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 Y축 물결무늬 차트 그리기

셀 차트 그리기 팁을 하나 공유한다.

들어가며

오늘 회사에서 자료를 하나 작성하는 데 차트를 그릴 일이 있었다. 대강 아래와 같은 차트이다. (데이타를 그대로 공개하기 뭐시기 해서 항목은 A/B로 바꿨다.)

이런 차트를 속칭 물결 무늬 차트라고 한다. 영어로는 broken y axis char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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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를 그릴 때 비교대상의 scale이 다르면 곤란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위의 차트를 원래의 scale로 그리면 아래와 같이 된다. 이렇게 그리면, A가 감소하는 것과 B가 증가하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차트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는 것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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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 사용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는데, 물결 무늬 차트가 그 중에 하나이다. 사실은 물결무늬는 그 중에서 가장 안좋은 방법이다.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크기 때문에. (역으로 말하면 숫자로 눈속임하기 딱 좋은 방법이다.)

Academic한 분야에서는 이럴 때, 로그스케일 차트를 사용한다. 그런데 숫자를 싫어하는 일반인들에게 로그를 언급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은 아니다. 로그를 입밖으로 내는 순간 사람들은 학창시절 끔찍히 싫어했던 수학을 떠올리며 거부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패널 차트라는 게 있는데, 그건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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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을 같이 보여주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는 적어진다. 단점은 차트가 익숙치 않기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적당히 타협을 해야된다. 일반인(이라고 쓰고 데이타에 무지한 높으신 분들이라고 읽는다.)을 대상으로 작성하는 자료에 익숙하지 않은 차트를 던져주고서 공부 하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럴 때, 마지막 선택지가 물결 무늬 차트이다.

말하자면, 이 글은 오해를 불러오는 차트를 어쩔 수 없이 그려야 하는, 먹고사니즘에 굴복한 누군가를 위해서 쓰는 글이다.

Y축 물결무늬 차트 그리기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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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기본 차트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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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축 차트 단위를 보기좋게 (70,000,000을 $70M으로 나오게) 바꿔준다. M은 million의 줄임말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 경우는 숫자 서식을 $#0,,”M”이라고 바꿔주고서 옆의 Add(추가) 버튼을 눌러준다. (참고로 나의 경우는 오피스 2013 영문판을 쓰는데, 버전에 따라 서식을 바꾸는 법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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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를 하나 복사해서 더 만들어 준다. 이제 차트 두개를 겹쳐서 눈속임을 할 껀데, 그를 위해서 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처음 차트를 차트1. 두번째를 차트2 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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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1의 Y축 범위 최대값을 바꿔주자. (이 경우에는 20 million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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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 2의 legend (한국말로는 범례)와 X축을 지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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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2의 높이를 차트1의 반만큼으로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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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2의 Y축을 상단으로 쓸 정도의 Scale로 바꿔 준다. (이 경우는 최소값 50M, 최대값 7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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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 1과 차트 2를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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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기본 도형중에 물결무늬를 찾아 삽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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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의 선을 투명으로, 색채우기를 흰색으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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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어보이지만, 이걸로 차트를 가려서 물결 무늬를 만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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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물결무늬로 차트를 가리면 위와 같이 된다. 여기서 그냥 끝내도 되지만, 두개의 차트가 겹쳐지는 부분의 이음새가 거슬리는 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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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하나 만들어다가, 앞의 물결 무늬에서 처럼, 흰색으로 만들어서 이음새를 가려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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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차트는 위와 같다.

가능하면 쉽게 쓰려고 했는데, 사람에 따라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보기에는 복잡해 보여도, 몇번 연습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다.

그리고 이 차트를 만드는 과정에는 생각보다 많은 잡기술이 들어 있는데, 이정도만 익혀도 어디가서 엑셀차트 못한다는 소리는 안듣지 싶다.

혹시 참고로 waterfall chart 만드는 것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길.

Excel Waterfall Charts (Bridge Charts)

Feedly 사용기 (RSS Reader)

어제 포스팅한대로, 나는 RSS를 애용한다. 어제 Netvibes를 소개하는 포스팅을 하면서 RSS Reader를 조사해봤는데, Feedly가 더 인기가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용해 봤는데 훨씬 편하다.

포스팅하면서 배운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찾아보다 더 좋은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아마 Feedly를 쓰게 될 듯 하다. (이미 Netvibes에 있던 RSS를 다 가져왔다.)

일단 들어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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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화면을 보게 되는데, 굳이 RSS 주소를 알아낼 필요 없이 검색창에 바로 주소나 Site 이름을 치면 된다. 대부분 Site가 검색으로 나오는 데, 아주 작은 site 같은 경우 (이를테면, 내 블로그라던지…) 아래와 같이 직접 주소를 입력해야 한다. 참고로 내 블로그 주소는 http://www.isaacinseoul.wordpress.co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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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보니, 가독성도 더 뛰어나고 모바일 기기와의 궁합도 좋다. 다른 사람들의 Feed를 보고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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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d된 글들을 제목만 이렇게 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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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형식으로 이렇게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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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이렇게 저장해둘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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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있는 주제가 있다면 따로 추천목록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서 Finance 관련해서 이런 유명한 블로그들을 팔로잉할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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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도 마찬가지다.

이 기능을 활용하면 본인이 관심있는 주제로 인기있는 블로그(또는 웹사이트)를 검색할 수도 있다.

예를들어, 자동차에 관심이 있다면 해쉬태그(#)로 Cars라고 검색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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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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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Feed를 저장해둔 목록을 주제별로 분류하는 것도 가능하다.

참고하시길.

블로그를 구독하려면 (RSS 리더 소개 글)

블로그가 한물 갔다고는 하지만, 나는 여전히 블로그 세계를 어슬렁 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미지 보다는 글을, 짧은 감상보다는 긴 이야기를 즐기는 나는 블로그가 더 좋다.

블로그의 단점은 흩어진 포스트들을 일일이 다니면서 수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블로그를 몇달 째 방치하다가 불시에 글을 올리기도 하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몇 주 마다 방문하는 일은 시간낭비이다.

나는 작년부터 RSS(Rich Site Summary)를 쓰고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 RSS 설명) 이미 많은 분들이 RSS를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RSS를 모르는 슬로우 어댑터를 위해 소개글을 쓴다. (심지어는 블로그계가 예전만 못한 이 시점에…) 나는 원래 구글 리더를 사용했는데, 작년에 구글이 서비스를 접을 때 현재의 Netvibes로 옮겼다.

