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의 통화

간만에 딸하고 통화했다. 기록해두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잊기전에 적어둔다.

딸내미가 한참 새로 생긴 장난감을 설명해주고, 여섯살 먹은 아이스러운 말장난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톤을 낮추며 말한다.

딸: 아빠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아?
나: 보고 싶지… 그치만 전화로는 볼 수가 없잖아?
딸: 음… 그치만 눈 감고 그 사람 생각하면 볼 수가 있다.
나: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딸: 내가 맞춰볼께. 아빠는 지금 편한 옷입고 누워서 통화하는 거 아냐?
나: 어떻게 알았지? 아빠는 잠옷입고 있었는데.
딸: 내가 볼 수 있다고 그랬잖아. (깔깔깔) 근데 나 발 시렵다.
나: 흠… 네가 발이 차면 아빠 배에다 넣고 뎁히고 그랬는데… ㅋㅋ 으~으~ 지금 생각만해도 차갑다.
딸: (깔깔깔) 맞아. 흠… 그얘기 들으니까. 지금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흐음…

아빠와 딸관계라서 다행이다. 이 녀석 크면 남자 여럿 울릴 것 같다.

유대인과 독일의 반성

 

Originally posted 06/04/2014 @ facebook

독일에 가면 길거리에서 금속으로 된 표식에 새겨진 이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독일어를 모르기에 그냥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케이블 매설’ 표지 같은 건 줄 알고 지나쳤다. 그 모습을 본 잉그릿이 이게 뭔지 설명해 준다. 이 표지는 표시가 된 곳 앞에 살던 사람들 중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2012년 당시 그 이야기를 듣고 찍은 사진이다. 그러고 보니 도로 곳곳에 이러한 표식들이 있었다. 한 골목에 많게는 수십 개의 이름들이 있다. 당시 유럽에 살던 900만 명의 유대인중의 2/3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니, 이러한 아픔의 흔적들이 유럽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2번의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 초는 정말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시기였다. 모두가 자신의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고 서로를 증오했다. 사회주의자는 자본가 계급을 적으로 생각했고, 자본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멸시했으며, 혼란의 와중에 등장한 파시스트들은 무질서와 ‘나와 다름’을 죄악시하며 하나로 똘똘 뭉쳐서 다른 민족/국가에 폭력을 쏟아 부었다. 아시아에서는 뒤늦게 제국주의의 물결에 합류하고자 했던 일본이 서구의 왜곡된 모습을 황국신민 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서 주변 국가들을 괴롭혔고, 미국인들은 흑인/native American에 대한 학대를 당연시 했다. 이러한 광기의 끝 무렵에 탄생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그 내부에서의 사상갈등으로 서로 죽고 죽인다. 스탈린의 피의 대숙청 때 사상자는 2백만으로 까지 추산되고 있다.

폭력의 시대를 겪고서 유럽 사람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똘레랑스 (관용)’이다. 어원은 허세의 끝장을 보여주는 프랑스 사람들에게서 나온 말이지만 내게는 가장 울림이 큰 가치 중에 하나이다. (쓰고 보니 politically correct한 말은 아니군…ㅎㅎ)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들이대는 것의 폭력적 결말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가치인 것이다.

이제 20세기 초는 너무나도 먼 옛날이다. 그 시절을 체험한 이는 모두 무덤 속에 잠들어 있고, 이제는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게 미국이나 한국이나 보수/진보의 갈등이 점점 커지는 것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가끔 온라인에서 보이는 글들도 소위 어르신의 입장에서 보면 선동이라는 생각이 들겠다 싶은 내용도 있고, 그 어르신들이 대응하는 행태도 너무나도 20세기 스타일이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타자 입장에서 봤을 때, 단편적인 사실만 보고서 감정적으로 서로 헐 뜯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음모론적인 이야기가 사실인냥 받아지는 경우도 많고…

이제 나도 세상의 때도 조금 묻고 좌절도 겪고 하다 보니, 지금 내가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죽고 못사는 것이 나중에 보면 별일 아닌 게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게 역사라는 관점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기독교는 왜 동성애에 이토록 민감한가? (ㅍㅍㅅㅅ)

기독교는 왜 동성애에 이토록 민감한가? (ㅍㅍㅅㅅ)

