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틴 여행기 – 마지막날 : 돌아가는 길

귀족체험

이제 마지막 날이다. 아직 하루의 로드트립이 남았다. 아침은 호텔에서 든든히 먹기로 했다. 부시시한 얼굴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 1층으로 향했다. 서버는 쿠바계 미국인. 생긴 것이 체게바라 비슷하다. 체게바라가 수염을 깍고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다음, 서버 유니폼을 입은 것 같다. ‘체게바라’ 서버는 말수가 적었지만 필요한 것을 제때에 챙겨주는 센스가 있었다. 그의 빠릿빠릿함에 나는 만족했다.

둘러보니 손님은 대부분 백인이다. 반면에 종업원은 히스패닉과 흑인. 호텔이나 식당에 오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서비스업의 본질은 유럽의 귀족 체험이 아닐까. (블로거 격암님의 포스트에 빚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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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드 ‘다운튼 애비’ 첫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견습 과정인 한 하인에게 전임자가 주의 사항을 알려준다. 아침에 주인에게 신문을 가져다 줄때, 주인 어른은 새로나온 신문지 느낌을 좋아하니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리는 것을 잊지 말라는 당부였다.

영국 귀족 한 가문을 챙기기 위해서 저택에는 수십명의 하인들이 같이 산다. 어떤 하인들은 주방을 전담하고, 어떤 하인들은 정원을 가꾸며, 어떤 하인들은 청소를 한다. 그리고 집사가 이들을 총괄한다.

우리가 호텔에서 받는 서비스의 원형은 귀족 저택의 삶이다. 귀족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부가 필요하다. 현대인은 그런 호사를 매일 누리지는 못하지만 비용을 지불하고서 잠깐 경험해 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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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그리고 콜롬버스

돌아가는 길은 루트를 다르게 잡아봤다. Dothan을 거쳐 Columbus를 지나는 일정이다. 아이가 Columbus라는 지명을 반가워 한다. 학교에서 Columbus day의 유래를 배우면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해 들었다고. 역사가 짧은 미국은 Columbus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그 날이 일종의 개천절인 셈이다. 내게는 별 의미가 있는 날은 아니지만, 노는 날이니 어쨌든 환영이다. 그 콜럼버스 덕분에 우리가 데스틴을 다녀올 수 있지 않았던가.

장거리 자동차 여행에서 가장 힘든 시간은 돌아가는 길이다. 가는 동안은 설래는 마음이 있어 그리 힘들지 않다. 반대로 집에 가는 길에는 그간 피로도 쌓인데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에 종종 마음이 무겁다.

탁트인 평야와 지평선을 보면서 잠깐 좋아했다가 금방 지루해졌다. 뒷자리에 앉은 딸아이는 하루 더 머물었으면 좋겠다고 칭얼대다가 잠이 든다.

아틀란타에 도착할 즈음에는 어둑어둑해졌다. 우리는 서둘러 짐을 내리고서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오니 침대가 참 반갑다.

<목차>

데스틴 여행기 – 첫째날 (1) : 로드트립

데스틴 여행기 – 첫째날 (2) : 알라바마와 플로리다, 목화와 야자수

데스틴 여행기 – 둘째날 : 해변과 악어

데스틴 여행기 – 셋째날 : 석양의 결혼식

데스틴 여행기 – 마지막날 : 돌아가는 길

데스틴 여행기 – 셋째날: 석양의 결혼식

Beignet

셋째날 점심은 seafood로 결정했다. 휴양지에서 먹는 외식은 비싸고 맛이 없기가 쉽지만 바닷가에서 seafood를 포기하자니 왠지 아쉬웠다. 가기로 한 곳은 이름만 들어도 냄새가 날 것 같은 Stinky’s라는 곳이었다.

다행히 냄새가 나는 곳은 아니었지만 서빙을 하는 금발의 여자가 피로에 찌들어 보였다. crab cake, grilled grouper, fried shrimp를 주문하는 동안 한번도 웃음을 짓지 않는다. 무표정한 그녀가 딱 한번 웃음을 지었는데, 우리가 beignet을 주문할 때였다. 그녀의 웃음은 ‘그래 촌놈들. 이제야 제대로 메뉴를 골랐군.’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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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flickr)

beignet은 New Orleans 음식인데, 쉽게 말하면 밀가루 덩어리를 도너츠 처럼 튀기고서 파우더 슈거를 입힌 디져트이다. 프랑스 요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New Orleans가 프랑스 이주민과 관련이 깊은 도시라서 그렇다. 내가 느끼기에는 뭐든지 튀기고 달게 만들어서 몸에 나쁘게 하는 미국 스타일 음식일 뿐이었다. 뭐 경험삼아 먹어볼 만은 하다.

석양의 결혼식

숙소로 돌아오니 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다. 오늘 이 호텔에서 7개의 결혼식이 있다고 한다. 호텔이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있는 것은 백사장 때문이다. 정확히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추어서 결혼식이 진행된다. 백사장에서 치루는 석양의 결혼식이라. 로맨틱하게 여겨질 법하긴 하다.

옆에서 힐끔 본 바로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결혼식이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웨딩드레스와 턱시도가 모래 덩어리가 되기 쉽상이다. 하객들의 의자에도 모래가 가득하다. 그래서 인가 보다. 서약을 마친 후에 사진 몇장 찍고서 모두들 성급히 자리를 뜬다. 사진으로는 몹시 낭만적이다. 나중에 신랑신부가 앨범을 들춰보면 석양이 기억에 남을까 아니면 어설픔이 기억에 남을까.