RSS를 이용하면 블로그를 일일이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좋은 글들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은 덤. 다른이의 글을 읽다가 옮겨가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마다 북마크를 하자니 관리가 어렵고, 그렇다고 긁어다가 퍼오기도 찝찝하다.

찝찝한 것은 블로그에 퍼다 나르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오해가 생길 수 있어서 이다. 부분 발췌는 언제나 오해를 만든다. 또 어떤 이들은 글을 올릴 때, 가독성을 생각해서 그림의 배치나 서체 같은 사소한 부분도 신경을 쓰는데, 퍼오면 그런 게 다 무시된다. 만약 블로거가 글을 올린 이후에 수정을 하거나, (나는 자주 그런다. 포스팅 이후에도 평균 4~5번은 수정한다.) 삭제를 하는 경우, 글쓴이의 생각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어쨌든…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내가 사용하는 RSS 리더는 Netvibe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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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가는 블로그의 RSS를 긁어다가 저장해 두면 위와 같이 한눈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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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별표를 누르면 중요한 글 저장도 가능하다. (엄밀히 말하면 링크를 저장한다.)

단점은 처음에 세팅할 때, RSS 주소를 긁어모으기가 번거롭다. 터치 하나로 다 되는 모바일 환경보다는 조금 더 작업을 해야한다. 읽는 것만 따지면 태블릿이나 스마트 폰에서도 불편함이 없는데, RSS를 처음 긁어 올때는 PC 환경이 유리하다.

그 과정을 좀더 상세히 소개한다.

내 블로그를 예로 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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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를 누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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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를 복사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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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 버튼을 누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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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app (+) 버튼을 누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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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 주소를 입력 (내 블로그의 경우는 https://isaacinseoul.wordpress.com/feed/) 하고 (+)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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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래에 생성되는 (+) 버튼을 누르면 끝.

참고로, 한국 분들은 대부분 한RSS를 사용하는 듯 하다. Feedly 도 꽤 인기 있는 듯. 영어권 RSS 리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래 글을 읽어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Google Reader Is Shutting Down; Here Are the Best Alternatives

+ 덧: 이 글을 쓰면서 검색하다가 Feedly를 알게 되었다. 살짝 둘러봤는데, Netvibes보다 더 편리한 것 같다. 내가 작성한 Feedly 사용기는 링크 참조.

우리나라 지역별 부동산 경기에 대한 짧은 이야기

며칠전 별 생각 없이 주요국가 부동산 가격 추세 그래프 포스팅을 올렸다. 아주 반응이 뜨거웠다. 사람들이 부동산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느꼈다.

포스팅 이후에, 페친이신 이조훈님과 임일섭님께서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셔서 또 배웠다. 내 허접한 포스팅 보다 전문가인 그분들의 댓글을 공유하는게 더 배울게 많을 것 같아서 그대로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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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훈: 우리 나라도 2008년이 정점이고 이후로 작년까지 계속 빠졌을텐데…

나:  그렇네요. 2008년에 bump가 있네요. 근데, data 상으로는 그 이후도 오르긴 하는데, 값이 물가를 고려 안한 nominal value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구요. 뭐 어쨌든 참고로는 재미있는 자료이긴 하네요.

정성태: 전국 기준이라 그렇습니다.

나: 넵. 그렇군요. 그렇게 보니 말이 되네요.

이조훈: 역시 주변의 경험을 기준으로 한 느낌과 현실은 다르네요. 글로벌 금융 위기 이전의 가격을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줄 알았는데, 그건 수도권 이야기군요. 임대료 대비 집 값(house price to rent ratio) 또는 소득 대비 집 값(house price to income)에 대한 OECD 통계 등을 찾아보시면 더욱 재미 있을 겁니다. 서울 아파트만 머리에 있다면 믿기 싫은 진실.

나: 그렇네요. 한국도 서울 밖으로 눈을 돌리면 집값이 그렇게 비싼편은 아니군요. 문제는 서울/강남이긴 합니다만. 최근 부산 부동산 경기에 대해서도 말이 많더군요. 재미있는 통계들이 많네요.

이조훈: 우리 나라 주거의 절반 가까운 건 다가구, 다세대 주택이고 (빌라, 하숙집) 수도권 인구도 절반이 안되니… 결국 서울의 아파트는 중산층 이상의 거주 공간이지요. 서울 강남은 그냥 맨하탄이나 런던의 첼시, 일본의 록뽄기, 홍콩/싱가포르의 핵심지역 같은 개념이라 그에 비하면 또 과도한지도 의문이지요.

임일섭: 관련된 졸고 두 편 소개합니다.^^ 글을 쓴 이후에 생각이 조금 달라진 부분도 있고, 스스로 보기에도 치열함이 부족하여 클리셰로 끝내버린 느낌도 있긴 합니다만… 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PIR)을 통해 본 주택시장 현황 그리고 이건 며칠전 이조훈님 포스팅과도 관련있는 글… 주택시장의 구조 변화가 주택금융에 미치는 영향

이조훈: 네. 링크하신 글처럼 저도 제가 링크한 그래프에서 바로 우리 부동산이 저평가 되어 있다는 결론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숫자가 일반의 인식과는 많이 다르긴 해서 첨부해봤습니다. 그보다, 어제 다른 분의 댓글에 대답한 내용이긴 합니만, 두번째 링크하신 글의 문제의식에 크게 공감합니다. 전세라는 사적 금융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공시가 안 되다보니 데이타도 안 쌓이고 따라서, 부채의 가시성(visibility)이 떨어져서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 점 같습니다. 험험.

임일섭: 예 어제 쓰신 글에서 기억에 남는 것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다들 스스로 부동산에 대해서는 좀 안다…라고 “착각하고”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ㅠㅠ

이조훈: ㅠ 박사님 보다 제가 오하려 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부끄럽습니다. 사실 그 표현은 월세로 전환해서 수백조 깔려 있는 전세금 수백조를 생산에 투입면 한국 성장률을 높이자는 노무라 리포트 정도를 염두에 두고… 아니면 술자리에서 인구 절벽 하나를 가지고 폭락론을 펼치는.. 그런 분들이나 불패론을 펼치는 투기꾼 아줌마를 염두에 둔 이야기였습니다.

