (NIV)’ 그리스어로는 케노시스(kenosis)라고 한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케노시스로 이해를 한 것이다.

빌립보서 전체는 바울의 ‘자기 비움’ 또는 ‘달관’의 삶의 자세가 가득차있다. 바울은 다른 예수 전도자들 사이에서도 시기를 받았는데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그릇된 동기에서든 참된 동기에서든 어쨌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내가 기뻐하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또 바울은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참되고 정결한 삶, 기뻐하는 삶을 살라고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하게 사는 법도 알고 부유하게 사는 법도 압니다. 배가 부르건 고프건 부유하게 살건 가난하게 살건 그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만족하게 생각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장자 인간세편에서 질문을 던졌고, 바울의 빌립보 편지로 답을 했다. 안회의 이야기를 보면서 세상을 바꿔보려는 사람은 옛날에도 많았구나 싶다. 젊은 혈기에 시시비비를 가리려 했다가는 잘난척한다는 소리 듣기 쉽상이다. 모른척 지나가자니 내가 사랑하는 친구/가족/사회/국가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한때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은 배신감으로 가득찬 염세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장자의 답변은 ‘심재’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심재’는 빌립보 편지에서 바울이 말하는 ‘자기 비움’이다. 바울은 평생 예수를 전하고 따르는 삶을 살았는데, 그가 전한 예수는 ‘케노시스’였고 그렇게 살다보니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한 것이다.

오늘 여러가지 뉴스들을 보면서 갑갑해진, 젊은 혈기로 가득차 있는 나를 위해 글을 써보았다. 조금 지루한 이야기 일 수도 있는데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페르시아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에스더

아이를 키우면서 그나마 잘한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매일 자기전에 성경을 읽어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내가 무척이나 자상한 아빠인 듯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일 읽어주었던 것은 아니고 귀찮은 날은 모른척 건너뛰기도 자주했다. 또 우리 마나님의 잔소리에 못이겨서 억지로 읽어준 적도 많이 있었고, 지금은 성경책 읽어달라는 아이의 성화에 마지못해 읽어줄 때도 많다.

아이에게 성경원문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은 그 수준에서 맞지 않는 일이라 아직까지는 어린이 성경을 읽어주고 있다. 처음 시작은 아이가 만 3세 였던 2012년. 그때 읽어 주었던 책은 아가페에서 나온 ‘아장아장 성경’, 그리고 2013년 읽어 주었던 성경은 ‘두란노 어린이 그림 성경’. 2014년 지금은 ‘두란노 이야기 성경’을 읽어주고 있다.

매해 수준이 조금씩 높히고 있는데, 지금의 책은 만 5세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듯 하여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면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언급한다던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를 묘사한다던지… 어린 딸에게 살인이라는 이야기를 묘사 해야하는 순간에는 혹시라도 이 아이가 ‘살인’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하나 조마조마 하며 빨리 넘어가곤 했었다. 그런데 구약에는 생각보다 살인의 장면이 많이 나오더라. 어느 시점에서는 그냥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성경에서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약속을 하는 이야기. 몇번을 다시 읽어달라고 한다. 그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우고서 my favorite이라는 표시를 해두었다. 아브라함이 별을 ‘하나, 두울, 세엣.’ 하고 세는 장면에서는 항상 웃음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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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Victors – The Banquet of Esther and Ahasuerus

이번주에 아이에게 읽어주는 본문은 에스더 이야기이다. 혹시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중에 성경에 친숙하지 않은 분을 위하여 내용을 짧게 설명하면 이렇다. 에스더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페르시아의 장관이었던 하만은 유대인을 증오하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계략을 사용하여 아하수에로 왕이 모든 유대인을 말살시키라는 칙령을 내리도록 한다. 유대인이었던 왕비 에스더는 지혜로운 방법으로 왕의 민족말살 명령을 거두게 하고, 하만 장관은 실각을 하게 된다.