Originally posted 05/29/2014 @ facebook

작년부터 미국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소식 중에 하나는 ‘XX 주가 동성 결혼을 허용했다.’ 또는 ‘대법원이 다시 기각했다/승소했다.’ 등등 이다. (또 다른 하나는 마리화나 합법화 관련 뉴스) 거의 매달 한번 이상 듣는 것 같다. 작년 오바마 대통령이 조심스레 same-sex marriage 지지 발언을 꺼낸후 더 많아 지는 추세다. 물론 내가 살고있는 조지아 주는 바이블 벨트로 불리는 종교색이 강한 지역이기 때문에 동성 결혼 허용은 아직 먼 이야기로 들리긴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은 이미 여론이 동성혼 찬성이 되었다. 오바마가 지금까지 동성혼에 대한 주제를 피하다가 same-sex marriage 지지 발언을 한건 이런 계산이 깔린게 아닌가 싶다. 심지어는 요새 커밍아웃하면 cool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얼마전 MTV에서 Faking it이라는 드라마가 시작했는데 고등학생 둘이 인기 끌려고 거짓으로 레즈인 척하는 주제의 시트콤이다. 반면에 아이러니하게도 Christian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금기시 되는 이상한 상황까지 연출된다.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가 어렵지만, 작년에 내가 학교 다닐 때 레즈였던 친구가 술자리에서 게이 비하 발언을 했던 다른 친구를 이슈화 시켜서 결국 학기마다 주는 ‘Integrity 상’을 받았던 일도 있었다.

동성간의 결혼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이슈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려면 아직 먼 이야기다. 얼마전 김한길이 차별 금지법 제정하려다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던가? 현재 야당이 동성혼 문제를 당론으로 이슈화 한다면 강산이 바뀌기 전까지는 야당 계속할 각오를 해야할 것 같다. 커밍아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는 사회적인 자살행위이다. 단, 한가지 집고 넘어갈 점은 동성혼에 관한 논의는 인권(human rights)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권은 보평타당한 관점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반면 동성결혼은 민권(civil rights)의 문제로 이해가 되어져야 한다. 민권은 특정 사회에 속한 시민들에게 보장된 권리이다. 사회적으로 동성결혼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동성혼을 인권의 문제로 끌고 가는 것은 정당성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조금 범위를 넓혀서 동성애에 관해 이야기 해볼까? 2002년까지도 나의 동성애에 관한 입장은 명확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죄와 달리 동성애에 관해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죄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율법에서 뿐만 아니라 율법의 완성인 신약에서도 명확하다. 자세한 내용는 share된 article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관심있으면 읽어보길 바란다. 저자가 정말 꼼꼼하게 잘 정리해 놨다. 이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은 요약해가면서 봐도 괜찮을 정도이다.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2002년에 나는 캐나다에 있었는데, 캐나다는 동성애에 대해 가장 개방적인 국가 중에 하나기에 동성애자들을 접할 기회가 많다. 이때 크리스챤 친구들과 한번은 동성애자에 대해 교회는 어찌 반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붙었다. 나는 정말 문자 그대로 핏대를 세워가며 동성애는 성경에서 명시된 죄악이기 때문에 성경을 진리로 고백하는 교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싸웠다. 너무 격하게 싸워서 집에와서도 한참을 씩씩거렸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그땐 정말 고지식한 열혈청년이었다. ㅎㅎ 왜 그렇게 속상하고 분하던지… 지금은 한발 물러서서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있고, 사회적/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동성애를 받아들이기엔 성경의 입장이 너무 명확하므로 그냥 모르겠다 정도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논리를 제외하고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때는 딱히 동성애를 아니라고 말할 논거는 거의 없다.

단 기독교인이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죄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다른 사람을 차별할 권리는 없다. 이런 점에서 동성애로 인한 차별은 민권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다. (동성혼과는 달리…) 또한 동성애의 논의를 비기독교인과 이야기 할 때, 이러한 부분에 대해 충분한 고민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감정적으로 비이성적인 주장을 한다면 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불러올 가능성이 아주 크다. 성경을 떠나서는 동성애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근거가 그렇게 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그사람 관점에서의 진리를 논리가 아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강압적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꽉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갑자기 삘받아서 장황설을 늘어 놓긴했는데 쓰다보니 좀 조심스러워진다. 괜히 민감한 주제를 다뤘나 싶기도 하다. (내 페친 인맥의 반이상이 크리스챤인데…. –;;) 뭐 이렇게 길게 쓰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동성애가 편하지는 않다. 불편한 거는 불편한 거고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말할 권리는 존중해 줘야 하지 않나 싶긴 하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한국 vs 미국 직장 1mm 차이 | Daum 스토리볼

한국 vs 미국 직장 1mm 차이 | Daum 스토리볼

디테일한 예시가 공감이 가는 글이다. 내 경우는 회사가 미국 남부에 있는 보수적인 대기업이고 글쓴이처럼 CEO입장이 아닌지라 다르게 느낀 부분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미국 직장 문화에 대해 막연한 환상 없이 이보다 잘 정리한 글은 드문듯.