임일섭: 엇 뭔가 오해하신듯. 저도 그런 뜻으로 읽었습니다.^^ 집값의 역사적 추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사실과 다른) 통념, 집값이 안정되면 서민들의 주거비 부담도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 등등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주인장이 따로 계신 담벼락에서 수다를 떤 듯하여 죄송합니다.)

나: 아닙니다. 두분의 논의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나: 그리고 임일섭 박사님께서 링크 걸어주신 보고서 잘 읽었습니다. 두분께서 이야기하신 것처럼, 전국적으로 보면 2008년 이후 큰 변화가 없지만 서울 특히 강남은 큰폭의 하락이 있었네요. (PIR을 기준으로 해도 이는 명확해 보입니다.) 전문가께서 댓글을 달아주시니 제 담벼락의 격조가 올라갑니다. ㅎㅎ 두 번째 보고서도 잘 읽었습니다.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되는 현국면에 딱 필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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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앞의 임일섭 박사님의 보고서에서 PIR (소득 대비 주택 가격 비율) 추이를 보면 2000년대까지는 전국의 아파트 가격이 동일하게 가다가 2008년 즈음 차이가 많이 벌어진 게 보인다. (지역별 소득격차가 8년 사이에 저렇게 줄어 들었을 리가 없으니 가격이 벌어진게 맞다.) 차트를 보면 강남이 아닌 전국을 기준으로는 2000년 이후 크게 오른 내용이 없다. 이전 포스팅에서 내가 IMF 자료를 토대로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이 (전국을 기준으로는) 별로 오르지 않은 사실을 발견한 것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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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금융 연구소)

뭐.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나. 그치만 Data를 바탕으로 과거의 일을 추적해보니 재미있긴 했다. 나는 부동산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인데, 너무 많이 떠든 것 같다. 그럼 이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0. 들어가며

곧 세월호 참사 1주년이다. 추모의 의미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가 길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생각해보고, 읽어보고, 공부한 다음에, 글을 쓰는 정도 일 것 같다. 주제가 워낙 무거우니 만큼 글도 길다. 이렇게 긴 글임에도 나의 이야기는 일반론적인 또는 근본적인 이야기에만 머무를 예정이다.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이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지적 부탁한다.

목차

0. 들어가며
1. 헴펠의 역설 – 귀납적 지식의 한계
2. 귀납적 지식과 인과론 – 회의주의자의 세상 보기
3. 자신의 법칙으로 살아가기
4. 신정론 (Theodicity) –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5. 볼테르와 루소 – 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6. 시스템적인 접근 – 루소의 답장
7. 힐스버러 참사 – 20세기의 참사
8.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개인적인 접근
9. 미시적 해체의 오류 – 개인적인 접근 vs. 구조적인 접근
10. 마치면서

1. 헴펠의 역설- 귀납적 지식의 한계

헴펠의 역설(Hempel’s raven paradox) 이라는 것이 있다. 독일의 논리학자 헴펠(1905-1997)이 귀납적 추론과 직관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예이다. 설명을 위해 고등학교 때 수학시간에 배운 명제에 대해 복습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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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선은 역(conversion), 녹색선은 이(inversion), 파란색선이 대우(contraposition)이다. 대우관계는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예를 들자면, ‘1) 전기가 나가면(P)는 불이 꺼진다(Q).’ 와 ‘2) 불이 켜져 있으면 (~Q) 전기가 들어온 것이다. (~P)’는 대우관계이고 1)이 참이면 2) 역시 논리적으로 참이다.

헴펠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까마귀는 검다. (All ravens are black.)

(2)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 (대우) (Everything that is not black is not a raven.)

(3) 내 애완용 까마귀는 검다. (My pet raven is black.) : 1번을 지지하는 예시

(4) 이 녹색 물건 (검은색이 아닌)은 사과 (까마귀가 아닌)이다. (This green (and thus not black) thing is an apple (and thus not a raven).): 3번을 지지하는 예시

직관적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사과를 보면서 까마귀가 검다는 것을 증명하다니.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맞다. 헴펠의 역설은 귀납적 접근의 한계를 드러낸다. 헴펠의 역설에 의하면, 까마귀가 검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세상의 모든 검지 않은 것을 모아서 까마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헴펠의 역설에다 시간의 개념을 더해 볼까. 우리는 까마귀가 검다라고 말하기 위해 과거에 존재했던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모든 까마귀를 가져다가 검다라는 것을 확인해야 까마귀가 검다라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다. 만약 3년 뒤에 파란 새를 한번 찾아봤는데, 알고보니 까마귀였다면 이 역시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2. 귀납적 지식과 인과론 – 회의주의자의 세상 보기

헴펠의 역설은 존재한다. 그러면 귀납적 지식이 무의미 할까. 감히 내가 어찌 인류가 쌓아올린 방대한 지식의 대부분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은 수천년에 걸친 관찰과 경험의 축적으로 발견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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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볼까. 케플러(1571-1630)의 법칙(Kepler’s laws of planetary motion) 같이 귀납적인 관찰로 발견된 법칙은 뉴턴(1643-1727)의 만유인력의 법칙 (Newton’s laws of motion)의 토대가 되었다. 실험과 관찰, 확증이라는 과학의 방법론은 지식의 근간이고 인류의 지식은 그렇게 발전해 왔다. 사족으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귀납적인 지식이 아니다. 모든 물체는 질점(부피는 zero이면서 무게를 가지고 있는 가상의 점)으로 환원된다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형이상학적인 법칙이다.

귀납적 지식이 무의미하지 않다면, 나는 헴펠의 역설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굳이 말하자면 인류의 지식에 경외감을 가지되 틀릴 수도 있다는 겸허함을 가지자는 정도가 아닐까 한다. 학문을 하는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어떤 법칙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말하는 진리/법칙/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법칙이라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의지가 들어갈 여지가 적은 편이어서 비교적 보편타당하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인간의 일을 다루는 학문 (이를테면 사회과학, 경제학, 경영학 등등….)은 되먹임 (feedback)이 클 수 밖에 없다. 학자들이 석유자원의 고갈을 경고할 때, 인류는 셰일혁명으로 예측을 뒤집었다. 멜서스의 비관적인 인구론은 농업혁명으로 가뿐히 무시되었다.

