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용 드론에 대한 잡담

최근 테크쪽에서 hot한 아이템 중에 하나는 드론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미국처럼 관심이 뜨겁지는 않다. 미국의 경우는 아마존/구글 같은 테크계의 공룡들이 드론의 상용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여러가지 소문이 무성하다. 구글이나 아마존의 실행력을 봤을 때 정말 몇년 뒤에 드론(무인비행기)이 택배를 배달해 주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드론의 민간부분의 활용 이야기는 아니다. 군용 드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드론은 특히 오바마 정권들어서 전면적으로 사용이 확대되는 추세이다. 이유는 비용이 싸고 (유인 폭격기에 비해), 살상력이 크며, 인명피해가 없으므로 정치적인 부담이 덜하다는 데에 있다.

회사 동료 중 아프간에서 복무한 미군 출신이 있다. 그 친구에 따르면 이미 미군은 드론을 워낙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막사에서 창밖으로 드론이 날아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Dec. 17 airpower summary: Reapers touch enemy forces

(image source: wikipedia)

어떤 살상 무기가 인간적일 수 있을까 싶지만, 드론은 상상 만으로도 비인간적이다. 어느날 맑은 하늘에 조그마한 무인 비행기가 날아와서 소형 폭탄을 투하하고 눈앞에서 친구들이 죽는 일을 겪는다면, 외출조차 하기 무서워지리라.

6.25를 묘사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폭격을 한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폭격기의 소음만 들어도 죽음의 공포와 맞닥드리게 된다고 한다. 폭격기의 소음조차 없이 나타나는 드론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다. 위의 클립에서 드론 어택을 경험한 예맨 소년은 파란하늘을 보기만 해도 공포스럽다고 한다. (흐린하늘에서는 드론이 날지 못한다고…)

통제되지 않은 기술은 너무나 강력해서 인류에게 실제적인 위협을 가져다 준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살상무기를 손에 들고서 장난칠 궁리만 하고 있는 개구쟁이 어린아이가 그려진다. 강력한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 지가 대부분 정치인의 손에 달려있다는 점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딸아이의 눈물

+ 주의: 오늘 글은 제가 기억에 남기고자 썼지만, 100% 저의 입장에서 씌여진 글이기에 미화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현실은 아이와 놀기 귀찮아하는 게으른 아버지 입니다.

tear

딸아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려고 하는데 아이 엄마가 모른척 넘어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왜?’라는 질문이 머리속을 맴돌지만, 지금 누가 답해줄리 없다.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면서 차근차근 달래는 것. 아내를 마트에 보내고 내가 아는 방법을 시도해본다. 첫번째 시도. ‘엄마 없는 데 뭐 맛난거 먹으러 갈까? 빵집 어때?’ 고개를 절래 흔든다. 실패. 배가 고프지 않거나 사먹으러 갈 기운이 없나 부다. 두번째 시도. ‘좋아하는 노래 틀어줄까?’ 아이는 고개를 흔들면서 소리낸다. ‘으~음’ 노래도 듣기 싫은가부다. 세번째 시도. ‘그럼 아빠가 옛날 얘기 해줄까?’ 그제야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옛날 이야기래봐야 별거 없는데 즉석에서 만들어 허접한 이야기 들려주니 귀를 기울인다. 마음이 풀어졌는지 조금 있다가는 원숭이 소리 들려준다면서 끽끽거리며 장난을 걸어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보니 아이 엄마가 오고 아이의 마음은 완전히 풀어져있다.

딸아이는 눈물이 많다. 처음에는 떼쓰는 아이로 키우기 싫었기에 아이의 울음에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온종일 에너지를 쏟아낸 날은 저녁 즈음이 되면 다루기가 쉽지 않은데, 그럴 때 아이는 주저 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짐짓 모른척도 해보고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울음의 원인을 묻는다. “너무 마음이 안좋아.” 양치가 하기 싫다고 말했다거나 자러 들어가기 싫다고 말했으면 훈계라도 했으렸만 마음이 안좋다고 한다. 그래 늦게까지 잠을 안재우고 지금에서야 잘 준비를 시키는 부모 탓이다. 아직 여섯살이니 그만한 버틸 힘이 없겠지. 일곱살이 되면 달라지리라. 번쩍 들쳐 앉고서 양치를 하러 간다.