가을 방학 –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20대에 나는 실수와 상처가 두렵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키우리라 믿었다. 그러나 30대에 나는 실수하거나 상처 입을까 봐 벌벌 떤다. 그것은 좀처럼 회복되거나 아물지 않을 것 같다. 20대에 나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웃거나 울었다. 그러나 30대에 여전히 남을 의식하는 나를 들여다보며 가끔 웃거나 운다. 20대에는 사랑을 힘주어 말하고 섹스란 말에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30대에는 섹스라는 말보다 사랑이란 말을 발음하기가 훨씬 어렵고 민망하다”

<톨스토이처럼 죽고싶다> 김별아

노래의 감성이라는 건 울림을 자아내는 세대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노래는 확실히 20대의 노래다. 왠지모르는 먹먹함과 감정선을 건드리는 게 있지만, 그 실체가 아련하게만 느껴진다. 한 10년전 쯤 이야기 처럼… 20대때는 뭐가 뭔지 모르고 헤매었는데, 30대 중반이 되서야 그게 뭐였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40대가 되면 확실해 질까? 나이 먹는게 뭔지…

이케아 충격

이케아 충격

Originally posted 04/07/2014 @ facebook

이케아는 DIY와 합리적인 가격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다. Swedish life style experience랄까? 우리집 가구의 80프로 이상이 이케아 가구다. 미국와서 한달동안 이케아 가구 조립하느라 고생했던 기억, 업그레이드 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동경으로 이케아를 벗어나려고 해보지만 이것 저것 따지다 보면 어느새 이케아로 향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케아의 전략은 현지화보다는 스웨덴 스타일 밀어붙이기랄까? 스위스 체류하던 시절 이케아 갔을 때도 미국이랑 대동소이한 레이아웃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냥 아이쇼핑차 이케아 들렸다가도 쇼룸 돌다보면 싸다싶어 뭔가를 사게 되는 마법이 있다. 하다못해 마지막에 만나는 캔들 섹션에서 양초라도 하나 사게 된다. 이케아가 정체되어 있는 한국 가구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길 기대해본다. 경쟁이란 단기적으로는 기업에게 고통이지만, 일단 소비자에게는 언제나 이득이고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윈윈이다.

NERI (내리) – 다이어트 할 거예요

 

이쁜 신상 옷들은 쏟아져 나오고
쇼핑몰 모델언니들은 왜 다들 날씬해
짧은 치마 스키니진 레깅스까지
제발 유행하지 말라고
살찔 땐 하체부터 빠질 땐 얼굴부터
원하는 곳만 빠지면 안되겠니
3개월치 등록해놓은 헬스장은
3일가니 정말 귀찮아요

다이어트 할거에요
다이어트 할거에요
오늘까지만 쉬고
다이어트 할거에요
다이어트 할거에요
내일부터 할거에요

오늘도 나를 유혹하는 고소한 빵 냄새
스트레스 풀고 싶어 치맥의 유혹
파스타와 피자 주말엔 브런치까지
아메리카노엔 치즈케익
영화 볼 땐 팝콘과 콜라 나쵸 콤보까지
밥배와 간식배는 따로 있는거야
오늘 저녁밥은 안 먹을거라면서
어느새 핸드폰은 맛집 검색

다이어트 할거에요
다이어트 할거에요
오늘까지만 먹고
다이어트 할거에요
다이어트 할거에요
내일부터 할거에요

다이어트 할거에요
다이어트 할거에요
진짜진짜 할거에요
다이어트 할거에요
다이어트 할거에요
내일부터 할거에요
오늘만 먹을거에요

커피소년 – 장가갈 수 있을까 (Feat. 내리)

Originally posted 03/25/2014

장가갈 수 있을까 장가갈 수 있을까

통장 잔고 없는데 장가갈 수 있을까

누굴 만난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남들처럼 그렇게 장가갈 수 있을까

(From 커피소년 – 장가갈 수 있을까)

세대마다 각기 다른 감성과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소위 말하는 참 ‘웃픈’ 가사이다. 내가 커피소년의 노래를 20대에 들었다면 가슴으로 공감했을 것 같은데, 장가를 간 30대 중반의 아저씨가 되어서는 20대를 떠올리면서 머리로 밖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그리 늙은 것 같진 않은데. 아… 20대의 감수성이여…

엄마와 딸, 그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다 (리빙센스)를 읽고서

원문:

매거진캐스트 : 엄마와 딸, 그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다_RELATIONSHIP (제공 : 리빙센스)

Originally posted 03/25/2014

모녀지간은 말로도 풀기 힘든 특별함이 있는 듯 하다. 아버지와 아들, 또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와는 또다른 무엇이다.