너무 학문적인 이야기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누구나 인생관, 지혜 같은 것을 가지고 살고 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순간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다.’ ‘세상에 믿을 것은 돈 밖에 없다.’ ‘가족과의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 같은 철학/법칙들은 누구나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러한 지혜들은 개개인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확증되어진 것이고, 부모님이나 인생의 선배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의 법칙과 마찮가지로 삶의 지혜 또한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자신의 법칙으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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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열심히 살았어. 다시 산다고 해도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할 꺼야.”

최대치가 여옥을 보고서 죽기전에 한 마지막 대사이다. 학도병이었던 최대치는 세월의 풍파에 마적단, 남파 간첩, 인민군 장교, 빨치산으로 살아간다. 그는 도덕을 무시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그는 강해지고  싶어서, 또 나중엔 무력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한 길을 고집한다.

예전에는 박상원 같은 반듯한 사람이 좋았다. 이제 나이가 든 걸까. 최대치 같이 살아보자고 발버둥 치는 그런 사람들이 더 안스럽다. 누구나 열심히 산다. 그것이 사회를 변화시킬 정의이던지, 자신과 가족을 먹여살릴 돈이 던지, 아니면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던지, 도저히 내려 놓을 수 없는 자존심이던지… 인간은 무언가를 위해서 달려가고 있다.

열심히 살아온 누군가에게 당신은 존재 자체가 틀렸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나 삶의 법칙/관점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그것이 남을 해하는 것이던, 자연을 해하는 것이던 간에 말이다. 누군가에게 옳은 것은 자신에게 그른 것이기도 하다. 모순된 세상에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 철학자들은 세상에 대해 여러 관점을 내 놓는다.

17세기. 세상의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고 우주는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관과 세계에는 기계적인 인과 관계만이 있을 뿐이라는 데카르트 적인 세계관이 부딪쳤다.

당시 두가지 세계관을 조화롭게 이해해보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라이프니치(1646-1716)이다. 그는 우주가 겉으로 볼 때 기계론적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데카르트적인 방식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기계를 창조한 신이라는 존재를 잊지 않고 언급한다. 그는 세계를 통해서 신의 목적과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4. 신정론 (Theodicity) – 신은 왜 악을 허용하는가

근대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을 한다는 것은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했다. 가장 성공에 근접했던 과학자는 뉴턴이 아니었을까 한다. 뉴턴이 엄청난 양의 신학서적을 저술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뉴턴은 자신을 과학자가 아닌 신학자로 여겼다. 뉴턴은 과학 보다 신학에 관련된 책을 더 많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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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과 동시대의 과학자 중에 라이프니치(1646-1716)가 있다. (앞의 라이프니치와 동일인이다.) 미분을 발명하기도 한 그는 신정론(Theodicity)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유신론자였던 그는 전지(omniscience), 전능(omnipotence)하며 선한 존재 (omnibenevolence)인 신이 창조한 세계는 완벽하다고 보았다.

I form the light, and create darkness: I make peace, and create evil: I the LORD do all these things. (Isaiah 45:7)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킨다.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한다. (이사야 45장 7절)

*덧: 라이프니치는 아마도 이사야서의 이 구절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1710년에 신정론(Theodicy: Essays on the Goodness of God, the Freedom of Man and the Origin of Evil)이라는 책을 쓴다. 신정론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신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첫 번째 악은 모든 피조물의 불완전한 성질에서 비롯된다. 완벽하다면 그것은 신이고, 악할 수가 없다. 두 번째 악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악이다. 신은 자연의 악을 꼭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죄에 대한 벌로서, 또 때로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더 큰 악을 저지하거나 보다 더 큰 선을 실현하기 위해 자연의 악을 원할 수 있다. 세 번째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 악은 인간의 자유의 결과이다. 신은 가장 선한 것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고, 이에 따라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선’ 뿐만 아니라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신은 ‘악’을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악을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용: 철학여행까페[41]다양성과 조화를 추구한 철학자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론 또는 어떠한 다양한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 배후에는 신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신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는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5. 볼테르와 루소 – 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VoltaireCandidFrontis+Chap01-1762

신을 믿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에게 정의가 있고 신도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죄 없는 사람들을 이토록 비참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 신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만행이라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다. 볼테르

1755년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한다. 이 지진으로 리스본 사람의 1/10이 죽는다. 볼테르는 이를 두고서 시를 쓴다. 그는 이 시로 당시 대세였던 라이프니치의 신정론을 비판한다. (영어 번역본 링크) 이 시는 왜 무고한 사람이 죽는가? 왜 하나님은 재난을 허용하는가? 재난을 만든 신은 왜 존재하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루소이다. 이 시를 편지로 받은 루소는 볼테르를 반박하는 답장을 쓴다. 루소는 ‘리스본의 지진은 신의 섭리가 아니다. 리스본 시내에 밀집 지역을 만들고, 다층 주택을 지은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재난에 대비해 적절한 대책을 마련했다면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답변한다. (영어 번역본 링크)

루소와 볼테르/라이프니츠를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루소는 재난에서 신의 존재를 고려 대상에서 빼버렸다. 말하자면 재난은 어디에서 왔는가.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를 멈추었다는 것이다.

18세기의 유럽은 철저하게 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곳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대형 사고가 나면, 누구나 신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현대인은 모든 인과를 신과 연결짓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분노를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심리이다. 나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을 때 분노와 답답함이 가득했다. 선장/회사/해경/정부를 파고 드는 하나하나 기사에 반응하고 우울해 했었다. 아마 리스본 대지진 때, 유럽인들은 비슷하게 신에게 의문을 제기했던 것 같다.

6. 시스템적인 접근 – 루소의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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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볼테르에게 답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 do not see how one can search for the source of moral evil anywhere but in man…. Moreover … the majority of our physical misfortunes are also our work. Without leaving your Lisbon subject, concede, for example, that it was hardly nature that there brought together twenty-thousand houses of six or seven stories. If the residents of this large city had been more evenly dispersed and less densely housed, the losses would have been fewer or perhaps none at all. Everyone would have fled at the first shock. But many obstinately remained . . . to expose themselves to additional earth tremors because what they would have had to leave behind was worth more than what they could carry away. How many unfortunates perished in this disaster through the desire to fetch their clothing, papers, or money?