딱히 떼를 쓰는 아이는 아니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있어도 몇번 말해보고 안된다 싶으면 거기서 그만이다. 좋아하는 초컬릿이나 캔디가 앞에 있어도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면 두번 묻지 않는다. 아이 답지 않게 절제 못하는 모습이 있으나 나이를 생각했을 때 딱 눈감아 줄 정도 이다. 오히려 절제하지 못하는 건 아비가 더 심하다. 딸은 절제 하지 못하는 아비의 모습을 볼 때 또다른 어미가 되어 한마디씩 던지곤 한다. “자세 바로하고 밥먹어.” “아이패드 그만해.” “운동 좀해.” 다 맞는 말이다.

그나저나 왜 울었을까? 배가 고팠던 걸까? 세상에는 두종류의 아이가 있다. 배가고프면 난리가 나는 아이, 밥을 하루 종일 굶겨도 떠서 입에 넣어 주어야 그제야 먹는 아이. 가은이는 전자에 속하고 나는 어렸을 때 후자에 속하는 아이였다.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지만, 아까 빵집을 제안했을 때 거절했다. 이건 답일 수 없다.

엄마와 다투었거나, 존심 상하는 일이 있었던 것 일까? 가능하다. 이 아이는 눈물이 많은 아이지만 동시에 자존심이 몹시 강한 아이이다. 말을 더듬더듬 하던 돌이 갓지났을 무렵에도 부모가 뭐라하면 입술을 꼭 깨물고 억지로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이 엄마는 딸에게 잘못을 시인하는 법을 가르키려고 노력했다. 이제 잘못을 시인할 줄 알지만, 그 안에 가득한 자존심은 여전하다.

아이가 잠들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아내에게 무심한 듯 물어본다. “아까 낮에는 왜 그랬던 거야?” “뭐?” “울었던거.” “아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고 뭔데?” “거울을 봤는데, 갑자기 자기 볼하고 눈이 예전하고 다른 것 같다고… 자기가 변해가는 것 같아서 슬퍼졌데.”

그러고 보면 딸아이는 몇달전에 비해서 젖살이 빠져서 볼이 헬쭉해졌으며, 눈이 더 커졌다. 어른에게 나이가 먹음은 주름하나 더 생기고, 활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매일 매일이 다르다. 작년에 아빠의 허리띠가 눈높이였다. 지금은 아이의 눈은 내 배꼽과 같은 높이이다. 매년 달라지는 눈높이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대부분은 그러한 변화를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일 텐데 이 녀석은 아쉬움으로 느낀다.

“여보도 어렸을 때 그랬데?” “뭘?” “감성적인거…” “아 나도 어린 시절생각하면서 운적이 있데.” “여보 닮았구나?” “그치만 저정도는 아니었지 싶어.”

역시나 생소하다. 아이가 감수성이 풍부한 것은 감사할 일이다. 세상이 쉽지 않은데 그러한 감수성을 가지고 사는게 쉽지 않을 것 같아 그게 걱정이다.

기계의 얼굴을 한 사람들

요새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대시보드(dashboard) 구축이다. 대시보드는 일종의 표준화된 레포트를 말한다. 어제 잠깐 동료들과 식사를 하면서 아무리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도 왜 대시보드에 에러가 발생할까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첫번째 이유는 자꾸 바뀌는 환경이다. 대부분 시스템/대시보드는 다른 시스템과 연결되어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설계할 때와는 환경이 달라지고 링크들이 깨지게 마련이다. 두번째 이유는 사람이다. 담당자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 동일한 담당자라도 바뀌는 환경을 새심하게 신경쓰지 않으면 프로세스가 엉켜서 에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회사일이라는 게 시간이 흐를 수록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시스템이 복잡해질 수록 일은 점점 분업화되고 서로 책임과 업무의 구간을 명확히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지 점점 파악하기 힘들어 지고, 점점 아무 생각없이 메뉴얼대로 일을 하게 된다. 금전출납 계원은 생각없이 영수증을 시스템에 입력하고, 보고서를 만드는 사람은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에 무감각해지고 그저 정해진 프로세스대로 기계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효율적/과학적/객관적인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일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되면 일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재미가 없고 그저 돈을 벌기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매일 하는 일에서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고 일의 의미나 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가치나 의미 같은 것은 계량화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뒤로 밀려날 뿐이다.