성경의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줄 때마다 무척 조심스럽다. 성경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구약의 경우에는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이라는 온전한 인격체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자칫 잘못 읽혔다가는 공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만의 하나님으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특히나 성경 원문 그대로가 아닌 짧게 축약된 이야기의 경우는 편집자의 시각이 은연중에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성경의 사건중에 몇가지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의 이야기가 그렇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살던 모든 민족을 말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토착민을 몰아내고 인종청소를 하라는 이야기인데,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는 비윤리적인 일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부분에 학자들의 의견은 몇가지로 나뉘는데, 나는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이었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던 고대인에게 있어서 전쟁에서의 압승은 말살이라는 표현으로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죄악이 넘쳐흐르는 가나안 민족에 대한 징벌의 개념으로 나온 결론이 진멸(殄滅)이다.

형이상학에 깊이가 일천하며 신학/윤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이문제를 더 깊이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수준의 형이하학적인 이야기는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는 이스라엘 민족 입장에서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폭력에서 시작되었다는 정도이다. 성경 속의 가치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석하고 시대적 맥락을 무시할 때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에스더 이야기는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말살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때 유대민족은 다른 민족을 말살할 수 있는 입장보다는 몰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더욱 많았었다. 에스더 이야기가 기록되었던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을 재건하던 때이다.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에스더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는 위로의 메세지이다.

이번주에 에스더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하나 알게 된것은 이제 아이에게 ‘권선징악’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몇달 전에 창세기와 사무엘서를 읽어줄 때만 해도 누군가가 죽거나 위험에 처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던 아이였다.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에게 확인하는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아빠, 하만은 나쁜 사람이야? 아하수에로 왕은?” 지금은 누가 선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인지부터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위험에 처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괜찮아 하나님이 다 지켜 주실 건데 뭘… 나중에 나쁜 사람들은 다 벌받지?” 이렇게 물어본다. 아이가 어디서 권선징악의 개념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성경책을 읽어가며 자연스럽게 형성이 된 것일까? 아니면 요새 즐겨보는 ‘번개맨’이라는 만화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일까?

고작 만 5세 딸아이 성경책 읽어주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ㅎㅎ 아마도 아빠로서 어린시절에 읽어주는 책이 이 아이에게 어떤 가치를 심어줄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지금은 5살 수준에서 권선징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정도로 만족한다. 사실은 만족하는 게 아니라 대견스럽다. 아이이지 않은가? 세상사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러한 시각에서 발전이 없다면 그 또한 문제이겠지만, 권선징악은 윤리의 뼈대를 세워주는 훌륭한 기본틀 정도는 된다.

오늘은 자식을 키우면서 생각하게 되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보았다. 별거아닌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신학/윤리/역사 같은 복잡한 주제를 건드리는 것을 보니까 병인 듯 하다. 딱딱하고 재미 없는 이야기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지금 가자에서 죽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

기독교는 왜 동성애에 이토록 민감한가? (ㅍㅍㅅㅅ)

기독교는 왜 동성애에 이토록 민감한가? (ㅍㅍㅅㅅ)

Originally posted 05/29/2014 @ facebook

작년부터 미국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소식 중에 하나는 ‘XX 주가 동성 결혼을 허용했다.’ 또는 ‘대법원이 다시 기각했다/승소했다.’ 등등 이다. (또 다른 하나는 마리화나 합법화 관련 뉴스) 거의 매달 한번 이상 듣는 것 같다. 작년 오바마 대통령이 조심스레 same-sex marriage 지지 발언을 꺼낸후 더 많아 지는 추세다. 물론 내가 살고있는 조지아 주는 바이블 벨트로 불리는 종교색이 강한 지역이기 때문에 동성 결혼 허용은 아직 먼 이야기로 들리긴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은 이미 여론이 동성혼 찬성이 되었다. 오바마가 지금까지 동성혼에 대한 주제를 피하다가 same-sex marriage 지지 발언을 한건 이런 계산이 깔린게 아닌가 싶다. 심지어는 요새 커밍아웃하면 cool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얼마전 MTV에서 Faking it이라는 드라마가 시작했는데 고등학생 둘이 인기 끌려고 거짓으로 레즈인 척하는 주제의 시트콤이다. 반면에 아이러니하게도 Christian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금기시 되는 이상한 상황까지 연출된다.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가 어렵지만, 작년에 내가 학교 다닐 때 레즈였던 친구가 술자리에서 게이 비하 발언을 했던 다른 친구를 이슈화 시켜서 결국 학기마다 주는 ‘Integrity 상’을 받았던 일도 있었다.