내가 이해한 루소의 관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이러하다. 사고가 났을 때,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가에 집중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신), 사고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사고는 누군가 (또는 신)의 잘못으로 발생하지만, 동시에 사회 시스템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 (물론 루소는 시스템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조직 문화, 정부의 시책, 법령, 관련 산업의 인센티브 시스템 등등이 하나하나 맞물려서 사고가 발생하고 더 커진다. 사고에서 잘못한 사람과 조직을 찾기에 급급하면 시간이 흐르고 다른 이슈에 묻혀버리게 된다.

7. 힐스버러 참사 – 20세기의 참사

현대에 일어난 대형 참사 중에 힐스버러 사고가 있다. 1989년 FA 결승전에서 96명이 압사 사고를 당했다. 이 사건은 영국인 모두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캡처
(image source: Hillsborough was real living hell, The Munster Express)

위의 사진은 힐스보로 참사 당시 데일리 미러 표지이다.

이 사건이 일어 났을 당시 경찰은 무질서한 팬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유족들은 희생자의 오명을 씻기 위해 Hillsborough Family Support Group (HFSG)와 Hillsborough justice Campaign (HJC)을 구성한다. 이 사건 이후에는 영국 축구계는 매해 사고를 기억하는 추모를 한다. 또한 영국의 스포츠, 공연 안전 시스템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 과정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 겼다. 결국에는 사고의 백서라고 할 수 있는 보고서를 내기에 이른다. 이 보고서는 45만 페이지에 이른다. 다만 이 ‘제대로 된’ 보고서는 사고가 일어난 지 23년 만인 2012년이 되어서야 나왔다.

8.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개인적인 접근

돌아돌아서 여기까지 왔다. 아마 나는 이쯤에서 루소의 관점이나, 시스템적인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끝내도 될 듯하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러한 접근이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교훈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시스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개인의 문제는 남는다. 시스템적으로 개선이 이뤄지고 난 이후에도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위험 천만한 곳이며 불행은 나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다. 진정한 위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다. 위험에 닥쳤을 때 인간은 참 무력하다.

나의 질문은 도돌이표 처럼 돌아온다. ‘신은 잔인한 존재인가?’ ‘왜 삶에는 고통과 위험이 있는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해결 되지 않는다. 신에 대해 변론하고자 여러 신학자들은 답을 내놓는다. 역사적으로 라이프니츠 뿐 아니라 정말 많은 논쟁과 이야기 들이 있어왔다. 나는 누구의 손도 못들어 줄 것 같다.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직관적으로, 느낄 뿐이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볼테르도 루소의 답장을 받고서도 그다지 속이 시원하지 않았던가보다. 그는 아예 책을 한권 쓴다. 그게 바로 풍자소설로 유명한 ‘캉디드’이다. 소설 속에서 캉디드는 처음에는 ‘All is well’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낙관주의자 였다. 그는 정말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생고생을 한다. 고향에서 추방당하고, 군대에 납치되었다가, 사기도 당하고, 노예선에 팔렸다가, 결국은 결혼을 해서 안정되는가 싶었지만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다. 결국 그는 낙관주의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캉디드는 이런 말을 남긴다. ‘그러나 우리는 밭을 갈아야 한다.’ 캉디드는 거대 담론에 파묻히기 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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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미시적 해체의 오류 – 개인적인 접근 vs. 구조적인 접근

미시적 해체의 오류

문제를 끊임없이 미시적으로 나눈다. 결국은 아무 문제도 없고 책임자도 없다. 그저 끊임없이 나눌 뿐이다. 거시적 태도는 도식적 틀 속에 갇히곤 하지만, 미시적 태도는 폭력의 문제를 무화시키고 본질을 해체시켜 버린다. 분석이 아니라 핑계거리를 나열할 뿐이지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세세히 나누다 보면 아유슈비츠의 학살도, 용산 철거민 사건에도, 세월호에도 책임자는 없다. 지젝이 사이비 들뢰즈 아류들에게 지적한 대목이다. 게다가 나누다가 이득이 생기면, 나눈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다. 계속 나누며 이득을 감춘다. (출처: 김응교 교수 페이스북)

균형잡힌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뜨거운 사안을 다룰 때는 더욱이나. 누군가는 내 글을 보면서 미시적 해체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겠다 싶다. 그럴지도. 나는 거시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폭력을 더 못견디는 사람이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다.

10. 마치면서

이제 정말 1년이 지났다. 끝으로, 누군가의 친구이고, 자식이었던 고인에게 삼가 명복을, 그리고 유가족에게도 위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장거리 비행을 대비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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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pedia)

아무리 많이해도 익숙해 지지 않는게 몇가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장거리 비행.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열다섯시간. 그 시간을 좁디 좁은 비행기에 갇혀있다 보면 수명이 며칠은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내 기대수명이 80년이면 79년 360일 쯤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노트북을 장시간 사용하거나 overload하면 발열로 인해 수명이 줄어 드는 데, 꼭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 기지개도 켜보고, 복도를 이리저리 다녀보고, 영화도 보지만 좀처럼 시간이 안간다. 어떤이들은 알콜의 힘을 빌어 잠을 청하기도 하는 것 같다. 조심해야한다. 과음하다가 바비킴된다.

이번 비행에는 뭘하고 시간을 죽일지 고민해 봤다. 책도 몇 권 들고 갈 생각이고, 아이패드도 풀로 충전해서 들고갈 생각이다. 기내 상영 영화가 중요하다. 예전보다 나아진게 있다면, 내가 영화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VOD(video on demand)이다. 2년 전인가 대한항공 미주노선을 타봤는데, 채널을 돌리는게 아니구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거다. 감격했다. 비즈니스를 탄 느낌이었다. (비즈니스는 진작에 이런 시스템이 었다.) 십년 전에 캐나다 갈 때였나 노트북을 들고 탔는데, 지뢰찾기 게임을 했었다. 탈때는 분명히 하수였는데, 내릴 때 쯤 되니 고수가 되어 버렸다. 한계 상황에서 인간의 집중력은 무한 증가한다.