모던타임즈

(Image Source: 영화 ‘Modern Times’ (1936))

찰리 채플린은 20세기 초에 기계의 부속으로 변해버린 인간의 비극을 그린 영화를 발표했었다. 영화 모던타임즈는 채플린이 사회주의자라고 매도 당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는 자의반/타의반으로 미국에서 추방당한다. 당시 그는 블루칼라의 기계화를 그림으로 그려냈지만, 21세기의 지금에 와서는 화이트 칼라 역시 그저 기계 부속품에 지나지 않게 된 것 같다.

현대 문명이 이루워낸 놀라운 성과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계량화 할 것을 강요한다. 과학의 눈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사물의 가치는 사라진다. 내 어릴적 낙서가 적혀 있던 공책은 과학의 눈으로 볼때 종이와 잉크에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유명인이 되지 않는 한…) 남녀의 사랑과 결혼은 과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서로의 필요와 의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는 생일 조차도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태어나는 것 조차 의미가 없고, 세포의 분열 활동에 지나지 않는데 우연히 정해진 하루를 매년 축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의 몸은 세포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가치나 의미가 사라질 때 사람들은 기계가 된다. 우리는 세월호의 선장을 통해 그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그는 매일 그가 운전하는 배에 화물을 실은 것과 아이들을 실은 것에 의미의 차이를 부여하지 않는다. 세월호의 담당 관리들도 그러했고 관련한 관료들도 그러했다. 메뉴얼을 그대로 보고 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줄이려고 어떠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나는 다른가? 나 또한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고 사는가? 기계적으로 메뉴얼을 따라 살지 않는가? 나에게 주어진 일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요즈음 읽고 있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 때문인지… 세월호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요새 내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일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머리속을 맴도는 질문은 비슷하게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같은자리에서 질문을 모양만 바꾸어 가며 하고 있다.

그럴 때 나를 잠깐씩 현실 세계로 끌어 당기는 것은 딸아이와 마눌님이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 나에게는 해독인 것인가? 이또한 계량화 될 수 없는 가치 같은 것이다. 오늘 아이하고 더 즐겁게 놀아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 덧 (2015년 11월 11일) : 이 글의 주제를 한단어로 요약하면 디지털 테일러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테일러리즘 관련하여서는 최근에 포스팅한 적이 있다.

2014 늦여름 아틀란타에서…

덥다.
서울도 덥다고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서울의 더위는
후덥지근하고 땀이 흥건해지는 끈적끈적한 더위다.
아틀란타의 더위는 문밖을 나설 때 들이닥치는 갑작스러운 더위다.
햇볕이 살을 에면서 파고 들고, 머리를 송곳 같이 찌르는 그런 더위다.

마거릿 미첼이 묘사한 아틀란타의 더위는
내가 느끼는 더위와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대에 존재한다.
덥다는 말은
서울과 아틀란타에서,
21세기와 남북전쟁 시대에,
미첼과 나라는 다른 존재에게
모두 다르게 체험된다.

딸아이가 환하게 웃는다.
아이가 가진 순수함, 해맑음이 나까지 웃게 만든다.
굳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딸아이와 같이 웃고 행복하면 되는게 아닐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가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만큼 멀어져 간다.

그래도 무언가를 해보는 것은 즐겁다.
느끼는 만큼 보게 되고 풍부해진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빛과 그림자에 그만큼 민감해진다.
햇볕이 쨍쨍한 어느날
푸르른 나뭇잎에 드리운 그림자와
미세한 초록빛의 아우성이 갑자기 크게 느껴져
흠짓 놀란 적이 있다.

짧은 인생. 모든 것을 체험할 수는 없을 테지만,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서 하나라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일이 아니겠는가?