  
(직찍)

아이폰 지문인증

해가 지고서 숙소로 들어왔다. 사흘째이니 그만큼 추억도 쌓였다. 아내와 나는 핸드폰에 모인 사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딴일을 하는 사이에 딸아이가 나의 아이폰을 만지작 거리더니 삐죽거린다.

아이의 불만은 아이폰의 지문인식 잠금기능이었다. “불공평해. 엄마 핸드폰은 잠금 설정이 되어 있지 않은데, 아빠 핸드폰은 잠겨 있어. 그러면 엄마는 아빠 핸드폰을 볼 수 없고 아빠만 엄마 핸드폰을 쓸 수 있잖아.”

전형적인 딸내미 화법이다. 자기가 아빠 핸드폰을 쓸 수 없다는 불만을 돌려서 말하고 있다. 아이는 말을 트기 시작한 네다섯 살 때도 돌려 말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내가 초콜렛을 먹는데, 아이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잊었다고 하자. 아이는 살며시 옆에 와서 귀에다가 입을 대고서 속삭인다. “나도 초콜렛 좋아하는데.”

나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다. 특히 여자 사람 말의 미묘한 뉘앙스는 절대 알아채지 못한다.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는 딸아이가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 그래서 딸이 구사하는 여자 나라 언어를 독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여자나라 말 입문과정이라고 할까.

고민 끝에 아이도 아이폰 잠금해제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설정 메뉴로 가서 지문 추가 등록 버튼을 눌렀다. 아이가 핸드폰에 엄지 손가락을 수차례 붙였다가 띠었다가를 반복했다.

‘Registered.’ 아이가 아이폰을 접수하는 순간이다. 딸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딸램은 테스트까지 해본다. 아이폰을 옆에 두었다가 자동으로 잠길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서 엄지를 척 올려 놓는다. 마지막으로 자기 지문이 통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깔깔 웃는다.

<목차>

데스틴 여행기 – 첫째날 (1) : 로드트립

데스틴 여행기 – 첫째날 (2) : 알라바마와 플로리다, 목화와 야자수

데스틴 여행기 – 둘째날 : 해변과 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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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틴 여행기 – 마지막날 : 돌아가는 길

딸과 하루를 마무리하던 이야기

간만에 딸램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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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media)

딸램과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내가 물었다. 오늘은 좋은일, 감사한 일이 뭐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하나 정도는 있겠지, 하루에 하나도 감사할 일이 없을까. 음~ 헤일리랑 재미있게 놀았던게 좋았어.

아빠는 뭐가 좋았어? 글쎄, 오늘 저녁을 가족끼리 맛있게 먹어서 좋았지. 그리고, 또? 음~ 그리고는 아빠도 잘 모르겠다.

그러면 아빠는 오늘 안 좋았던 일은 없어? 안좋았던 일은 없는데. 그러면 하기싫었던 일은 없어? 글쎄… 예를 들자면 회사일이라던가…

후우. 덥지않아? 선풍기 좀 틀어줄까? 아니 안더운데.

아빠는 회사일이 재미있어? 아~ 뭐 항상 재미있는 건 아니지만, 가끔 열심히 일하면 사람들이 칭찬해 줄 때도 있고… 보람 있을 때도 있고… 그리고… 그리고…

아이가 고개를 떨군다. 이어서 쌕쌕 소리가 들린다.

다행이다. 그런데 얘는 어떻게 내 속을 알지?

딸과의 대화 모음 (집안일/성경/반대말에 대한 잡담)

첫번째

아내: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설겆이를 하다가) 일이 해도해도 끝이 안나.
딸램: (무심한 듯 앉아있다가) 집안일은 원래 그런거야.

으이구 애늙은이.

두번째

오늘은 아이에게 성경에 있는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아이가 물었다. “아빠, 엘리야 선지자는 남자야? 여자야?” “남자.” “왜 이렇게 성경에는 남자가 많아? 나는 여자인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남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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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딸아이에게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라는 표현을 가르쳐 주었다. 며칠후 딸아이가 시끄러운 곳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쥐살은 듯이 시끄럽네.”

가끔 우리말의 상투적인 표현을 뒤집어 보아도 재미있다. 그러면서 표현의 유래/의미/어감을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일곱살 딸에게 시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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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media)

딸애는 어려서부터 잠이 없었다. 갓난쟁이 때는 바시락 소리만 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울어댔다. 크면서도 뭐가 그리 무서운지 자다 말고 깨서 무섭다고 난리다. 만 세살이 되어서야 자다가 깨는 일 없이 한밤을 그대로 자기 시작했다. 건강에 이상이라도 오는게 아닐까 싶어 의사에게 물었더니 잘 크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했다.

세상에 궁금한 것 투성이라 자는 시간도 아까운가부다. 아이 때 낮잠이라도 재울라 치면, 잠깐 눕는 듯 하다가 밖이 궁금해 못참는다. 만으로 두살 반 되던 때에 낮잠을 재우는 걸 포기했다. 가능하면 9시 이전에 재우려고 일정한 시간에 침대에 눕히는데, 하루종일 있던 일을 되새기느라 잠이 들려면 한시간이 넘게 걸린다. 혼잣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깔깔 웃기도 하고, 아빠를 호출하기도 한다.

9시 45분 경. 무섭다며 침대에 누어서 아빠를 호출한다. 무슨 일인가 가봤더니 잠깐 도란도란 시간을 갖자고 한다. “아빠,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까? 음… 있잖아 5분이 한 몇 초만에 지나는 것 같아.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시간이 훅 지나는 게 너무 아쉬워.”

아이구 이놈아 일곱살 아이에게 시간이 그렇게 빨리가면 엄마 아빠는 어쩌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