남녀를 떠나서도 부모로 부터의 온전한 독립이라는 주제는 가슴을 찌른다. 나 자신부터도 부모로부터 독립 (물질적/정서적/경제적) 하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독립이라는 건 나이와 그다지 연관이 없다. 오히려 삶의 큰 이벤트와 연관이 있다고 해야하나?

그 때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문득 찾아온다. 어떤이는 유학을 계기로, 어떤이는 결혼을 계기로, 어떤이는 자신이 부모가 됨으로서, 어떤이는 부모의 아픔을 계기로, 어떤이는 취직을 계기로 독립의 시점을 맞이한다. 부모님이 훌륭하고 좋은 분일 수록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인격적인 관계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선행학습을 금지한 독일은 지금!!(EBS, 캡쳐)’을 보고

Originally posted 03/16/2014

EBS 프로그램을 누군가가 해둔 캡쳐를 보고서 든 생각을 포스팅 한다. (링크: 선행학습을 금지한 독일은 지금!!)

작년 이맘때 3개월간 독일/스위스에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차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비즈니스를 전공한 입장에서 특히나 경제/기업문화를 관심있게 보았다. 거기서 가장 많이 느낀 차이는 독일 사회는 ‘연대’가 정말 중요한 사회적인 가치라는 것이다. 미국식의 가치인 ‘효율성’ 또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천박하게 여겨지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두번의 세계대전이 가져온 참혹함에 대한 뿌리 깊은 반성과 사회주의의 가치가 그러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가져온 듯 하다.

하지만 독일 방식이 우리에게 맞는 방법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BS 프로그램에서 독일의 교육을 따라야할 근거로 독일은 잘사는 나라라서 그렇다고 이야기 했으므로… 이부분부터 생각해보기로 하자.

현재 독일의 부의 근간에는 몇가지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EU의 통합 과정에서 동유럽의 저임금 노동자의 다수를 받아 드릴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기업입장에서는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큰 이점을 가져왔다. 또한 유로화로 인한 환율의 왜곡은 그들을 수출 강대국으로 만든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반면에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과 시스템, 침체되어 있는 청년들과 너무나 안정이 되어 있어서 어떻게 보면 노쇄한 것 같이 보이는 분위기가 한국에 맞는 것인가는 의문이다.

또한 교육을 말할 때 교육 제도 자체 만을 말하는 건 어불 성설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과 사상을 그대로 배울 뿐이고 어른들이 변하지 않고서는 제도를 아무리 바꾸어 봤자 얼마안가 다시 우리식으로 바뀔 뿐이다. 90년대 후반 미국의 SAT를 벤치마킹해서 만들었던 수능이 지금에 와서는 문제 유형만 바뀐 다른 형태의 학력고사로 바뀐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덧붙여 말하자면 SAT는 지식을 측정하는 시험이라기 보다는 사고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일종을 아이큐 테스트 같은 시험이다. 아마 내가 96년에 봤던 수능과 두번 수능을 치뤄 진통을 치뤘던 94년의 수능이 그에 가장 근접했던 수능이 아니었나 싶다.)

독일/스위스에 있을 때 현지에서 사시는 분들과 그들의 아이들과 교제할 기회가 있었다. 그 학부모들이 느끼는 건 학교에서 너무 쉽게 가르치고 공부하는게 아니라 놀다 오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아이들은 맨날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은 최상위권인게 이상하다는 거였다. (아이들이 놀고 오는 건 아닐꺼다. 다른 형태의 교육을 받고 오는 거일 꺼다….) 만약 이러한 시스템을 우리나라로 그대로 들여오면 한국의 학부모들이 마냥 놀고 먹는 것 같은 자녀들을 그대로 둘까? 아마도 공교육에 대한 불신만 가지게 되고 당장 사교육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될 것이다. 어른들의 삶자체가 ‘연대’가 아닌 ‘경쟁력’과 ‘치열함’을 모토로 하는데 어찌 자식들이 가만히 놀고 있는걸 두고 보겠는가? 또 그렇게 두는 인격적인 부모님이 있다 한들 그 아이들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적응하면서 살아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