캡처

 (Image :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중)

 

단식의 의미 그리고 함께 살아 간다는 것

최근 뉴스에 유민 아버지의 단식 소식이 자꾸 보여서 마음이 아프다. 세월호 참사 이야기 관련해서는 워낙 많은 목소리들이 있기 때문에 말을 아끼려 했다. 피해자 가족들이 있고 아직도 여파가 남아있는 사건이기에 말한마디 꺼내는 것 조차 조심스럽다. 다만, 단식이라는 행위는 누군가가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계속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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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소식을 접했을 때, 내게 떠오른 인물은 간디였다. 유민 아버지가 간디 같은 성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간디는 진심을 보여주려고 했을 때 단식이라는 행위를 했고 누가 어떻게 말하던 지금 그분은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 느껴져서 이다.

간디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책중에 하나가 ‘간디 자서전’이다. 함석헌 선생이 번역했는데, 642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고 어려운 인도 지명과 추상명사들이 나와서 손대기가 쉽지는 않은 책이다. 나도 실은 아직 읽지 못했다. 다행히도 누군가가 잘 요약한 글을 올려주어서 조금 맛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참고한 블로그 글은 다음의 두 링크이다. (해를그리며 님의 블로그: 간디자서전을 읽고, 격암님의 블로그: 간디로본 우리의 모습) 두 글 다 찬찬히 읽어볼 만큼 좋은 글이다.

이분들의 글에 따르면, 간디 자서전은 간디가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은 아니다. 본인이 깨달은 진리를 설파하지도 않는다.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부제가 보여주듯이 본인이 살면서 구도해왔던 실험 과정을 차근차근 기술하고 있다. 대부분은 그가 믿었던 힌두교를 바탕으로 해서 금욕적인 삶과 채식으로 몸을 단련해 왔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본인의 도를 추구하면서 분쟁과 다툼이 있는 곳을 쫓아다닌다. 섬유노동자 파업, 세금 파업 등등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 그는 일방적인 폭력을 배제하였고 토론과 설득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진심을 보이기 위해 단식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폭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고 대화를 통해서 하나되고 화해하는 것을 추구했다.

간디의 이러한 방식은 현대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의 방법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는 마음으로 깊이 동의한다. 의견의 차이가 생겼을 때 명확하게 승패를 가르는 방법은 일시적으로 통하더라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양당정치에서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누군가는 선거공학적으로 승리를 거둘 테지만 이것은 패자에게 위기의식을 가져오고 오히려 패자는 다음번 승리를 위해 결집하게 된다.

내가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태도를 발견할 때는 이러한 말을 들을 때이다. ‘이 모든 것은 놈현 때문이다.’, ‘MB가 나라를 망쳐놨다.’, ‘공주님 때문에 나라를 떠나고 싶다.’ 이 말들은 사실 그저 푸념이다. 푸념을 내가 너무 진지하게 여기는 걸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네편과 내편을 갈라 놓고서 이제 내편이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으니 너는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통령에게 나라의 모든 것을 맡겨두고 이제 책임은 모두 그쪽이다. 대통령 선거가 중요하긴하지만 정치의 모든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물건을 사고, 토론을 하고, 글을 쓰고, 자녀를 키우는 모든 일이 크게 보면 정치의 연장선이고 우리의 목소리이다.

정치 이야기를 이왕 꺼낸 김에 몇가지만 더 써보려 한다. 정치 이야기는 워낙 첨예하게 갈리고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에 내가 좋아하는 주제는 아니다. 나는 불필요한 오해로 진보나 보수 어느 한쪽의 프레임으로 씌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정치와 떨어져 살 수도 없는 일이고 나도 이시점에서 내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해두고자 몇자 적어본다.