동성간의 결혼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이슈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려면 아직 먼 이야기다. 얼마전 김한길이 차별 금지법 제정하려다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던가? 현재 야당이 동성혼 문제를 당론으로 이슈화 한다면 강산이 바뀌기 전까지는 야당 계속할 각오를 해야할 것 같다. 커밍아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는 사회적인 자살행위이다. 단, 한가지 집고 넘어갈 점은 동성혼에 관한 논의는 인권(human rights)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권은 보평타당한 관점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반면 동성결혼은 민권(civil rights)의 문제로 이해가 되어져야 한다. 민권은 특정 사회에 속한 시민들에게 보장된 권리이다. 사회적으로 동성결혼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동성혼을 인권의 문제로 끌고 가는 것은 정당성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조금 범위를 넓혀서 동성애에 관해 이야기 해볼까? 2002년까지도 나의 동성애에 관한 입장은 명확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죄와 달리 동성애에 관해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죄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율법에서 뿐만 아니라 율법의 완성인 신약에서도 명확하다. 자세한 내용는 share된 article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관심있으면 읽어보길 바란다. 저자가 정말 꼼꼼하게 잘 정리해 놨다. 이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은 요약해가면서 봐도 괜찮을 정도이다.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2002년에 나는 캐나다에 있었는데, 캐나다는 동성애에 대해 가장 개방적인 국가 중에 하나기에 동성애자들을 접할 기회가 많다. 이때 크리스챤 친구들과 한번은 동성애자에 대해 교회는 어찌 반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붙었다. 나는 정말 문자 그대로 핏대를 세워가며 동성애는 성경에서 명시된 죄악이기 때문에 성경을 진리로 고백하는 교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싸웠다. 너무 격하게 싸워서 집에와서도 한참을 씩씩거렸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그땐 정말 고지식한 열혈청년이었다. ㅎㅎ 왜 그렇게 속상하고 분하던지… 지금은 한발 물러서서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있고, 사회적/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동성애를 받아들이기엔 성경의 입장이 너무 명확하므로 그냥 모르겠다 정도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논리를 제외하고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때는 딱히 동성애를 아니라고 말할 논거는 거의 없다.

단 기독교인이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죄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다른 사람을 차별할 권리는 없다. 이런 점에서 동성애로 인한 차별은 민권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다. (동성혼과는 달리…) 또한 동성애의 논의를 비기독교인과 이야기 할 때, 이러한 부분에 대해 충분한 고민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감정적으로 비이성적인 주장을 한다면 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불러올 가능성이 아주 크다. 성경을 떠나서는 동성애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근거가 그렇게 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그사람 관점에서의 진리를 논리가 아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강압적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꽉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갑자기 삘받아서 장황설을 늘어 놓긴했는데 쓰다보니 좀 조심스러워진다. 괜히 민감한 주제를 다뤘나 싶기도 하다. (내 페친 인맥의 반이상이 크리스챤인데…. –;;) 뭐 이렇게 길게 쓰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동성애가 편하지는 않다. 불편한 거는 불편한 거고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말할 권리는 존중해 줘야 하지 않나 싶긴 하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낸시랭의 신학펀치 – 제6회 ‘창세기 이야기는 왜 다른 신화와 비슷한가요?’