몇달째 만지작 거리고 있는 초고 상태인 글들을 완성 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블로그 게시판에는 40개 가량 드래프트 상태로 저장되어 있는 글들이 있다. 어떤 글은 주제만 메모 되어 있는 글들도 있고, 어떤 글들은 개요만 짜놓은 글들도 있다. 어떤 글은 거의 다 썼는데, 영 올리기가 찜찜해서 임시 저장 해둔 놈들도 있다. 딸램과의 이야기,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각 나라별 커뮤니케이션 방식, 돈에 대한 내 나름의 경제학적/사회학적/철학적/성경적 고찰 시리즈 등등. 꽤 오랜 시간 생각에 물을 주고 이런 저런 잡다한 메모를 모으다보면 그럴 듯한 글이 될 때가 많은데, 그정도 글이 나올라면 몇 번 글이 뒤집어 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경우는 산책을 하거나 샤워를 할 때 좋은 생각이 많이 나오는데, 비행기 안에서는 그렇게 생산적이기 힘들 것 같다. 이건 실현 불가능한 생각인듯.

아내는 비행할 때 먹을 것을 준비한다. 이착륙을 대비해서는 껌과 사탕을 준비하고, 중간중간 유용한 과일도 준비한다. 이착륙 할 때는 기압 때문에 귀가 먹먹해진다. 나는 침 몇번 삼키면 괜찮아 지는데, 아내는 꽤 힘들어 한다. 그럴 때 껌과 사탕은 조금 도움이 된다. 몇년 전 부터 귀마개도 사용해 봤는데, 아내가 꽤 만족한다. 고통을 줄여주니 꽤 기특한 도구이다. 기내식을 계속 먹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항공사 입장에서 나름 신경써서 식단을 구성하는 것일 테지만, 먹는 입장에서는 곤욕이다. 아무래두 기압이 낮은 곳에서 대량으로 조리를 하기 때문에 냉동식품의 퀄리티 이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계속 앉아 있어서 소화도 안될 지경인데 이런 음식을 먹고 있자니 사육당하는 가축의 느낌이 든다. 장거리 비행을 하고서 내리면 몇시간은 속이 부글거리고 그 좋은 나의 먹성도 사라진다. 아내는 귤이나 신선한 과일을 준비하는 데, 이게 그나마 낫다.

딸아이는 워낙 어려서 부터 장거리 비행에 자주 데리고 다녔더니 비행기가 자기 세상이다. 비행기에 앉으면 바로 담요와 쿠션을 뜯어보고 만져본다. 우선은 자리부터 편하게 만든다. 열 몇 시간의 비행이 순탄하기 위해서는 안락함이 중요하다. 그다음에는 안전 메뉴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도 읽는다. 주로는 그림을 보지만, 그래도 그게 무슨 재미일까. 하긴 동물원에 가서도 동물보다 지도를 더 재미있게 보는 녀석이니 거기에 그려진 그림이 큰 재미를 줄런지도 모르겠다. 그다음엔 주위를 살핀다. 앞으로 뒤로 놀만한 아줌마/할머니가 없나 살핀다. 아이의 놀이 상대로는 할머니/할아버지가 딱이다. 손녀 생각이 나는지 그 분들은 비행기 안에 있는 꼬마들의 좋은 친구가 된다. 몇시간은 그정도로 버틸 수 있다. 그것마져 지루할 때는 어린이 프로를 찾는다. 몇년 전까지는 뽀로로가 큰 도움이 됐다. 몇 시간은 더 버틸 수 있다.

그 다음은 승무원 언니들. 딸애는 승무원과 친해두면 뭐라도 하나 더 나온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한국말, 영어, 몸짓, 발짓, 표정을 다 동원해서 애교를 부리고 어떻게든 그들의 시선을 잡아챈다. 서비스를 하는 분과 친해지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비스가 만족스럽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아이는 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만족을 나타낸다. 어디서 사람들을 기분좋게 하는 법을 배웠을까 궁금해진다. 조금은 가엽기도하다. 두살 무렵 부터 부모의 유랑에 동참을 시켰으니 말이다. 서울, 제주, 채플힐, 뉴욕, 애틀란타, 마이애미, 런던, 취리히, 로마, 프랑크프루트 등등. 좋은 경험이 되었을 거라고 말해보지만, 아직 어린 아이에겐 환경이 자주 바뀌는 건 큰 스트레스이다. 만 네살이 될 때까지는 장거리 비행을 하고 나면 꼭 일주일을 아펐다. 한번은 딸때문에 마일리지를 모아서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한 적이 있지만, 매번 그렇게 여행할 수는 없을 터이다.

이번 비행에는 가족이 없다. 일정 때문에 아내와 딸이 먼저 한국에 들어가고, 나는 따로 갔다가 따로 돌아와야 한다.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장거리 비행 무사히 잘 마쳤으면 좋겠다.

온라인에서 나를 얼마나 드러내는 것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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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깅을 하다가 가끔 드는 고민이 있다. 나를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고, 어디까지 감추는 것이 좋을까. 내가 유명한 블로거이거나 감추어야 할 은밀한 사생활이 있어서는 아니다. 내 글의 독자들이래야 친구/가족들이 대부분일 테다. 하지만 블로그는 오픈된 공간이다. 이곳도 검색유입이 꽤 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는 문제이다.

그런데 과연 모르는 사람이라서 자신을 드러내는게 어려운 것일까. 블로깅을 하면서 간혹 선뜻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내가 블로그를 하는 것을 아는 지인과 만날 때이다. 친구나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항상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는 내면을 조금 감추고 사는게 사람이다. 블로깅을 통해 일방적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독자들을 잘 모르는데, 독자들은 나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주된 관심사라든지, 정치적인 지향점이라든지, 좋아하는 책이라든지, 최근에 본 영화라든지, 딸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하는 것들을 말이다.