진보의 정체성이 무엇일까? 나는 진보의 정체성이 대안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거에서 우리가 야당에게서 듣는 목소리는 정권심판과 반새누리당이었다. 그들에게 대안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듣는 것이 그렇고 최소한 내가 듣는 것이 그렇다. 대안 없이 진보세력이 여당의 도덕성을 문제 삼거나 정권심판만을 이야기 한다면 설사 단기적인 승리를 얻는다 하더라도 길게 봐서는 패배이다. 싸움을 통한 승리는 상대를 완전히 짓밟는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하다. 선거를 통해 60:40으로 이기면 무엇하나? 그렇다면 이제 남은 40은 적인가? 이제 그들을 억지로라도 교육시키던가 아니면 늙어서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더이상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어떤 생산적인 논의의 가능성 조차 닫은 분들에게 무슨 이야기가 가능하단 말인가.)

보수층은 진보세력을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악으로 인식하고 진보는 현정권을 적으로 인식하여 그들과 싸워 이기려 한다. 적당히 중간을 지키자는 애매한 자세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현정권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정권심판은 대안이 아니고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민들 대다수는 정치에 관심 없으며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새로운 가치를 주지 못하면서 기존의 정권에 반대하는 모습은 그저 싸우는 것으로 비추고 정치에 대한 염증만을 불러 일으킨다.

너무 곁길로 샜다. 다시 간디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짓자.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하지만 인도제국은 힌두와 무슬림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게다가 종교분쟁으로 인도인들은 서로를 죽인다. 이에 간디는 죽을때까지 단식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기적같이 전쟁이 멈춘다. 그러나 얼마후 간디는 암살당한다. 결국 인도제국은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 독립을 하게된다. 지금도 인도는 파키스탄과 크고 작은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

오늘로 28일째라고 들었다. 광화문에 계시는 그분도 큰일 생기지 않고 누구의 가슴도 찢어지지 않은 채로 진정한 의미의 화해가 있었으면 좋겠다.

글쓰기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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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 시리즈를 발견했다. (링크: 고종석 “글쓰기의 쾌감, 중독되면 끊을 수 없어”) 글쓰기 특강 연재의 대부분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일맥 상통하는 듯.

특별히 공감한 두 부분

“달리는 사람에게 고비를 넘기고 나면 찾아온다는 marathoner`s high가 있다면 글 쓰는 사람에게는 writer’s high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첫 번째 독자이기 때문에 글을 읽으며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이 제법 마음에 드는 순간, 그 쾌감을 맛보게 되면 거기에 중독되어 계속 쓰게 된다는 거였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고종석은 몇 가지 작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하나는 글을 쓸 때 행갈이에 신경 쓰라는 말이었다. 의외로 많은 수강생들이 행갈이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나의 문단은 하나의 생각 덩어리이기 때문에 문단을 제대로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단을 잘 나눌 수 있다는 건 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글을 읽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 듯하다. 고종석은 또 문단나누기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내가 처음 글쓰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연습했고 지금도 신경쓰는 부분은 문단 나누기와 한 문단에 한가지 생각만 담기이다. 아직도 그게 쉽게 되질 않는다. 공감가는 글을 만나고서 박수가 쳐졌다.

나는 글을 쓸 때 나쁜 습관이 많이 있다. ‘수동태의 문장을 즐겨 쓴다.’ ‘만연체의 문장을 쓴다.’ ‘쓸데없는 부사와 겹조사로 겉멋을 부린다.’ 등등… 내 사고 체계가 명료하지 못해서 머리속의 생각을 처음 글로 옮겨 놓으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나열일 경우가 많다. 나는 나의 글을 교정을 볼 때는 이런 부분에 몹시 주의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본다.

가장 간결하면서도 글맛이 있도록 글을 쓰는 작가로 유명한 사람은 헤밍웨이이다. 그가 말한 글쓰기에 대한 언급도 여기 몇자 옮겨본다. 그러고보니 헤밍웨이와 고종석은 기자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구나.

“글을 쓰는 일은 잘해야 외로운 삶을 사는 겁니다. 작가를 위한 단체는 외로움을 덜어주지만 글이 좋아지는가 하는 점에는 회의가 듭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면 작가의 공적인 위상은 올라가지만 작품의 질이 떨어질 때가 종종 있죠. (노벨상 수상소감 중에서)”
“내가 이룬 성공은 모두 내가 아는 것에 관한 글을 써서 이룬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심성이 많아질 뿐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두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네. 자신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완벽한 글, 그게 아니면 멋진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 그다음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쓰네. 그녀가 읽거나 쓸 줄 아는지, 또는 생존인물인지 고인인지 상관하지 않고 말일세.”