Origianlly Posted 03/12/2014 @ facebook

많이 생각 해봤지만 그다지 입밖으로 내본적은 없는 주제다. 과학과 기독교, 신화와 성경… 창조과학의 존재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서 과학적인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받아왔다. 어쨌든 구원교수님이 마지막에 언급한 두가지 입장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두번째 입장, 즉 인류는 역사적으로 공통적인 경험을 해왔고 이것이 각기 다른 신화에서 유사한 모티브로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사람이 성경을 썼다는 사실이 성경의 가치를 절대 훼손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옛날 성경이 쓰여질 때부터 오랜 세월 성경이 전수되고 확립 되어지는 과정에서 성령이 주재하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믿음 아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낸시랭의 신학펀치 – 제4회 ‘큐티(QT)식 성경읽기는 문제가 되나요?’

Originally posted 02/19/2014 on facebook

큐티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 중에 간혹 큐티를 오늘의 운세 보듯이 하는 분이 있다. 어느 한 단어나 한 구절에 꽂혀서 성경 전체의 맥락을 무시한 채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하여 적용하려고 드는 분… 신년이나 생일에 맞춰 그날의 말씀을 찾아 랜덤한 성경구절을 찾아 그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는 분 등… 이러한 모습이 신년운세를 알기위해 점집을 찾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나님 말씀을 매일 진심으로 읽는 것을 도와준다는 점에서 큐티는 참으로 유익한 신앙적 전통이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에게 큐티는 적용꺼리를 억지로 꺼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종종 지워주곤 한다. 그러한 적용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성경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간혹 설교에서조차 끊어 읽기 큐티식 성경해석을 발견했을 때는 그 답답함이 얼마나 큰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성경을 맥락에 맞게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듯 싶다.

복음 자체가 어려운 내용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시 가장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서 가르키신 말씀이니 말이다. 하지만 교회사를 되돌아 보자. 교회가 가장 세속화/계급화 되었던 중세시대에 낮은 자를 위한 예수님의 복음은 헬라어/그리스어로 숨겨져서 가진자의 성경이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마틴루터가 종교개혁 초창기에 했던 일(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서 금속활자로 성경을 보급했던 것)은 무척이나 적절하다. 아마도 현대의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일 중에 하나는 평신도에게서 너무나 멀어져버린 성경 말씀을 제대로/쉽게 풀어서 낮은자에게 돌려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 종교개혁/미국 대각성운동이 그러했던 것 처럼 그러한 일이 다시 이루어 진다면 그 유익은 교회 뿐 아니라 우리가 몸담은 세상에도 바람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짧게 쓰려다 오늘도 사설이 길어 졌다… ㅋ

(덧붙임 02/12/2015)

예전에 지나가듯 잡상을 적어둔 내용인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날이 너무 서있다. 근대 의외로 이글이 조회수가 높다. 지울까도 싶었지만, 당시 내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현재도 동일하기 때문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글에서는 큐티의 단점 만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큐티는 분명히 매일매일 성경을 마음에 새기려는 분들에게 귀한 도구이다. 다만 지나친 일반화, 원 의미의 변질,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적용의 위험성 또한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이글을 읽고서, 평소 성경도 안읽고 성경 공부도 안하는 분이 ‘누가 그러는데, 큐티 안좋은 점도 있다고 하더라. 큐티 안해도 된다.’ 이렇게 말씀 하시면 정말 오해하시는 거다.

낸시랭의 신학펀치 – 제2회 ‘세종대왕은 지옥에 가나요?’

내가 느끼기에 성경은 그리 친절한 책은 아니다. 성경은 각 책마다 다른 저자의 관점과 뚜렷한 목표의식이 닮겨 있긴 하지만 인생의 모든 문제와 질문에 시원시원한 즉답을 주지는 않는다. 복음이 전파된 적이 없던 곳에서 구원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를 괴롭혔던 적은 없지만, 몇몇 분들에게는 꽤 중요한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프로그램 후반부에 나오는 공동체적인 관점에서의 구원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은 내게도 생각의 단초를 던져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