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서울도 덥다고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서울의 더위는
후덥지근하고 땀이 흥건해지는 끈적끈적한 더위다.
아틀란타의 더위는 문밖을 나설 때 들이닥치는 갑작스러운 더위다.
햇볕이 살을 에면서 파고 들고, 머리를 송곳 같이 찌르는 그런 더위다.
마거릿 미첼이 묘사한 아틀란타의 더위는
내가 느끼는 더위와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대에 존재한다.
덥다는 말은
서울과 아틀란타에서,
21세기와 남북전쟁 시대에,
미첼과 나라는 다른 존재에게
모두 다르게 체험된다.
딸아이가 환하게 웃는다.
아이가 가진 순수함, 해맑음이 나까지 웃게 만든다.
굳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딸아이와 같이 웃고 행복하면 되는게 아닐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가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만큼 멀어져 간다.
그래도 무언가를 해보는 것은 즐겁다.
느끼는 만큼 보게 되고 풍부해진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빛과 그림자에 그만큼 민감해진다.
햇볕이 쨍쨍한 어느날
푸르른 나뭇잎에 드리운 그림자와
미세한 초록빛의 아우성이 갑자기 크게 느껴져
흠짓 놀란 적이 있다.
짧은 인생. 모든 것을 체험할 수는 없을 테지만,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서 하나라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일이 아니겠는가?
(Image :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중)