요즈음의 나를 보면 글쓰기에 중독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제 조금 숨도 고르고 쉬어가며 글을 써야겠다. 내공이 부족한데다가 생업이 있는 사람인데 이러다가 주화입마에 빠질듯…

조언자를 찾고있는 당신을 위하여

최근에 회사에서 좀 부담가는 일이 하나 생겼다. 우리회사의 텔레마케터들을 모아서 마케팅에 대한 강의를 하라고 하는 압력이다. 나름 이제 뻔뻔함이 생겨서 회의에서 문법틀려가면서 콩글리쉬로 이야기 하는데에는 별 스트레스가 없지만 미국 아줌마/아저씨들 모아놓고서 호흡이 긴 강의를 하는 것은 부담이 너무 크다. 결국 하게되지 않을까 싶지않기는 하다.

Capture

(출처: CEB Research)

그분들 모아놓고 하려는 강의 자료중에 하나는 위의 내용이다.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인터넷 세상이 오면서 이제는 고객들에게도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디지털 이전 시대에는 고객들이 정보가 부족하여 영업담당자에게 문의를 했다면 요즈음은 대부분의 고객들이 이미 정보를 알고 있고 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기업에 문의를 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비추어 보아도 확실히 그렇다. 어떤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기전에 제품에 대해 사전에 검색해보고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먼저 찾아본다. 은행의 금융상품이나 컨설팅 서비스, 학원, 음식점, 여행지의 숙소를 선택할 때 우선시 하는 것은 주변사람의 추천이나 입소문이지만, 그다음 찾아보는 것은 인터넷이다. 직접 추천을 못받는 경우에도 디지털 세상에서는 정보가 부족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의사에게 상담을 받고 진료를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이전인 20세기에는 의사의 말이 곧 진리였다. 의학관련 정보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의사가 말해주는 처방을 단순히 따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건강 정보는 세상에 넘처난다. 우리는 의사를 만나기 전에 인터넷을 검색하고 주위의 조언을 먼저 듣는다. 의사를 만나서 진료를 받은 후에 의사의 진단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원하는 진단과 처방을 내려주는 의사를 만날 때까지 다른 병원을 방문한다. 2nd opinion을 받는 것이 나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의사의 권위는 예전만 못하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는 것이 무의미해져 버린 것일까?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의 조언이 필요없어져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조언에 목말라 하는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다만 조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내용이 바뀌었다. 20세기에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서 정보를 듣고자 했다. 요즈음의 우리들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 또는 판단을 전문가가 인정해 주는가?’ 하는 것을 듣고자 한다. 세상에 넘처나는 정보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들은 더욱더 불안해졌으며 누군가가 나서서 나의 판단에 확신을 줄 것을 갈구하고 있다.