교류 없이 지내던 옛친구를 블로그를 통해서 만나고, 오프라인 모임까지 연결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소개팅에 나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나는 상대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다. 외모도 배경도 모른채 그저 커피점에서 상대방이 언제 오려나 궁금해하면서 커피를 마신다. 근대 상대는 이미 나에 대한 뒷조사가 끝난거다. 창밖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언제 들어갈지 뜸을 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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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생각은 오버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예를 들어 사촌 동생 결혼식장에서 갔는데 오랜만에 집안 어르신을 만났다고 하자. 어르신은 관심있는 척, 나에 대해 몇가지를 물어본다. 나는 성의껏 대답을 하지만, 어르신은 그 내용을 금새 잊는다. 거기다가 만약 내가 진짜 요즘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 – 이를테면, 딸과 대화하면서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던지, 회사에서 하루 종일 치이다가 집에 와서 레츠비를 마셨는데 평소에는 드럽게 맛없던게 그날따라 맛있었다던지 –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좀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어르신은 내가 어떤 직장을 다니며, 무슨 학교를 갔으며, 자녀가 몇살인가 하는 등등의 호구조사 정도로 충분하다. (아직 장가를 못갔거나 자식이 없다면 한바탕 훈계가 따라오겠지…) 사실은 호구조사를 하는 자체가 어르신에게는 관심의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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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블로그가 유행할 때만 해도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교환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블로그의 글들은 좀더 호흡이 길다. 또 블로그에는 한개의 글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여러개의 글들은 글쓴이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낸다. 독자는 포스팅한 글들을 읽으며 생각을 한다. 그들은 필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블로그 역시 완전한 소통의 공간은 아니며 어느 정도는 일방적일 수 밖에 없기는 하다.

몇년새 뜨거워진 소셜 미디어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의 독자는 참을성이 없다. 손가락으로 주욱 스크롤을 하다가 맘에드는 문장 / 사진 / 그림이 있으면 Like를 눌러주면 그만이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어르신이 나의 호구조사에만 관심이 있다면, 소셜 미디어에서는 누군가가 올린 짧은 문장과 사진 속의 찰나가 나와 코드가 맞는가만이 중요할 뿐이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블로그의 독자라고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들어줄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글이라면 당연히 최소한의 포장은 필요하다. 이건 아마 글을 읽는 사람을 향한 배려 같은 것일 테다. 사람들은 누구나 바쁜 데, 최소한의 배려도 없으면 그것은 소통을 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도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 몇가지 신경 쓰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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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형식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글 자체의 내용과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다. 나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블로깅을 한다. 블로그에서 일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 이슈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경제 이야기, 또 정치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나라는 사람이 관심사가 자주 바뀌고 중구난방이라 오만가지 잡다구리를 이야기 한다. 그래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매일매일 사회의 일원으로, 경제 생활을 영위하며, 정치에 영향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글들이 있는데, 나를 빼놓고 글을 쓴다면 쓰레기 더미를 재생산하는 것밖에 아니지 않나.

나를 드러내고 글을 쓰면 누군가와 척을 지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속에 있는 생각은 통제할 수 없는 몬스터 같아서 밖으로 나오면 누군가에게 상처 줄 수 있다. 생각이 말이되고 말이 글이 되면서 여러번의 자기 검열을 거치지만, 보편타당한 두리 뭉실한 이야기만 쓰는게 아니라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드러내고 쓰는 글에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세상을 보는 방식, 가치판단이 갈리는 의견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거기서 끝난다면 다행인 일이겠지만, 쓰여진 글이 독자의 눈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게 된다. 글을 읽는 사람이 나와 똑같은 문화에서, 똑같은 주제를 공부하고,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똑같은 경제적인 형편에 있다면, 오해나 상처가 적어질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나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할 이유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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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 중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외로울 때 책을 본다고… 이해가 간다. 책을 읽다가 책의 저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게되면 반갑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다. 시대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는 친구이다. 어렴풋이 내가 생각했던 것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정리되어 나오면 그게 그렇게 기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는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껴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생각을 강요할 수 없지만, 책을 공유할 수는 있다. 내가 공감했던 책에 같은 감정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더 가까이 온 것 같다.

어찌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책을 추천하는 사람보다 더 외로운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는 것도 모자라서 직접 쓴 글을 내민다. ‘방망이 깍던 노인’을 쓴 윤오영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한 수필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맘이 통하는 친구와 대화할 수 있다면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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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다보면 유리병에 편지를 적어서 망망대해에 떠내려 보내는 느낌이 든다. 오늘도 유리병 편지를 하나 적어 띄어 보낸다. 이번 편지는 너무 길어서 누가 읽을런지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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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행기에서 신분 격차를 새삼 느낄까?

땅콩회항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하루 이틀 이야기하다가 말겠거니 했는데 해를 바꿔가면서 모두들 한소리씩한다. 굳이 내가 거기에 한마디를 보탤 이유는 없다. 그런데 유독 사람들이 비행기 1등석 이야기에서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며칠전 한 기사를 읽다가 내 나름데로 실마리를 찾았다. 기사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뉴스 페퍼민트: 왜 항공사는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어하는가

Newyorker 원문: Why Airlines Want to Make You Suffer
BY TIM WU

이야기인 즉슨, 항공사들이 수익을 위해서 점점 더 이코노미석 승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consumer report에 따르면 지금 미국 4대 항공사의 가장 넓은 이코노미석 좌석은 1990년대 가장 좁은 좌석보다 작다고 한다. (source: Think airline seats have gotten smaller? USA Today)

1등석/비즈니스석/이코노미석의 차별은 미시경제학으로 보면 개인별로 다른 consumer surplus를 최소화하는 가격을 책정해서 수익을 최대화하려는 가격정책의 일환이다. 싸게 티켓을 사고 싶은 사람들은 좁은 자리에 타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돈을 주고라도 서비스를 사고 싶은 사람은 더 비싼 요금을 감수한다는 논리이다.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이야기이고, 1990년대에는 그렇게 비행기 티켓 가격을 책정했던것 같다. 그런데 요즘 기업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항공사들은 기본적인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그 불편을 피하고 싶으면 좀더 돈을 주고 좋은 서비스를 이용하라는 메세지를 주는 것이다.

미국 기업들은 pricing에서 다양한 통계 기법을 활용한다. 그리고 새로운 가격정책을 내 놓을 때는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를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운송업계에서도 마케팅부서의 상당수가 pricing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몇년전 구직활동을 할 때, 이쪽 업계 분위기에 맞추어서 델타항공/FedEx에 면접을 준비하면서 프라이싱 관련된 토픽들을 몇개 준비했던 기억도 있다. 특히나 항공업계는 pricing 분야를 선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도 생각해보았다. 현대 사회에서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은 신분의 차이를 의미한다. 신분제가 분명했던 예전과 같이 노골적인 차별은 거의 없어졌다. 대신 돈을 지불해서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특권이고 능력이다. 차별화된 호텔/운송수단(열차,비행기)/근사한 외식은 중산층의 사치이거나 특권층의 당연한 권리이다. 비싼 식당이나 호텔에 갔을 때 불만족을 느끼면 내가 이돈을 내고 이런 서비스를 받다니라면서 불쾌해진다. 서비스업의 본질이란게 어쩌면 사람들에게 이러한 환상을 파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좌석의 class는 이러한 계급 차이를 노골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에서 직접적으로 모욕감을 느꼈던게 아닐까.