우리세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키워드는 ‘공감’이다. 어느새인가 인터넷 공간에서 권위있는 기성 언론의 목소리는 점차 약해져가고 있다. 요즈음의 사람들은 주변의 누군가가 올려놓은 공감 베스트 글에 마음을 연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은 인기글을 쓰는 사람들은 요즘 세상의 celebrity이다. 웹툰계에서는 일상의 작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생활툰’이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가 즐겨보는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공감을 자아내는 소재를 다룬 코너들이 대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해줄 입장이 되어본 적이 별로 없다. 어떤 분야에서도 어느정도 잘하는 사람이 된적은 있으나 일인자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세를 따르기 보다는 내가 그냥 좋아하는 일을 했으니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별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나는 아직 어리고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누군가의 조언에 목말라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조언자를 구했던 방법이나 원칙에 대해서는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나와 유사한 고민을 해봤던 사람을 찾는다. 이때 주의할 점은 너무 오래전에 그 고민을 해보았던 사람은 안된다.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른 뒤라면 그 사람은 현실감이 많이 떨어진 조언을 해줄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관점에서 생각을 하고 문제를 바라보게 되어있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까? 우리가 경제적인 문제를 은퇴한 어르신에게 묻는다면 그분은 노후보장과 은퇴준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가능성이 크다. 고등학생이 학창시절에 대해 어른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이야기는 역시나 대학입시나 성적이 중심이 될 것이다. 어른의 시각에 있어서 친구들 사이에서의 인정이나 이성에 대한 관심은 지나가는 순간의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렇지만 정작 그 어른들은 직장에서의 상사의 인정에 목을 매어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진심으로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그사람의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 인생에 있어 그러한 사람을 한사람이라도 만난다면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입을 앞둔 학생들, 진로의 고민을 하는 20대에게 그러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몇년 앞의 조언자의 존재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둘째로는 ‘나이든 사람의 조언을 찾는다.’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숫자적인 나이보다는 진정으로 삶을 고민하고 치열하게 살아간 경험으로서의 나이이다. 이러한 조언을 듣는 데에는 어느정도의 훈련과 자신의 관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들의 조언은 대부분 나의 상황과 다른 맥락과 관점의 조언이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 어른들의 말이나 금언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가끔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나의 상황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문제를 단순하게 볼 때 해결책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세상 돌아가는게 어쩔 때는 너무 복잡하게 보이지만, 때로 단순한 삶의 지혜나 원칙이라는 것은 여전히 먹힌다. 그 지혜라는 것은 어떤 복잡다단한 이론이나 체계적인 지식이 뒷받침 되지 않은 투박한 모습인 경우도 있고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네 잔소리 일 수도 있다.

그 지혜라는 대상이 굳이 사람일 필요는 없다. 어쩔 때는 고전이 답일 수도 있다. 가끔 오래된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책을 들추다가 고민에 대한 해답, 또는 지혜라고 불리우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대부분의 고전은 오랜 세월을 통해 여러사람들에게 검증된 책이고 우리의 현실의 문제에 직접적인 답을 해주지 않지만 중요한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내가 딸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것은 이러한 책을 통한 관계 맺음을 어려서부터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 이다. (관련글: 페르시아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에스더) 사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은 단순한 고전을 넘어서는 책이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지혜라는 측면에서 유익함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나 자신에게 조언을 구한다.’ 이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과정을 거쳤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를 거친 단계이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필요 이상 고민하게 되면 쓸데없는 고민이 되어 버린다. 삶의 불확실성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도 우리를 옭아맨다. 본래 완벽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때로는 나의 느낌에 충실해야 할 때가 있다. 일단 던져보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수정을 한다던가 또는 완전히 접는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해보지 않고서는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판단의 잣대는 감정과 직관일 것이다. 결정의 순간에 있어서 내가 당시 하고 싶은 것을 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지나고 생각해봤을 때 후회가 남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선택해 왔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도 그렇다. 내 인생을 결정지었던 많은 결정들은 후에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르고 했던 것이 대부분 이었다. 고2때 이과를 선택했던 것, 대학 때 화학공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했던 일, 현역으로 군대를 갔던일, 미국으로 온 일 등등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결정이었다. 당시 주위의 조언을 듣기는 했지만 나는 그 조언을 토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정도로 나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단지 ‘수학이 좀더 좋았다.’, ‘영어는 싫었다.’, ‘화학이 왠지 끌렸다.’, ‘현역으로 군대를 가면 세상 경험을 할 것 같다.’ 등등의 왠지 모르는 나의 감정과 직관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 왔다. 지금에 와서 돌아볼 때, 어떠한 결정은 인생길을 돌아오게 한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어쨌건 나의 감정과 직관에 기반한 결정이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감정과 직관에 의한 결정은 두가지 측면이 있다. 일단 어떤 일이든지 자기가 좋아해서 하게된 일은 꾸준히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자의식이 있어서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에 있어서는 일종의 책임감이 생기게 된다. 기본적으로 자질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질이 꾸준한 노력과 시간을 넘어서지 못한다. 또 직관이라는 것은 묘한 측면이 있다. 직관은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의식 또는 이성의 영역 밖의 나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직관은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고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오늘도 꽤 긴 글을 썼다. 처음에 자판을 잡고 글을 시작했을 때는 ‘공감’이라는 주제와 ‘조언자를 찾는 원칙’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고서 가볍게 시작했으나 쓰고 보니 어떤 팁이라기 보다는 나의 희망사항이나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만 그리다가 말은 모양새가 되었다. 최근 내가 이런 글을 올리는 걸 보니 확실히 요즈음의 나는 자의식 과잉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이글을 다시 보면 낯뜨거워 질 것이 분명하지만 일단 기록을 남기는 의미에서 포스팅을 한다.

huffingtonpost korea에 올라온 코스타리카 관련 글들을 보고서 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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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huffingtonpost korea에 올라온 코스타리카 관련 두개의 아티클을 보고서 든 생각을 올려본다. 본문의 내용과 상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하다.

‘8강 돌풍’ 코스타리카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과연 코스타리카는 지상천국일까?

남미출신 친구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곳은 만성적인 인플레가 일상화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곳에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불가능하다. 잠깐 지상낙원으로 소개되었던 코스타리카도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듯.

남미 쪽 물가상승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인지라 그동네 화폐들은 이미 화폐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고 봐야할 듯 하다. 예전에 mba 회계 case 수업때 남미 회사의 case를 다뤘는데, 상당히 건실한 기업이었는데도, 자국 화폐가치의 신뢰성 하락으로 복잡한 회계적인 이슈들이 있었다. 기업 회계 담담자 입장에서 골치 아픈 건 물론이고, 이정도 되면 정상적인 기업활동이 거의 불가능 하다고 봐야한다.

우리나라도 70-80년대 고속성장의 부작용을 많이 겪은 나라이고, 이젠 나름 정부에서는 물가 통제(?)의 노하우도 많다.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정부에서 몇몇 기업의 총수들을 소환해서 압력을 넣는 방법인데, 이게 무식해 보이지만 아직 우리나라 정도의 규모 경제에서는 먹힌다. 그리고 실제 이런 방법을 우리나라는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가 가끔 행복지수가 높다고 예시로 드는 부탄 같은 나라는 세계 경제의 지형도에서 섬같이 고립된 나라이니 우리가 지향점으로 삼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세계 경제는 어찌보면 미국화(?) 또는 신자유주의화(?)라는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견고한 모습의 유럽의 경제도 예전보다는 많이 미국처럼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개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한가지 생각나는 예는 휴가의 천국으로 불리는 프랑스 같은 나라. 이 나라는 한달씩 휴가를 가는 걸로 유명한 나라인데, 이런 럭셔리도 이제는 점점 옛날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다고 들었다. 무한 경쟁의 삶으로 모두를 몰아가는 미국식 경제 모델은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진보적이고, 깨어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미국식 경제 모델과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데, 나의 솔직한 느낌은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대안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전세계적인 흐름을 거부하고 우리식의 모델을 제시하면서 나아가는게 방법일까? 그렇게 말하기에는 이미 우리나라 경제의 수출의존도가 너무나도 높다.

우리나라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깜짝 놀랄 만큼 높다. 학교에서 거시경제 수업들을 때 한 나라를 선택해서 미국의 GDP와 비교하는 조별 과제가 있었다. 조원중에 한국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나… ㅠㅠ) 내가 총대를 매고서 우리나라 GDP와 미국의 GDP를 비교하는 작업을 해봤는데, 오히려 미국같은 나라는 내수의 비중(특히 서비스업)이 엄청나다. (그렇다고 논문이나 연구수준의 심도 깊은 리서치는 아니었다. 그냥 수업 중에 하나 과제였을 뿐….ㅎㅎ)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 정도 경제규모가 되는 나라는 세계 경제와 동떨어져서도 사는게 가능하다.

내가 자본주의의 본산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경영을 공부해서 그런지 다른 대안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진보적인 학자들이나 참신한 의견들이 많고, 그런 목소리들이 색다른 시각을 던저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역시나 아직 그런 목소리들이 주류라고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내가 워낙 형이하학적인 인간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기존의 경제체제나 회사가 돌아가는 방식은 너무나 견고해보이고, 진보적인 목소리는 아직도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