영화하는 사람들은 운송 수단에서 계급구조를 잘 간파하고 있는 듯 하다. 재작년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이러한 계급의 차이를 주된 영화의 소재로 삼고 있고, ‘타이타닉’에서도 귀족과 평민들의 차이를 1등석과 3등석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이를 피부에 와닿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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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비즈니스석을 탄 적이 있다. 뉴욕에서 서울로 갈 때 였는데, 오버부킹되는 바람에 업그레이드 되었다. 나는 대접받는게 익숙치 않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섯살난 딸내미는 금새 적응해서 즐기더라. 비행중에 이코노미석에 타신 어르신과 마주쳤는데, 딸아이보고 귀엽다고 하시다가 비즈니스석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서 부러운 눈길을 주며 말하셨다. 나는 이나이 먹도록 이코노미만 타고 살아왔는데, 저 어린게 어찌 비즈니스석을 탔을까 라면서…

뭐 어찌 되었든 비즈니스석도 아닌 일등석에 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하고 별로 상관있게 느껴지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비즈니스석도 돈낭비라는 생각이 들고 별로 부러워 한적은 없지만, 좁아터진 미국 국내선에서 처자식 불편해 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돈 좀 더내고 편하게 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끔 든다.

블로그 중간 결산 (순위 집계)

2014년 10월 22일 포스팅

이번 포스팅이 100번째이다. 4개월이 지났고, 누적 조회수가 2,500이 조금 못된다. 따져보니 하루 평균 20개 정도의 조회수가 있었던 셈이다. 블로그를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닐테다. 그래도 이곳이 상업적인 목적의 블로그도 아니고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 적은 없었기에 나름 의미가 있다.

누군가가 내 생각을 읽고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즐거운 일이다. 내 글은 대부분 길고 지루한 만연체인데다가 주제가 심각하기 짝이없는데, 생각보다 많은 방문객들이 있어서 의외이긴하다. 추측하건대 다양한 주제로 포스팅을 했기 때문에 검색유입이 있지 않았나 싶다. 또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한국인이 흔하지는 않기 때문에 내 관점이 읽을 꺼리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조회수가 높은 글들은 대부분 미국 생활나눔이다.) 아니면 단순히 꾸준히 포스팅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정도 트래픽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이 블로그가 100개 정도 포스팅을 이어온 만큼 어딘가에 있는지 모를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지금까지 조회수가 높았던 글을 정리해봤다.

1위: 1st work anniversary! – 미국회사에서 일년을 일한 기념으로 올린 글.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었다.

2위: 미국의 중산층 그리고 맞벌이 부부의 삶 – 미국에 중산층으로 살면서 겪는 경제적인 이슈들 나눔

3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미국 정착하던 시기의 어려움과 주기도문/산상수훈을 통해 위로받았던 경험

4위: 한국사람들은 왜 외국에서 서로 피할까? – 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과 답변

5위: 페르시아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에스더 – 성경의 에스더서를 딸에게 읽어주면서…

6위: 무한경쟁의 삶의 방식은 우리를 어떻게 불행하게 만들었을까? – 빡빡한 한국의 삶을 돌아보며…

7위: 딸아이의 눈물 – 감수성이 남다른 딸에 대한 이야기

8위: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 – 아이들은 어른들의 스승이다.

9위: 조언자를 찾고있는 당신을 위하여 – 선택의 기로에 섰던 내 모습을 돌아보며….

10위: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 그리고 바울이 말한 자기 비움과 자족 – 장자의 사상과 바울의 사상에 대한 생각

그외에 순위에 들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의리, 한국의 정, 그리고 미국인의 인간관계

백면서생(白面書生): 오직 글만 읽고 세상 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

발음/관사/전치사 이야기

고전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가?

벌레, 그리고 두려움에 대처하는 자세

영어공부 또는 뭉뚱그려 공부에 대한 이야기…3. 성취감 편

‘독일 경제에 관한 세가지 환상’ 기사를 보고서

현재 독일이 잘나가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지속가능할 지는 잘 모르겠다는게 개인적인 의견이다. EU 통합 초창기때 가장 힘들어했던게 독일이다.

내 생각에 현재 독일이 잘나가는 이유중 첫째는 임금동결, 둘째는 유로화로 인한 환율의 왜곡에 기인한 바가 크다.

임금동결이 가능했던 것은 노사정 연대가 영향을 미친바도 있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EU 통합 후 동유럽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독일로 몰려왔고, 이로인해 실질임금을 올릴래야 올릴 수 없게 된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싼 인건비는 독일이 수출 경쟁력을 키우는 데에 한몫을 했다.

환율 관련해서 말하자면, 독일은 제조업기반의 나라이고 수출에 강점이 있는데, 원래대로라면 수출을 잘하면 독일 화폐가치가 올라 수출이 어려워져야 정상이지만, 유로를 쓰고 있어 그렇게 안된다. 왜곡된 환율구조는 꾸준히 독일에게 부를 가져다 주고 있다. 반대급부로 그리스나 이태리 같은 수출에 강점이 없는 나라들은 골골댈 수 밖에 없고…

작년에 독일/스위스에 체류할 때 벤쳐기업가와 대기업 임원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경영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자, 그들은 독일 정부의 산업규제와 경직성에 대한 불만을 토로 하면서 미국의 환경에 대한 부러움을 표현했다. 일부는 립서비스 차원에서 그러했으리라. 립서비스임을 감안하더라도, 독일의 비즈니스 환경이 경직되어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EU 통합은 경제를 떠나서도 사회적으로도 독일에게는 쉽지않은 숙제다. 작년에 독일에 있을 때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그들은 동유럽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무슬림에 대해서는 다소 적개심까지 보였다. 유럽사회에 무슬림 인구는 무시 못할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고,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되고 있다.

링크한 뉴스페퍼민트 보고 든 생각들 난삽하게 늘어놔 봤다.

뉴스페퍼민트 link: 독일 경제에 관한 세가지 환상

원문 (economist) link: German economy: Three illu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